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더스 칼럼]
▲ 공기화 부산교육대 명예교수 |
부산사람들치고 영도다리나 구포다리 아래서 주워왔다고 놀림을 받으며 자라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부산에 오래된 다리라면 세병교, 광무교, 구포다리, 영도다리, 노하다리, 검정다리, 수영교, 썩은다리 등이다. 부산은 바다나 낙동강, 수영강, 동천, 보수천 등을 건너려면 다리가 필요했다. 다리가 있어 영도, 서면과 동래, 남구나 해운대로 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다리가 있어 보다 먼 곳에 가서 장사도 하고 사돈을 맺고 교류를 할 수 있었으니 지역의 고립을 면하고 인간 간의 소통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거제동에서 동래시장 쪽을 잇는 세병교(洗兵橋)일 것이다. 이 다리 근처에 있었던 동래읍성의 병사들의 병장기를 씻었던 곳이라 하여 세병교라고 하였다. 20세기 초에도 제법 긴 돌다리였으니 구포다리와 영도다리가 세워지기 전까지 부산의 대표적인 다리였을 것이다.
동천의 본류에 합류하는 지류는 총 5개다. 성지곡수원지에서 발원해 동천과 만나는 부전천(釜田川), 백양산 선암사 너들지대에서 발원한 동천(東川), 엄광산 계곡에서 시작하는 가야천(伽倻川), 범일6동 안창마을에서 발원하여 현대백화점, 평화시장 쪽으로 흘렸던 범내 또는 호계천(虎溪川), 금용산에서 발원하여 연지동으로 흘러 동천에 합수되는 전포천(田浦川)이다. 범일동과 서면을 이어주던 다리가 범천동에 광무교(光武橋)였다. 1785년 자성의 서문 앞 범천에 나무다리를 석교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호천교(虎川橋)의 근처인 것 같은 광무교의 관계는 뚜렷하지 않다.
1932년 3월 7일에 완공된 구포다리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어 ‘구포장교(龜浦長橋)’라고도 하였다. 이 다리는 서부 경남으로 이어주는 다리로 6·25전쟁 시에 전쟁 물자가 건너갔던 다리이다. 4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다리는 젊은이에게는 낭만의 다리였는데 청춘남녀들이 이 다리를 건너 대저의 과수원에 가서 봄에 딸기, 여름에 포도, 가을이면 배 밭에 놀러 갔다. 이 다리는 매해 여름마다 홍수로 뻘물을 뒤집어쓰다가 2003년도 ‘태풍 매미’에 상판의 한쪽이 잘려 강 아래에 수장되자 보존 여부를 논란하다가 끝내 철거되었다.
1934년에 세워진 영도다리(부산기념물 제56호)는 용두산의 끝머리인 용미산(龍尾山)과 영도 남항의 자갈마당을 연결한 연륙교(連陸橋)로 섬사람과 조선소 직원들을 나룻배 없이도 건너게 한 다리이다. 6·25전쟁 후에 피난민들이 다리 난간에 기대어 울다간 애환의 다리였다. 부산에 피난 왔던 피난민들은 이 다리 아래에서 비를 피하였고, 가난한 연인들이 이곳에서 만났던 다리였다. 이제는 영도다리를 지나면 2003년도에 세운 현인 동상과 노래비에서 ‘굳세어라 금순아’ 곡이 흘러나온다. 예전의 영도다리의 도개교(跳開橋)가 10시와 오후 4시에 들리면, 이때 다리 위에 쌓인 흙먼지가 쏴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예전에는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던 곳이다. 이 다리가 1966년 8월 31일에 마지막으로 하늘로 치솟고는 멈췄다가 2014년부터 롯데그룹이 영도다리를 더 넓히고서 낮 12시에 다시 들리는데 예전에 비해 인기가 덜한 듯하다.
노하다리는 범일동과 문현동을 잇던 다리였다. 범일동 자성대 아래 노하리에서 문현동 로터리 근처의 연동리 사이가 삼각주로 되어 있었다. 동천교가 세워지기 전에 남구와 해운대의 사람들이 부산장을 오갔던 다리였다. 호주장로교 선교사 예원배 선교사(Wright, A. C.)가 대연교회, 해운대교회 등을 지도할 때에 무개차를 타고 건넜던 다리였다. 이제 그 다리 곁에 있었던 대선소주공장의 자리에 아파트와 골프연습장이 들어서 노하다리 통로를 차단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검정다리 이름의 기원은 서너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첫째, 개항기 설치된 통나무로 된 다리의 부식을 막으려고 불로 까맣게 그을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둘째, 다리 인근 동대신동에 있었던 부산감옥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재판받으러 가거나 면회를 할 때 건넜던 다리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셋째, 다리의 주석으로 된 난간이 징발되면서 대신 만들어진 시멘트 난간 위에 검은 칠을 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중에 세 번째 설이 인근 고로들의 증언으로 보아 가장 설득력이 있다. 검정다리는 1940년 콘크리트로 만든 부민교(富民橋)가 세워지면서 철거되었고, 1987년 보수천의 하천 복개공사가 진행되면서 부민교까지 철거되었다. 1996년 7월 1일 중구청에서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검정다리를 추억하며 다리가 놓였던 자리에 ‘검정다리 추억비’를 세웠다.
수영로터리와 수비삼거리를 있는 수영교(水營橋)는 1959년에 착공했다고 하나, 그 이전부터 2차선의 튼튼한 나무다리가 있어 버스가 지나다녔다. 적어도 1940년에 센텀시티에 위치한 육군비행장(후에 수영비행장)이 완공된 이후부터 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썩은다리’는 범일동과 문현2동을 잇는 다리이다. 6·25전쟁 이후에 동천변에 피난민들이 많이 거주하였는데, 조방 앞 중앙시장에서 문현동이나 전포동으로 가려면 ‘썩은다리’를 건너야 했다. 다리 양안에 보신탕집 등 음식점이 즐비했고, 다리를 건너기 전에 서울의 황학동과 같이 골동품, 각종 중고 물품, 헌책방, 인근 신발공장에서 흘러나온 불합격 신발이나 운동화를 파는 곳 등이 있었던 ‘썩은다리시장’이 있었다. 그곳은 자유시장, 현대백화점 그리고 대형마트 등에 포위되어 사그라지면서 그 다리에 대한 추억도 잊혀져가고 있다.
첫댓글 많은 다리중 문현동의 무지개다리로 변모한 썩은 다리가 그리운 오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