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나무가 군수물자가 된 사연
벚꽃이 하나의 상징으로 각광 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일본 군대나 경찰에서 계급장으로 쓰이면서부터다. 일본인들도 중국인이나 한국인처럼 대체로 봄꽃으로는 부유함과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를 좋아했다. 정작 사무라이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15~16세기에는 벚꽃놀이를 가는 것을 과거 문벌 귀족들의 허례허식이자 잔재로 여겼다. 오히려 근대 이전 벚나무를 많이 심었던 민족은 조선인들이었다. 그 이유는 벚나무가 조선이 자랑하는 '활'을 만드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군수물자였기 때문이었다.
원산지가 히말라야 일대로 알려진 벚나무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도 많이 서식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제작된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의 경우에도 장판의 60% 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벚나무는 가로로 잘 쪼개져 목판을 만드는데 유용했으며, '화피'라 불리는 껍질은 활을 만드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를 살펴보면, 화피가 군수물자로서 평안도 강계 지역과 함길도 일대에서 공물로 바쳐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종 21년 3월 기사에는 당시 집의 벼슬에 있던 한승정이란 인물이 중종에게, “화피 같은 것은 또한 우리나라에서 금하는 물건인데 중국에 밀무역하여 우리나라에는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조선군의 핵심 무기라고 할 수 있는 활을 만드는 군수물자다보니 금수품목으로 지정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묘 · 병자호란의 수난을 겪은 뒤, 북벌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던 임금인 효종 때는 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기도 했다. 서울 우이동에 수양벚나무를 심어 나무는 궁재로 삼고, 껍질은 화피를 만들고자 했다는 기록이 뒷받침 한다. 당시 심었던 나무들 중 일부가 지리산 밑 구례 화엄사 경내에 옮겨 심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영조와 정조 연간에는 일본 통신사들에게 벚나무 묘목 수백그루를 가져오게 해 우이동 일대에 심게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물론 꽃구경 대상으로 심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일본보다 오히려 조선에서 전략물자로서 벚나무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벚꽃은 이른바 사무라이 무사도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굳어지면서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찬밥 신세로 전락한 반면, 일본에서는 전통화 중 하나로 사랑받으며 봄꽃의 대명사가 됐다.
- 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