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현 박사,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2)
‘영역 주권’은 ‘개혁파’의 원리로서 자유대학교가 지향하는
원리이다.
크게작게
김순정 2014-10-27
이 글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실천신학을 교수하는 박태현 박사가
「신학지남」 2014년 가을호에 기고한 논문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적주권 사상을 강조했던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을
2014년 봄호에 이어 소개하고 있다.
III. 개혁파 원리
필자는 지난 신학지남 2014년 봄호(제318호)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의의, 그리고 그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영역주권이 선명하게 제시된
카이퍼의 자유대학교 개교 연설(1880년)의 앞 부분을 한글로 번역하여 게재하였다. 금번 호에서는 개교연설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번역하여
게재함으로써 번역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카이퍼의 개교연설인 ‘영역주권’은 그의 문학적 필치와 다양한 수사적 표현들로 인해 번역이
쉽지 않고, 또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할 때 카이퍼의 의도를 놓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금번에는 카이퍼가 말하는 영역주권의 세 가지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카이퍼는 신설 대학 자유대학교가 네덜란드 국가에서 감당하게 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유대학교가 지닌 학문적 목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대학교가 지닌 개혁파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단 하나의 개념인
‘영역주권’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1. 국가적 의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세상의 위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핵심적으로 주권자 메시아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주권자에 대한 논의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날 메시아가 구원의 진리냐 아니면 원초적
거짓이냐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최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인간에게 위임하였고 또 여전히 위임하고
있다면, 이런 주권의 위임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 주권이 나뉨이 없이 단 한 사람에게 위임되었는가? 라는 중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둘로 나뉘는데, 그것은 특별계시를 인정하는지 여부에 따른다. 특별계시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할 수 있는 한 나뉘지 않으며, 또한
모든 영역을 관통”한다고 주장한다. “할 수 있는 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까닭은 초자연적인 것, 자연과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각각의 영역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영역, 즉 사람들의 생활, 권리, 양심, 심지어 신앙조차
통제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결국 헤겔의 체계 속에서 국가가 ‘현재적 신(神)’으로서 정교화된다.
그와 반대로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최상의 주권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나뉘어지지 않고, 또한 중단되지 않은 채 죄 없으신 인간-메시아에게 위임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메시아의 절대적 주권은 사람들의 삶을 각자 자신의 주권을 지닌 고유한 영역으로 나눔으로써 죄인들의 절대적 주권을 직접적으로 부정하고
도전하였다.
가시적인 물질적 삶과 그 배후의 비가시적 영적인 삶을 지닌 인간의 삶은 무한히 복잡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여 개인은
집단 가운데 존재한다. 따라서 사람이 살아가는 범위는 도덕적 영역, 가정의 영역, 사회적 삶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더 확대시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연의 범위, 삶의 범위, 사유의 범위, 양심의 범위, 그리고 신앙의 범위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영역들은
자신들의 톱니바퀴로 서로 맞물려 있기에 하나의 영역이 다른 인접한 영역을 침해하는 위험도 발생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국가의 특별한 권위 영역이
등장하여 다양한 영역들 사이를 조화롭게 만들고, 집단에 의해 억압받을 수 있는 개인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은 개인을
보호하고 가시적인 삶의 영역들에서 상호 정당한 관계를 규정하는 권세로서, 명령권과 강제력으로 이 모든 영역들 위에 탁월한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영역 안에서는 이 국가의 주권이 적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기서는 다른 권위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 권위는 국가와 상관 없이
하나님에게서 내려 온 것으로 국가에 의해 부여된 권위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인정된 권위다.
결국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자들과
인정하지 않는 자들 사이의 두 개의 신앙 고백이 상호 예리하게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자들은 모든 주권은 하나님 안에
기초하며, 이 주권은 절대적 의미에서 그리고 나뉘지 않은 채 인간 메시아에게 부여되었으며, 이 메시아 아래에서 국가와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들은
메시아에게서 파생된 고유한 영역 주권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특별계시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주권의 문제를 신앙의 문제에서 절대적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의 주권 외에 다른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신앙고백은 인간 삶을 근본적으로 갈라 놓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두 개의 반정립(反定立)으로서 다른 사람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영역주권은 국가의 주권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하는데, 이 주권은 국가의 주권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창조 질서 속에 존재했었다. 하지만 한 번 등장했던 국가의 주권은 삶의 고유한 영역
주권을 무시하고 하나의 세계 제국이 되었다. 이때 왕으로 오신 주권자 메시아는 가이사(Caesar)에게 저항하여 초월적, 믿음의 능력으로
고유영역의 주권을 다시 창조하셨다.
이것은 국가 주권에 대항한 네덜란드 역사에서 잘 드러나는데, 공화국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과
몰락, 군주주의의 등장 등의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다가, 단일 주권이 다른 주권들을 위협할 때 그 시대를 구원한 것은 세상의 다양한 학파나 정신이
아니라 주권자 메시아였다. 주권자 메시아의 부흥을 통해 도덕적 힘을 지닌 고유한 영역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였는데, 지배가 아닌 섬김을 위한 일부
기독교인들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학교, 양심, 가정, 교육, 그리고 영적인 영역의 주권이 위협 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하기
위한 지식을 길러내야 하는데, 이 같은 집중적인 지식은 오직 대학의 성격을 지닌 학교에서만 길러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대학교는 비록 거친
바다를 항해하기에 부적합한 작은 배에 지나지 않지만, “왕이신 예수의 주권 아래 특허를 받아 모든 지식의 항구에 ‘영역 주권’의 깃발이
세워지기까지” 항해해 나가야 한다.
2. 학문적 목적들
인간 삶 전체를 둘러싼 영역들 중의 영역인 국가는 지상에서
최상의 권력을 쥐고서 고상한 의미에서 모든 영역을 위하여 하나의 영역이 다른 영역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저지시키고 무산시킨다. 인간 삶의 영역들이
자유롭게 번성하느냐 아니면 국가의 압제 아래 신음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상 그 영역들 자체에 의존한다. 즉, 각 영역이 지닌 도덕적 장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는 힘이 된다. 만일 죄로 인하여 도덕적 생명력 혹은 장력을 잃게 되면, 그 영역은 국가에 의해 축소되고 자유가 침해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주된 범인은 의무를 망각한 시민 자신으로서 국가에 의해 자신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만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자유를 보존하도록 부여하신 저항의 수단들 가운데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학문이다. 학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내 주신
빛의 천사로서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 인류를 위한 하나님을 숙고하며, 모든 시대를 포함한 인류의 삶을 파악하는 선명한
의식이다.
이 학문은 “자기 영역의 주권자”로서 국가의 보호나 교회의 감독 아래 그 성격이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학문은
진리의 영역에서 삶을 형성하는데, 어떤 환경에서도 그 삶의 법칙이 위배되거나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학문에 대한 모욕이며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스피노자는 이 학문의 영역주권이 침해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첫째, 교회는 자신의 수위성 혹은 우월성을
학문에 부과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학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허용된 영역 주권을 주장하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학문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오만의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학문이 지닌 정당한 영역을 존중해야 하는 반면,
학문은 국가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시녀가 된 학문은 도덕적인 것들에 대한 설득력을 상실한 비천한 창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학문이 국가의 간섭을 떠나 대학교에서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다면 번성하고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일부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의
재정후원으로 설립되고 유지되는 자유대학교는 기부자들의 관대함과 수혜자들의 강박감에 의해 조금씩 진행하는데, 이것은 삶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기부자들의 재정 속에는 단순히 화폐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가 숨어있는데,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 수고의 땀방울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3. 개혁파 원리
모든 학문에 적용되는 고귀한 밑바탕으로서의 ‘영역 주권’은 ‘개혁파’의 원리로서 자유대학교가
지향하는 원리이다. 굳이 개혁파라고 말하고 ‘기독교적’이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로마교적’인 것이나 ‘항변파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네덜란드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들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개인이 아닌 교회 공동체의 합법적인 판단에 의해 도르트신조를 고백하는 개혁파라는 명칭으로
보다 더 순수한 성경적 원리를 추구한다.
개혁파의 원리는 성경의 요구와 칼빈의 전례를 따른 하나님의 주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영역 주권’은 진실로 성경의 핵심과 개혁파 삶의 보고(寶庫)에서 나온 것으로, 성경의 유기적 신앙원리를 깊이 살펴보면 환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시민의 자유, 가정의 평화, 시민 공동체의 자율이 가장 잘 보증된 것은 칼빈 후예들의 영토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학문의 영역에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개혁파 정신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원리에서 살아가는 학문과는
중립성 협약을 맺어 동일한 대화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원리를 갖는 학문은 각자의 원리를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음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그리스 학문, 아랍의 학문, 스콜라적 학문, 그리고 중세 이후의 카톨릭 대학과 비카톨릭 대학은 각각 그
원리에 따라 구별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주체나 객체를 강조하는 경향에 따라 서로를 배제하는 학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고(思考)의 영역에서 다른 원리를 가진 사람과 협력이 불가능하다면, 삶의 영역에서 영역 주권은 더 더욱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원리는 역사적 사실, 즉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의 반대자들이 우리의 원리를
자기기만이라고 부를지라도,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기” 때문에(잠29:7하)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들과 우리 사이를
구별하는 경계선은 “객관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없고 주관적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다. 따라서 학문적 원리의
출발점과 방향이 다른 자들과 결코 동거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학문은 자유롭지만 원리에서 분리되거나 떠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원리의 기초 위에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발견한 결과를 배내기 장식으로 삼아 학문의 전당을 확립하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에 대한 우리들의 소원은 단지 신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학과 법학, 자연과학부, 문학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학문에서 ‘생각하는 주체’인 동시에 ‘생각하도록 만드는 객체’로서 되돌아 온다. “아 우리의 사고 세계 가운데 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들로부터 물샐틈없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외침에 응답하여 우리 앞에 놓인 힘겨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멸시와 모욕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촉하며 격려하시기에 우리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전진해야만했다. 작은 학교로서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기조차 부끄럽고, 재정과 학문적 인재가 부족하고 사람들의 호의조차 받지 못하지만,
자유대학교의 설립은 거룩한 개혁파 원리를 거듭 상기하며 모든 역경의 파도를 헤쳐 나왔다. 혹시라도 누구든지 우리의 힘이나 학문적 중요성을 마음껏
경멸한다 해도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그리고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칼빈주의적 신조가 그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청하는 단 한 가지는 우리를 감동시킨 열정만큼은 존경의 찬사를 바라 마지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절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증거요 그리스도는 여러분 선조들이 경배했던 분이기 때문이다. 혹시 여러분이 믿는 신조에 따라 성경은 끝장났고 기독교는 정복을 당한
하나의 이론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독교가 여러분이 보기에도 역사적으로 수치스럽게 무너지고
불명예스럽게 쓰러지기엔 너무도 위압적이고, 너무도 장엄하며, 너무도 거룩한 현상이 아니었습니까? … 우리가 골고다에서 메어 온 깃발이… 과연
원수의 손아귀에 떨어질 수 있습니까?
저의 결론적인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
“결코”라는 말에서 자유대학교는 태어난 것이다.
카이퍼는 이와 같이 자유대학교 설립의 주요한 원리인 영역 주권을 세 가지로 설명한
후에 개교기념식에 참여한 정부의 대표, 암스테르담 시장과 시의원, 국회의원들, 기독교연합회 운영자들, 언론계 대표자들, 이사회 위원들, 동료
교수들, 외국의 축하 사절단, 말씀의 봉사자인 목회자들, 그리고 개인적인 후원자들에 대한 감사와 협력을 요청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대학교
개교 선언에 앞서 매우 인상적인 기도를 올림으로써 마친다.
…우리의 심장을 시험하시고, 오 또한 우리 나라의 재판장이며 배움의
학교들을 판단하시는 심판자시여, 만일 이 기관이 언젠가 당신의 가장 부드러운 사랑스런 아들의 십자가 안에 있는 이 주권적인, 자유롭고 능한
은혜를 자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도하거나 언젠가 다른 것을 원한다면, 당신 자신이 이 기관의 벽들을 무너뜨리시고, 당신의 면전에서 그것들을
파멸시키소서! 주여, 주 하나님이여, 우리의 모든 도움이 당신의 이름 안에, 오로지 당신의 이름 안에만 있게 하소서! 아멘.
III. 개혁파 원리
그러므로 우리는 “영역 주권”이 어떻게 우리의 기관이 태어나게 된 열망이 되었는지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영역 주권”이 장차 융성하게 될 모든 학문에 적용되는 고귀한 밑바탕이 된다는 사실이 숨김없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단지 우리의 논쟁적 주장을 호소하는 일만 남아 있는데, 이 “영역 주권”이 우리의 원리,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개혁파 원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명칭을 언급함에 있어서 나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오해를 지체없이 잘라내고, 우리 편에서의 “개혁파”를 참된 순수 기독교와 다른 어떤
것 혹은 조금 모자란 것을 의미하는 모든 추측을 내던져 버립니다. 상인이 순수한 무게를, 금화 주조자가 순도 높은 금을, 은세공사가
품질보증서를, 성경이 순전한 나드(nardus)를 말하고, 어떤 신문이 [네덜란드의 한 지역] 스파르너(Spaarne) 자신에게 “참으로
의로운”(de Oprechte)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처럼, “순수한” 기독교, “순도 높은” 기독교, “순전한” 기독교, “참된” 기독교의
탁월성을 발휘하려면, 우리 역시 “품질보증서”를 지닌 기독교에 대해 그릇되지 않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이상한 용어들과 결별하고 언어습관과 역사적 요청에 따라 차라리 개혁파를 언급합니다. 이로써 모방한 것과 가짜, 그리고 잘 자라지 못한 것을
기독교로부터 예리하게,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별하게 됩니다. 단지 “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마교적”인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항변파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현대인도 “기독교적 명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실재를 부인한 자들에게 영광이 비치고, 그들이 비기독교화된 학교 정문 위에 “기독교적”이라는 거짓된 깃발을 매달던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 반드시 무슨 조치가 취해져야 합니다.
언어 혼란은 결코 작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한 영적 영역에서도 영역 주권이 적용되므로, 개인이 원리들의 이름을 짓거나 이 원리들을 정의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런 권리는 단지
권위를 지닌 기관(organ), 즉 이 영역에서 역사적 삶을 지니 기관에만 부여됩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 없었고, 우리의
원리를 임의적으로 고백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지녔던 “개혁파의 명칭”으로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우리가 판단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합법적으로 판단한 것을 의미한다. 즉 다시금
용감하게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도르트신조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루터파 형제들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얕잡아
보는 것은 우리의 허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보기에 더 순수한 것을 덜 순수한 것과 바꾸도록 우리에게 강요하지 말며, 무너진
개혁파 신전을 순수한 개혁파 스타일에 따라 다시 세우도록 우리에게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할 뿐입니다.
나는 이 연설에서 그것을
추구하고, 따라서 성경의 요구와 칼빈의 전례를 따라 하나님의 주권을 전면에 내세울 것을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이 주권만이 삶의 뿌리까지
자극하고, 인간에 대한 모든 두려움, 사단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역 주권”이 진실로 성경의 핵심과
개혁파 삶의 보고(寶庫)에서 나온 것인지 묻는다면, 저는 그에게 요청하기를, 제일 먼저 성경의 유기적 신앙원리의 깊이를 측량하고, 더 나아가
다윗의 대관식을 위한 헤브론 족장들의 법을 주의하며, 아합의 폭정에 대한 엘리야의 저항, 예루살렘의 경찰 규정에 대해 양보하지 않은 제자들의
거부를 유의하고,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과 가이사에게 속한 것에 대한 동전담화를 그들 주님의 입술로부터 들으라는
것입니다.
개혁파 생활에서, 여러분은 칼빈의 “하급관료”(magistratus inferiors)를 알지 못합니까? 영역 주권이
전적으로 장로교 교회정치의 기초가 아닙니까? 거의 모든 개혁파 국가들이 동맹국가의 형태로 기울지 않았습니까? 시민의 자유는 바로 개혁파 국가들
사이에서 가장 풍성하게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가정의 평화, 지방분산, 그리고 시민 공동체의 자율은심지어 오늘날 여전히 칼빈의 후손들(issus
de Calvin)의 영토에서 가장 잘 보증되었다는 사실이 부인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고유한 학문적 영역에서 우리
자신의 원리인 주권을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혁파 정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원리에서 살아가는 학문과의 중립성 협약을 맺어 동일한
대학의 식탁에 앉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비기독교 정부 안에도 높으신 하나님과 그의 정의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심지어 이방 폭군들의
경우에도 칼빈이 경의를 표했던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경건한 특성은 기껏해야 지붕이나 창문도 없는 벽 하나가
세워진 기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여러분이 더 정확한 모습을 원한다면, 뾰족탑, 따라서 편종연주와 시계와 풍향계, 요컨대
탑이 세워진 이유인 이 모든 것이 없다면 건설된 탑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정부가 다름 아닌 연단이 구비된 강의실, 더 나아가 박물관과
실험실을 제공하고, 모든 학자들이 등단할 수 있는 권리와 모든 영역이 학자들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거대한 단일 국립 아카데미에 대한
다른 제안이 더 수용될 법합니다. 모든 선로들이 한 점에 모이는 학문적 중앙역과 같되, 각각은 자신의 고유한 방향과 자신의 고유한 통치를
갖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역 주권”을 갖는 모든 원리에 대한 고귀한 권리는 양쪽 모두에게 손해가 될 것입니다.
역사는 학문이 자신의 원리를 갖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취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한때 그리스의 학문, 아랍의 학문, 스콜라적
학문이 존재했었는데, 비록 우리가 이것들에 친숙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고유한 영역에서 지속되었고 거대한 사상가들에 의해
숙고되었습니다. 그 사상가들은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들의 그림자 안에 들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세 이후에 학문은 로마 카톨릭 대학교들과 비로마 카톨릭 대학교들에게 쉽게 구별되는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칸트와 더불어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한
일련의 철학자들은 주체나 객체를 강조함에 따라 상호간에 서로를 배제하는 학파들을 형성했습니다. 일원론자(monist)와
원자론자(atomist)를 여러분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한 원리의 힘이 그렇게도 강력하고 지배적이어서 모든 사람이 인정하듯이
헤겔의 사고력은 신학과 법학과 물리학, 진실로 모든 영역에서 전적으로 고유한 체계를 산출하였고, 따라서 헤겔 학파에서 형법(刑法)을 그리고
헤르바르트(Herbart) 학파에서 민법(民法)을 배우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든 정의의 감각을 혼동시킬 것입니다.
똑같은 옷을 함께
협력하여 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사고(思考) 원리의 차이에서 드러난다면, 삶의 원리에 있어서 영역 주권의 필연성은 얼마나 더 강력하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피히테(Fichte)의 실례가 보여주듯이, 단지 사고의 원리만이 개입하는 한, 처음에 거부했던 것을 되돌아가는 것은 여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삶의 원리에 있어서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사실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더 강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적 원리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뿌리를 두는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의 등장은 세상 한가운데, 세상 역사의 중심점에서, 또한 세상 사고(思考)의 중심에서
하나의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이 살아있는 사람, 그리스도에게 질문하고, 단지 그의 권위있는 해석자들에게 질문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배웁니까? 나사렛의 랍비가 자신의 지식을 세상 현자들의 지식과 결합했다고 선언했습니까? 예루살렘(Jeruzalem)이나
아테네(Athene)에서의 대학원 수업이 당신을 점차 자연스럽게 그의 고상한 지식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사도들이 당신에게 말합니까?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이 랍비는 자신의 보석 같은 지혜가 지혜자들과 명철한 자들에게 감추어졌고, 오히려 젖먹이 아기들에게 계시되었다고 당신에게
각인시킵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 훈련받은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배운 학문과 이제 자신에게 심겨진 삶의 원리 사이에 아주 넓고, 깊고,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을 그은 후, 반복해서 한 원리의 사고 영역을 어리석음으로, 다른 원리의 삶의 영역을 지혜로 불러 서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신적 자의식이 전적으로 다른 뿌리에서 싹이 돋는다고 확실하게 선언한 것을 우리가 단 하나의 뿌리에서 함께 기를 수
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습니까? 신사 여러분, 우리는 그런 모험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한 원리를 갖고 시작하고, 따라서 어떤
고유한 것이 자신의 원리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고려해서, 우리의 원리와 우리 반대자들의 원리를 위해 우리는 사고 영역 전체에서 고유한 주권을
견지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자신들의 원리로부터, 자신들의 원리에 적합한 방식을 따라, 반짝거리기는 하지만 우리를 유혹하지 못하는 학문의
집을 세우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우리의 원리로부터, 우리 원리에 상응하는 방식을 따라 고유한 줄기가 자라 그 가지와 잎과 꽃이 자신의 고갱이의
수액(樹液)으로부터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반대자들이 자기기만이라고 선언한 것을 참된 것으로 발견했다고 다시금 주장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29:7하]는 잠언기자의 복창(復唱)을 그만 둘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어리석은 자들로 여겨지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그가 우리보다 지식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우리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로 확립된 것을 그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따라서 우리 영혼의 의식이 붙잡은
것을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다고 선언합니다. 객관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없고 주관적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 바로 여기에서 경계선이 그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지식은 지적 확신에 근거하고 우리의 지식은 단지 신앙에
기초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믿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당신 자신의
자아로부터 출발하든지, 혹은 당신의 이상(理想)을 확실히 붙들든지 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즉각적으로
자신 앞에 확립된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은 심지어 자신의 사고를 위한 출발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사고의 출발점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어떤 것을 학문적으로 탐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다른 사람들이 지은 건물 옆에 바깥 뜰, 창문들을 통한
전망, 우체부처럼 생각의 교류를 유지시키는 신문 외에 공통된 것 없이 건물을 짓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물론 인정하는 바, 사고의 투쟁이란
거듭해서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다름 아닌 출발점과 방향에 대해서는 결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출발점과 방향이
정해져서, 당신이 바르게 당신의 선을 긋는다면, 당신의 선의 모양이 그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것이며, 당신을 향해 제기된 모든 논쟁은 설득력을 잃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기적 사상가는 정당하게
원자론적 허식(虛飾)을 조롱하는데, 마치 성장하는 각 사람이 반드시 모든 체계들을 충분히 생각하고, 모든 고백들을 탐구하며,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도 이렇게 할 수 없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위해 이용 가능한 시간도 사고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어리석은 사람만이 자기 자신이 그것을 했거나 다른 사람이 했다고 혼자 공상할 수 있거나, 혹은 지식이 없는 자스스로 다른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언급된 모든 체계들의 견본은 단지 피상성을 키워주고, 사고하는 것을 파괴하며, 성품을 부패시키고 두뇌를 그와
같은 실질적인 작업에 부적당하게 만듭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당신의 건축 지식을 든든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집들을 대충 살피는 것이 아니라, 잘
지어진 집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주의깊게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학문은 “원리에서 분리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메마른 땅 위에 있는 물고기의 자유이며, 화분의 흙에서 뽑힌 꽃의 자유일 것입니다. 혹은 자신의 시골 마을에서
떠나 갑자기 낯선 거리나 해변에 놓여진 드렌트(Drent) 일용근로자의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고한 가정 질서 가운데
모든 가정 생활이 가장 번성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우리 자신의 집에서 확고한 생활 규칙을 엄격하게 그리고 혹독하게 지켜 나갑니다. 결국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온건한 자유는 다름 아닌 떠나고자 하는 자에게는 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은 당신 집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며, 또한 각
사람이 자신의 원리의 기초 위에 자유롭게 자신의 고유한 방식대로, 자신이 발견한 결과를 배내기 장식으로 삼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우리의 이 개별적 학문의 발전의 소원이 단지 신학만 아니라, 또한 모든 학문을 위한 것인지도 질문할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기독교 의학”과 “기독교 논리학”을 멸시한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미소를 참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대에
대한 우리의 답변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시가 마치 일그러졌다가 다시 본래 모습을 회복한 것처럼, 우리가 이 계시를
우리 노력의 출발점으로 고백하여, 단지 신학자로서 이 원천으로부터 이끌어내되, 더 나아가 의사와 판사, 그리고 언어학자로서는 이 수맥(水脈)을
비웃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작은 방으로 칸칸이 나누어져 독립된 전문지식에 걸맞은 학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사람들은 의과(醫科)를
말합니까? 의학이 위생상 도움을 주기 원하는 것은 병든 포유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판단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사람을 도덕적 존재요, 더 고상한 운명을 지닌 영혼과 육체요,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존재로 보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침묵할 것인지 알려줄 것인지, 해산하는 여인에게 마취를 추천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예방접종을 강요할 것인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것인지, 성미가 급한 청년에게 자기절제의 의무를 말할 것인지 방종에 내버려 둘 것인지,
말투스(Malthus)와 함께 어머니의 수태 능력을 저주할 것인지 성경과 더불어 축복할 것인지, 혹은 여러분이 정신병 환자를 심리적으로 지도할
것인지 신체적으로 마취시킬 것인지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간단히 말해서, 화장(火葬)을 좋게 말할 것인지, 생체해부를 무조건 허용할 것인지, 가장
끔찍스런 모든 의학적 검사 수단을 통해 권위를 업신여기고 인간 존엄성을 손상시킴으로써 사회에서 매독의 확산을 막을 것인지 말입니다.
법학(法學)에 대해 무엇을 말할까요? 사람을 발전하는 자연의 산물로 보느냐 선고 받은 죄인으로 보느냐, 법 자체를 기능적으로
발전된 자연적 기관으로 보느냐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내려온, 하나님 말씀에 매인 보석으로 보느냐에 따라 형법은 다른 목적을 취하고, 국제법은 다른
지침을 선택하지 않습니까? 이미 학문과 상관 없이 기독교적 양심이 지배적인 정치 경제학, 유행하는 상업 관습들, 그리고 약육강식의 사회적
관계들을 반대할 때, 그리고 시민 생활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역 주권”을 통해 지방분권으로의 복귀를 촉구할 때, 그리고 우리의
헌법에서 심지어 3대 1로 독립된 “기독교” 학교들이 등장했을 때, 이런 모순된 원리들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단 하나의 법학의 강단을 언급할 수
있습니까?
만일 우리 자연과학부가 엄격하게 측정과 측량에 한정된다면, 원리라는 쐐기가 최소한 그 대문을 뚫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합니까? 어떤 자연과학자가 가설 없이 실험합니까? 측정기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학문을 연마하면서,
자신이 보는 것을 주관적 렌즈를 통해 보지 않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동그라미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언제나 주관적 견해를 따라 점으로 그리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인쇄된 종이와 인쇄하는데 소비된 잉크 방울 가격을 계산하는 자가 당신이 출판한 책, 당신의 소책자, 당신의 노래모음집을
고상한 의미에서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아름다운 자수품의 가치가 사용된 명주실과 캔버스 가격으로 매겨질 수 있습니까? 더
좋게 표현하자면,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의 황홀한 회화(繪畵)처럼 모든 자연과학자의 눈앞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진실로 이 장엄한 예술 작품은
그림을 둘러싼 황금 액자, 그림 밑 캔버스, 그리고 그림에 사용된 물감에 의해 평가될 것입니다!
제가 문학에 대해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글 읽기를 배우는 것”과 단어들의 “어형 변화”는 메시아에 대한 찬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제가 더 나아가 여러분에게 헬라스(Hellas) 예술 궁전을 열거나 로마의 권력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면, 제가 그리스도의 영을 추방하기 위해
민족들의 영(靈)의 복귀를 부르거나, 아니면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 아래 두는 일은 인간적 평가와 신적 평가 모두에 따라 중요하지 않습니까?
셈족 언어의 연구는 제가 이스라엘을 절대적 계시의 유일한 민족으로 보는가, 아니면 기껏해야 천재적 경건을 지닌 백성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까? 철학이 건너편에서 “이상적 존재”를 추구하든 혹은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성육화”된 이상으로 고백하든 철학은 여전히
동일한 것입니까? 세계 역사가 십자가를 소크라테스(Socrates)의 독이 든 잔과 동일시하든 모든 역사의 중심점으로 보든 상관없이 세계 역사는
동일한 결말에 이르게 됩니까? 더 이상 언급할 것도 없이, 우리 조국의 역사가 프라인(Fruin)이나 나이엔스(Nuyens), 혹은 흐룬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 -아, 그가 여전히 살아있었더라면! -에 의해 그 영웅적 아름다움 가운데 펼쳐졌던 것처럼,
청년들의 가슴에 똑같은 불을 지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달리 될 수 있겠습니까? 신사 여러분? 타락한 죄인 혹은 발전하는
자연존재의 이중적 모습을 지닌 인간은 모든 학과, 모든 학문, 그리고 모든 연구자에게 “생각하는 주체”로서 혹은 “생각하도록 만드는 객체”로서
돌아옵니다.
아, 우리의 사고 세계가운데 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들로부터 물샐틈없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만 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외침을
들었으며, 오로지 이 외침에 응답하여 우리의 힘에 버거운 이 사역을 담당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형제들이 비극적 무능을 한탄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자신들의 원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무방비 상태가 되어 자신들의 영광스런 원리에 비례하는
힘으로 그 원리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한숨소리를 들었는데, 그들은 부끄러운 자기비하 가운데,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목자들이 돌보며, 선지자들이 영감을 주도록 기도하기를 다시 배웠습니다. 우리가 깨달은 바, 그리스도의 영광은 이와 같이 멸시와 모욕 아래
짓밟히도록 허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우리 영혼의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므로 반드시 그의 이름으로 다시
건설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작은 힘을 보거나, 상대방의 막강한 힘을 보거나, 그러한 앞뒤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시도를 보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불은 우리의 뼈 속에서 계속 타올랐습니다. 우리보다 강하신 분은 우리를 재촉하며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전진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우리 형제들 중 일부는 아직 우리의 건물을 지을 단계가 아니라고 충고하면서 인본주의와 더불어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무언의 수치를 일으키는 매우 고통스런 원인이었으나, 단지 내적인 욕구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그런 사람들의 망설임은 우리의 삶의 원리의 미래에 대한 더욱 심각한 위협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작은 학교는 태어났고, 스스로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러운 대학의 이름으로 등장했습니다. 재정이 빈약하고, 학문적
인적 자원이 매우 미약하며, 사람들의 호의를 받기는커녕 많은 지원이 끊겼습니다. 이제 이 학교의 가는 길이 어떠하며, 그 생명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오, 학교의 미래와 연관된 수천 가지의 질문들이 이 마음 속에 휘몰아치는 것보다 더 강하게 여러분의 의심과 불안 속에 파고들 수
없다니! 단지 우리의 거룩한 원리를 거듭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삼켰던 모든 파도가 지난 후 우리는 다시 용감하게 피곤한 머리를 물 위로
들었습니다. 만일 이 일이 야곱의 전능자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과장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학교의 설립을 감행하는 것은 거대하다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 학자들의 세계, 한 세기 전체, 엄청난 매혹의 세기에
거슬러 진입하여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의식(自意識)이 허용하는 한, 우리의 사람들, 우리의 힘, 그리고 우리의 학문적
중요성을 자유로이 경멸하십시오.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칼빈주의적 신조(credo)는 당신이
그렇게 하는데 전적인 권한을 부여합니다. 저는 단지 이 한 가지만을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비록 당신이 우리의 가장 지독한 대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감동시킨 열정에 대해서만큼은 존경의 찬사를 거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시금 먼지를 털어낸 고백은 일찍이 짓밟힌 나라의
영혼의 외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권위 앞에 머리를 숙이는 성경은 절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일찍이 여러분 자신의 세대의 슬픈
자들을 위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기관에서 그 이름을 존경하는 그리스도, 그는 여러분 자신의 선조들의
영감자(Bezieler), 택함받은 자, 경배받는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서재에서 기록되고 시련의 용광로에서 메아리쳤던 것에 따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신조(credo)에 따라 성경이란 본질적으로 끝장이 났고 기독교란 정복을 당한 하나의 입장이라고 가정한다 할지라도, 저는
여전히 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독교가 여러분이 보기에도 역사적으로 수치스럽게 무너지고 불명예스럽게 쓰러지기엔 너무도 위압적이고,
너무도 장엄하며, 너무도 거룩한 현상이 아니었습니까? 혹은 노블레스 오빌리주(Noblesse oblige)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골고다(Golgotha)에서 메어 온 깃발이, 가장 극심한 시련이 아직 남아있는 한, 단 하나의 화살이 아직 화살통에 남아있는 한,
그리고 골고다를 통해 왕위에 오르신 분의 경호원이 얼마나 적든 상관 없이 이 상속된 나라에 아직 살아있는 한, 과연 원수의 손아귀에 떨어질 수
있습니까?
신사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 그리고 이것으로 저는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우리 영혼 속에 울려 펴졌습니다. “결코”라는 말에서 이 기관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코”라는
말에 의지하여, 저는 모든 애국자의 심장이 더 높은 원리에 대한 충성의 맹세로서 응답의 메아리를 요청하며, 그 응답이 ‘아멘’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이 예식을 마치기 전에, 이 대강당에 함께 모인 다양한 그룹들에게 드릴 말씀이 아직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 허락하신다면, 먼저 왕을 보필하는 장관, 각하에게 친히 참석해 주신 영광에 대해 정중하게 감사드리고, 이 나라 정부의 너그러운 은혜
가운데 개교된 기관을 겸손히 추천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76년에 우리의 존경하는 국왕께서 그의 법에 이미 48년에 승인된, 고등 교육의 자유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쓰셨습니다. 국왕께서, 그리고 각하께서 만족하게 여기셔서 이미 4년 후에 그 법이 필요 없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국민들은
이 자유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그 법을 변호했던 국왕 폐하의 장관께서 1876년 3월 11일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만일 암스테르담(Amsterdam)이 자신의 시립대학을 위해 ‘공적 효력을 지닌(cum effetu civili)’ 박사학위
수여권을 획득한다면, 다른 도시들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문제가 반드시 제기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동일한 권리를
허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저에게 허락하신다면, 당신께 대한 저의 존경을 기도함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면,
이 말로 표현된 것보다 더욱 공명정대하게 당신께서 왕실 자문위원들 가운데 지도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 도시의 고귀한 시장,
시의원, 그리고 비서관 여러분, 당신들께도 저의 존경을 표합니다. 특히 이 도시의 수장(首長)이신 당신! 시장으로서의 전직 교수를 환영하는 것은
가장 무모한 것을 감히 바라지 않는 고등교육 기관 개교자에게 매우 드문 특권입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사서 당신의 선임자에게 주어졌던 옛 팔라스
아테네(Pallas Athene) 옆에 이제 미네르바(Minerva)가 값없이 돈 없이 한 어린 딸을 얻게 된 것을, 우리가 당신을 기꺼이
그렇게 부르듯이 ‘시민의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스런 암스테르담을 위해 환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역사적 암스테르담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자연스레 이렇게 역사적인 기관을 위한 가장 적합한 도시였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일상적 운영이 더 나아가 이미 여기서도 등장하고, 아주
놀랍게 보여주었던 우리의 성향을 부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도시의 대학 교수, 학장, 그리고 비서관! 옛날부터
문학계(respublicalitterarum)에서 서열을 가리는 투쟁, 학과들 안에서가 아니라 학교들 사이에서의 서열투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 작고 어린 학교의 학장으로서 어떻게 제가 여러분에게 더 오래된 학교의 탁월한 지도자로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 대학교”를
부르는 외침이 수 년 전에 이미 여러분의 교수회의실에서도 울려퍼졌던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우리의 몰(Moll)이 언젠가 동일한 암스테르담에서
시립대학과 나란히 우리가 선택한 기초 위에 설립되리라고 일찍이 추측했었습니까? 그리고 질투를 일으키지 않고 설립된다고? 아,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도 작습니다. 여러분의 의도가 더 지역적이면 지역적일수록, 우리의 의도는 조국 전체에까지 더욱 확장되는 것입니다. 고전적으로 형성된
것의 영광이 우리가 바라는 이해를 보존하고, 또한 다양한 원리에서 비롯된 삶에 있어서도, 진리의 의미에 대한 사랑, 학문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공유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저는 국회, 연합회, 그리고 신문사의 사회적 생활의 해석자들에게 정부와 정부의 협력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국회의원 여러분, 여러분의 지칠줄 모르는 열심으로 노력한 결과가 이제 설립되는 학교입니다. 우리 국민의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나선 여러분은 특히 교육 부분에서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힘찬 말은 학술원들(Academien)의 자유를 위해서도
쉴새없이 울려 퍼졌습니다. 여러분의 국민의회는 지도자이신 하나님 아들을 의지하여 이제 이미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삶에서 현저한 전환점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관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국민은 자신들의 심장의 피로 여러분의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여러분의 국민이 앉은 한 가운데, 수많은 신실함, 수많은 헌신에 대해 모든 시선이 전하는 감사의 존경 가운데 여러분에게 의미심장한 보답을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기독교 연합회 운영위원 여러분,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우리 기관은 여러분과 함께 나라의 비기독교화를 막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으로서 여러분을 이 생일 축하에 초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예절, 더 나아가 사랑을 보여주신 여러분의 참석을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 투쟁을 동일하게 바라보지 않을지라도, 동일한 십자가 깃발 아래에서 모두가 메시아께 전쟁의 맹세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 우리 국민, 그리고 이 국민 가운데 위로자 그리스도(Christus Consolator)를 각 사람이 자신의
방식대로, 겸손과 사랑으로 봉사하고, 우리의 명예로운 투쟁이 그의 이름을 위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언론계
대표자들이여! 하나의 권세가 여러분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옛 학술원(學術院)들이 알지 못했지만, 어린 대학교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고려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또한 저의 전통들을 떠나지 않고, 따라서 저는 흐룬 판 프린스터러(Groen vanPrinsterer)의
제자로서 또한 신문을 나라의 힘으로 존경합니다. 흐룬(Groen)이 스스로 여러분의 횡렬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여 처음으로 틀에 박힌 관습을
깨뜨렸다면, 저는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대열에 진입하는 것을 저의 영광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학교의
학장으로서, 하지만 또한 옛 전우로서, 저는 새로 설립된 기관을 위해 여러분의 영예로운 기사(記事)의 거수경례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 작은 영역으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이 기관에 보다 개인적으로 연관된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형제 사랑의 감사를
드립니다. 존경하는 형제들, 이 학교의 지도자들이여! 또한 학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존중하셨던 학문을 위하여, 살고, 열심을 내고, 헌신하는
것은 예로부터 암스테르담상인 도시의 영광이었습니다. 이제 지방 지도자들과 지방 비서관들로서 전국 출신의 형제들과 연합하여 그러한 학교의 통치
가운데 암스테르담의 이런 사회적 상태를 본다는 것은 위로를 주고, 감명을 주며, 기분을 돋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국민의
친절함이 여러분의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과업을 가볍게 해 주시고, 교사와 학장으로서 저는 여러분의 신뢰가 부끄럽게 되지 않으며, 또한 여러분의
선택이 후회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을 섬기길 바랍니다!
존경하는 형제들, 이사회 위원들이여! 동일한 기도로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학자들로서 도르트레흐트(Dordrecht)의 설립헌장을 지닌 학교를 학문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것을 갈망하고, 고통을 받는 것이 박사학위증보다 더 나은 것이며, 용기와 도덕적 헌신의 고귀한
특징으로, 이에 대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이 학교가 여러분을 존경하며, 우리 국민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을 위한 유용한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큰 은혜를 통한 기도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모든 학문 역시 기도의 열매입니다. 존경하는 동료들, 사랑스런
형제들이여! 여러분과 더불어 이 건물을 위한 첫 돌을 놓는 은혜가 저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이것은 주로 우리의 노동에 부응하는데, 왜냐하면 이
노동의 열매를 위해 이 밭이 경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오, 여러분은 우리가 수용한 엄청나게 힘든 과업을 생각할 때 때때로 나와 함께 놀라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뒤로 물러나기를 원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도 더 높은 의무에 대한 충동,
본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단 한 가지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학과들의 흑사병인 서열투쟁의 위험은 우리들 사이에서 영구히
단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주관적 의도들은 객관적인, 역사적인, 권세를 덧입은, 공식적으로 선언된 말의 위엄 가운데 포로가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이곳에 오신 존경하는 신사 여러분, 형제들이여! 저는 우리 기관 전체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놀라운 형제간의 신뢰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스코틀랜드, 독일, 심지어 미국으로부터 동감의 표시를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찍이 모든 개혁파 국가들이
참석했던 도르트레흐트(Dordrecht)를 생각나게 합니다! 개혁파 고백은 학문처럼 국가적 경계선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렇게 될 것입니다.
- 우리 가운데 와서 환영하고 모국으로 향하는 길에 여러분의 형제들을 위하여 이곳에서 드리는 행운의 소원, 평화의 인사, 축복의 기도를 가져
가시길 바랍니다!
귀하고 학식이 많으신 신사 여러분, 말씀의 봉사자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또한 여러분이 여기 아주 넓은 대열에
앉아 계신 것은 축제일의 기쁨을 적지 않게 증진시켜 줍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교회에 속한(van) 사람도 아니요 교회를 위한(voor)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학문적 삶은 우리로 하여금 고유한 주권을 지닌 한 영역을 형성하고 따라서 독립적인 삶을 형성케 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순수한 교회들로부터 그리고 다시 이 땅의 교회들을 순수하게 만들게 될지 결정은 우리가 아니라 교회의 왕에게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보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장님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러분의 신분을 높이 존경하고, 여러분의 용기가 우리를
상쾌하게 하는 것을 고백하며, 여러분의 공적인 호의를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결국 여러분 또한 신학자들이며, 대중의
지도자들이며,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자들로서 우리를 도와 봉사해 주십시오. 국민의 지도자들로서 여러분의
추천으로 도와주시고, 제사장적 기도자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이 기관을 위한 기도로 도와 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
기관을 위한 설립자들, 회원들, 기부자들, 지역구(地域區) 대표들로서 여러분이 자신들의 황금, 시간, 노력을 바치려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존재는 여러분의 손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가는 여정에 필요한 소요경비를 보게될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성장 가능성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에 도달하기엔 아직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 때문입니다. 교수들의 숫자가 최소한 반드시 세 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과 헌신의
노력도 반드시 세 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학교의 세목에 따라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는 완성될 것입니다. 진실로, 이 희망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대담무쌍하게 비치든지 간에, 우리는 감히
그렇게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것 때문에, 이미 수많은 형제들이 우리를 놀라게 한 무한한 신뢰 때문에, 여성의 눈에서 반짝이는
이 거룩한 사역에 대한 열심 또한 결코 작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한 가지 더! 공동 설립자로서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 계신 한 분을 보고
계시는데, 흐룬(Groen)의 소중한 친구에게 저의 마지막 말씀을 드립니다. 통찰력 있는 눈과 언제나 친절한 눈을 지닌 존경스런 백발의 노인,
고귀한 엘라우트(Elout), 당신을 의미합니다. 역사의 한 장(章)은 당신의 짧은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섬긴 왕실 귀족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지쳐있으나, 당신의 머리 위를 휩쓸고 지나지 않은 폭풍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에 참석하길
원하셨습니다. 당신의 기부금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아버지 같은 축복의 말씀을 일러주시고, 만일 이 기관이 계획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를 축복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당신이 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최소한
공개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 개혁파 국민이 이 땅의 위대함에서 단순한 시민으로 내려가는 이러한 형제다움을 존중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 역사적인 국민이, 당신과 같이, 이미 우리 앞서 무덤에 내려간 두 세대를 상기시키는 역사적 인물들에게
애착을 느끼는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게다가 성경과 함께 성장하고 이 성경과 함께 죽기를 원하는 우리 국민이 어떻게 거룩한 성경말씀에 대한
겸손하고 신실한 고백 가운데 당신의 지위, 당신의 삶의 지혜, 당신의 연수를 지닌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즐거워하는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여러분의 기도로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끝났으므로, 저는 또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저의 조용한 끝맺음의 말은 이제 전능자에 대한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의 근본이요 모든 참된 지식의
원천이시며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가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떠나 헤매는 당신의 피조물은 영혼의 어두움 외에,
침체 외에, 속박 외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나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께 가까이 나아가며, 당신의 생명 속에 우리를 담그고, 빛이 우리를
둘러싸고, 힘이 우리의 정맥 속에 고동치고, 신앙의 자유가 복된 환희 가운데 펼쳐집니다.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영원하신 주재여, 은혜로 이
기관을 내려다 보아 주십시오. 이 기관의 황금, 능력, 그 모든 지혜가 당신께로부터 나오기를 빕니다. 당신의 거룩한 말씀보다 결코 못한 것,
결코 다른 것으로 맹세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심장을 시험하시고, 오, 또한 우리 나라의 재판장이며 배움의 학교들을
판단하시는 심판자시여, 만일 이 기관이 언젠가 당신의 가장 부드러운 사랑스런 아들의 십자가 안에 있는 이 주권적인, 자유롭고 능한 은혜를
자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도하거나, 언젠가 다른 것을 원한다면, 당신 자신이 이 기관의 벽들을 무너뜨리시고, 당신의 면전에서 그것들을
파멸시키소서! 주여, 주 하나님이여! 우리의 모든 도움이 당신의 이름 안에, 오로지 당신의 이름 안에만 있게 하소서! 아멘.
이것으로써 나는 이 예식을 마치고 자유대학교가 개교됨을 선언합니다!
==자료제공 리폼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