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의 탐욕이 전염되다
민수기 11:4~9
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이스라엘의 원망 =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 오게 되어 있습니다.
원망 자체도 문제인데, 마치 1+1처럼 따라붙는 악한 말이 더 큰 문제입니다.
원망이 전염성은 얼마나 강하냐 하면 에볼라 바이러스처럼 강합니다.
4절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섞여 사는 다른 인종] = 출 12:38 [출애굽 때 함께 나온 중다한 잡족]들을 말합니다.
[섞여 사는] = 히브리어로 [아랍]입니다.
다니엘이 보았던 신상의 모습(금 은 동 철 흙)이 섞여 있는데 이것이 [아랍]입니다.
섞여 사는 다른 인종으로 시작 된 원망이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으로 전이됩니다.
이들의 원망은 만나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1년 동안 만나만 먹었으니 원망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 이들은 펙트만 얘기한 것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탐욕을 품으니] = 바이러스입니다. - 이것은 말씀으로만 잡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만희집단의 사람이 왔어도 말씀으로만 세워져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으면 매번 말씀을 전할 때마다 다른 말을 하게 되고, 성도들은 말씀의 중심이 없어짐으로 헷갈리고, 문제는 심각해지며, 이단에게 홀딱 넘어가게 됩니다.
탐욕 = 바이러스인데, 이들이 거짓말과 사실을 섞어서 원망을 합니다.
5~6절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여기에서 최고의 거짓말은 무엇일까요?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 =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은 값없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 정작 값없이 먹고 있는 것은 만나인데..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의 말이 다 거짓이 아니라 사실과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의 말도 다 거짓입니까? 아니면 사실도 섞여 있습니까? - 섞여 있습니다.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믿게 하는 것에는 100% 거짓말로는 안 됩니다.
또 100% 진실도 안 됩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섞여 있는 말은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100% 사실이죠? - 불신자는 안 믿어짐
100% 사실에는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집니다. -
[값없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값없이] 주시는 것은 모두 사람의 생명과 직결 된다는 사실입니다.
공기 물 흙 산 강 바다 태양 바람 등.. 을 누리면서, 마치 내 것인 양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값없이]라고 말한 부분은 사실은 400년간 임금도 없이 노예로서 먹여준 것이요, 종 값입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출애굽 때 금 은 보석 패물로 대가를 받아서 나옵니다.
값없이 = 은혜라는 단어로 쓰입니다.
일상적인 은혜, 보편적인 은혜가 싫어지고, 특별한 것을 원할 때 원망이 되고, 욕심이 생기는 삶의 비상상황이 됩니다.
5절은 사실입니다.
4절은 거짓과 사실이 섞여 있습니다.
6절에도 거짓말(불신)이 있습니다.
6절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 그들이 기력이 정말 다했을까요?
만나만 먹었어도 지금 현대인들이 필요한 영양이 골고루 주어졌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메추라기는 이때만 주셨을까요? 매번 주셨을까요?
성경에 안 나와 있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면 안 주신 것으로 봅니다.
메추라기를 한 달 동안 코에서 냄새가 밸 정도로 먹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 모세도 설마? 계산
이들이 욕심은 그럼에도 32절에 보면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고 증거 합니다.
잡아서 두고두고 먹겠다는 욕심입니다.
[기력이 다했다] = 앞에서 말한 생선, 부추, 파, 마늘 등 자신들의 식용과 원기를 돋굴만한 음식을 오래도록 먹지 못했기 때문에 몸이 약해졌으며 반복되는 색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 그들이 약해진 것은 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정신 상태였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고기를 거부하고 채소만 먹었어도..
[기력]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불어 넣으셨던 생기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근원이며, 말씀의 능력인데, 말씀은 뒤로하고 욕심에 눈 가리니 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가면 [만나] = 오병이어, 생명의 떡으로 연결이 됩니다.
지금 하늘의 양식이 내리고 있음에도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중요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말씀 대신 다른 것이 들어옵니다.
사실인 것 같은, 인리 있는 이야기, 세상의 좋은 것 등 그래서 객관적으로 보자고 합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보아야지 객관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8절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만나만 먹었어도 40년 동안 영양실조 걸릴 일이 없고, 생선, 부추, 파, 마늘 등을 먹지 못해도 기력이 쇠할 일이 없습니다.
9절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는 우리의 형편과 믿음의 상태에 상관없이, 보편적인 은혜로 주시는 이슬이 내릴 때 여전히 생명의 은혜인 만나를 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제가 실수하여 부족하고, 잘못 전했어도(전하는 자는 책망 받을지언정...),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에게는 여전히 심령에 젖어드는 생명의 말씀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9절 까지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모세와 같이, 귀한 자리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