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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강원 정선. 태백
* 산행일시 : 2023년 10월 14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 회차 : 대간 74-10
* 산행코스 : 두문동재~은대봉[1442m]~중함백(인증)~함백산[1572m](100명산 인증)~창옥봉[1238m]-만항재-수리봉~화방재(B코스 출발/차량 중간 대기)~사길령(인증)~사길치-태백산 장군봉[1566]-태백산 천재단(100명산 인증)-부쇠봉~깃대배기봉(인증)~차돌배기-신선봉(인증)~구룡산 부쇠봉~곰넘이재-고직령- 구룡산(인증) -도래기재(약35.9km/15시간)
* 산행시간 : 02:04~14:23 [12시간18분] (휴식시간: 0시간51분)
* 산행속도 : 3.26 km/h
* 산행거리 : 37.36km
* 날씨 : 맑음
* 기온 : 5~15℃
* 약수터 정보 : 화방재. 유일사
* 조망점 : 정상
* GPX 트랙 : 별도 첨부
* 산행 난이도 : 고도차: 힘듬 , 거리:힘듬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 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이나라 골격의 틀 중에서 장대하고 당당한 산줄기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길게 연결된 장대한 산줄기로 그 길이는 약 1,400km이나 남한에서 종주할 수 있는 거리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향로봉까지 약 684km이다.
벌써 날씨가 추워졌다..!
도착하여 보니 기온이 영상 5도..!
얼마까지만 해도 반팔에 더워서 힘들었는데.
갑자기 추워지니 옷차림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하여간 가벼운 옷에 바람막이를 입고서 은대봉으로 향했다.
[두문동재] 싸리재 1268m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빈봉산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개풍군지』를 들추어보니 만수산의 서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 72인이 은둔했고, 빈봉산의 동두문동에는 무신 48인이 숨어 살았다 한다. 전설을 따르자면, 회유에 지친 조선의 태조는 끝내 그 두 곳의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많은 이들은 그렇게 불에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충신이 흘러간 곳이 바로 정선의 고한 땅이었다. 또한 변함없이 두문불출하였으니 이름 역시 두문동이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신하들이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정선 두문동으로 숨어들어 마지막 공양왕을 그리며 읊은 시가 정선아리랑의 시원이라고 한다.
-> 흔히 두문동재의 옛 이름을 싸리재라고도 하지만,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싸리재는 또다른 고개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이곳 은대봉까지는 약 1.2km 정도 되며 은대봉을 천의봉이라고도 한다.
두문동재의 고도가 약 1267m이고 이곳 높이는 약 1442.3m 정도로 고도차가 약 175m 정도 된다.
그래도 조금은 오르막이 이어지는데 육산이고 막 시작하는 산행으로 어렵지 않게 은대봉에 도착을 한다.
[은대봉] 1442.3m
함백산의 봉우리인 상함백산, 중함백산(1,505m), 하함백산(1,527.9m), 창옥봉(1,380m) 중 상함백산을 가리킨다. 정암사를 세울 때 조성된 금탑, 은탑에서 금대봉과 은대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두문동재(예전 이름 싸리재)를 통해 바로 이웃에 있는 금대봉과 이어진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금대봉·비단봉·천의봉, 동쪽으로 태백시와 백병산·면산·묘봉으로 이어진 낙동정맥, 남쪽으로 중함백산, 서쪽으로 백운산·두위봉 등이 보인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아래로는 죽령터널에 이어 한국에서 두번째로 긴 정암터널(4,505m)이 지나간다.
낙동강의 원류 발생지는 이곳에서 가까운 천의봉의 동쪽계곡에 자리한 너덜계곡으로 공식 인정되었지만, 은대봉의 은대샘에서 태백시 화전동쪽으로 흘러내리는 황지천(黃池川)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산자락에는 태백광업소와 한국 기차역 중 제일 높은 곳(855m)에 위치한 추전역이 있다. 부근에 정암사, 용연동굴이 있다.
- 낙동강의 발원샘 은대샘(너덜샘)
낙동강의 첫 물방울은,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 황지보다 상류에 있는 은대봉의 너덜샘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전문가나 향토사학자들은 너덜샘은 낙동강의 발원샘,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황지의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대봉에 도착을 하면 다시 내리막이 시작되고서 1200 고지까지 내려갔다가 중함백 1500 고지까지 약 300m를 올라야 한다.
그래도 그렇게 어렵지 않은 산행이며 육산이다.
이곳 중함백까지 약 4.4km 정도 되고 1시간 16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제부터 함백산으로 향하는데 잠시 내려갔다가 다시 함백산 200m쯤에서 올라야 한다.
[중함백]
중함백 정상엔 인공으로 깍은 듯 자연스레 깎인 넓은 돌 판 쉼터가 있다. 이정표나 표지석이 없으나 동남쪽으로 시야가 열려 있어 황지 시가지 일대가 내려다보이고, 함백산 방송 중계탑과 함백산 스키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함백에서 함백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유명한 주목군락지가 있다.
함백산이다.
이곳은 탁 트인 조망이 참 좋은 곳인데.
안내산악회는 인증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곳은 짧게만 왔다가 다시 태백산으로 향한다.
탁트인 전망에 겨울에는 서있지 못할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오늘도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고 하여 춥기도 하고.
인증사진만 촬영하고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중함백에서 이곳까지는 약 1km 정도 되고 전체 거리는 5.4km 정도 된다.
중함백에서 20분 정도 소요된다.
[함백산] 1572.9m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과 태백시의 경계에 있는 산.
강원 동부의 최고봉으로 정상에서 태백산, 백운산 등 지역 전체와 동해 일출 전망이 가능하며, 전국 최고 최대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삼척탄좌 등이 소재하고 있어 석탄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산업선인 태백선 철도가 산의 북쪽 경사면을 지난다.
함백산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동·서·남·북으로 뻗친 대간과 지맥의 분포를 살펴 저술한 산경표에 대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선총쇄록에는 상함박, 중함박, 하함박 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왜 함백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태백(太白), 대박(大朴)과 함백(咸白)이라는 말은 모두 '크게 밝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측량기술을 통해 밝혀낸 높이는 함백산(1,572.9m)이 태백산(1,566m)보다 높지만 옛날에는 두 산 모두 '크게 밝은 산'의 봉우리였음이 틀림없다.
함백산 북서쪽 사면에는 서기 636년 신라 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정암사(淨岩寺)가 있으며, 함백산 등산로 중 하나인 만항재는 해발 1,313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도로이며 싸리재는 1,268m로 만항재와 버금간다. 이곳에선 매년 8월이면 함백산 야생화축제가 열린다.
잠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함백산 아래 표지석이다.
함백산에서 내려오니 만항재를 가기 전에 이름 없는 작은 봉우리 창옥봉을 거친다.
합백산 -> 창옥봉 : 1.9km/32분
[창옥봉]
특이한 점 없는 흙길의 능선봉우리와 이어지는 안부 능선 길. 표지석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옥봉'이란 걸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함백산에서 만항재는 처음에 돌계단을 가파르게 내려오다가
다시 한번 올랐다가 내려오면 이곳 만항재에 도착을 한다.
창옥봉 -> 만항재 : 0.9km/13분/ 평균속도 4.1km/Hr , 전체 : 8.5km/2시간 24분, 평균속도 3.5km/Hr
[만항재] 1330m
만항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포장도로로 고도가 무려 1,330m이다. 그래서 국가대표선수들의 고산 적응 훈련 장소가 있다. 만항재는 정선, 태백, 영월의 경계에 위치한 재로 함백산 줄기가 태백산으로 흘러내리면서 잠시 쉬었다 가는 곳으로, 1980년대까지 일대에서 캐낸 석탄을 옮기던 운탄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암사 입구를 지나 고개에 오르는 동안 만나게 되는 만항마을은 본래 주변 탄광의 근로자들이 살던 마을이다. 그러나 인근 탄광들 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 주민들이 밭농사에 손을 대 삶을 이어 간다.
만항재의 북쪽 일대는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 이어져 파릇파릇 잎이 돋아나는 봄부터 야생화 천국을 이룬다. 정제된 느낌이나 향기는 덜하지만 자유와 생명력 만큼은 오히려 정원을 장식하는 관상용 꽃이 따라오지 못한다. 그래서 천상의 화원이라 불린다.
晩學재의 뜻이라고 하며, 늦은목이재도 비슷한 뜻이라고 한다.
만항재에서 수리봉에 오는 길은 내리막길이면서 산죽과 함께 낙엽송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다가 잠깐 오르막이 있다가 수리봉까지 내리막이다.
이곳 수리봉까지는 평탄한 육산이고 이곳부터 화방재까지는 가파르게 내려가야만 한다.
만항재-> 수리봉 : 2.4km/34분/ 평균속도 4.2km/Hr , 전체 : 10.5km/2시간 53분, 평균속도 3.5km/Hr
[수리봉]
함백산 구간의 가장 남쪽 봉우리다. 남쪽 건너편으로 태백산이 올려다 보인다. '독수리의 일종인 수리가 살던 봉우리'다. 일견 '솔(松)'이 '수리'로 변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실제 아름드리 노송들이 군락을 이루는 지역이다. 그 중에는 수백 년쯤은 족히 먹어 보이는 것도 많다.
수리봉에서 이곳 화방재는 가파르게 내려와야 하는 곳이다.
화방재에는 휴게소가 있어서 식당도 있으며 화장실도 있고 샤워장도 있는데 식당에서 비용을 지불하고서 샤워를 할 수 있다.
수리봉-> 화방재 : 2.4km/34분/ 평균속도 3.1km/Hr , 전체 : 10.5km/3시간 17분, 평균속도 3.6km/Hr
[화방재] 939m
태백과 영월을 연결하는 고개로 31번 국도가 허리를 넘어간다. 마루금에는 어평휴게소 겸 주유소가 자리한다. 내륙쪽 200m 거리에 만항재에서 내려온 414번 지방도로가 합류한다. '화방'은 '꽃밭'이라는 뜻이다. 진달래 피는 계절에 이곳을 여행해본 종주자에게는 쉽게 납득된다. 봄이 되면 도로변의 밭을 제외하고는 온 산이 진달래로 붉게 물드는 장관이 연출되는 곳이다.
이곳 주민들은 주로 어평재라고 부른다. 서쪽 기슭의 어평이라는 마을에서 유래했다 한다. 어평이란, 태백산의 산신이 된 단종대왕의 혼령이 "이제부터 내 땅(御坪)이다."라고 해서 '어평리'라는 이름이 붙었고 '재'를 어평재라 불렀다는 유래도 있고, <태백의 지명유래>에는 봄이면 고갯마루 부근이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타올라 꽃방석 같다 하여 화방재(花房嶺)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방화선(防火線)을 설치하면서 현재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으며, '정거리재'라고도 한다.
화방재에서 사길령과 함께 사길치를 가는 동안에도 일출은 시작되지 않았다.
일출 시간이 6시 30분경 되는데 장거리다 보니 무리하게 속도를 내지 않았다.
조금 더 속도를 냈다면 아마도 태백산 정상에서 일출을 볼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 든다.
유일사 쉼터에서 바라본 일출이다.
태백산 산 허리에서 일출이 시작되기 때문에 예정 시각보다도 15분이 지났지만 해가 보이지 않고 붉은 기운이 아닌 밝은 하늘이 이어져서 그냥 일출을 보지 않고서 태백산으로 향했다.
함백산 부분의 모습이다.
[사길령 산령각(산신각)]
사길령의 본래 이름은 새길령. 고려시대에 새로 개척한 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길령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높고 험하기로 유명했지만 가장 가까운 길인 만큼 길손의 왕래가 많았고, 특히 보부상들이 수십 혹은 수백명씩 대열을 이루어 계수의 인솔 하에 넘어 다녔다. 산이 험해 맹수와 산적들의 출몰이 잦았기 때문에 고갯길의 무사안전을 위해 고갯마루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5일 제를 올린다. 현재 태백산사길령산령각계회에 보존 중인 천금록은 200여년 전부터 보부상들이 이곳 태백산산령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유일사에서 태백산 주목이 있는 곳까지는 조망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떠오르는 해는 보지를 못했다.
결국 이렇게 태백산 주목이 있는 곳에 도착을 했더니 이미 해는 많이 떠 있는 상태였다.
태백시 쪽에 이렇게 운해가 장관이었는데.
일출을 봤다면 정말 멋진 모습이 아닐까 생각 든다.
겨울 눈꽃과 상고대가 핀 주목도 이쁘지만 이렇게 초록의 주목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풍경도 참 멋지다.
드디어 장군봉에 도착을 했다.
이른 시각이고 가을이라서 그런지 산객들은 몇 명만 보였다.
수리봉-> 화방재 : 4.3km/1시간 59분/ 평균속도 2.1km/Hr , 전체 : 16.5km/5시간 05분, 평균속도 3.2km/Hr
일출을 본다고 유일사 탑이 있는 곳에서 약 20분 정도 기다렸더니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화방재에서 사 길치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임도와 함께 육산이고
사길치에서부터 유일사 쉼터까지 작은 오르막이 몇 개소 있고 일부는 돌길이다.
유일사 쉼터에서 장군봉까지는 경사가 있는 오르막이 이어지고 주목이 시작되는 곳 까지는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주목이 있는 곳부터는 육산이다.
[태백산] 1567m
태백산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산이라면 그것이 어떤 산이든 일단 민족의 영산이라 할 수 있다. 일명 태백산이라는 이름도 있는 백두산이 그렇고 태백산이 그렇다."동국여지승람"에 태백산은 신라의 오악 중 하나인 북악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산이라고 기록되어 일찍부터 명산으로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
'太白山'이란 산이름에 대해서는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산마루에 하얀 자갈이 마치 눈이 쌓인 듯 깔려 있기 때문에 太白이란 이름을 지니게 됐다'고 했으며, 후대의 고산자 김정호도 '산이 다 하얀 자갈들이라 이를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산 이름 太白은 이 때문이다(대동지지 안동조)'라고 하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太白山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옮김과 뜻옮김하여 혼용표기한 것으로 본다. '한밝달'은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 됐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했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일성왕 5년(138) 10월에 왕이 북방에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지낸 일이 있고, 기림왕 3년(300) 3월에는 우두주(牛頭州·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또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내왔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초엽부터 태백산에 천제 또는 산신제를 지내왔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태백산사(太白山祠)조에 의하면, 그러한 제의(祭儀)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본도(本道·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이 산 곁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이를 돌아볼 것 같으면 신이 불공하게 여겨 죄를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러한 풍속을 이름하여 퇴우(退牛)라고 한다.'
위의 태백산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상고시대 이후 고대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로 삼아 중사를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산신제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사(淫祠)에 관한 제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천제→산신제→음사로 변질
허목(許穆·1595-1682)의 기언(記言)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퇴우(退牛)조에 의하면, 그러한 미신의 폐단을 보다 못한 당시의 산승(山僧) 충학(沖學)이 태백산사를 불태워 버렸으며, 이후로는 이곳 산신에게 소를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산의 목민심서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조에 의하면,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도 영남관찰사로 있던 김치(金緻·1577-1625)에 의해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가 미신적 폐단으로 인해 헐린 일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여지승람의 태백산사 이야기는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신당퇴우설(神堂退牛設)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지승람의 내용은 아마도 이를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풍속이 민간풍속으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전래되어 왔을지는 모르나, 그 제의의 풍속이 현대까지 이어왔다는 정사(正史) 상의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산이다.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령의 상징인 태백산은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청옥-두타산을 거쳐 흘러온 맥이 한번 웅장하게 용트림한 산이다. 금강, 설악, 오대, 두타산이 대부분 기암괴봉으로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깊은 협곡을 거느려 명산에 걸맞는 경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태백산은 주능선일대에 국한해서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연상시키듯 크고 거대한 능선과 봉우리로 이루어진 육산일 뿐 아기자기만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산이다. 함백산이나 정암사로 빠지는 고개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면 거대한 활등 모양으로 휘어든 평탄하다고 해도 좋을 만한 둔중한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상을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큰 덩어리로 다가온다.
동국여지승람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 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전후 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 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 신도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의 위패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 이래의 정사(正史) 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 상에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태백산 천제단이다.
장군봉에서 이곳까지는 약 300m 정도 되며 1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철쭉철이 되면 이곳까지 오는 길에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 천제단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에 위치한 천제단은 높이 2.5m 정도의 사각형 제단이다. 태백산에는 장군단과 천왕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천제단이라 부른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규모가 가장 큰 원형의 천왕단(해발 1561m)은 장군봉에서 300m쯤 더 가야 나온다. 이곳에서 300m 더 가면 작은 사각형의 하단이 있다. 해마다 10월 상순 살아 있는 소를 몰고 올라가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렸고, 이를 '태우'라고 했다. 지금은 10월 3일 개천절, 소머리만 놓고 제를 올린다.
1991년 10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둘레 27m, 너비 8m의 제단으로 태백산 정상에 있다. 산꼭대기에 이와 같은 큰 제단이 있는 곳은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다. 제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국가에서 치제하였고, 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린 곳이다. 신라초기에는 혁거세왕이 천제를 올렸고 그 후 일성왕이 친히 북순하여 천제를 올렸으며, 300년 기림이사금 3년에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니 낙랑, 대방의 두 나라가 항복하여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 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고,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고 일제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 지금도 천제의 유풍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산꼭대기에 이같이 큰 제단이 있는 곳은 본토에서 하나밖에 없다.
천제단은 다른 이름으로 구령단(九靈壇) 또는 구령탑(九靈塔)이라 하고 마고탑(麻姑塔)이라 하기도 하는데, 천왕단(天王檀)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단(將軍檀), 남쪽에는 그보다 작은 하단의 3기로 구성되었으며 적석으로 쌓아 신 역(神域)을 이루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이며, 녹니편암의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이러한 구도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 때문이다.
특히,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받드는데 중앙에 태극기(太極旗)와 칠성기(七星旗)를 꽂고 주변에는 33 천기(天旗)와 28수기(宿 旗)를 세우며 9종류의 제물을 갖춘다. 이 주변의 계곡 일대에는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로 사용된 크고 작은 적석탑과 석단들이 있으며 함부로 짐승을 잡거나 나무를 꺾는 일을 금하고 있다.
보이는 곳이 부쇠봉이고 우측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깃대배기봉으로 백두대간 등산로가 이어지는 길이다.
태백산에서 가장 멋진 자태를 가지고 있는 주목이다.
눈꽃과 상고대가 피면 정말 환상이지만 이렇게 초록의 나뭇잎과 파란 하늘이 잘 어울린다.
부쇠봉이다.
천제단-> 부쇠봉 : 0.8km/22분/ 평균속도 2.2km/Hr , 전체 : 17.7km/5시간 31분, 평균속도 3.2km/Hr
부쇠봉에서 깃대배기 봉으로 가는 길에 전망대가 있는데 전망대에서 조망이 참 좋다.
[부소봉] 1547m
천제단 남동쪽에서 1Km 지점에 위치한 준봉이다. 장군봉, 천제단과 비슷한 높이다. 그러나 두 봉우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봉우리다. 대간의 중요한 봉우리인데도 기존의 대간로가 옆으로 비껴 우회할 정도로 구박덩이다. 남진해오던 대간이 부소봉을 지나면서 차츰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경상북도 지경으로 처음 진입한다. 북족은 여전히 태백시다. 솥두껑(釜)처럼 생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단군의 아들 부소왕의 이름이다.
부쇠봉에서 내려오는 전망대에서의 풍경이다.
태백 쪽의 운해가 이곳에서 더 조망이 잘 된다.
깃대배기봉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고 이렇게 참나무 군락지이다.
곳곳에 조릿대 숲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참나무가 있는 대간길이다.
참나무에서 자라는 노루궁댕이 버섯이다.
이제는 날씨가 추워서 물기가 다 사라진 노루궁댕이며 끝물이라서 거의 보이지 않았고.
2개의 큰 노루궁댕이를 봤는데 너무 높아서 딸 수 없는 버섯이었다.
깃대배기봉이다.
깃대배기봉은 2개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아래로 약 200m 정도 내려가면 두리봉 갈림길에 깃대배기봉 정상석이 또 하나 있다.
부쇠봉 -> 깃대배기봉 : 2.9km/1시간9분/ 평균속도 2.5km/Hr , 전체 : 20.8km/6시간 18분, 평균속도 3.3km/Hr
[깃대배기봉] 1368m
예전 신라시대에는 채백산과 부소산 그리고 깃대배기봉을 연결하는 대간길을 하늘고개라는 뜻의 '천령(天嶺)'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성시했다고 한다. '깃대처럼 높은 봉우리'로 해석된다. '~배기'는 명사형 어미다. 따라서 '깃대봉'이다. 이 능선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었고, 신라 사람들이 이곳을 '천령'이라 불렀고, 산이름이 '깃대봉'인 것으로 보아 고구려나 백제, 신라 중 한 나라가 국기를 내걸었던 봉우리는 아니었을까?
일제가 측량을 하면서 깃대를 꽂아 놓아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깃대배기봉에서 차돌배기까지는 가파르게 내려가는 내리막이고 이렇게 곳곳에 이쁜 단풍이 많이 있었다.
[차돌배기]
지나는 행락객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옛날 이 자리에 차돌이 박혀있었다 하여 차돌배기라 전하여 오고 있다.
깃대배기봉에서 이곳 신선봉으로 가는길은 가파르게 내려왔다가 다시 한번 작은 재를 넘고 차돌배기를 지나서 몇백 미터를 올라가면 신선봉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육산이고 중간에 갈림길이 있는 곳에 쉼터가 있어서 잠시 쉬었다가 왔다.
역시 25km가 넘으면 몸에서는 힘들다 신호를 준다.
깃대배기봉(차돌배기) -> 신선봉 : 5.4km/2시간 4분/ 평균속도 2.6km/Hr , 전체 : 26.4km/8시간 13분, 평균속도 3.2km/Hr
[신선봉] 1300m
화방재에서 시작하든 도래기재에서 시작하든 크게 힘들인 다음에야 오르르 수 있는 보우리다. 정상을 사이에 두고 앵 방향 등산로 모두 급경사를 이루는데 등산로의 폭이 좁다. 특별한 이정표도 없고 갈길도 멀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신선이 산다는 봉우리'인데 '신선만 오를 수 있는 산'인 양 오르는 사람에게 구슬땀을 요구한다.
경주 손씨 묘가 있다.
이곳 곰넘이재를 넘기 전에 구룡산 부쇠봉을 지나야 한다.
신선봉 -> 곰넘이재 : 1.9km/34분/ 평균속도 3.3km/Hr , 전체 : 29km/8시간 57분, 평균속도 3.2km/Hr
[곰넘이재]
'옛날부터 이 고갯길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였으며 특히 태백산 천제를 지내러 가는 관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고갯길이었다. 문헌 영가지(永嘉誌)에 웅현(熊峴)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언제부터인가 순 우리말로 순화하여 곰넘이재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다른 뜻풀이에 의하면. "곰"은 "검"에서 온 말로 "신"을 의미하고 태백산으로 천제를 지내려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가며 행렬을 이루니,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곰(검신)님이"이라 불렀다. 즉, 웅현(熊峴)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검재"이니 다른말로 "신령(神嶺)이다. 일설에는 "곰"을 "고개"로 해석하고 "님이"를 "넘이"로 봐서 "곰님이"는 "고개넘이"로 보기도 한다.
[고직령] 高直嶺
고직령은 '높고 곧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곳은 '높은 것'은 당연하고 '곧은 길'은 서벽리에서 올라오는 '곡내계곡길'이다. 따라서 춘양면의 입장에서 이름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구룡산에서 떨어지면 높고 곧은 고직령이다. 설에 의하면 고개 북쪽에 사창(社倉)이 있어 고직(庫直)이가 지킨다. 고산자 김정호[대동지지]삼척 산천에는 서쪽 일백십리에 고석령(孤石嶺)이 있고 매우 험하다.
곰넘이재를 넘어서 고직령을 넘어가서 급하게 올라야만 마지막 봉우리 구룡산에 도착을 한다.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 구룡산이다.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장거리를 와서 그런지 힘들기는 하다.
이곳 구룡산은 곰넘이재에서부터 고직령에서 잠깐 쉬다가 계속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육산이라서 그리 힘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힘든 곳이 아닌가 한다.
곰넘이재 -> 구룡산 : 2.9km/ 1시간0분/ 평균속도 2.9km/Hr , 전체 : 31.3km/9시간 45분, 평균속도 3.2km/Hr
[구룡산] 九龍山 1345.7m
강원 영월군 상동읍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 사이에 있는 한국의 산.
태백산(太白山:1,567m), 청옥산(靑玉山:1,277m), 각화산(覺華山:1,177m), 옥석산(玉石山:1,242m) 등과 함께 태백산령에서 소백산령이 갈라져 나가는 곳에 있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남북으로 흘러서 각각 낙동강과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산은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여 구룡산 이라 하는데,용이 승천할 때 어느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 오다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뱀봐라" 하면서 꼬리를 잡아당겨 용이 떨어져 뱀이 되어 버렸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룡산 아래를 천평이라 한다.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때 태백산 정상을 天嶺이라 하였고, 천제단이 있는 곳을 天山이라 하여, 그 아래 있는 들을 "하늘들"이라 하여 "天平"이라 하였다 한다.
구룡산에서 하산길에도 이렇게 이쁜 단풍나무가 제법 있다.
구룡산에서 하산길은 가파르게 내려가다가 작은 재를 한번 더 넘어가야만 도래기재에 갈 수 있다.
드디어 도래기재에 도착을 했다.
육산이지만 그래도 거리가 있어서 제법 힘든 곳이다.
구룡산 -> 도래기재 : 5.4km/1시간 54분/ 평균속도 2.8km/Hr , 전체 : 37.4km/12시간 18분, 평균속도 3.0km/Hr
도래기재] 763m
도래기재는 춘양면 서벽리와 우구치리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고갯마루에는 금정굴로 불리는 터널이 있어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였으나 근래에 폐쇄되고 현재는 고갯마루를 관통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이어주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88번지방도가 지나간다. 도래기재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름을 따와서 도래기재라고 한다. 도래기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導驛里)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이 되어 현재는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재넘어 우구치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을 닮아서 우구치(牛口峙)라 불린다.
- 금정광산
금정광산은 백두대간 구룡산의 심장에 해당하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일대에 위치. 일제 강점기 때부터 50년 이상 금을 캐온 금정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구룡산 계곡 한쪽에 광미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어설픈 광해 방지 작업이 더해져 5년이 지난 2002년 여름 끝내 무너져내렸다. 태풍 루사에 의해 폐기물 더미가 완전히 무너진 것.
초기 복구를 담당한 산업자원부는 폐기물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아카시아를 심었지만,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부실하게 복구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큰 비를 맞고 무너져내린 중금속폐기물은 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우구치리계곡을 비소, 구리, 수은 등 중금속으로 오염시켰다.
우구치리는 '창지개명(創地 改名)'된 명칭이다. 애초 강원도 영월군에 편입돼 있었으나 지금은 폐광된 금정광산에서 캐낸 금을 봉화로 실어내 오면서 행정구역이 바뀌었고 폐광지역 침출수가 영월로 흐르는 하천을 오염시켜 지역간 환경 분쟁을 낳고 있다.
GPS 트랙
본 산행의 GPS 트랙
봉우리 표시가 있는 GPS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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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단풍나무 돋보이는
가을 산행하기 좋은곳으로
힘든코스로 기록되는 군요
네
산행기를 다 작성하지 못했는데.
거리가 37KM 정도 되다보니 아무래도 어려운것 같습니다.
지금 딱 단풍이 절정이 아닌가 합니다.
벌써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어제는 산행하기 정말 좋은 햇살좋은 날씨였네요
태백산은 겨울에 혹독한 추위로 사진찍기도 힘들었던 추억~~
굿건하게 태백산을 지키고있는 주목나무가 반갑네요
어딜가도 좋은 계절 안산하세요
네.
서울에는 비가 왔었는데.
그래도 강원도 쪽에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태백산은 겨울 산행이 제일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듭니다.
태백산 정상을 가는것도 어렵지 않으니까요..!
벌써 주목도 다 시들고 있어서 아쉬움이 남네요.
겨울에 상고대와 눈꽃이 핀 주목이 제일 멋진 것 같아요..
댓글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