사랑에 관한 시 [3]
차례
더딘 사랑 / 이정록
돌쩌귀 사랑 / 정일근
오래된 사랑 / 이상국
눈 먼 사랑 / 허형만
어쩌다 사랑 / 박라연
저린 사랑 / 정끝별
공터의 사랑 / 허수경
때늦은 사랑 / 김사인
벼랑 위의 사랑 / 김해자
시정잡배의 사랑 / 허연
사랑(노래) / 임재범
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 이정록,『의자』(문학과지성사, 2006)
돌쩌귀 사랑 / 정일근
울고 불고 치사한 이승의 사랑일랑 그만 끝내자
다시 태어나 우리 한 몸의 돌쩌귀로 환생하자
그대는 문설주의 암짝 되고 나는 문짝의 수짝 되어
그 문 열리고 닫힐 때마다 우리 뜨겁게 쇠살 부비자
어디 쇠가 녹으랴만 그 쇠 다 녹을 때까지
우리 돌쩌귀 같은 사랑 한번 해 보자
- 정일근,『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문학사상사, 2003)
오래된 사랑 / 이상국
백담사 농암장실 뒤뜰에
팥배나무꽃 피었습니다
길 가다가 돌부리를 걷어찬 듯
화안하게 피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백 년이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햇살이 부처님 아랫도리까지 못살게 구는 절마당에서
아예 몸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
지나가는 바람에도
제 속을 다 내보일 때마다
이파리들이 온몸으로 가려주었습니다
그 오래된 사랑을
절 기둥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바라봐주었습니다
- 이상국,『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창비, 2005)
눈 먼 사랑 / 허형만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룬 동굴이 있습니다
그 동굴에는
눈이 먼 사랑이 살고
그리움이 살고 아픔도 살고 있습니다
그리움은 눈 먼 사랑을 잡아먹고
아픔은 그리움을 잡아먹고 삽니다
눈 먼 사랑이여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 떨어질 때마다
그 파동으로 울음 우는
서러운 짐승이여
- 허형만,『눈 먼 사랑』(시와사람, 2008)
어쩌다 사랑 / 박라연
어떻게
그 큰 보름달을
오직 손바닥만으로 굴려서 훅 저쪽으로 밀어내 버렸니?
그날의
너의 밝음과 둥긂이 보름달을 잠시 이겼던 것처럼
사실은, 사실은 보름달이 널 위해 잠시 져준 거야
널 아주 잠시 사랑해버린 거야
- 박라연,『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창비, 2018)
저린 사랑 / 정끝별
당신 오른팔을 베고 자는 내내
내 몸을 지탱하려는 내 왼팔이 저리다
딸 머리를 오른팔에 누이고 자는 내내
딸 몸을 받아내는 내 오른팔이 저리다
제 몸을 지탱하려는 딸의 왼팔도 저렸을까
몸 위에 몸을 내리고
내린 몸을 몸으로 지탱하며
팔베개 돌이 되어
소스라치며 떨어지는 당신 잠에
내 비명이 닿지 않도록
내 숨소리를 죽이며
저린 두 몸이
서로에게 밑간이 되도록
잠들기까지 그렇게
절여지는 두 몸
저런, 저릴 팔이 없는
- 정끝별,『와락』(창비, 2008)
공터의 사랑 /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 허수경,『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때늦은 사랑 / 김사인
내 하늘 한켠에 오래 머물다
새하나
떠난다
힘없이 구부려 모았을
붉은 발가락들
흰 이마
세상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단정한 글씨 같다
하늘이 휑뎅그렁 비었구나
뒤축 무너진 흰구두나 끌고
나는 또 쓸데없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벼랑 위의 사랑 / 김해자
ㅡ 크림트의 그림 '키스'를 보다
꽃밭이다 찬란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빚어낸 바닥에서 꽃이 된
남자의 황금빛 가슴 속에 묻혀 시간을 잊은
여자의 몸에서도 황금 잎사귀가 돋고
찰나의 시간에도 덩굴은 자라는데
여자의 발끝이 벼랑 끝에 걸려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와 여자의 눈은 감겨 있고
벼랑 위의 키스는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벼랑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듯
벼랑은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는 듯
사랑은 필사적이고 벼랑은 완강하다
살아가는 일이 벼랑이라면 모든
사랑은 벼랑 끝에서만 핀다 지금
안전한 자여 안전한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저 심연을 보아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벼랑 끝에서 벼랑을 잊은 채 우리는
이 순간 영원이다 말하는
저 백척간두의 사랑
- 김해자,『無花果는 없다』(실천문학사, 2001)
시정잡배의 사랑 / 허연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어지지도 못하는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 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그렁그렁 한 눈물 한 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딱 한 번만 부르고 죽자.
- 허연,『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출처] 시 모음 943. 「사랑」|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