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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8. 26
2017년 KBO리그 신인 2차 지명회의가 끝났다. 1차 지명이 각 구단 연고 지역 최고 기대주를 먼저 뽑을 수 있는 기회라면, 2차 지명은 신중하게 옥석을 골라내 미래의 든든한 발판을 마련해야 하는 시간이다. 실제로 2차 지명 선수가 1차 지명 선수들을 제치고 팀의 간판스타로 성장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한국인 메이저리거인 류현진(LA 다저스), 오승환(세인트루이스), 강정호(피츠버그), 이대호(시애틀)는 모두 1차 지명을 받지 못하고 2차 지명에서 선택돼 프로에 데뷔했다. 신인 드래프트의 진짜 승패는 이렇게 1차보다 2차 지명에서 갈릴 가능성이 높다.
프로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2차 5라운드 이내에 지명된다. 그러나 하위 순번에서 건져 올린 ‘보배’들도 많다. 삼성 장원삼은 2002년 신인지명 2차 11라운드에서 전체 89순위로 현대에 턱걸이 지명됐다. 두산은 오재원과 양의지를 각각 9라운드와 8라운드에서 뽑았다. SK 박희수, 삼성 최형우도 하위 순번에서 간신히 지명된 선수들이다. 2차 지명에 임하는 각 구단이 마지막 선수 선택의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이유다.
▲ 8월 22일 열린 2017 프로야구 신인 2차 지명회의에서 지명된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17년 신인 2차 드래프트의 특징
잘 뽑은 선수 하나가 향후 구단의 10년 성적을 좌우할 수도 있다. 그래서 스카우트들은 1년 내내 전국의 야구장을 누비고, 매의 눈으로 선수들을 꼼꼼히 살핀다. 선수를 뽑을 때는 당연히 실력과 재능이 최우선 가치다. 팀에 현재 어느 포지션의 선수가 가장 필요한지, 또 가까운 미래에 어떤 선수들이 남아 있을지 두루 고려해 신중하게 유망주들을 고른다.
올해 역시 치열한 눈치작전이 펼쳐졌다. 올해부터 드래프트가 ‘Z자’ 형태로 진행돼 더 그랬다. 지난해까지는 ‘ㄹ자’ 방식이었다. 전년도 성적 역순으로 홀수 라운드를 진행한 뒤, 짝수 라운드는 다시 성적순으로 지명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번엔 라운드마다 똑같이 전년도 순위 역순으로 지명권이 행사됐다. 당연히 최대 피해자는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팀 두산이었다. 기존 방식이라면 전체 10번과 11번, 30번과 31번 선수를 뽑을 수 있었지만, 올해는 10번과 20번, 30번과 40번을 지명해야 했다. 반대로 지난해 최하위팀 kt는 1번, 11번, 21번, 31번을 지명하는 수혜를 얻었다. 기존 방식대로였다면 1번과 20번, 21번과 40번을 뽑아야 했을 것이다.
이번 신인 2차 지명회의에 참가한 선수는 총 938명. 지난해 860명보다 78명이 늘었다. 그 가운데 프로 지명을 받은 선수는 딱 100명이다. 2차 지명 전체 1순위의 영광은 마산 용마고 투수 이정현(kt 지명)에게 돌아갔다. 2차 지명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는 ‘전체 1순위’가 대단한 훈장이다. 이미 기량을 인정받은 유망주들은 최소한 1라운드 지명을 기대하고 현장에 온다. 한 야구 관계자는 “어느 정도 전국적으로 인정받은 선수들은 지명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몇 라운드에서, 어떤 팀에, 전체 몇 순위로 지명을 받느냐를 놓고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며 “한 라운드씩 뒤로 밀릴 때마다 계약금이 수천만 원씩 깎여 나간다. 억대 계약금을 받고 싶으면 1·2라운드 정도 안에는 이름이 불려야 하기 때문에 초조해질 수밖에 없다”고 귀띔했다.
올해 1라운드 지명에선 부산·경남 지역 선수들과 해외파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마산 용마고는 전체 1순위 이정현과 3순위 포수 나종덕(롯데)을 배출했다. 경남고도 투수 손주영과 이승호가 나란히 LG와 KIA의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부산고 투수 최지광 역시 삼성에 1라운드에서 지명됐다.
신진호, 김진영, 김성민과 같은 해외 유턴파 선수들도 좋은 결과를 얻었다. 포수 신진호는 전 소속팀 캔자스시티에서 방출이 아닌 임의탈퇴로 처리돼 2차 지명에 참가하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드래프트 개최 나흘 전에 법원에서 참가 자격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극적으로 1라운드에서 NC의 선택을 받았다. 시카고 컵스 출신 투수 김진영은 미국에서 퇴단할 때 방출 절차를 밟지 않아 유예 기간을 남들보다 1년 더 소모했다. 3년 만에 드래프트에 나와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한화에 지명됐다. 김성민은 고교 시절 신분조회를 거치지 않고 볼티모어와 계약했다가 대한야구협회로부터 영구제명 징계를 받고 볼티모어와의 계약도 철회됐던 비운의 선수다. 이번엔 일본 대학생 신분으로 드래프트에 참가해 1라운드 지명으로 SK 유니폼을 입게 됐다.
해외파 선수들은 이미 지난해에도 2차 지명에서 강세를 보였다. kt 남태혁, NC 정수민이 1라운드, 삼성 이케빈이 2라운드, 롯데 나경민이 3라운드에서 각각 뽑혔다. 한 프로 스카우트는 “해외파 출신들은 애초에 메이저리그 구단의 러브콜을 받았던 재목들인 만큼, 평균적인 유망주들보다 좋은 재능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 많다”며 “미국 구단에서 방출된 후 유예 기간 동안 군복무를 해결하고 오는 경우도 많아 더 매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 신인 2차 지명의 변천사
사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2차 지명이라는 제도가 유명무실했다. 1차 지명에 인원 제한이 없었던 시기라 각 팀이 연고 지역 고교 출신 선수들을 자유롭게 싹쓸이해갔다. 2차 지명은 1차 지명에서 선택받지 못한 선수들이 다른 지역 팀의 문이라도 두드려 볼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1985년에는 2차 지명 선수가 전 구단 통틀어 총 3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1986년 처음으로 1차 지명 인원에 한도가 생겼지만, 최대 10명까지 뽑을 수 있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차 지명이 지금처럼 치열한 전면 드래프트 형태로 바뀐 것은 1987년부터다. 1차 지명 인원이 구단별 최대 3명으로 줄어들면서 전 구단이 전 지역 선수를 뽑을 수 있는 2차 지명의 가치가 높아졌다. 1차 지명 인원이 3명에서 2명, 2명에서 1명으로 계속 줄어들면서 더 그렇게 됐다. 당시에는 2차 지명 역시 초창기의 1차 지명처럼 무제한으로 할 수 있었다.
2차 지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전년도 최하위 팀에게는 1라운드에서 가장 먼저 2명을 뽑을 수 있는 혜택도 주어졌다. 팀 간 전력 차를 좁히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1996년 열린 2차 지명 회의를 마지막으로 꼴찌 팀에 지명권 한 장을 더 주는 제도가 폐지됐다. 구단별 전력이 점점 평준화돼 큰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 물론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4강에서 탈락한 팀들이 아예 꼴찌를 하기 위해 경쟁하는 부작용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1996년 OB와 LG의 ‘꼴찌 전쟁’이 불을 붙였다. 그해는 “4강에 못 간다면 차라리 꼴찌를 하는 게 낫다”는 우스갯소리가 심심찮게 나돌던 시즌이다. 1997년 2차 드래프트에 나오는 대졸 선수들 가운데 워낙 월척급이 많아서다. 당시 국가대표 배터리였던 고려대 손민한과 진갑용을 위시해 단국대 이병규와 최만호, 한양대 이경필, 동국대 백재호 등 대어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1차 지명에서 연고 지역 선수 한 명을 뽑은 뒤 2차 지명 전체 1, 2번까지 차지하게 되는 팀은 그야말로 ‘대박’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서울 라이벌 LG와 OB가 ‘져주기 경쟁’을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야구 관계자들은 “시즌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꼴찌 싸움이 치열해졌다. 관중이 엄청나게 줄었고,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LG와 OB는 나란히 그해 9월에 6연패를 했다. OB는 최약체였던 쌍방울전에서 일부러 역전패했다는 의심도 받았다. 잠실 관중이 평일 3000명, 휴일 7000명으로 뚝 떨어졌다.
또 양 팀은 “2군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려고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주전 선수들을 대거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했다. 한 야구 관계자는 “이기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기가 많았다”고 했다. 연속 안타가 나와 승리를 눈앞에 뒀다가도 볼넷과 외야플라이 포구 실책이 나와 지기도 하고, 잘 던지던 선발 투수를 느닷없이 교체해 버리거나, 반대로 계속 실점하고 있는 투수를 바꾸지 않고 놔두는 식이었다. 결국 논란이 커지자 1996년 시즌 막바지 단장 회의에서 최하위 팀의 1라운드 2명 우선 지명 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의했다. 애써 최하위가 된 OB도 결국 헛물을 켠 셈이 됐다.
이후에도 2차 지명 제도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2001년에는 매년 11월에 열리던 2차 드래프트시기를 8월로 앞당겼다. 프로 구단과 대학팀 사이의 스카우트 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2003년에는 2차 지명 가능 선수의 숫자가 9명으로 줄었다. 또 2010년부터 2013년까지는 전면 드래프트가 시행돼 1차와 2차 지명의 구분이 사라졌다. 2014년부터 다시 지역 연고제를 기반으로 한 1차 지명이 부활하면서 2차 지명회의도 재개됐다.
배영은 / 일간스포츠 기자
일요신문 [제1268호]
해외파 특별지명 기억하나요? ‘추추트레인’ 문학구장 달리는 날 오긴 올까
2007년 4월 2일. KBO리그 해외진출 선수 특별 지명회의가 열린 날이다. 지금까지 단 한 차례만 열렸던 특별한 행사다.
사연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코리안 특급’ 박찬호(당시 LA 다저스)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뒤, 국내 아마추어 야구 유망주들이 마구잡이로 해외로 진출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급기야 KBO는 1998년 무분별한 유망주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해외파 복귀 2년 유예’라는 장치를 마련했다. 1999년 1월 이후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 복귀를 원할 경우, 소속팀이 완전히 없어진 시점부터 2년의 유예 기간을 거쳐야 하는 제도다.
만약 그 기간 동안 한국의 독립구단에서 야구를 계속하더라도, KBO리그 2군과의 교류전에서는 절대 뛸 수 없다. 그 정도로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유예 기간이 지난 뒤에는 2차 지명회의 개최 한 달 전까지 직접 KBO에 신청서를 접수하고 드래프트에 참가해 구단들의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지명을 받지 못하면 당연히 프로에서 뛰지 못한다.
그러나 2007년 1월 KBO 이사회는 일시적인 특별 규정을 적용하기로 결의했다. ‘1999년 이후 해외에 진출한 선수 가운데 입단 5년이 경과한 선수’에 한해 유예 기간 없이 국내에 곧바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당시 KBO리그의 인기는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 기회에 유명한 해외파 선수들을 국내로 유턴시켜 리그에 새 바람을 불어 넣겠다는 포석이었다.
그 당시 이 기준에 부합하는 선수들은 송승준, 이승학, 추신수, 김병현, 최희섭, 류제국, 채태인이었다. 문제는 선수가 7명인데 팀은 8개 구단이었다는 점이다.
KBO는 연고 지역 선수가 복수로 포함된 롯데와 KIA에 먼저 지명권을 줬다. 롯데는 부산 출신인 송승준, 이승학, 추신수 가운데 캔자스시티에서 이미 방출된 송승준을 선택했다. KIA는 광주 출신인 김병현과 최희섭 가운데 탬파베이에서 뛰고 있던 최희섭을 뽑았다.
이제 남은 5명을 6개 구단이 차례로 데려가야 하는 상황. 지명 순서와 지명 탈락 구단을 정할 묘안이 필요했다. 그 어느 팀의 반발도 사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하늘이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추첨’뿐이었다. 선수 지명권이 없는 ‘6번’을 뽑은 비운의 구단은 안타깝게도 한화였다. 추첨에 참여한 한화 구단 관계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고, 당시 사령탑이었던 김인식 감독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때 뽑은 선수들이 대부분 향후 각 팀에서 쏠쏠한 전력으로 활약했으니 더 박탈감이 컸다.
1번을 뽑은 SK는 당시 클리블랜드 소속이던 외야수 추신수의 영구 지명권을 얻었다. SK 외에도 3개 구단이 가장 원했던 카드였지만, SK가 발 빠르게 낚아챘다. 2순위 LG는 서울 연고 선수이면서 7명 중에 가장 나이가 어렸던 탬파베이 투수 류제국을 선택했다. 3순위 두산과 4순위 삼성은 이미 소속팀에서 방출돼 즉시 입단이 가능한 선수들을 골랐다. 두산이 전 뉴욕 양키스 투수 이승학, 삼성이 전 보스턴 투수 채태인을 각각 호명했다. 마지막으로 지명한 현대는 당시 가장 이름값이 높았던 콜로라도 투수 김병현을 택했다.
계약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송승준은 롯데의 우선 지명을 받자마자 이미 계약을 마친 상태였다. 그 후 꾸준히 롯데 선발진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최희섭도 지명회의 직후 한 달 만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팀에 복귀했다. 2009년 KIA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한 뒤 지난해 은퇴했다. 이승학은 계약 직후 2년간 두산에서 활약하다 허리 부상을 당해 2009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채태인은 곧바로 삼성에서 입단해 주전 선수로 성장했고, 넥센으로 이적한 지금도 팀의 주요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김병현은 5년 뒤인 2012년 넥센과 계약해 국내로 복귀했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다 2014년 고향팀 KIA로 트레이드됐다. 2013년에는 류제국이 LG에서 뛰기 시작했다. 군복무까지 모두 마친 뒤 홀가분하게 고향팀 유니폼을 입었고, 올해 주장을 맡고 있다.
이때 특별 지명된 선수들 가운데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선수는 이제 텍사스 추신수만 남았다. 당시 추신수를 지명한 SK의 권리는 영구적으로 유효하다. 추신수가 향후 KBO리그에서 뛰는 날이 온다면, 무조건 SK와 계약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추신수는 이미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텍사스와의 계약 기간도 아직 4년 넘게 남았다. SK의 특별 지명권도 아직은 금고 속 깊은 곳에 보관돼 있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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