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찰에 대한 개념을 접하기 이전, 사찰은 그저 내게 사찰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주 신륵사를 여행했을 때, 그렇게 아담해 보이던 신륵사가 영녕릉의 원찰이라는 점과 더불어 조선 왕실의 지원을 받아 대찰로 거듭났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신선했다. 오래전, 성북구에 자리한 정릉을 돌아봤을 때가 문득 생각났다. 당시에는 그에 대한 생각이 없어 정릉만 오롯이 산책길까지 돌아본 후 하산했었는데, 그 존재의 소중함을 알아보고 지체 없이 카메라와 함께 오랜만에 정릉 주변을 다시 찾았다.
가는 길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지만, 도심 한가운데 이런 유구한 시간을 간직한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낯선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때는 지금처럼 겨울의 매서운 추위 그 한가운데 자리했다. 수풀 대신 콘크리트들로 뒤덮인 건물들이 주변을 가득 채웠으며, 600년의 시간 그 깊이 대신 아담한 규모의 사찰은 오롯이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줬다. 이곳을 일부러 찾거나 거주민들이 아니라면 그 존재를 알기 어려웠던 사찰 아니 원찰. 흥천사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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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찰
사전적 의미로는 망자의 명복을 빌고자 만든 사찰이라는 뜻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조선 최초의 중전을 모시던 사찰임과 동시에 숭유억불의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실의 인물을 모셨다는 점이 당시에도 상당히 새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이유는 분명히 파악하고 있지는 않지만, 흥천사를 포함해 신륵사 등 조선왕릉 주변에 이런 사찰들이 자리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선왕릉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는 별개로 이곳들을 돌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솟구치는 요즘이다.
흥천사의 운명은 바로 옆에 자리한 정릉과 함께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본래 정릉의 위치가 지금의 이곳이 아니었던 것처럼, 흥천사의 위치도 이곳이 아니었다. 신덕왕후 강씨 사후 동쪽에 원찰인 흥천사를 짓게 됐는데, 그 해 8월에 천도회를 열고 직접 시주를 하는 등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170여 칸에 달할 정도로 대찰로 거듭났지만, 왕자의 난과 함께 정안이 실권을 장악하고 자연스레 태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며, 흥천사의 운명도 180도 바뀌게 된다.
도성 내 자리했던 정릉의 위치도 바뀌며, 170칸에 달했던 흥천사도 그 건물을 뜯어 명나라 사신들이 머물던 '태평관'을 짓는 데 사용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의 체면 때문이었는지 사찰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 세종시대에 들어 선종과 교종 통합 과정에서 선종 쪽에 속하게 됐으며, 중종 대에 이를 때까지 왕실의 끊임없는 지원을 받으며 정릉 바로 옆에 자리한 원찰로서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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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산군 집권 말인 1504년에 들어 흥천사에 화제가 나고 만다. 이로 인해 사찰의 전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됐고, 중종 대에는 그 사리각까지 불에 타며 폐허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흥천사는 그렇다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명맥을 이어오다 다시금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고쳤다. 그 덕분에 조선이 시작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었으며, 덕분에 당대의 분위기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일제에 의해 탄압이 이뤄지기보다는 새롭게 전각이 들어서며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 전한다. 조선시대 당시 앞서 언급했던 수난의 시기만 제외하면, 영겁의 세월을 무사히 넘겼다고 볼 수 있으며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한국전쟁 당시 피난생활을 이어가던 곳이라는 것도 검색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양파와도 같은 매력을 갖춘 사찰 흥천사. 그 느낌은 처음부터 시작해 흥천사에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고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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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위기
서울을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어 줄 법한 매력을 충분히 갖춘 곳이었다. 존재 만으로도 풍겨오던 그 이질감은 한 발치 떨어져 볼 때,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는데 조선시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춘 만큼 서울 광화문 주변에 자리한 고궁들에서 풍겨오던 그 분위기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의 고풍스러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사찰의 시간이 오래 지난 만큼 소유한 문화재의 종류도 꽤 됐는데, 검색을 통해 하나하나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추위를 피하고자 덮어 준 비닐포와 더불어 그 뒤쪽에 자리한 한옥 양식의 유치원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게다가 차가운 아침 공기를 뚫고 들려오던 스님의 힘찬 목탁 소리에서 청아함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는데, 잠시 그 소리에 잠겨 정릉에 잠들어 계신 신덕왕후에 대한 명복을 빌어본다. 문득 사후에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다가 한참이 지나고 본래의 지위를 회복하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론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매우 날씨가 맑았으며, 먹구름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으나, 잠시나마 그분과 연관된 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분을 위한 순간을 가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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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즈넉하면서도 적막감에 녹아들다 잠시 먼 발치에서 떨어져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외부를 충분히 돌아봤기에 내부의 그 모습도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굳게 닫혀있거나 내부에서 한창 스님께서 일을 보고 계셨기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더불어 다른 사찰에서도 진행중인 템플스테이가 이곳에서도 가능할까? 싶어 좀 찾아봤는데 진행되었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코로나 이후 예약할 수 있는 상품은 쉬이 찾아볼 수 없어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관람을 마치고 짧지 않았던 순간에 작별을 고하려 뒤를 도니, 어느새 해는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물론 이곳에 쌓여있는 시간에 비할바가 못 되겠지만, 잠시나마 이성계가 그녀를 그리워했던 마음과 더불어 당시 처해있던 정치적인 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쌓여 얼핏 바라 봤을 때, 다른 사찰들에 비해 심심해 보일수도 있을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 녹아있던 이야기와 얽혀있던 역사적 사실관계를 파악하니 모든 공간들이 새롭가 다가오는 경험은 언제 마주해도 짜릿했다.
날이 따뜻해질 때를 기다리는 요즘이다. 조선왕릉들을 돌아본 뒤, 서울 시내에 자리한 사찰들을 시작으로 원찰들도 하나하나 돌아볼 생각이 요즘 따라 상당히 강해졌다. 찾아보니 그 존재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그 조선왕릉 주변에 남아있는 사찰을 오롯이 향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에서 즐기는 여행의 그 순간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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