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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항상 그리 오는듯 하다가 오지 않는
늘 기다리는 희망의 나래처럼 그리 피어나지 않는 꽃망울 같은 여운이
가득한 구례 산수유 노오란 안개 가득한
지리산 자락을 다녀왔디.
자기 스스로 서는 것이 자립이라 한다.
태어나서 엄마 젖을 찻고 엄마의 그늘에서
커가면서 하나 하나 서가는 것이다.
머리가 깨어나고 몸이 발육하고 사춘기 지나면 마치 혼자 자라난것 같이 사회에
일원이 된것 같은 느낌으로 일어난다.
공자님이 젊어서 너무 힘쓰지 말고 자중하라 하는 말은 혈기로 망하는 길을 너무 빨리 가는 경우를 성숙을 얻지 못한 풋내기 가 어찌 나를 알것 같은갖하고 자중하라는 말씀이다.
달리고 달리고 가도 가도 힘이 남아 있던시절이 누구나 다 산타는 어린시절이
있었다. 하루에 이삼십 키로는 기본으로 오르락 내리락 봉우리는 지나가는 바람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는 것은 다녀왔다는 느낌 뿐이 었다.
그렇게 혼자 산을 다니는 것이 스스로 자립했다 느끼고 다닌시절이 있었다.
사회에서도 혼자 이룬것 이라 느끼고 거만하게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버리지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살때쯤
이 되면 내려가는 시점이 오는 것이다.
가장 크나큰 것이 권력이고 가장 아까운 것이 목숨이라.
하다못해 사회 어느 곳에서 완장하나 차면
그곳은 나의 것 처럼되는 것이다.
권력의 맛이란 마치 산 봉우리에 오르면 느끼는 정상의 기분은 산꾼의 권리이자
최고의 희열이 아닌가
발 아래 세상 모든 것이 있고 보이는 것들은 다 눈 아래 있어니 어디를 못가겠는가 하는 마음이라.
한번 잡은 권력의 맛은 마치 여인의 품과 같고 손 아래 굽신되는 가신들이라는 허울에 마치 신이 되는 것 같이 느끼면
어찌 이것을 놓을수 있는가
태고적 부터 역사는 높은 곳에 오르기위해
오르면 다시는 내려오기 싫어서 자식이고
충신이고 모두 불쏘시게쯤으로 느끼고
권력을 탐하는 자는 구족을 멸하고 충신도
토사구팽이라 때가 되면 이유달아 버리고
늘 걱정은 어느 놈이 커가면서 권력을 나눌려고 하는가 하고 걱정에 걱정을 하다가 그렇게 내려오지 못하는 곳에서
마치 히말라야 정상에서 오가지도 못하고
있는 정상공격조 같은 것이다.
조조도 평생을 권력을 지고 고민하다
두통에 고생하다 죽었고 , 알렉산더 대왕도 어린나이에 부친보다 낫다는 망상에 앞으로 만 가다 젊은 나이에 모기에 죽는 말로를 얻는 것이다.
마치 조폭세계 영화 장면처럼 머리숙이는
병정놀이에 열굉하는 어린애들 같은 것이
권력이라 한다. 놓치면 죽는 줄 아는 것이다.
목숨이란 인간이 하나 뿐인 재산이라
두개는 가질수 없는 유일한 것이라
누구에게나 하나 쁜이다.
부처도 예수도 공자도 마호메트 도 신인척 하는 인간이라 죽음앞에서는 성인답게 처신 하지만 중생은 누구나 여유가 있어면
죽음은 남에게나 있는 것으로 알고 지내는 것이다.
아는 큰스님께서 오래전부터 의료원에서
봉사를 하고 환자분들 임종을 삼십년 가까이 하셨는데 모두가 하시는 말씀이 단 몇분만이라도 조금만 더 살고 싶어하는 것이 모두의 바램이라 하신다.
인생은 몽중설몽 夢中說夢 이라 중국의 임제종 대혜종고의 대혜 어록에 있는 고사로 " 꿈속에서 꿈이야기를 한다." 는
꿈을 깨달어면 깨달음도 꿈이다 라는 뜻으로 우리의 모든 것은 일장춘몽 이라는 것을 잘 말한다.
죽고 사는 것도 지나고 나면 모두가 꿈같은 것들 뿐이라는 禪士 선사의 깊은 뜻 같지만 누구나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연휴에 외국으로 죽을듯이 나가고 돌아오면 지나간 꿈과 같은 것이다.
바람이 부는 것은 마음에 바람이 지나갈뿐이라는 말씀처럼 지금도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자식이 커는데 부모의 마음은 바닷가 파도처럼 끝이 없이 하는 은덕 이라.
평생 을 뒷바리지 하지만 어디 그것이 무엇이라 하는가
자식에게 하는 경제적인것은 늘 모자라는 것 같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 한다.
나이가 들고 자식집에 이고 들고 무겁게 싸가지고 오시면 자식은 무엇을 그리 무겁게 늘 가져오느냐 하면 부모님은 늘
아무것도 아니라 하신다. 주어도 주어도 평생 을 주다가 가시는 빗쟁이 도 그런 빚쟁이 가 없는 것이다.
살아생전에 그리 늘 싸가지고 오는 반찬 들도 그리 구박하고 타박해도 지금은 먹을수도 앖는 보물인것 이다.
부모의 지원은 이리 끝이 없고 어찌보면
자식은 늘 모자라는 것 뿐이다.
남의 부모를 비교한다는 것은 어린자식의
좁은 욕심이라 철이 들기전에는 항상 모자라는 것 뿐이다.
지원은 이리 어린아이를 만들수도 있는 무서운 것이 될수도 있다.
우리나라 만 아니라 선진국이면 캥거루 족들이 사회의 크나큰 문제가 된다.
정신적으로 조헌병을 만드는 원인도 된다고 한다.
지원은 어느 정도에서 자립할수 있게 그쳐야 한다.
그러나 지지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나 어릴때부터 자립할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해아하니 부모의 노력이나 지식이 필요하다. 지지를 할려고 하면 어느정도의
자식에게 도움이되는 방편을 가져야하니
지혜가 있어야한다.
자식도 부모의 모습을 보고 크는 것이다.
항상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 참으로 어려운 것이 지지 인데 마음으로 주는 것 만큼 크나큰 것이 없지만 그것이 잘못되면 독이 될수도 있다.
서로의 소통이 없어면 지지가 하나의 강압이 되면 마치 장벽이 되는 수가 생긴다.서로 진실한 소통이 없어면 힘들지만 지지를 해서 잘못되는 경우는 없다. 마음으로 늘 지지하면 크나큰 그롯이 되는 경우는 많고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에디슨이나 빌게이츠나 음악가나 과학자는 대부분이
부모님의 지지로 이룬 자립이다.
지지와 지원은 자립에 빛과 소금이라한다
자립이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옛 선사는 제자는 지옥이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의 28대 조사 달마는 중국에 와서 중국 선종을 이루고 제자를 받지 않는다는 말에 이대선사 혜가선사는 찻아와서 한쪽 손을 공양하고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토록 절박한 배움을 얻고 스승을 모시기란 참으로 어렵지만 제자의 자립을
도우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 깨달음의 나무란 본래 없는 것이고
밝은 거울또한 받침대가 없는것이고
본래가 한 물건 없는 건만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참으로 심오한 뜻이지만 일자무식한 혜능이 전한 답송이라 한다.
배우고 깨우치는 것도 본래가 맑고 깨끗한 것인데 뮐딱고 깨닫느냐는 심오한 뜻이다.
이 처럼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는 것이 스승의 기쁨이고 즐거움이라 한디.
자립하게 만드는 것은 어린애를 서게하는
작은 일이지만 그것이 밑거름이 된다.
처음 산에 온 분들을 후미대장 이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해 보았지만 처음 오신분들 중에 후미로 오신분들이 정말 산꾼이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후미에는 늘 후미이고 선두는 늘 선두이다.
지금은 즐기면서 가지만 옛 선사들이 제자나 상좌들을 받지 않는 이유가 있다.
공자도 늘 제자들 마다 다 다르게 이야기 하는 것을 논어에도 자주 나온다.
편해 하는 것이라고도 일부는 전하지만
늘 제자들이 각자의 능력으로 만 지내는 것은 항싱 지적해도 제자들은 늘 그이상의 능력은 힘들다는 것을 평생 을 느끼고 살았다고 한다.
자립이란 어느정도 컬때까지만 필요하디.
스승이할수 있는 일은 지지이고 그 이상은 각자의 능력으로 크는 것이다.
오늘 스님과 차를 나누다가 기복신앙 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바라는 것은 스님도 안된다고 하신다.
기복신앙 이라는 것은 안되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하면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한다.
자식을 대학에 가기위해 기도를 부탁하면
어렵다고 한다고 한다. 어머니가 기도를 하는 것은 본인의 정성이니 하든지 하고
스님에게나 부처님에게 부탁을 하지 마라 하신다. 방생을 가는 짓도 하지마라 하신다. 잡은 물고기를 방생 한다고 풀어 주는 것은 두번 죽이는 짓이라 한다.
용왕님이 그것을 좋게 보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괜히 몰려다니는 짓을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삼사 순례니 암자순례니 백일기도니 모여서 하는 짓은 아무런 도움도 안돤다 한다. 단지 본인이 하고 싶은 사람이 직접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고 열심히 할려면 도움을 줄수 있다고 한다.
서울대 가고 싶은 놈이 직접 기도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꼭 가야되는 정신도 있고 코피가 나도록 하면 되든 안되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바로 되는 기도를 하고 마음을 바로 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바른 마음으로 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절이나 교회나 종교인들은 각자가 살아갈수 있는 행위를 하고 생산하고 먹고 살수 있는 짓을 해야한다고 한다.
단지 중생들이 아파하는 것을 안아프도록 도외 주는 짓을 하는 것이 종교인이 베푸는 것이라 한다.
참으로 기본적인 종교관에 고개숙여 경배 하였다.
종교인들이 각자 수행 하기도 힘드는 일이라 한다.
스님이 자기 머리 깍기도 힘들다 하신다.
공부하고 절일하고 하면 시간이 모자란다
하신다. 살아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야 아침공양도 하고
오전 일도 하고 점심 공양에 오후 운동 하고 책볼려다가 저녘공양하고 씻고 책보다가 잠들고 하면 새벽이다.
어느 곳이든 자기 일을 하는 자립하는 사람은 바쁘다.
요새 인도 철학책을 보다가 문득 인도성자들에 관한 느낌이나 사두들의 삶에 대해서 기도나 요가나 신에게 접근 한다고 하는 행위나 인도 의 오래된 전통에
관해 스님과 이야기 나누었다.
성자들이 대중이나 제자들에게 신과 통하고 병자나 제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을 마치 기적처럼 하는 것을 공공연히 모두 믿고 있는데 정작 성인 본인은 가는 길은 신이 정해준대로 죽고 산다고 하는데 어떻게 다른 이들은 자기가 마음대로 할수 있는가 하고 의논 하니 스님은 웃고 그냥 읽고 느끼는 대로 살면된다고 한다.
믿음이란 각자의 생각이고 각자의 길이니
그것이 어떻고 어떤지는 본인 만이 알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믿고 말고 하는 것은
내가 관섭을 하는것이 아니라 하신다.
세상은 믿고 안믿고는 마음이 결정하는 일이라 하신다.
인도에 가서 요가에 빠지든지 성자에 깨달음을 얻든지 하는 것은 하는 사람이 얻는 것 뿐이라 한다.
종교의 가는 길은 다 같지만 다르게 느낄뿐이라 하신다.
나도 나 의 책을 보고 가는 것 뿐이라 하신다. 좋고 나쁘고 는 없다하신다.
그것이 자립이라 하신다.
수화는 세계적으로 똑같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화 박사는 부산에서
여자분이 되었다. 최초라 문교부에서 심사할 사람이 없었다. 몇가지 수화를
만들기도 했단다.
수화는 언어가 필요 없이 행동으로 하기에 서로 다른 말이나 구별이 없이 동작으로 나타내기에 전달하는 것이나 받는쪽도 행동으로 하기에 느낌으로 알아듣는다 한다. 우리가 외국이나 말이 통하지 않으면 바로 몸동작을 하는 것과 같다고 느끼면 된다. 우리는 말을 하면서 의식을 가지고 서로 다른 곳에서 살면서 횐경이나 사회의 형태에 글의 모양에 의지 하다보니
동물의 기본인 동작을 하지않고 서로 말과 글로 전달하다 보니 서로의 감정이나 행동을 잃어버린것 인지 모른다.
예의라는 것도 사실은 행동의 규칙이나 절제로 만든 의식이라는 것이다.
노자의 사상 처럼 쓸데없는 것들을 만들어서 서로가 얽매이는 것 이다.
우리는 산길을 가는데 아무런 말도 필요 없이 잘가고 있다. 단지 갈곳을 찻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서로 사랑을 할때는 말이 필요 하지도 않고 힐 필요도 느끼지 않고 그냥 같이 있는것 만으로 모든 것을 대신 한다.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서로의 의식이 다를때
이해 하는 것을 전제로 하면 복잡하고 다툼이 생기는 것 뿐이다.
문명적 이기는 생길수록 우리는 더욱더 서로가 멀어지고 갈등과 외로움으로 인해
스스로 자립하는 것을 전제로 멀어지는 것이다.
수화는 어쩌면 원초적인 우리의 본질이 아닐까?
산을 처음 가다가 세월이 가면 문득 알파니스트가 되는 경우가 있다.
산악인으로 자립의 길을 들어서는 것이다.
요새는 교통과 장비의 발전으로 조금의 지식과 체력이 있어면 가능하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배우기를 단체의 중요성과 장비의 전문성 즉, 등산이란 각자가 하는일과 협동으로 서로 의 일을 분담하는 것을 먼저 배우기에 알파니스트
의 신분은 극히 전문가의 경지라고 배우게 되었다.
우리나라 어느곳이나 산이 있다.
특히 집근처에는 산에 집이 있는 경우는 우리나라 의 환경의 전부라고 할수있다.
어릴때부터 산에 놀러가서 지냈어니 어쩌면 산이 좋은 놀이터라고 느꼈는지 모른디.
혼자서 처음으로 간산은 천태산이었다.
열차를 이용하기도 편하고 처음으로 하루에 갔다 올수도 있었어니 그러다가
대운산 시명산 철마쪽도 홀로 걸어서 걸어서 갔디왔어니 참으로 즐거운 주말 이었다. 동해남부선이나 경부선근처 산들을 홀로 다니다 친구들과 같이 영남알프스 를 다녔어니 참 좋은 환경이었
는지 모른다.
지리 종주나 대간종주를 홀로 한다는 것은 해보면 체력이나 준비가 혼자 하기는 연구와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일본이나 대만을 가면 가희 홀로 가는 산악인을 보면 장비나 지식이 산 높이에 따라 천지차이다. 4천미터급 산을 가진 나라와 우리의 현실은 어마어마 하다고 할까
특히 아가씨나 여자가 홀로 장비를 지고 걸어오는 것은 말도 못한다.
가희 존경 쓰럽다고 할까?
15박이나 10 일정도의 단독종주일정의
장비는 참으로 대단하다.
우리나라는 2천미터도 없어니 대간종주를
하지만 중간 중간 숙소나 민박을 이용하니
차이는 말로 못한다.
우리도 홀로 가는 산길을 즐기도 한다.
혼자 가는 산길이 어쩌면 신경을 안쓰고 다니는 것이 편할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같이 움직인다는 것은
무엇을 맞춘다는 것은 한개 를 버리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남과 같이라는 것이 점점 성숙이나 희생이
없어면 불가능 한 일이다.
같이 움직이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좋은 일이다. 인간은 원래 나약한 짐승이라
같이 살아온 유전자 가 발달 한 것이다.
혼자 자립하는 것은 힘들수도 있다.
외국이나 옛날에는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을 홀로 바같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문화 었다.
자립은 어른이 되는 길이다
원래 따로 독립되는 것은 없다.
부자 가 가난 하다고 한다. 늘 부족하다고 한다. 산을 오르는 것은 고난이다.
그러나. 누가 산을 오르면서 고난이라 하는가 즐겁지 않는 이는 드물것이다.
없다는 것은 바로 생기기전에 나타나는 현상 이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 뿐이다.
무와 유는 같다.
생과사는 같다.
슬픔과 기쁨도 같다.
고통과 희열이 같다.
" 무지로 인해 이원성이 존재할때 . 사람은 삼라만상 모든 것을 ' 지고의 자아 ' 로 부터 구별되는 다른 것으로 본다. 모든것이 ' 자아 ' 로 인식될 때 . 원소 하나까지 도 ' 지고의 자아 ' 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될때 .' 참된 실체 ' 에 대한 지식이 솟아오르자마자 육체의 환상 으로 말미암아은 과거의 행위의 업보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마치 잠에서 깨어나면 꿈 이 사라지듯이 ! "
위대한 일원론자인 샹카 는 이렇게 말한다.
늘 녹차를 마시는 스님은 즐거운일이 곧 슬픈 일이다.라고 하신다. 괴로운 일을 해야만 즐거운 일이 만들어진다고 하신다
따로 존재하는 것은 이세상에 없다고 한다.
죽은 사람들이 있기에 지금 살아가는 후손이 있고 후손이 있어야 선조가 있어니 모두가 같은 것이라 한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고 중생이 곧 보살이라 하신다. 이말은 스님이 하신말도 아니고
원래 있는 진리 일 뿐이다 라고 하신다.
스승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하신다.
육체도 정신도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자립은 곧 탄생과 같은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은 다 같은 것일 뿐이다
다른 것은 마음에 담는 헛것일 뿐이다.
성인은 괴롭거나 슬프지 않는다 하신다.
남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나눌뿐이라 하신다. 늘 즐겁게 사는 것이 성인이다.
불교생활에 관해서 이따금 큰스님에게서
듣는 것은 속가나 절이나 사람사는 곳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속가에도 빈부가 있고 높낮이가 있듯이
불가에서도 높은분이나 낮은분이나 다 계신다는 것이다.
통도사에 300 분이상 스님이 계시는 데
모두 공양시간에 모이고 새벽기도나 행사에 창석해야 하고 각자의 업무와 각말사의 주지들이나 학승이나 하는 일이 다 있다고 하신다.
모두 각자의 자립할수 있도록 처음부터 준비를 해야한다고 하신다.
동안거나 하안거나 지나면 모든 스님들은
산문을 떠나서 각자 생활을 하는데 스님들
멏분은 갈곳이 없어서 민가의 집에 모여 생활을 하신다고 한다. 자립이 안되는 스님들은 평생 을 그렇게 사시다가 늙고 병들면 고생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라 한다.
그리고, 속가 인연들 부모나 자식이 있어서
출기하면 끊었던 인연들이 괴롭힌다고 한다. 참으로 세상 어디나 다 같은 것 같다.
세상의 자립이란 수양의 끝이 아닌가?
명품이란 사람이나 물건이나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녹차나 커피도 명품은 가희 맑고 청아한 색에 항기가 그윽하다 못해 느끼는 맛을
먹고나서 쉼을 입안에 담어면 맛이 목에서 다시 은은한 향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물론 녹차도 오래되고 명품이 것은 내려먹어면 입안 가득 담기는 맛이 오묘하고 머금다가 저절로 넘어가면 뒷맛가득 입안에 퍼지는 여운은 느끼지 못하면 그만이다.
커피나 녹차나 어느 차든지 먼저 명품이 있어야하고 다기 茶器가 명품 즉, 차맛을 높이는 찻잔이나 그리고, 물이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명인이 차를 내리는 차이는
같이 먹어보면 아는 것이다.
찻잔만 보아도 차마시는 사람의 수준을 안다는 스님의 말씀이나 모두가 차어 대하여 자랑을 하지만 차한잔 먹어보고
말없이 스님 차 한봉다리 주고 온다고 한다. 그러면 며칠내로 두손 빌고 와서 차 얻어 먹어러 자주 온다고 한다.
어제도 30년 가까이 사용하던 다기를 깨어버려서 경주에 도공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다기를 몇개 고르시드니 조목조목 차이를 말씀 드리고 마음에 맞는 용도로 30개 주믄하니 도공이 거절을 한다.
그리고 , 자기가 만든 다기가 제일이라고 하는데, 스님이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나와버렸다. 우리나라고 어느 나라고 장인들의 버릇이 자기 제일주의라는 것이다. 오래동안 차를 마신 사람의 의견도 들어보고 이렇게도 저녛게도 만들어 보고 사용하고 녹차마시는 장인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통해야 발전이 있고 서로가 좋아하는 실용적인 것을 할수가 있는데 무슨 고집이 그리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스스로 명품은 무섭다고 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장인이나 명품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흙을 좋은 것을 쓰는데 뚜께가 조금 앏어면 금싱첨화 이고 찻잔밑부분을 조금만 높히면 실용적이고 크기를 조금만 키우면
띡 좋은 것이 되는데 어찌 그대로 만들어 팔리지도 않고 사용처도 모르는 것을 잔뜩 만들어 놓고 전시회를 하면 무엇하느냐 이다.
명품이란 서로 용도가 분명하고 모두가 즐겨사용 할수 있는 것이 우선이다.
자립이란 남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홀로 피는 것이 아니라 같이 어울려 있는 것이 우선이다. 남에게 도움되지 않는 자립은 존재하는 것은 없다.
실패는 보이지 않는 훈장이다.
실패 한다 는 것은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어면 성공률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것이다.
외국에는 실패한 분들은 모아서 연구하는
곳이 생겼다고 한다.
실패가 가장 큰 성공이라는 것이다.
경험이란 가장 큰 자산이라 실패하면서 얻은 것은 소중한 밑천이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계속 간다는 것은 도착하는 곳이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알고 가는 길은 힘들고 지치고 하겠지만 그것은 도착하기 위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크나큰 인물들의 경험담을 자주 접하지만 이루고 나면 당연한 결과 인것 같지만 다시하라고 하면 감히 새롭게 할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하고 가시는 분들도 많지안 이루어지는 것은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길로 가는 것은 신념보다 더 좋은 원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도 산을 가는 이유는 언젠가는 올라가서 즐기고 내려온다는 생각이 가득 하기에 산을 간디는 산꾼이다.
그래도 우린 실패를 하는 원정대 가 아니고 그냥 즐기는 취미 지만 점점 더 산에 빠지면 실패하는 순간을 맛보는 때가 오면 그때는 이미 산악인이 되는 것이다.
남들이 할수 없는 것을 할수도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종주를 간다든지, 몇날을 산을 걷는다든지,
원정을 따라 간다든지, 어느 외국의 트레킹을 계획 하고 떠난다든지, 홀로 밤새 걷는 산을 간다든지ᆢㆍ그러면 이미
알파니스트가 되어 있는 것이고 실패가 가장 큰 재산이 되는 것이다.
어릴때 초등학교 를 다니던 시절에 누구나
길가에 넝마주의를 본적이 있었을것이다.
우리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는 큰 하천이 있었다. 지금은 복개하여 도로기 되어 있지만 어릴때는 수양버들에 맑은 물이 흐르고 다리밑에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리고, 무서운 넝마주의라는 사람들이 살았다. 학교 오고 갈때 자주 보면 그때는 보는 것도 시비를 거는 시절이라 비켜다니는데 다리밑에는 흰페인트로 커다란 글씨가 써놓고 있었다.
자립갱생이라는 글씨인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단체 이름인가 하고도 느끼고 웃어면서 꼬마친구들이 서로 자립갱생 하면서 장난도 치고 했는데
길가다가 넝마주의를 만나면 무서워 도망을 치고 했다. 그후 그 말뜻이 무슨 말인지 알았을때는 데모를 자주하고 하든 시절이 었다.
자립갱생 이란 말은 못살든 시절에 혁명 시절 나라에서 만든 구호라는데 알아서 스스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못사는 사람들 에게 하는 가진자들의 넋두리라는 것이다.
물론 공자시대나 조선시대나 옛날부터 노약자나 홀로된 과부나 홀아비들 에게도
다 법이있고 나라에서 구훌에 신경을 쓰고 했지만 사람이 사는데는 빈부나 차등이 없을수 얷ㄹ 것이 현실이고 진리인것 이디.
그런데, 나라에서 못사는 사람들 알아서 스스로 살아라는 자립갱생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지난날 무슨 형제원이며
영화숙 재생원등에서 경찰이나 관공서에서 착취하고 농락하는 짓을 한 것이 지난사회의 큰 과실로 없는 사람들을
고통에서 더 죽을곳으로 보낸 짓을 한것이 뉴스의 한분야로 킅날 것이 아니다.
우리사회의 자세는 늘 바르게 하는 소리에
같이 가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회가 바른자세가 성립되지 않고
자기 편으로 살아가는 닫힌자세로 나만이 옳다는 것은 어린애들의 투정일 뿐이다.
사뫼는 언제나 변하고 바뀌는 것이 세상이다. 어느쪽으로 계속 가지는 않는다.
지맥길이나 산길을 가면 바로 앞산을 오를려고 해도 산줄기는 돌아돌아 가는 것이 산길이요 사림이 살아가는 길이다.
오늘도 뉴스나 들리는 소리는 늘 내가 옳다는 어린애들 장난같은 말들이다.
세상은 늘 옳은 쪽으로 가는 말인것 같다.
세상 은 여러가지가 어울려 가는 곳이다.
맞는 것은 하나의 부분이다.
다 맞는 것은 없다.
모두가 깉은 곳으로 가는 것은 없다.
나는 나의 자립이 옳고 사회는 사회의 자립이 맞는 것이다.
바른 자립는 남의 자립도 볼줄 알아야한다.
자립은 가만히 두어도 자라나는 산야의 수목들과 같은가
자립이란 스스로 자연스러운 돋움이 아닌가
숲속에 피어나는 것들은 모두 야생에서
삶과 즉음이다.
자립이란 오늘도 떠 오르는 태양과 같다.
봄이되니 꽃은 피고 하늘은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