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탐방
지난 2월 17일은 해운대의 역사의 발자취를 처음 더듬는 날이었다. 장산지하철역에서 만나 건영2차 아파트앞에 있는 햇살공원으로 갔다. 이번 탐사를 기획하신 좌상훈선생이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호로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라는 말에 30년전에 중학교 세계사교과서에 듣었던 유물이 내가 살고 있는 해운대에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며 따라 나섰다. 햇살공원에는 구석기시대 문화가 발견되었다는 <해운대구석기유적지>라는 비석이 있었다. 몇 번씩 재래시장에 술 먹으러 이 길을 걸어갔지만 한번도 덩그러니 놓여있는 비석이 있었다는 것 조차 몰랐고 그것이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구석기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말에 놀랐다. 그 당시의 원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봄기운이 기지개를 켜는 춘천을 거쳐 대천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폭포사에서 있는 이공을 기리는 비석 (이전에는 안내문조차 한문으로 쓰여졌지만 3년전 구청에 건의하여 한글로 바꾸었다.) 앞에서 해운대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 놓았던 이공의 이야기와 천제당과 마고당을 가서 청동기시대와 장산국이야기를 듣었다.
오늘(2월 24일)은 동백역에서 만났다. 조류학자, 학교선생, 아파트관리소장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인근의 대우마리나 주민을 비롯해 인근의 좌.우.중동주민들은 물론 초량, 반여동에서 온 사람들이 한데 모여 2차 길여행을 떠났다. 해운대해수욕장앞에 있는 베네시티건물앞에 조그만 송림공원에서 해운대의 첫 마을인 운촌마을 표지석을 보았다. 운촌마을은 지금부터 천년전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마을이었다는 말에 그 역사가 지금은 새로지은 높은 아파트와 빌딩에 갇혀있다고 생각되었다. 해운대송림앞에 있는 복개된 다리에서 장산에서 흘러나온 춘천의 마지막 그리고 바다의 첫 시작을 보게 되었다. 좌선생이 준비한 사진에는 이전에는 백사장이 넓었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그것은 비단 해운대뿐만 아니라 광안리등 다른 바닷가도 그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했다. 10명에서 출발한 팀들은 그곳에서 합류한 사람들로 20여명이상 불어났다.
조선비치호텔을 지나 동백섬으로 갔다. 동백섬의 구멍이 숭숭뚤린 바위는 화산섬이었고 바다의 용앙이 융기되어 육개도(육지와 연결된 섬)였다는 설명을 했다. 동백섬에 있는 누리마루앞에서 대마도를 한번 보고 최치원동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최치원은 이전에는 이름은 있으나 성은 없는 평민(신라시대에는 성이 있는 경우에는 진골.성골등 왕족만 해당)이었다. 당나라에 가서 크게 성공을 하여 최씨 성을 따서 최치원이라 자칭을 하였고 그것이 경주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조국인 통일신라에 와서 나라의 발전을 위한 개혁안을 제안했으나 신분의 한계(6두품)와 그 당시 썩었던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이후에도 신라, 고려시대의 뜻있는 젊은이들이 이곳에 와서 그가 못 이룬 꿈을 되새기며 시로서 노래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에 들어서는 이곳에 군사시설인 좌수영이 들어서고 또한 일제시대에는 해운대온천에 술집(유곽)들이 번창하여 개혁적인 기상은 모두 사라지고 흥청망청 유흥을 즐기는 곳으로 해운대가 추락했다는 말에 왠지 모를 서글픔이 묻어나왔다.
동백섬에서 나와 해변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마린시티를 지나갈 때 새로 생긴 방파제를 보면서 함께 참석한 해운대구 의회 김광모의원이 엄연히 바닷가가 있으면 태풍, 해일등을 고려해 거리를 넉넉히 두고 큰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데도 바로 인접해 지었고 자신들의 안전만을 위해 방파제를 지어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는 지적을 했다.
요트경기장에 도착을 했다. TV에서만 보았던 수많은 요트들이 있었고 옆에 제니스, 아이파크등 우리 부산에서 제일 높은 아파트와 같이 있으니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별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웅장하다는 생각은 잠깐이었고 200미터이상 세로로 쭉 뻗은 철골 시멘트덩어리인 아파트를 보면서 인간의 주체할수 없는 끊없는 탐욕을 보게 되었다. 또한 그곳에서 청소,경비를 하시는 분들이 좌동에 거주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말에 좌동의 아파트에 사는 나로서 우리 아파트에 근무하시는 분들이 반송,반여,재송동에서 산다는 말이 기억이 났다. 해운대가 지역에 따라 소득격차로 갈라지고 그것이 물과 같이 서로 소통되기는 커녕 더욱더 심화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수영비행장을 거쳐 승당마을(현재 우동 동부올림픽타운)에 오게 되었다. 1996년 재개발조합과 구청은 강제철거를 단행했고 몇몇 주민들은 현실적인 철거보상비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이곳은 그야말로 5년전 용산참사에 버금가는 불상사가 났던 곳이다. 이제는 그런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큰 아파트와 건물들만 들어서 있다.
처음에는 쉽게 해운대의 역사의 발자취를 찾는다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 나섰으나 오랜만에 많이 걸어서 다리가 많이 아픈만큼 해운대의 슬픈 역사가 너무 생채기를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10억대를 훨씬 넘는 멋진 아파트가 우리 해운대의 본 모습이요 자랑은 아니다. 재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쫒겨났던가 아니면 해운대 백사장에서 관광객들에게 간이 음식을 든 대야를 들고 팔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해운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그런 힘든 삶을 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애환을 사랑하며 존중해야 할 것이다. 즐거움,환함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슬픈 그림자를 사랑하고 그 역경을 이겨내는 강인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 해운대는 누구나 소통되고 공감하는 멋진 일류도시가 되는 것이다.
끝으로 오늘 길잡이를 해온 좌선생은 해운대에서 4대를 이어 살아왔고 어릴때는 몰랐으나 머리가 커짐에 따라 자기가 난 곳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알고 싶은 욕구로 변화했으면 결국은 자신의 탯줄이 묻힌 해운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하게 된것이라고 했다. 나 자신도 그렇지만 해운대는 아파트들이 많아 원래 살던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많이 정착해 있다. 이제 우리들의 고향은 바로 이곳 해운대이다. 우리의 고향인 해운대의 고층아파트밑에 흘렀던 역사의 흔적을 알고 이곳에 뿌리박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더욱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참고로 다음 해운대 탐방은 △3월 10일 동백섬입구에서 만나서 ->송림공원->해운대시장->미포->동해남부선->삼포길->송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3월24일 송정입구 ->송정천->안적사->안평 △4/7일 대천공원->중봉->돌탑->장산습지입구->원적사로 이어질것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신병륜(010-2683-0273)
해운대의 길속에는 해운대가 있다.
해운대를 알게 되면 해운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해운대를 위해 행동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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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good!
반갑습니다. 좌상훈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사진 잘 나왔네요~사진 퍼가도 될까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