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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Text Lk 16,1-9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 2023년 성탄절이 내일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기보다는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은 훗날 하나님 앞에 가서 물어봐야만 알 수 있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예수님의 탄생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학자들은 지금 달력으로 12월 25일부터 이듬 해 1월 6일 사이 정도로 좁혀놓았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도 ‘그리스도’라는 ‘크리스트’와 ‘예배’라는 뜻의 ‘마스’라는 두 단어를 합친 말이지 생일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단순히 탄생하신 것 자체만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 영광을 뒤로 하시고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친히 낮은 인간이 되신 그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의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널리 알리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성탄절에 믿는 성도들은 캐롤과 여러 가지 장식과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또한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일을 만들고 실천합니다.
우리들도 이런 성탄절의 의미를 확실히 알기 위해, 그리고 이 의미를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몸을 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최대한 크리스마스는 성대하게 지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 전날이며 대강절 네 번째 주일인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본문 눅16,1-9 말씀을 통하여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각 사람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2.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첫 번째는, ‘낭패당한 인생’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주인은 그 청지기를 불러놓고, ‘너에 대하여 내게 들리는 소문이 어찌 된 것이냐? 그동안의 품삯을 줄 터이니 받을 돈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서 가지고 오너라. 내 그걸 줄 테니 그걸 받고 그만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불의한 청지기는 속으로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라고 탄식합니다. 이것은 낭패한 꼴을 당한 인생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낭패는 원래 전설 속에 나오는 동물의 이름입니다. 낭(狼)은 뒷다리 두 개가 아주 없거나 아주 짧은 동물이고, 패(狽)는 앞다리 두 개가 아예 없거나 짧은 동물입니다. 이 둘은 항상 같이 다녀야 제구실을 할 수 있었는데, 꾀가 부족하지만 앞 다리 둘로 용맹한 낭과, 꾀가 있는 대신 뒷다리밖에 없다며 겁쟁이인 패가 호흡이 잘 맞을 때는 괜찮다가도 서로 다투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만저만 문제가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같이 낭과 패가 서로 떨어져서 아무 일도 못하게 되는 경우를 ‘낭패’라 합니다. 요즘은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어그러진 형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인생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놓은 것들, 건강, 지혜, 소유, 시간, 재능 등을 흥청망청 낭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들의 그런 행동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불의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이 무시된 목적을 위한 소비는 허비이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이 무시된 방법으로 시행되는 소비는 낭비입니다. 그런 허비와 낭비는 언제까지나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불의한 태도와 저지른 허비와 낭비는 반드시 책망이 따릅니다. 청지기 직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의 불의와 낭비와 허비가 용납되지 않는 때가 될 때까지도 그런 허비와 낭비를 계속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고발하시면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15,19-20)이라고 증거하신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도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3,13-16)고 인간의 완악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 감리교회의 창시자이신 죤 웨슬리와 동역도 했던 전도자요 훌륭한 선교사이며 유명한 부흥사인 횟필드는 ‘인간은 절반은 짐승이요, 절반은 마귀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멸망할 짐승처럼 본질적으로 어리석고 무익하며 마귀처럼 사악하며 부패합니다. 고치지 않아도 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으며, 개량하거나 개선하는 것으로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 것입니다.
흔히 유럽의 ‘신사도 정신’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덕적이고자 하는 인간성도 분명히 존재합니다만 신분과 부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부정부패가 신분사회나 왕조 시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분적 강제가 사라지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된 문명국가의 문명사회에서도 부정부패 소식이 거의 매일 TV 뉴스와 신문의 정치·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지구의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기존 행보를 포기하지 않는 국제사회의 현실도 봅니다. 정말 인간은 파멸의 종점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 인생은 어떤 지혜로운 판단과 결단을 내일 수 있을까요?
3. 성탄절을 하루 앞둔 대강절 4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두 번째는, 낭패한 인생이 한 가장 지혜로운 판단과 결정은 친구를 사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잘못을 저질러 해고되게 된 이 불의한 청지기는 불의한 방법이지만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힘을 다 동원하여 급히 친구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한 방법들을 잘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이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들은 딱 한 가지는 ‘급히 친구를 만든 것’ 그것입니다. 9절에서, 그 친구는 내 가진 재물이 다 없어질 때에 나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할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10-18절 말씀에서는 9절에서 말한 ‘불의의 재물’을 재물과 율법, 바리새인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재물이란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고, 13절에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16절과 17절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 맞지만 복음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불완전하여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이유로, ‘불의한’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다시 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불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인간, 불의한 지혜, 불의한 재물, 그리고 불의한 율법까지 모두 구원과 진리에 이르게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한계이고 사람 때문에 함께 신음하고 있는 세상의 아픈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놀라운 지혜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불의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좋은 친구를 사귀는 데 사용한다면, 그 행위는 칭찬들을 만한 행동이요, 아주 지혜로운 행위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묻고 다녔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 그들이 아주 먼 곳에서부터 찾아온 열정과 수고, 준비해 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 등의 선물, 이 모든 것들은 참 진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지식이요, 불의한 수고요, 불의한 재화입니다. 그런데 그 불의한 것들이 자기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수단이 되었을 때, 그 불의한 것들이 매우 유용한 것이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사용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들은 ‘불의의 재물’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취득했다는 면에서 뿐이 아니라, 그것에 의지를 하고 만족과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속을 것이기 때문에 ‘나쁜 재화’란 뜻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내세우는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불의한 재물’은 행복을 가져오는 것으로도,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도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것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는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동원하든 예수님을 친구로 삼는 데 사용하십시오. 그리하면 그 친구 예수님은 이 낭패한 세상, 절망스러운 세상,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당신을 구출하셔서 영원히 머무를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들이실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고 친구를 따라가며 친구에게 충성하십시다. 무한대로 감사하십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에 대하여서도 이런저런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있습니다만 그 모든 것들이 성탄 사역,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사역이 될 때 ‘메리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4. 성탄절 하루 전 날인 오늘 대강절 제 4주일에 듣는 하나님의 말씀 세 번째는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왜 모든 불의한 것들을 한 순간에 지혜로운 것으로 바꿔놓는 최고의 친구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9절 말씀을 다 같이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세상의 모든 좋다 하던 것들이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밝혀져서 절망하게 되는 날, 그날에 영원히 좋은 것들로 가득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는 처소로 가게 해주는 친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이런 능력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누구입니까? 인생이 사귀어야 할 정말 좋은 친구는 나를 영원히 살 수 있는 처소로 영접할 친구이신 예수님을 사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 친구를 소개할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불의한’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좋은 친구, 구원의 곳으로 인도하고 거기에 들어갈 수 있게 하며, 또 거기에서 영주, 즉 영원히 거할 수 있게 하는 친구를 소개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소개하는 친구가 누구입니까? 성탄절에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인생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떠나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인생이 죽음에 당도하였을 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죽음은 우리를 끝장나게 합니다. 상인은 ‘파산자가 될 때, 이젠 끝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조만간에 이처럼 실패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받던 평안과 즐기던 것들 모두 다 우리를 저버릴 것이며 살아있는 육신도 우리를 내동댕이칠 것입니다. 눅16장에 계속 이어져 나오는 19-31절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로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허무하게 절망적인 자리에 이르렀을 때, 영원히 복된 곳으로 들어갈지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을 보장받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예수님을 친구로 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당신을 친구로 삼은 자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먼저 가셔서, 지금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시다고 요14,2-3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천사의 무리가 그들을 그리로 데려가면 천사들의 합창이 거기서 그들을 영접하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다가 영광의 나라로 먼저 간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그들을 맞이해 줄 것입니다. 이 좋은 친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성탄절의 진실입니다.
여러분, 사실 예수님은 성탄절에 축하를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신 것이 축하받으실 일입니까? 천번 만번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요. 하늘의 영광을 뒤로 하시고 자신을 낮추사 사람이 되신 것이 어찌 ‘축하받을 일’이란 말입니까? 도리어 위로해 드릴 일이지요. 그저 고맙고 감사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만 반복하는 것이 맞습니다. 감사하는 것으로 끝내서도 안 될 일이지요. 오셔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를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늘 영광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태어나시기까지 하며 가르쳐주시는 그 구원의 도리인데 믿을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