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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 지 씨(鳳山 智 氏)를 찾아서 - 지 동 빈 (智 東 彬)
서기 1957년 11월 늦은 가을 싸늘한 날씨에 서울역에서 * 1)경의선(京義線)을 따라 문산행(汶山行) 기차에 몸을 기대어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40여분이 지나 금촌역(金村驛)에 완행열차는 꽤 많은 시골사람을 토해낸다, 역사(驛舍)를 뒤로하고 6,25전란으로 피란민(避難民)들의 안식처(安息處)인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비탈진 길에 휜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휘적휘적 앞서가시는 아버님(智位泰=興哲)을 따라 학생복차림의 나는 소풍(逍風)가는 기분이랄까 아버님의 말씀에 마지못해 따라나선 서먹함일까?
싸늘한 날씨에 웅크리고 먼 하늘만 바라보며 느릿느릿 걷노라니
“부지런히 따라 오렴!”
하시며 뒤돌아보시는 아버님의 얼굴에서 <그렇게 오기 싫으냐?> 하시는듯하여 엉겁결에 뛰어 따라서 파주군 아동면 금능리(坡州郡 衙洞面 錦陵里) 야산위로 오르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멍석을 깔고 제상(祭床)을 설치하고 * 2)진설(陳設)에 한참이었다.
아버님의 수인사(修人事)가 끝난 후 여러 종친(宗親)들의 자문(諮問)에 답하시는 모습에서 힘이 넘쳐나는 것을 보고 * 3)시향(時享)의 의미(意味)가 희미하나마 마음을 스쳐갔고 봉산지씨(鳳山智氏) 장단지역(長湍地域)의 구심점(求心點)이 되는 모임의 한 단면(斷面)이며 이는 지속적(持續的)으로 속행(續行)돼야 되겠다고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특히 돌아가신 조상(祖上)님들의 가르침을 받는 광범위(廣範圍)의 가정교육(家庭敎育)임을 확인(確認)할 수 있었으며 금촌(金村)으로 가고 서울 집으로 오는 중에 아버님이 말씀하신 조상님들의 화려(華麗)하거나 또는 전쟁(戰爭)과 기아선상(飢餓線上)에서도 부단(不斷)한 노력(努力)을 하셨다는 말씀을 일부나마 듣게 됐다.
하지만 당시(當時)로서는 약간 허황(虛荒)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지나치듯이 들었고 여러 종친(宗親)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어리둥절 할뿐 누가누구인지 행열(行列)의 선후를 분간할 수도 없는데 어르신들은 잘 아는 듯 인사를 나누고 나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봉산지씨(鳳山智氏) 장단파인가 보다 하는 애매(曖昧)한 감정으로 여러 어르신들 뒤 한 쪽에서 장단국민학교 시절 같이 학교 다니던 몇몇 집안 친구들과 떠들고만 있었다.
* 1)경의선(京義線); 경성(현 서울)과 평안북도 신의주까지의 철도노선.
* 2)진설(陳設); 제사나 잔치 때 음식을 상위에 올려 차려놓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제사의 경우 각 집안마다 음식을 상위에
놓는 위치가 각각 다르나 봉산 지씨 집안에는 고려시대의 진설 례(陳設禮)를 따르고 있다.
* 3)시향(時享); 해마다 음력 10월에 조상의 산소에 제사지내는 것으로 시사(時祀), 시제(時祭)라고도하며 직계손이 모여
지내는 경우와 종중들이 모여 지내는 경우가 있는데 봉산 지 씨는 시조부터 12세까지를 대종회에서 모시고 13
세부터는 각 지역 종친회에서 모신다.
단지 시제(時祭)를 모시는 동안 싸늘한 날씨에 임진강(臨陣江) 주변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뒤편에 서서, * 4)산신제(山神祭)에 고축(告祝)을 하고 시향본제(時享本祭)에도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모르는 고축(告祝) 후 어느 분에 겐지도 모르는데“재-배-애!”(再拜)소리에 연신 절만 하면서 또래들과 무슨 얘기를 할라치면
“제향 (祭享)을 모시는데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 5)읍(揖)해야 된다.”
하시는 어른들 말씀 때문에 추위에 떨기만 했던 기억(記憶)이 새롭다.
한참을 * 6)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의 순으로 “재-배-애”하면 또 절하고 몇 차례를 절하며 진행(進行)하는 동안 시간의 지루함과 따분함에 몸이 비비꼬이는 것 같은 불만을 삭이는 동안 점심시간이 한참지난 다음에야 제행(祭行)이 끝났다.
어느 조그마한 방에서 따끈한 밥에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고기 국을 한 그릇 푸짐하게 먹은 후에 온몸의 한기(寒氣)가 가시면서 후끈한 몸에 밖으로 나와 몇몇 친구들과 그간의 학교생활 등을 애기하며 아버님이 빨리 나오시어 어서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봉산(鳳山) 지(智)씨의 조상님들은 과연 어떤 일들을 하시었으며 본인들의 영달(榮達)은 물론 후손들에게 훌륭한 인재가 되도록 수많은 노력을 하셨음을 짐작케 되었다.
서기 1950년 6.25 * 7)동족상잔(同族相殘)의 유혈충돌(流血衝突)이 4년간을 우리들 주변을 휩쓸고 지나간 후인 서기 1957년부터 59년까지 3년간을 아버님인 지흥철(智興哲=위태[位泰])씨께서 6,25 동란(動亂) 후에 식생활의 위기(危機)속에서도 서울의 효자동(孝子洞), 마포(麻浦), 영등포(永登浦), 경기도의 금촌(金村), 문산(汶山), 파주(坡州), 안양(安養), 인천(仁川), 수원(水原)은 고사하고 도로망의 미비(未備)와 교통수단(交通手段)이라고는 하루 두 편밖에 없어 왕복(往復) 일주일 이상이 소요(所要)되는 강원도(江原道) 평창(平昌), 충청북도(忠淸北道) 제천(堤川)을 수없이 다니시었다.
서기 1959년 * 8)기해보(己亥譜)를 발간(發刊)하는 어려운 과정(過程)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 4)산신제(山神祭); 장례를 모실 때, 시향을 모실 때, 조상 묘를 찾아 뵐 때에 묘가 있는 산에 산신에게 제를 지냄.
* 5)읍(揖); 웃어른 앞, 제사를 모실 때 두 손을 마주잡고 얼굴을 들고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하는 예법의 하나
* 6)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사시제(四時祭), 기제(忌祭) 등을 지낼 때 초헌관은 제주(祭主)로서 처음
조상님께 술을 올리고, 아헌관은 두번째 잔을 올리는 사람이고, 종헌관은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사람인데 이
때 제주의 부인(婦人)이 아헌관이 되도 되고, 참석자 중에서 행열(行烈)이 높거나 계열별 연장자의 순으로
정한다.
* 7)동족상잔(同族相殘); 1950년 6월 25일 미명을 기하여 북한 인민군이 남한을 침공하여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유엔군은 물론 우리 군인과 민간인 3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동족간의 전쟁
* 8)기해보(己亥譜); 봉산 지 씨의 네 번째 족보로 1959년 기해년에 1권으로 발간된 보서로서 휴전선 이북 북한에 거주하는 봉산
지씨의 후손들은 통행을 할 수 없어 새로 추가기록을 할 수 없었음.
이때 나의 뿌리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같게 되었으나 20여년 후인 1978년
정주영(鄭周永) 현대(現代)구릅 회장(會長)이 뿌리를 찾기 위해 4층 건물을 울산(蔚山)에 짓고 보서연구(譜書硏究)와 역사(歷史)연구를 위한 직원(職員)을 두어 철저히 뿌리를 찾는다는 일간신문(日刊新聞)의 기사를 읽고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궁금증이 내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나보다.
서기 1981년 서울종로구 명륜동(明倫洞)에 이병철(李炳喆) 삼성구릅 회장 가계의 뿌리를 찾는 5층 건물에 4, 5층에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회(大宗會) 사무실을 방문(訪問)하고는 나의 뿌리에 대한 깊은 사색(思索)에 잠기게 되었으며 봉산 지 씨(鳳山智氏)의 힘이 이렇게 작은가? 나는 과연 어디에 서있는가? 어떤 것부터 찾아야 하는가? 이런 마음의 혼란 속에서 웃어른들을 몹시 원망(怨望)하기도 했고 나의 무능(無能)을 한탄(恨歎)하기도 하면서 보서(譜書)를 뒤적이는 나의 작은 노력의 시발점(始發點)이 되기에 이르렀다,
성(姓)은 언제부터 사용하였으며 언제부터 지(智) 씨 성을 갖게 되었을 까?
서기 1981년 초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족보(族譜)를 넘기기 시작하면서 시조(始祖)님으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30년이 한 세대(世代)라는데 우리 봉산 지 씨는 한 세대차이가무려 37년으로 너무나 큰 차이가 나서 의문(疑問)이 더욱 나를 괴롭힌다,
또한 부자간(父子間)의 나이 차이(差異)가 많거나 적은 분들, 생, 졸년월일(生卒年月日) 등 미기재(未記載) 사항이 많음을 알게 되면서 의문(疑問)을 더하게 되었고 특히 2세분의 휘함실전(諱涵失傳)에서는 커다란 회의(懷疑)를 느끼게 되었으나 회사생활(會社生活)에 바쁘다는 핑계로 세월(歲月)을 보냈다.
서기 1983년 말경에야 수 많은 역사서(歷史書)들 중에서 * 9)고려사(高麗史)를 손에 잡게 되면서 우리 봉산지씨(鳳山智氏)들의 화려(華麗)하고 때로는 비참(悲慘)하리만치 치열(熾烈)한 삶을 살아간 조상(祖上)님들의 생활상(生活相)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봉산지씨(鳳山智氏)의 등장(登場)은 고려시대 이전에도 있었으리라는 막연(漠然)한 추론(推論)에 빠져가고 있어 * 10)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의 내용의 차이(差異)를 비교(比較)하면서 의문(疑問)이 점차(漸次) 해소(解消)되어 가는 중에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라시대(新羅時代)에도 지(智) 씨로 보이는 몇 몇 사람이 등장(登場)함을 알게 된다.
* 9)고려사(高麗史); 139권 100책으로 고려 34왕 475년간의 정사. 이조 태조 때 정도전(政道傳), 정총(鄭摠)이 고려역대실
록 (高麗歷代實錄)과 민지(閔漬)의 강목(綱目),이재현(李齋賢)의 사략(史略),이색(李穡)의 금경록
(金鏡錄)을 참조 작성하기 시작하여 태종을 거쳐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김종서(金宗瑞) 등이 개찬(改撰)
하여 1451년 문종 1년에 완성.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으로 4항목으로
분류 편찬 1908년 일본 국서간행회(國書刊行會)에서 3권 2,211항 간행, 1955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
(東方學硏究所)에서 3권 영인본 2,789항 발간.1961년 색인판 1,094항 출판. 기전체(紀傳體).
* 10)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권 1452년 춘추관에서 완성. 고려사보다 간결하나 고려사에 없는 부문도 수록됨 1932년
고려사 편수회에서 조선사료 총간 제1로 간행, 1938년 보강하여 고려사절요 보간(保刊)으로 영인 출
판. 1959년 고전간행회편으로 동국문화사에서 영인 출판한 고려 역사서.
* 11)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한 * 12)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13)
삼국사기(三國史記), * 14)삼국유사(三國遺事), * 15)신라 일천년사(新羅一千年史), * 16)한국계행보(韓國系行補), * 17)조선왕조실록(王朝實錄)등을 읽어보게 되는 오랜 시간 이후에 조금씩 봉산 지 씨(鳳山智氏) 지자채자문자(智字蔡字文字) 시조로부터 12세 지언귀(智彦貴), 지을귀(智乙貴), 지중귀(智重貴) 세분에 이르기까지의 기본적(基本的)인 토대(土臺)를 적게나마 확인(確認)하고 이를 발취(拔取)하게 되었다.
13세부터는 종중(宗中) 후손(後孫)들의 보관자료(保管資料)들이 있으려니 했으나 장단지역(長湍地域)의 경우 거주지인 장단군 장단면 노상리(長湍郡 長湍面 蘆上里)가 6,25사변으로 완전전소(完全全燒) 되는 참담(慘憺)한 지경을 당하여 족보(族譜),가승(家承)은 물론이고 각종 토지 건물의 등기문서(登記文書) 조차도 확보할 수없는 상태로 몸만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戰爭)과 피란(避亂)의 와중(渦中)에서도 족보(族譜)와 가승(家乘)을 가지고 나온 몇 사람을 알게 되어 참으로 많은 참고가 되었으나 부족함이 너무 많아 앞으로 더욱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考證)과 각 지역 종중의 자료를 더 수집(收集)하여 알아보기로 하고 그때까지 수집된 각종자료와 역사의 고증자료(考證資料)를 근거로 작은 책을 만들어 서기 1993년 제1차 [봉산 지 씨 자료탐구(鳳山智氏資料探求)]를 기본한자(基本漢字)를 사용하여 풀이해 발표(發表)하였다.
요즘 한자(漢字)를 안 배운 젊은 세대들도 알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원하는 종중들이 있어 한글에 한자(漢字)를 병기(倂記)하고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부분의 원문(原文)을 게재(揭載)하고 한자음(漢字音)을 달고 해석을 달아 제2차로 낮은 직책(職責)에라도 근무한 분들을 고문헌(古文獻)들, 족보(타성 족보 일부 포함), 가승(家乘), 구전의 기재사항(記載事項) 등을 우선 취합(聚合)하여 [봉산 지 씨 인명집(鳳山 智 氏 人名集)]으로 1900년 이전에 태어나신 분들을 우선 취합하고자 한다.
* 11)동국통감(東國通鑑); 56권 26책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편년사서(編年史書).1484년(성종15년)서거정(徐居正), 정
효항(鄭孝恒)등이 편찬. 신라초기부터 고려 공양왕까지 1400년 동안의 국토의 이합, 성쇠, 명교
(明敎), 절의, 난적(亂賊), 간유(奸諛),등의 사적을 쓰고 따로 단군, 기자, 위만의 3조선과 한사
군(漢四郡), 이부(二府), 삼한(三韓)등을 외기로 책머리에 실었다. 일제 때 조선고서간행회본,
광문회본의 두 종류가 있음.
* 12)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250권 50책 우리나라 상고로부터 대한제국까지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책. 1770년(영조
46년) 홍봉한(洪鳳漢) 등이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
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糴),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등의 13고로 분
류 100권 편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 함. 1782년(정조 6년) 이만운(李萬運)이 9년간 사
저(私邸)에 사자관(寫字官)을 두고 146권으로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라 함. 1903년
박용대등 30여명이 찬집청(撰集廳)을 두고 5년간 재계(宰系),교빙(交騁),예문(藝文) 3고를 추가,
13고를 보완 16고 250권 완간. 1957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 국판 3,051면으로 영인함.
* 13)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 사마천의 사기를 본 따 쓴 현존한 삼국. 신라 통일기를 통한 유일 최고의 정사. 고려 인종
때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서를 인용 편찬. 조선 태조 2년(1393년)부터 2년간 진의귀(陳義貴),
김거두(金居斗)가 개간, 1512년(중종7년) 이계복(李繼福)이 본기[신라 본기(1-12권), 고구려본기
(13-22권), 백제본기(23-28권)],연표(29-31권), 지류(32-40권), 열전(41-50권)으로 다시 개간,
* 14)삼국유사(三國遺事); 5권 인본 고려 충열왕 때의 명승 보각국사 일연(一然) 지음. 1512년 개간본이 전해지며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년표를 싣고 기이(紀異), 흥법(興法),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의 항목 중 신이영묘(神異靈妙)한 사적도 있고 단군, 기자, 위만의 삼선
과 삼한, 사군, 낙랑, 대방, 말갈, 발해, 양부여, 후백제, 가락 등의 일과 삼국사기에 없는 고기
의 기록도 특색이다, 또한 고대의 신화, 전설, 민속, 사회, 고어휘, 성씨록, 지명기원, 사상, 신
앙, 일사는 좋은 고증자료이며, 향가 14수가 실려 있어 국문학에도 좋은 자료임.
* 15) 신라 일천년사(新羅一千年史); 신라의 1천년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한 자료집.
* 16) 한국계행보(韓國系行補); 명인들의 가계 등 한국의 성명의 발취록.
* 17) 조선왕조실록(王朝實錄); 1893건 888책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의 편년체
역사기록으로 방대한 양이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의 본문해석(本文解釋)만으로는 당시의 상황(狀況)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 당시 정치, 사회 등의 관계 정황(政況)을 가미하여 부분적인 보완을 하려고 하였다.
몇 가지 알아둘 일은 각종 문헌(文獻)이나 보서 상에는 최종(最終) 직책이거나 차 하위(借下位) 직책만 표시되 있어 하위 직급(職級) 또는 직책(職責)과 중간의 직책 또는 직급을 유추(類推)한 부분도 있으며 구전(口傳)으로 전해온 부분을 추가한 경우도 있으며 각 가정에 가승(家乘)과 이에 준하는 기록들이 참고가 되었음을 부기(附記)한다.
또한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품계(品階)가 종1품(從一品)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정1품(正一品)이 최고 품계였고 시대에 따라, 왕의 등극(登極)에 따라 정부기관(政府機關)의 명칭이 바뀌는 경우가 너무 많고 품계(品階)도 직책도 변화가 많아 시대에 따라 변경되는 직책과 품계를 확인하기 어려워 혹여(或如) 오기(誤記)된 경우도 있다고 보아야한다.
한편으로 북한의 선천지역(宣川地域) 종인들이 연락할 수 없음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빠른 시일 안에 남북통일(南北統一)이 되어 그분들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 추록(追錄)할 수 있기를 간절(懇切)히 바란다.
각 지역별(地域別)로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나 족보에 등재된 행열자(行列字) 이름과 관(官)이나 사회 각 분야에 제출(提出)된 이름이 다른 경우가 많아 앞으로도 역사서(歷史書) 등과 가승 또는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름과 사건들이 새롭게 발굴(發掘)이 계속되어 선조(先祖)들의 행적(行蹟)이 좀 더 자세히 기록되기를 열망(熱望)하며 이 자료가 지금 살아가는 사람이나, 후세인(後世人)들에게 적으나마 우리 봉산 지 씨(鳳山 智 氏)의 삶의 기록(記錄)으로서 도움이 된다면 하는 마음이다.
여러 자료(資料)의 수집(收集) 보완(補完)하는데 적극적으로 또한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종친(宗親) 여러분들께 감사(感謝)의 말씀을 드리며 계속(繼續)해서 자료(資料)를 수집(收集)중인바 새로운 자료를 발굴(發掘)하거나 자료의 오류(誤謬)를 발견(發見)하여 알려주시면 앞으로 족보(族譜)를 발간(發刊)할 때 참고(參考)하려하며 추후 교정본(校訂本)을 간행(刊行)할 예정(豫定)이오니 많은 협조(協助)를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우리 뿌리의 묻혔던 자료발굴을 위해서는 후손들의 몫이라고 생각되어, 타성씨의 글을 퍼왔습니다.
후손의 한사람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알고자 한번은 생각해봐야 하지않나 사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