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정에서
이른 새벽 해를 맞이하러 금강 변으로 나섰다. 참샘의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한솔정에 올랐다. 강 건너 비학산 봉우리 위로 붉은 빛이 감돌더니 태양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산봉우리 위로 쑥 올라왔다. 한솔정과 금강 변에 삼삼오오 모여 선 사람들이 환호를 했다. 누군가는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경건했다.
새해 첫날 금강 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니 문득 정동진에서의 해맞이 추억과 그녀가 생각났다.
이십년도 더 지난 일이다. 아홉 명의 지인들과 정동진으로 해맞이를 갔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정동진 바닷가는 몹시 추웠다. 해는 떠오를 기미도 없는데 바닷가 백사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 멀리에서 파도가 쉼 없이 밀려오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는 오들오들 떨면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하늘이 붉어졌다. 서서히 더욱 선명한 빛으로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일행 중 한 사람이 모래 백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아 오열했다. 그녀는 가슴을 치면서 울었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울음이 당황스러웠다. 사연을 듣고 나서야 알았지만, 늘 밝고 명랑하던 그녀한테 그런 아픔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아들 선호사상이 심했는데 그녀는 딸만 셋을 두었다. 그녀의 시댁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재산을 다른 형제에게만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신도시 개발로 하여 땅값이 많이 올랐지만, 손녀딸은 시집가면 남의 집 식구가 된다면서 그녀의 딸들한테는 땅 한 평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대를 이을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이 서럽고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더욱이 의논도 없이 재산을 다 넘겨버린 시부모님이 야속하고 일을 그렇게 만든 손윗동서가 얄밉다고 했다. 그녀가 시부모님을 성심껏 모셨는데도 재산 앞에서는 모질게 하시니 마음에 상처가 컸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나는 감히 누구의 도움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남편과 나는 가난한 집안의 맏이로 태어나 부모와 형제까지 보살펴야했다. 욕심 낼 땅 한 평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시부모님과 시동생들을 책임져야했다. 그래도 숙명으로 여기며 묵묵히 감내하고 살았다.
나는 하소연하면서 울고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에게 부모와 형제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 어깨가 무겁지는 않아서 좋겠다고 했다. 일행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그녀는 울음을 그쳤다.
일행이 그녀를 달래는 사이, 수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태양의 발그레한 미소에 젖어 하늘도 바다도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따사로운 햇빛이 추위에 언 내 몸을 녹여 주었다. 태양이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때 문득 부모님이 태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햇살처럼 따뜻한 사랑을 주시는 부모님이 곁에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녀의 얼굴에도 햇살이 가득했다. 차라리 그녀 시부모님한테 재산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신도시개발로 하여 땅값이 많이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욕심을 내지 않았을 것 같다. 가난한 집안 형제들이 우애가 좋다고 하듯이 형제애에 금이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 집안처럼 유산 문제로 갈등을 겪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나누어 줄 재산이 없어서 형제간에 다툼이 없도록 해 주신 양가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곤 한다. 이제는 다 제몫을 하고 사는 시동생들의 얼굴을 보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없는 가정에서 고생하며 자랐지만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고맙다. 좀 부족하면 어떠랴. 사이좋게 서로 아끼고 보듬으며 살면 되지. 이 나이가 되니 힘들었던 날 들마저도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다. 아들만 위하던 세상이 아들 딸 구별하지 않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오히려 요즘은 딸이 최고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딸들이 부모에게 살갑게 하니까 그런 것 같다.
딸만 셋이라서 슬퍼하던 그녀는 딸 셋과 더불어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참기 힘들만큼 슬프고 괴로운 일들도 살다보면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 같다. 그날, 그녀는 정동진 바다의 해돋이를 보면서 모든 서러움을 다 씻어내고 마음의 자유를 얻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위를 올려다보지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아야한다고 하시던 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사랑하는 딸이 세상을 살아감에 상대적 빈곤이나 상대적 박탈감으로 괴로워하지 말고 마음 편히 살아가기를 바라셨기에 하신 말씀이었던 것 같다. 또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고 도우며 살아가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두루 비치며 솟아오른 태양처럼 늘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번뇌와 욕심으로 가득한 내 마음을 햇살에 씻어내고 아름답고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다짐하면서 한솔정을 내려왔다.
어느새 태양은 중천에서 비학산과 금강을 비추고 있었다. 해는 내일도 비학산 봉우리 위로 변함없이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