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소풍 가는 날은 무척 피곤 했었다는 기억뿐이다..
종일 걸어야하고.. 산에 올라가 땡볕에 줄 맞춰 않아서
앞에 나와 떠들어대는 광대들에게 웃음을 팔다가
또 그렇게 줄지어 돌아온 기억뿐...
나는 소풍가기 전날의 흥분된 마음을 아직도 발견한다.
몇 일 전 서영(큰딸애)이의 만 8세가 되기 일주일 전,
서영이는 엄마를 졸라 생일파티를 요구했다..
물론 작년에 엄마가 약속한 "내년에는 꼭 생일파티를 해 줄께"
라는 엄마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은근히 내 눈치를 싶피다가 나의 긍정적인 눈빛에
초대할 인원을 5명으로 제한한 후 허락을 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간 녀석은 온통 파티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
무엇을 할 것인가 ?
선물은 무엇을 받을까 ?
친구들에게 Return 선물은 무엇을 줄까 ?
아내는 거금(?)을 들여서 생일파티를 준비했고
서영이는 학교친구(외국인) 4명, 교회친구 1명의 초대장을 만들고..
이윽고 파티하는 날이 밝아왔다..
평소 7시 30분정도에 깨워야 일어났던 녀석은
새벽 4시쯤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 입고 침대정리를 하고..
않아서 T.V 시청을 하고 있었다..
나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소풍가기 전날처럼 흥분되는 날은 없었다는 기억이 남는다..
민휴 선배님 !
좋은 기억만 남기세요..
--------------------- [원본 메세지] ---------------------
오늘은 우리 향토부대 31사단에 소풍을 갔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천곡중학교 1학년 전교생을 인솔하여 간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 보면 소풍이고 31사단 쪽에서 보면 부대개방 행사입니다. (처음에 오늘이라고 했지만,실제 이글을 쓰는 오늘은 the day before the last day of october, the second last day of october,잊혀진 계절이고 소풍 간날은 10월 26일 지난주 금요일 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5반 수업들어가니 좃선일보에 5반 아이들이 105밀리 포 주위에 모여 설명듣고 있는 것이 나왔다고 술렁이길에 나도 덩달아 보다가 좃같은 조선일보 욕하고 열받았지만)
그런데 선생이 되어 31사단 정문을 버스 열 대를 대절하여 통과해 갔는데 이게 그렇게 신기한 겁니다. 여기에 정말 이유가 있지요. 31사단은 그 암울한 시대에 더욱 나에게 암울한 삶을 살고 있음을 기록해준 곳이거든요.
1981년은 모두가 알다시피 5.18이 었었던 해의 다음 해입니다.국가적으로도 특히 광주 사람으로서도 모두 엄청난 충격과 좌절을 겪고 난 직후, 또 충격과 좌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때였지요. 그러나 저는 그보다도 우선 저 개인적으로 너무나 처참한 절망에 빠져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1976년 고1 때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신 후 시골 면에서는 그래도 반듯하게 새로지은 흙기와 집에 3.40 마지기씩 되는 논과 밭, 그리고 네군데의 작은 산, 우리 집을 짓고(1966년) 난 후 우리 집 마당에서 직접 지어 그날 바닷가로 동네 사람들이 달구지에 싣고 가다 동네 앞에서 우리 동네에 와있던 전경들이 축하포를 3발이나 쏴올리기도 했던 새 배 한 척, 고막 양식장과 김양식장, 그리고 내 위로 3명의 형님 4명의 누님들로 둘려쌓여 행복하기만 했던 저의 동네서 귀한 막둥이인 유년 시절은 박살이 나고 만 것입니다.
그 때는 나로서는 무슨 말인지도 몰랐지만 아버님께서는 항상 막둥이를 앞세우고 논과 밭 또는 바다에 나가 일하시면서 "내 막둥이는 유학까지 보내줄란다." 했었지만 광주로 고등학교를 온 다음 나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하숙도 못하고 계림동에서 자취를 하며 굶기를 먹듯이하며 향수병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됬으며 방황과 좌절로 점철된 나의 생활은 그후 3수 후에 겨우 밥얻어 먹을 곳이 있는 목포로 향하게 했는데 또 직전에 겨우 광주교대에 턱걸이 하여 입학해 놓고 목포로 간 나는 돈 안들고 다녀 빨리 돈 벌 수 있는 학교를 마다하고 왔다고문전 박대를 당하여 또 떠돌이 tramp, vagabond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아시다시피 대학생들에게 10일 입영이라하여 10일동안 군부대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게 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해 5월 초순에 31사단으로 10일 입영을 갔는데 정말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말그대로 고문관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가장 늦게 집한, 가장 늦게 밥먹기, 가장 불량한 복장, 가장 단정하지 못한 관물정리, 순간순간 이어지는 나의 부대생활 부적응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수많은 지적사항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런다고 이지경까지 되어야 하겠습니까.
마지막 퇴소하는 날은 토요일 이었던 것같습니다. 그날은 특별한 훈련은 없고 아침을 먹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관물을 반납하려고 보니 아니 또 군복 바지가 하나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급한김에 막사 뒤에 널려있는 훨씬 색깔이 푸르른 군복 바지를 훔쳐다 척 정리해 놓고 연병자에서 딴전을 피우고 있는데 소리를 고래고래지르면서 어떤 상병녀석이 내 번호와 이름을 불러 가보니 내가 훔쳐온 바지를 보이며 (아 바지 고리 있는 곳에 노랗게 그의 이름이 틀로 박혀있더군요)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마지막 퇴소하는 날이라 용서 받고 내무반에 와 대기하고 있으니 구대장이 와서 전남관(퇴소식강당)으로 집합하라고 하는 데 아니 내 번호와 이름을 부르지 뭡니까. "195번 김민휴 너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아! 나는 487명 중에서 유일하게 지적사항이 넘쳐 낙제 점수를 받고 다음 재교육 대상자로 분류되어 퇴소식에도 못가게 된 것입니다.
그후 9월 초에 나는 또 다시 31사단을 찾게 되었습니다. 10일 입영 재교육을 받으러. 내 삶의 근본적이 원이이 해결되지 않은 나는 여전히 똑같았으나 5월에 왔을 때 알았던 내무반장들과 조교들 덕분으로 겨우 이번에는 소정의 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잠시후 11월 14일 방위 소집훈련 통지서가 날아와 나는 결국 그해에 31사단을 세 번 들어가 훈련을 받게 되는 기구한 운명의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사건같은 것이 아니고 나의 젊은 청년시절의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들을 드러내 주는 사진 한 컷정도의 장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후로 10여년 동안 내게 닥쳤던 암울한 날들은 나를 거의 폐허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영내에 도착해서 우리는 정해진 안보관, 간단한 비행기 박격포 등 전시 무기를 구경하고 큰 연병장 옆에 있는 연병장 만큼 큰 잔디밭에서 반별로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놀았습니다. 그 전통의 수건 돌리기도 하고, 나는 걸리고 말아 다쇤 목소리로 그야말로 한물 간 옛날 노래를 불렀습니다.
갑자기 최근 읽은 시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소풍
풀밭 위에서 식사를 했다
바구니를 열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바구니는 금방 비었다
풀밭 위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기타를 떨어뜨렸다
풀들이 이리저리 쓸려
기타를 찾을 수 없었다
기타 없이 노래를 계속했다.
풀들이 자라
노래를 덮었다
풀들이 자라
노래 위를 떠도는
잎술을 덮었다.
<이수명>
아이들은 풀밭에 여기저기 앉아 싸온 김밥을 먹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엄마들 두분이 싸온 갈낙탕을 먹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내 어머니께서 초등학교 봄 소풍 때 싸오신
삶은 왁새기(갑오징어) 허연 살을 초장에 찍어 먹고
"그 이름 아느냐 무적에 용사들....."
아무 것도 모르고 월남전 파병 용사들의 부대 노래를 불어 온 선생님과 동네 사람들에게 엄천 칭찬 밨았던 초등학교 1학년 소풍이 떠 올라 울적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내게 암울한 시절 더욱 굴종감과 비굴한 복종감을 주었던 31사단, 오늘은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선생이 되어 찾았습니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옛날 그 모습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더군요.
사실 나의 옛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합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세월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겨 놓고 싶지 않았던 때문인데 이 것은 내가 글 쓰기를 싫어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정확한 기억으로는 남아있지 않지만, 잠재의식 저 밑에 남아서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할 때가 많지요.
이제 31사단도 내게 슬픈 기억을 주지 않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1. 시월의 마지막 밤 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