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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좌담 : 변화하는 한국사회와 한국작가회의의 전망
일 시 : 2008년 1월 21일(월) 오후 5시 <이명원(이하 이)> 한국작가회의로 단체명도 바뀌고, 변화된 시대에 작가회의가 어떤 정체성과 지향 속에서 대표적인 문인단체로서의 방향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전현직 사무총장을 모시고 얘기를 들어보려고 대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김형수 총장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사무총장 체제로 전환하면서 작가회의 안에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변화의 중심에 전임총장으로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회고도 있을 수 있고 또 공인으로서 작가회의에 대한 생각들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형수(이하 김)> 글쎄요, 살림 부도내고 나가서(다 같이 웃음) 많이 힘들었어요. 다행히 뒤에 오시는 분이 선배님이시니까, 굉장히 죄송하면서도, 어쩌면 수습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큰 의지가 되고, 그러면서도 또 마음이 아파요. 4년 전 제가 섰던 자리를 돌이켜보면, 우리 작가회의가 내용상 당대성을 획득하는 것이 절실한 시점에서 그에 합당한 모양을 만들지 못하는 대신에 차선책으로 제도 변경을 선택해서 그것으로 세대교체를 시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2004년 11월 30주년 행사할 때, 이것을 끝으로 새로운 주역들이 들어서서 시대에 맞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이제 1세대 어른들에 대한 불평이나 늘어놓을 시점은 다 지나가 버렸다, 그분들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들이 당대적으로 의미 있는 대열 안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했지요. 내용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대교체를 잘하느냐가 사무총장제 전환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던 건 사실입니다. 많은 분들이 조언하고 충고했던 점도 사무총장제의 정착이었는데 막상 일을 하면서는 민족문학의 자기확장의 방향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랄까 하는 것에는 적극성을 보인 반면, 안정된 구조를 확보하고 정착시키는 것에는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이 뼈아픈 실책으로 느껴집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작가회의의 체제가 정비된다거나 체질개선이 된다거나 변화의 확고한 방향성이 정착된다거나 이건 어느 조직이나 다 힘들 것 같은데요. 그래서 상투적이긴 한데 신임총장의 어깨가 무겁다는 느낌이 듭니다. 작가회의가 지난해에 여러 가지 논란을 거쳐서 명칭개정이 됐고, 도종환 선생님께서 초대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게 되셨는데요, 어떤 계획과 부담감 속에서 출발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사무총장제 전환과 명칭변경의 의미 <도종환(이하 도)> 지금 말씀하신 대로 작가회의가 지난 1년 동안에 명칭변경, 개정이 아니라 명칭변경과 관련해서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문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에 따른 대립을 보인 적도 있었던 게 사실이죠. 1년 동안 쭉 논의과정에 참여하면서 양쪽 얘기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들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회원들에게 양쪽 입장을 공평하면서도 자세하게 전달하기도 했고,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젊은작가포럼의 의견도 들어보고, 고문·자문위원의 의견을 들어보고, 또 지역별 의견도 전부 수합했어요. 지역에서는 이사회를 하거나 총회를 하거나 전 회원에게 전화로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지요. 결국은 우편투표까지 가서 명칭변경을 반대하는 의견이 대략 25% 정도 되었고 찬성하는 쪽이 75% 정도 나온 것은 다 알고 있잖아요? 그 이야기는 조직이 창조적으로 쇄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75% 정도 되고,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민족문학의 가치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25%가 된다는 걸 보여준 거라고 생각해요. 그 두 의견들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법고창신’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근본을 지켜나가되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회원들이 투표로 내려준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그래서 이제 새롭게 조직의 책임을 맡으면서, 이런 것들을 대립이나 분열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단체를 사랑하는 두 개의 정신이 다 같이 들어 있다고 보고, 지금은 화합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조직의 화합과 일을 할 수 있는 재정적 토대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일이 당장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적자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재정 구조를 해결하는 방법이 돈을 끌어오거나, 아껴쓰거나 둘 중에 하나지요. 아니 둘 다 해야지요. 그래서 저부터 월급을 받지 않고, 사무처의 상근인원을 한 사람 줄이고 이렇게 인건비 먼저 줄이는 긴축운영을 하면서 회원들에게 특별회비를 부탁드리고 있어요. <이> 쇄신과 새로운 가치 창출, 그런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또 작가회의가 현실적으로 처해 있는 정세랄까 상황이랄까 하는 것이 그렇게 호의적인 것 같진 않습니다. 새 정부가 아직 출범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작년에 작가회의 명칭변경 전후로 해서도 그렇고 보수언론들이 보여준 태도라든가 또 최근에 보면, 이명박 인수위가 출범하면서 가령 통일부를 해체시키고자 하는 내용까지 등장하면서 특히 진보진영이라고 할까요? 문화진영에 대해서도 일종의 문화권력을 휘둘렀던 거 아니냐, 그런 차원에서의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 경제적 지원의 축소가 필요하다 등등 제가 볼 때는 이념적 흑색선전 비슷한 여론들이 조직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랬을 때 작가회의 차원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공식적인 대응이랄까, 치밀한 준비랄까, 문제의식이랄까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전현직 총장님 모두가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시면서 활동을 해오셨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기초예술의 중요성, 민족지성의 건강성 <도>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공개적으로, 자료를 근거로 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다분히 감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측면이 있다고 봐요. 전횡을 저질렀다는 둥, 독식을 했다는 둥, 예산을 독점했다는 둥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잖아요. 올해 작가회의가 문화예술위원회에 신청해서 받아낸 사업이 딱 두 건에 4,200만 원이에요. 『내일을 여는 작가』 계간으로 네 번 내는 데 2,000만 원. 그리고 동구권의 세계작가와의 대화에 2,200만 원. 이렇게 사업 딱 두 건만 지원받았어요. 문인협회가 받은 사업 건수와 액수가 올해만 따져도 더 많을 겁니다. 민예총이 처한 현실과 예총이 처한 현실을 재정적으로 비교해보세요. 예총처럼 몇 백억짜리 예술인회관을 건립하지도 못하고 다른 건물에 한 칸 정도 전세를 들어 있는 민예총의 재정적 구조를 비교해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실관계를 따지고 들어가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인적 청산까지 얘기를 하더라고요- 감정적으로 보입니다. 현기영 선생님이 문예진흥원장을 맡은 적이 있는 걸 가지고 작가회의나 민예총이 다 독식한 것처럼 말하지만, 수십 년간 문인협회 출신 문인이 -이렇게 따지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라 생각하는데- 계속 맡다가 처음으로 맡았고, 김병익 선생님처럼 중립적인 분이 맡은 것까지도 우리가 독식을 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아요. <이> 김형수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질문을 좀 나누어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하에서 한반도의 진로를 작가로서 어떻게 예측하고 바라볼 것인가 하는 면과 문화권력의 차원에서 지금 제기되는 면 두 가지로요. 후자를 먼저 얘기하자면, 저는 기본적으로 1990년대 이후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주요 가치가 좌나 우로 표현되는 세계관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그러니까 이미 냉전의 시대를 벗어났고, 가혹한 냉전하에서도 민족문학은 다른 예술장르와는 달리 필드의 주류를 차지했어요. 순수-참여 논쟁에서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논쟁에서 압도적 우위와 미학적 정당성을 확보했고, 수정되어야 마땅한 것들이 대부분 수정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 정권에 따라서 불평스런 것이 없을 순 없겠지만 권력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을 때 오히려 그런 유형의 낡은 대결을 무시하면 어떨까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총, 민예총 대립, 혹은 작가회의, 문인협회 갈등 같은 관심은 되도록 줄이고, 새로운 상황에서 문학이 해야 할 당대적 사명이랄까 하는 것에 좀 더 주목하면 어떨까? 사실 중요한 주제들을 지난 10년 동안에도 많이 놓쳤잖아요. <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지상주의 내지는 발전주의노선 -아주 낡아빠진 노선인데요- 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는데, 대체적으로 볼 때는 소극적인 차원에서의 네거티브 담론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제발전주의가 아닌 다른 가치나 지향이 뭐냐 하는 부분에서는 사실 구체적인 설계도라든가 인식론적인 사고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아무래도 이런 성장주의노선의 폐해를 가장 직접적·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이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런 점에서 특히 작가들 같은 경우가 이 부분에 대해서 준비된 답변들을 미리 제출하지 않았던 것이 굉장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고, 미학적인 대응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 도종환 선생님께서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말씀을 하신 바 있는데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도> 지금 이명박 정부가 통일부를 폐지하려고 하는 논리나 지극히 시장중심적이고 경쟁제일주의적인 논리로 교육을 바라보는 것이 일관된 맥락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실용주의적 접근이라기보다 물질중심주의, 자본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북한을 바라볼 때도 이익이 되면 거래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래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겠지요. 북쪽에 있는 사람들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고, 동포로 바라보고, 함께 살아가야 할 민족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교육에 대한 논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는데, ‘인재만 기르면 된다’는 것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가르치고 키운다’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이거든요. 교육이 추구하는 목적이 사람을 어떻게 사람답게 키울 것이냐 하는 데 있는 건데 사람을 하나의 도구로만 보는 거죠. 도구적 가치, 사용적 가치로만 교육을 바라보는 거예요. 경제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자원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기능주의적인 관점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논리지요. 재벌의 돈이든 기업의 돈이든 막 끌어들여서 자립형 사립고를 몇 백 개씩 만들어내고 나머지 학교가 어떻게 되든 공교육이 어떻게 되든 필요한 인적 자원만 길러내서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써먹고는 또 바로 버리잖아요. 실용주의, 탐욕의 재생산이라는 일방통행 이런 식의 관점이 여성부를 폐지하거나 축소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죠. 여성과 어린이와 북한의 형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거예요. 사람 중심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질중심주의적 관점으로 보고, 이현주 목사님의 표현대로 하면 자(資)를 본(本)으로 삼는 태도가 심화되는 거예요. 자본중심주의가 천민적으로 훨씬 더 심화되면서 자본, 물질 이런 것들을 삶의 중심에 놓으려고만 하는 가치지향을 가지고 있는 거죠. 우리 삶의 중심이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거죠. 무시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작가들이 할 일이 많아질 거라 생각해요. 환경문제까지 포함해서 할 일이 굉장히 많아지게 될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작가회의가 문학적 긴장을 되찾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이명박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두 가지 점이 걱정됩니다. 우선 하나는, 원시시대는 인류 모두가 굉장히 어렵게 살았잖아요. 과거의 인류사가 한편으로는 부의 축적의 역사이기도 한데, 인간이 부를 축적해서 그 재화를 자아실현에 사용하느냐 아니면 자기과시에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굉장한 차이일 거란 말이죠. 세상을 일도 안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열심히 일해야죠. 그런데 그렇게 산 결과가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된다면 얼마나 불행한 세상이 되겠어요? 우리가 먹고살기가 너무나 어려웠을 때에는 수없이 많은 꿈과 이상이 있어도, 일테면 음악적인 것들, 문학적인 것들, 그 외에 여러 가지 도달하고 싶은 이상이 있어도 접근할 수가 없었단 말예요. 땀 흘려 일한 부가 바로 거기에 사용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우리 사회는 지난 100년 동안 가파른 속도로 변화해오면서 바로 여기에 대한 좌표를 잃었어요. 최근에 나오는 조선시대 드라마 같은 것과 비교를 해도 개인의 삶의 내용 자체가 굉장히 천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어요. 그래 놓고 21세기를 삶의 질을 추구하는 문화의 세기고 창의의 세기라는 얘기를 계속하는데 거기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이 없이는 이 사회는 계속 탐욕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일방통행으로 가게 될 겁니다. 조금 전에 도종환 선배님이 교육을 예로 지적을 하신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사실 이명박 정부의 것만은 아니고 지난 10년한테도 퍼부어야겠죠. 다만 지금은 그에 대한 일고의 자의식도 없이 마구 진행되는 양상이라는 거죠. <도>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잖아요. GDP만 가지고도 세계 11위, 각종 수치를 볼 때 10위권에 진입한 경제강국이기도 하고 조선이라든가 자동차 같은 경우 1위, 5위 하는 경제강국인데 행복지수가 102위라는 거죠. 이 갭을 어떻게 줄일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주요 관심사이어야 해요. 부를 더 증대하면, 7%성장을 이룩하면, 4만 불 시대가 되면 행복해질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끌고 가는 경제제일주의에는 아주 중요한 것들이 빠져 있어요. 이 갭을 어떻게 좁힐 것이냐가 우리가 고민해야 될 과제인데, 이걸 못 보고 엉뚱한 데로 가고 있단 말이에요. 7%성장을 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끝없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어떻게 진정으로 가치 있게 살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학적, 인문학적 담론을 만들어가는 것이 작가들과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 이명박 정부가 하는 게요, 제 개인적으로 봐도 굉장히 이상한 불균형들이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정부조직을 개편하면서 과거의 박정희 시대의 경제기획원을 연상시키는 듯한 국가주도형의 경제부서를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걸 시장논리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외치고 있거든요. 시장주의와 국가주도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행동들을 경제발전이라는 구호 속에서 융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자체가 사실은 내부적으로도 붕괴하기 쉬운 전략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을 재화라는 경제적 용어로 전환시키면서 인간됨의 문제 같은 경우가 과격하게 실종되고 있는 상황이죠. 특히 젊은 세대 같은 경우 88만 원 세대로 명명되는 데서 알 수 있듯 자기 삶의 존재가치를 획득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지고, 또 어떻게 보면 왜곡된 파우스트적 상황에 빠져 있는 것 아닙니까. 다른 가치에 대한 관심은 실종되고 오직 일자리, 정규직 이런 것에 호소하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사회의 미래전망이랄까 연속성이랄까 이런 것들이 과격하게 단절되는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사실 문인들이야말로 이러한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통일부 폐지… 전문성 부재, 아마추어적 대북인식 <김> 통일부 문제는 참 안타깝습니다. 최근에 해양수산부 문제로 국회의원 한 분이 전면전을 하다시피 문제제기를 하더군요. 통일부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한 것인데 누구도 본격적인 항의를 안 하고 있어요. 통일부에 대한 새 인수위 측의 발언 수위를 보면 도대체 북에 대해 아는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는 그 어떤 유형의 사업보다 남북사업이 더 어렵습니다. 60년 동안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서로 만들어왔기 때문에 이쪽에서 보내는 미소와 눈물 한 방울이 저쪽에 닿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수없이 많은 것으로 계속 걸러져서 왜곡되고 굴절됩니다. 엄청난 노하우가 아니면 주고 싶어도 줄 수 없고, 같이 일하고 싶어도 같이 일할 수 없어요. 남북간의 소통 자체가 이렇게 까다로운데 그것을 저렇게 아마추어적으로 논평하면서, 지금 표현하는 바로는 통일부의 가치들을 없애는 게 아니라 확장하려고 한다는 답변을 하거든요. <도> 국민이 이명박 정부를 선택해서 남북관계, 북미관계가 결국 또 꼬이는 관계로 가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미국에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서 북미관계를 잘 풀어보려고 했을 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고, 또 우리 쪽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잘 해결해보려고 했을 때 미국에 부시 정부가 들어서서 북미관계를 꼬이게 하고. 그러다가 이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려고 할 때 만약에 남쪽에 진보적인 정권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민족문제가 잘 풀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오는 것인데 그렇지 못해서 또 꼬이는 상태가 반복되는 거죠. 그 상징적인 사건이 통일부가 존폐위기에 놓이는 상황까지 간 것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는 비체제적 존재다 <이> 이명박 정부가 대북문제에 있어서는 굉장히 비실용적인 태도로 접근하고 있는데요. 북한문제와 관련해서 가지고 있는 씽크탱크라고 할까요, 이게 굉장히 협소하고 편향적인 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조갑제 씨와 같은 분들은 북에 대한 혐오감 내지는 경멸감에 가까운 반북주의가 굉장히 강한 분들이죠. 사실은 그게 소수세력의 생각이라면 그런대로 반대 자유가 존재하니까 용인할 수는 있겠는데, 이게 국정운영 철학으로서 반북주의가 제기된다면 민족사의 진로와 관련해서도 어렵고 위험한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편에서는 남북문제에 있어서 흥미롭다면 흥미롭고 곤혹스럽다면 곤혹스러운 문제가 사실 민족문제의 중요성이 점점 주변화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이른바 민주노동당을 포함하여 진보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데서도 반북주의가 강렬한 것 같아요. 좌파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나 집단 가운데서도 북한문제에 대해서는 냉정성을 잃는달까 하는 면이 있고 우리 사회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극우적 반북주의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 두 노선이 사실 서로 다른 형태인데 쌍둥이처럼 작동하고 있는 측면이 있어서 민족문제나 민족담론의 측면에서 설득력 있는 대안 제시가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김> 여기서 작가의 견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정환 선배님의 시 중에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쟁의 반대말을 평화라고 인식하는 습관을 가지는 경우가 체제적 사고를 작동시키는 쪽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체제는 현 제도를 지키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체제의 문제점을 극복하겠다고 대안을 내세우며 나서는 사람들도 있지요. 일종의 잠재적 체제죠, 대안적 체제고. 이 부분이 개인의 영혼과 달라지는 부분이라 생각돼요. 이게 분명히 민과 다른 부분입니다. <이> 작가는 비체제적 존재다,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습니까? 시선을 조금 돌려서, 남북문제를 얘기했지만 한편에서 보면 기초예술의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신보수주의 정부다 보니까 예술조차도 시장에 내다 파는 방식의 시각 속에서 앞으로 문화예술정책을 해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기초예술에 대한 재정 지원 축소는 물론이고요, 예술적 가치 대신에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강화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이런 현실 속에서 문학의 위엄이랄까 혹은 기초예술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역능성이랄까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보존하면서 강화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 굉장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응해갈 수 있을 것인지. 사실 작년 같은 경우도 왜 복권기금을 기초예술의 재원으로 활용해야 하느냐 하는 관료적인 반발들이 있었고, 항상 문화 관련 예산을 심의하고 평가하는 과정 속에서는 문화예술위원회가 정부평가에서 최하위에 있을 정도로 정책능력이 무능하다는 식의 발언들이 빈번하게 제기된 것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도> 문화와 예술을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니까 투자한 만큼 돌아오는 게 없다고 보는 거죠. 쏟아부었는데 어떤 성과가 있었느냐를 수치와 통계 중심으로 바라보면서 평가하는 것도 문제이고, 평가에서 최하점을 받았으니 기금을 축소한다, 이런 식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낮은 차원의 예술 인식이에요. 미국에 대공황이 찾아왔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문화예술에 더 투자를 했어요. 투자를 하면서 문화예술인들을 살리는 정책을 펼쳤어요. 대형 문화예술사업 ,공공미술프로젝트 같은 것을 통해서 예술을 살렸지요. 건물을 새로 지으면 건물 가격의 1%에 해당되는 돈으로 조각 작품을 세우게 한다든가 하는 정책을 그때 만들었어요. 몰가치의 위기 앞에 선 기초예술 작년에도 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부문 예산이 계속해서 줄어들었어요. 복권기금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요, 문학에 배정되는 예산을 복권기금 같은 데 의존하지 말고 제대로 된 당초 예산을 설정해서 어떻게 기초예술을 살릴 것인가, 기초예술 중의 기초예술인 문학, 문학을 하는 문학인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이런 것들을 고민해야 돼요. 지금 일본소설이나 외국소설만 읽히고 우리 소설은 안 읽힌다고 걱정을 많이 해요. 김훈이나 공지영, 황석영 정도 극히 몇 명을 제외하고는 잘 안 읽히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시, 소설 같은 예술들을 살릴 것인가, 계속 시장에만 맡기면 방법이 없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 사실은 기초예술의 위기에 관한 문제는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고 국민 전체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난 100년 동안 가치지향성을 상실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쪽으로 일방통행식으로 달려오면서 가치의식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좌절 한 번도 없이, 시련 한 번도 없이 인생을 살아내는 생은 없단 말이에요. 좌절을 어디서 배우고 꿈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삶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뭘 통해서 배우겠어요? 바로 이 부분이 문화의 역할인데, 문화·예술 중에서 산업화되는 영역은 주로 오락과 유흥에 관련된 것들이고, 그것들의 실제 젖줄이 되는, 불안한 존재의 근원적 가치를 형성하는 것들을 우리가 기초예술이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이것들은 유흥성이나 오락성이 약해서 시장에다가 맡기는 것은 장터 한가운데다 꽃밭을 방치하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시장은 이윤의 전쟁터이기 때문이죠. 존재의 근원적 외침으로부터 흘러나와야 될 예술을 시장에 맡겨놓으면 어떻게 되냐면 유흥과 오락적 요구를 계속 수용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그쪽으로 계속 변질돼가서 한 시대의 문학의 타락이 예술의 타락으로, 예술의 타락이 문화의 타락으로, 문화의 타락이 그 시대 전체의 타락으로 가게 합니다. 미덕과 위엄에 의한 서열화가 중요하다 <이> 방향을 돌려서, 작가회의 내부적 문제를 여쭤보고 싶은데 작가회의 구성원이 상당히 확대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정체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적인 이견도 존재하는 것 같고 또 그런 이견의 존재에 대해 굉장히 고소해하는 외부의 사람들도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편에서는 작가회의가 분화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외부적 시각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작가회의의 회원이지만 다른 방식의 소모임도 늘어나고 있고 몇몇 조직 같은 경우는 사단법인 형태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조직도 있는 것 같고 작가들, 노동문학 계열에 속했던 작가들은 또 다른 작가모임을 만들기도 하는 건데 그랬을 때 진보적 문인들의 단일조직으로서 작가회의의 위상이나 정체성이 변하고 있는 것 아닌가, 기능과 역할이. 일종의 작가회의가 네트워크조직으로 바뀌고 있는 것 아닌가 또 혹은 분화되거나 작가회의 자체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직의 단결성이 약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상황과 관련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하고요, 그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되는지도 필요한 것 같거든요. <도> 분화는 분열은 아니거든요. 분화와 분열은 다르죠. 나뭇가지가 처음엔 한 줄기로 올라오다가 여러 가지로 뻗어나가서 무성해지는 것은 나뭇가지가 분화돼서 발전하는 것이죠. 나뭇가지가 갈라졌다고 해서 분열됐다고 말하지는 않거든요. 저는 우리 내부의 소모임들, 예를 들어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 모임, 인도를 생각하는 작가 모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미얀마와 몽골 작가들과 교류하는 모임이 자꾸 만들어지고 자체 사업들을 해 나가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지역별로도 지회 지부가 만들어지고 지역문단이 형성되고, 일정 정도 민족문학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애를 쓰는 문인들이 군지역 면지역에 이르기까지 문학활동을 하면서 외연을 넓혀나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봐요. 다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열까지 감수하면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그건 문제가 되겠죠? 그런 이야기가 잠깐 나왔던 적도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주도권 싸움처럼 비친다든가, 문학권력을 나도 가져야겠다든가 이런 형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민족문학을 해왔던 사람들로서 올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보고요, 함께해야 할 사람을 적대시하거나 공연한 분열담론을 만들어서 서로 폄하하거나 불신하거나 이런 것들을 조장하는 움직임들이 만약에 있다면 온당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저는 믿고 있어요. 동이불화(同而不和)하지 말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해야죠. <김> 분열과 분화를 나눠서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에게 가치지향성의 다양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소그룹이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고 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1,400명이 한 대열로 움직일 수가 없어요. 자꾸 단일한 목소리를 만들려고 하면 우리 모두가 365일 동안 함께 움직이고 있어도 시간이 모자라요. 건강한 작가들의 실뿌리가 사회 심층 저 깊이까지 닿을 수 있으려면 무조건 같이 가야 된다고 얘기하면 곤란하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조직화사업에 실패했다고 지목하는 건 그런 류의 것, 지회관계 같은 것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회원들끼리 돕고 살기 위해 조직된 계모임이 아니잖아요. 문학적 세대연대는 가능한가 <이> 어느 조직이나 중요한 게, 세대간의 연대랄까 그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가령 사회운동단체에서 운동조직이 경로당화되고 있다는 농담도 간혹 합니다. 사실은 학회도 마찬가지고, 사회운동단체도 마찬가지고 후속세대가 진입할 수 없는 구조가 돼 있거나 진입한다고 해도 선배세대들과의 대화나 소통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조직 자체가 굉장히 약화되고 소멸하는 방향으로 가는 측면도 있는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80년대에 활동해 왔던 현 집행부와 전에 90년대 이후에 등단하고 활동을 했는데. <도> 젊은작가포럼의 대표를 맡은 회장이 32살이에요. 연출도 해요. 글도 쓰면서 공연연출도 하고, 연극연출도 해요. 상당히 재주도 많고 재기발랄하고. 저도 문학콘서트나 문학행사 기획연출을 많이 했는데, 제가 음악과 문학을 만나게 해서 시를 노래로 만든다고 하면 잔잔하고 템포가 느린 포크계열의 노래를 만들어서 시노래를 부르게 해요. 그런데 이 친구는 노래를 랩송으로 만들어요. 처음에는 “노래를 랩으로 만들면 알아듣겠냐?”하고 묻죠. 그런데 지난해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의 밤 때 랩으로 시를 했는데 “유가족들이 그렇게 감동을 해요”라고 말해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락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죠? 처음에는 저게 뭐야 했는데 여러 번 들으니까 괜찮아요. 우리가 불렀으면 가곡으로 불렀을 텐데 얘들이 락으로 부르는 걸 들어보니까 괜찮더라, 그랬는데 이제 랩으로까지 부른단 말이에요. 시를 랩으로 부르는 거? 처음에는 정서적으로 듣기 거북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자기 개성을 가지고 자기 문학관 예술관을 바탕으로 해서 창조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김> 우리 작가회의 34년 역사의 서두를 장식해온 고은, 백낙청, 신경림 선생님 세대들을 보면 다른 분야의 어른들과 전혀 다른 게 있습니다. 이분들에게는 속말로 ‘가방모찌’라 하는 게 가능하지 않거든요. 문화적으로 완벽하게 젊어요. 담배 예절, 술 예절, 선물 예절 같은 것들로 형식적 권위의 서열화를 꿈꾸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게 서른 몇 해가 흘러오면서 그래도 문제가 조금은 생겼던 것 같아요. 앞세대가 아무리 훌륭해도 뒷세대를 발견하는 능력이 없으면 아름다운 관계를 못 만들어내요. 앞세대가 뒷세대를 가로막으면 뒷세대가 자기 존재를 문화적으로 브랜드화(化)시켜서, 대중적 에너지를 동원하여 앞세대를 엎어먹는 상황이 오거든요. 뒷세대는 세월의 지원사격을 받으면서 무조건 사회 전면에 진출하게 되어 있는데 그 방식은 두 가지밖에 없어요. 하나는 줄서서 제도화되든지, 쉽게 말해서 심부름 잘하고 말 잘 듣고 눈에 들게 하든지, 이렇게 되면 자기 시대의 눈이 아니라 앞시대의 눈에 선별되는 거죠. 아니면 대중을 사로잡아서 질서를 엎든지. 어떤 것도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이 안돼요. 나무가 아무리 조그마해도 오뉴월의 빛깔이 있고 구시월의 빛깔이 있어요. 구시월 이파리가 아름답게 단풍들어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훌륭한 것이고, 감동이고, 엄청난 교과서고, 텍스트지만 당대가 주목하는 게 그게 아니란 말이죠. 당대의 문화가 언제나 주목하고 있는 것은 오뉴월에 돋아난 잎새이지 구시월의 잎새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 작가회의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상당히 높은 것 같고요, 아까 총장님께서도 말씀해주셨듯이 민족문학인협회나 아시아 아프리카, 세계작가와의 대화 등등 해서 작가회의가 추진하거나 계획하거나 해온 일들이 확대되고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역시 중요한 것이, 문학적 의제랄까 또 지향과 방향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대표성을 띤 단체로서 중요한 측면이고, 단지 조직의 차원이 아니라 한국의 지성사에서 계속해서 법고창신의 태도를 보여주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향후 2년간 도종환 총장님께서 작가회의에서 실무적으로 활동을 하시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도 굉장히 생각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작가회의가 주력해야 할 문학적 의제, 가치지향을 어디에 두고 계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도> 전임 사무총장이 4년 동안에 우리 문학의 영토를 굉장히 확장시켜놨죠.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내실 있게 다지는 게 중요하고요,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 같아요. 문학의 영토가 북으로 확산됐었고, 아시아·아프리카로 확산됐었는데 말하자면 대회를 하는 형태였잖아요? 남북이 처음으로 함께 모여서 민족문학인대회를 하고 단체를 결성하고, 아시아·아프리카 문학 대회를 하고, 이렇게 영토를 확장시켜놓고 넓혀놓았는데, 아시아·아프리카 작가들과 만났다고 하지만 인도 작가들과 구체적으로 만나고 팔레스타인 작가들,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와 구체적으로 만나고 교류하는 단계로까지 가야 한다는 거죠. 그동안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베트남에 갔었는데 최근에는 충북의 작가들이 베트남 푸옌성의 작가들을 만나러 가고, 제주 작가들이 꽝하이성 작가들을 만나러 가요. 밀라이 학살이 있던 지역인데요. 그런 식으로 만나서 문학교류나 문화예술교류를 하고 그런 문화교류를 바탕으로 해서 그 지역의 문화사업까지 해요. 학교를 짓는다든지, 공연과 전시를 한다든지 양쪽 자치단체의 우호교류협정을 체결하고 문화의 날 행사를 정례화하게 만든다든지 이렇게 교류를 구체화해야 된다는 거죠. 광개토대왕이 한 바퀴 쭉 돌고 왔다고 우리 땅이 되는 게 아니고 구체적인 성들을 거점으로 해서 거기 사람이 살고, 농사를 짓고, 문화가 창출돼야 우리 땅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구체화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고요. 인간중심의 눈으로 문학을, 세계를… <김> 한국문단에서 작가회의가 건강하게 숨쉬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당대 사회체계 안에서 개개 작가들이 시장지향적으로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가치지향적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문제라고 봅니다. 가치 지향적이기 위해서는 자기의 방향성을 찾아야 할 것이고, 저는 이 방향성으로써 “지역정신, 혹은 토착정신의 건강성을 모아서 조선작가동맹과 손을 잡고 아시아·아프리카 연대로 간다.”를 상정했었는데, 역시 구호적이고 이벤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이영진 시인이 쓴 책을 보니까 풀밭에서 풀이 자라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 자라는 순간을 보지 않고 있을 때도 성장한단 말이에요. 이런 것들이 문화적 가치들인데, 그 부분이 구호적이거나 이벤트적이었다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프죠. <이> 『내일을 여는 작가』가 이번 호가 50호거든요. 나름대로 마디를 짓는다면 짓는 것이고, 의미가 있다면 있는 것인데, 50호면 10년 이상 발간되었다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랄까 문학담론 지형 안에서의 주도성이랄까 이런 것들이 상당히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측면에서는 시장주의와 가장 거리를 두면서 자체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건데,』내일을 여는 작가』라고 하는 기관지, 문학잡지에 대한 바람이랄까 나름대로의 생각이랄까 이런 것들에 대한 고언을 해주신다면 이후에 잡지가 개선해가는 방향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 같습니다. <김> 민족문학 기관지, 아니 한국작가회의 기관지는 이윤추구를 위해서 출현한 필드가 아닌, 공적 에너지를 밑천으로 해서 출현한 필드인데, 이 필드의 단점은 물적 토대를 잘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편집위원들의 압도적 헌신성에 의해서 유지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 필드가 살려면 그 토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다행히도 1,400명의 자의식들이 자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이 사람들에게 정중히 요청하면 여기에 헌신성을 보태주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공식적으로 요청을 하면 누구나 다 집안 제사지내듯이 와서 한 몫씩 하고 갑니다. 이 단점과 장점을 결합해서 의미를 얻어야 되는데, 그러려면 역시 제 생각에는 형식적·제도중심적으로 사고해 가지고 편집권 독립을 주장하면서 편집위원들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책이 아니라, 이 1,400명이 딛고 선 발자국 위에, 현장 위에서, 그 첨단의 정신들을 담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건 작가회의가 제일 잘하는 일이거든요. 이 일들을 열심히 하면 세련미는 떨어지더라도 현장성은 높은, 그래서 생생한 민족문학인들의 고민이 담기는 책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첨단에서, 한국문학의 고민을 보라 상업매체들과 비교하여 균형감을 잡으려 하기보다 회원들의 관심이 높은 부분들, 이 단체가 안고 있는 전선을 계속 밝혀주면 내용이 다소 거칠더라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작가지를 생각할 때 무엇을 놓치지 않을 필요가 있냐면, 국내시장에서도 결코 적은 독자를 가진 매체가 아니라는 점, 이미 1400명한테 배달돼버리잖아요. 독서율이 제일 높은 1,400명이잖아요.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북에서도 그렇고 외국에서도 한국문학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보고 싶어 하는 매체가 이거라는 거예요. 기관지를 보자. 그래야 당신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믿어도 되는 것인지, 한국작가들의 고민의 현주소는 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1,400명의 결집에 의해서 보이지 않게 이 매체에 대표성이 부여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발 여기서는 균형 이야기 하고, 배려 이야기 하고, 회비 잘 낸 사람 것도 실어주고 그렇게 하지 말고 작가회의의 진로를 안고 내용적으로 헌신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궤적, 즉 거기서 생겨나는 문제들을 1,400명의 것으로 늘려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는 매체가 됐으면 합니다. <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잘 해줬다고 생각하고요, 사실 지금의 문단은 작가단체, 우리 문인단체가 권력의 중심인 시대가 아니라 매체가 권력의 중심인 시대지요. 매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요. 거기에 가야지 발표 기회도 있고, 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하기 때문에 매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시대가 되었고, 그래서 매체가 많아지고 있고.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전혀 권력이 되지 못하는 매체 중의 하나가 『내일을 여는 작가』입니다. 문학권력을 갖게 해주는 매체도 있고, 돈을 벌어주는 문학지도 있고, 시인의 명함을 만들어주고 돈을 받는 매체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매체가 『내일을 여는 작가』죠. 그러면서 헌신성을 요구하고 공익근무를 요구하는 잡지, 맞죠? 그러면 또 거부하지 않고 바로 공익근무를 수행하겠다고 달려오는 사람들이 만드는 잡지이기도 해요, 『내일을 여는 작가』는 그런 점이 단점이면서 장점이죠. 공익근무를 하는 주어진 몇 년의 기간 동안 지금 얘기한 대로, 우리들이 가장 가치중심에 두고 논의하는 것들을 회원들에게 보여주고, 문단에 알리고, 문단을 이끌어나가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확산시켜나가는 역할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익근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밥도 제대로 못 사주는 매체였는데 그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리고 젊어지는 잡지가 되었으면 하고 바래요. 편집진이 바뀌면 기획과 편집에서 참신함을 요구할 겁니다. 지난 호 맨 뒤에 보면 ‘소설가 구효서 선생님께’라는 부제가 붙은 후배 작가의 편지가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정반대로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떨지 모르겠어요.『웹진 생생』에서 시도하는 인터뷰처럼 기성의 이름 있는 작가가 아주 젊은 작가를 찾아가는 인터뷰. 이건 우리가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인터뷰잖아요? 예를 들어 이철수가 그림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김윤이라는 화가를 찾아갔다, 이런 식의 인터뷰를 기획했더라구요. 김윤이라는 사람이 이철수라는 훌륭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보고 돌아오는 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기획인데, 정반대의 기획을 했는데 참 신선했어요. 이름 있고 명망 있는 작가들이 그 분야의 아주 젊은 사람을 찾아가 만나서 왜 문학을 하려고 하는지, 왜 돈 안 되는 예술을 하려고 하는지, 왜 이런 판에 뛰어들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같이 이야기해보는 이런 인터뷰를 시도하는 거죠. 예를 든 건데요, 이런 식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접근하고 기획하는 젊은 잡지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긴 시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개인적인 계획은 작품을 통해서나 행동으로 보여주실 것 같아 생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