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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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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작품 1 | 어둠 속에 흐르는 연등 |
대표 작품 2 | |
수상연도 | 2003년 |
수상횟수 | 제22회 |
출생지 | 서울 |
[수상 작품]
어둠 속에 흐르는 연등 / 박진서
바람 속에 피어난 봄빛도 어느덧 사그라지고 따가운 햇살이 여름을 재촉한다. 가뭄에 애태우던 백성들을 위로하듯 빗줄기는 일기예보에 한발 앞서 대지를 적셨다. 물기를 머금은 산천 초목의 푸른빛은 생기를 되찾아 보기에 좋다. 이렇듯 만물이 반기고 있는 빗속에서 나 혼자 침통한 것은 요즈음 더해 가는 다리의 통증 때문이다. 오늘도 병원에 들렀다. 교통편이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동안에 여러 곳을 다녔던 중에 그래도 인연 있는 듯하여 이곳으로 정했다. 예부터 병은 자랑해야 한다. 해서 나도 어기지 않고 그리 했더니 침도 맞게 되고 뜸도 뜨며 탕약을 먹는 등 한방, 양의를 두루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 촬영으로 증상의 원인을 알았으니 더 이상 방황할 이유가 없어졌다.
매일 아침 서너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여태껏 무심했던 타인의 모습을 관찰할 기회가 생겼다. 그중에도 나처럼 불편한 다리를 끌며 걷고 있는 사람이 저리도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그 틈에 끼어 나도 다리를 절고 있으니 타인의 눈에 비칠 또 하나의 타인이 군중 속에 끼어 있는 셈이다.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에 창 밖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그랬다. 삶과 죽음은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이 모여졌다가 흩어지는 것이라고. 그러나 구름은 무심 속에 바람을 인연하여 생기는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정이란 게 있어서 구름과의 비유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사대[地水火風]로 이루어진 육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육신의 아픔에는 어쩔 수 없이 이성異性도 끌려 다니고 있는 게 한심스럽다.
너무 육신을 학대해 왔었나 보다. 자존심만큼 내 몸을 지탱해 준 척추를 무시한 게 나의 잘못이었다. 뒤늦게 탈춤을 배운답시고 껑충껑충 뛴 나의 무모함도, 무거운 여행가방을 들고 국내외를 누빈 과욕도 모두 오늘을 초래했던 원인이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편식도 그렇고 과음도 그랬을 것이다. 실은 물지게에 다쳤던 게 주인主因이긴 하지만….
얼마 전에 나는 '자전적自傳的 인생론人生論'이란 주제의 원고청탁을 받은 일이 있다. 내게는 인생론이 있어 살아온 세월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삶을 그럭저럭 지낸 것 뿐. 다만 근 몇 달째 원고지를 멀리 했던 게으름을 떨쳐볼까 하고 책상 앞에 앉아 보지만 견디기 어렵다. 이젠 누워도 아프다. 전부터 나는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더 나이가 들면 쓰겠노라고 세월을 핑계댔으나 지금은 아프다는 이유로 쓰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이었다. 보통 해지기 전에 귀가하던 일상이 그날은 지켜지지 않았다. 집에 누가 있어 그리 허둥대며 일어서느냐는 핀잔을 뒤로하고 나는 강북쪽으로 향했다. 희극배우가 무대를 떠나면 허탈에 빠지듯이 즐겁게 지내던 나는 허무를 느끼며 공허해졌다. 불빛이 어둠 속에서 더 드러나듯 나의 늦은 귀가歸家는 나를 더 외톨이로 만든다. 그게 싫어서 집에 일찍 돌아가려 하고, 또 때묻은 가구가 나를 포근히 감싸주기 때문에 집이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누군가에게서 걸려올 전화를 기다린다는 사실이다. 꼭 누구라고 지목할 사람은 없으나 기다림 속에서 살아온 나였기에 그리운 이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집으로 빨리 가야 한다.
한강에 어른거리는 불빛은 더욱 그리움으로 다가서게 하고 인왕산 자락의 내 집은 멀기만 하다. 강변을 누비는 화사한 불빛의 행렬이 볼 만하고, 밤에 유람선을 한번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연인戀人의 가슴에 안겨 그의 심장소리를 듣듯 강물의 물살을 느끼고 싶다. 이때, 저 쪽에서 붉은 연등 하나 떠내려오는데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여태껏 벼르기만 했던 나의 글 한 편의 주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누가 무슨 애틋한 소원 있어 사월초파일도 아닌 이 밤에 연등 하나 불 밝혀 떠내려보내고 있는가. 나의 자전적 에세이도 저 연등처럼 그 안에 회포와 후회와 사랑을 담아 열반에 이르는 강물에 띄워 대해大海에 닿게 하고 싶었다.
전생을 시작으로 해서 육십 평생의 이야기를 담아보고도 싶었다. 어린 나이에 무슨 죄가 있어 친가, 양가를 오가야 했으며, 어른의 바람기에 부녀만의 고달픈 생활을 했어야 했는가. 한강에 띄워 홀로 술잔을 기울이시던 아버지 곁에, 철없는 나는 손가락을 강물에 적시며 즐거워했었던 등.
연극만으로는 살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선친께서는 악극단에도, 창극단에도 관여하시며 어린 딸은 으레 객석에 앉아 있었다. [심청전], [장화홍련전], [춘향전] 슬픈 줄거리에 눈물 흘리면서 보아서 그랬을까, 아직도 내 눈엔 눈물이 고여 있다. 여학교, 한국전쟁 그리고 결혼, 이 숱한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까. 오늘도 나는 이야기 연등꾸미기에 생각만 굴리다가 잠이 들지도 모른다.
창밖의 빗소리는 더욱 굵어지고 있다. 사월초파일도 앞으로 닷새가 남았다.
[작가 프로필]
52 서울사대부고 졸업
54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중퇴
59 문공부 방송문화연구실 근무
69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간사
77 신사임당 백일장 당선
84 詩文會 회장
91~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팬클럽 한국본부 회원
95 청주 동양일보 문화기획위원
03~ 한국불교문인협회 이사
♣ 저서
수필집
1991 <외로운 나비의 행복한 자유>
1994 <사람에겐 정이란 게 있어서>
1998 <그건 바람이었더이다>
2000 <꽃비축제>
2002 대표작선집<어둠 속에 흐르는 연등>
♣ 수상
2001 황희문화예술상 수필부문 본상
2004 한국수필문학상
[작품 심사평]
박진서의 <어둠 속에 흐르는 연등>
박진서 수필은 튄다. 디테일한 부분이지만, 그의 수필은 독자의 예기치 않은 감각을 무작위적으로 자극한다. 럭비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처럼 그의 수필은 낯설게 진행된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심하게 흔들리며 혹은 비약하면서 그의 수필 문체는 흐른다. 끝을 짐작할 수 없게 나아간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수필은 참신하다. 자신의 안 모습과 바깥 세상의 모습을 교차하면서 내숭 없이 보여주는 맛이 그의 수필의 특성이다. 그 하나의 예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이 수필집의 표제인 [어둠 속에 흐르는 연등]에서 쉽게 찾아진다. "한강에 어른거리는 불빛은 더욱 그리움으로 다가서게 하고 인왕산 자락의 내 집은 멀기만 하다. 강변을 누비는 화사한 불빛의 행렬이 볼 만하고, 밤에 유람선을 한번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연인의 가슴에 안겨 그의 심장소리를 느끼고 싶다. 그 때 저 쪽에서 연등 하나 떠내려오는데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가 그것이다.
수필집 <어둠 속에 흐르는 연등>은 수필집 <외로운 나비의 행복한 자유><사람이란 정이란 게 있어서> <그건 바람이었더이다><꽃비 축제>에 이은 그의 수필선집이다. 수필선집을 문학상 수상작품집으로 선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 한 권의 수필집이 그의 수필세계를 대표할 만한 책이라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박진서의 수필세계를 김용구는 이렇게 정리한다. "박진서는 재능 있는 사람, 고운 마음씨의 사람, 불심 깊은 사람이다. 그의 재능이란 특유의 시원스럽고 때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라는 인간평과 "그의 글에는 감동적인 표현, 소탈한 정서, 때로 심오한 사상이 들어있어서 독자는 그런 흥취를 만나는 기쁨과 정신의 공양을 맛"보게 된다는 작품평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김용구는 그를 '문학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 평한다. 그 뿐 아니라, 김용구는 그의 수필에서 "인간혼을 풍요롭게 하는 힘"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표작으로 [어둠 속에 흐르는 연등]를 꼽고 있다. 이 수필의 제목이 그러하듯 이 수필에서 감각적인 아름다움과 깊은 사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흐르는 연등>은 다분히 불교적인 인식을 바탕에 두고 쓴 수필이다.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오가면서 느끼게 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없음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 '연등'이라는 불교적인 물체로 표상되고 있는 수필이기 때문이다.
이 수필의 한 부분인 "삶과 죽음은 저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같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라고. 그러나 구름은 무심 속에 바람을 인연하여 생기는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정이란 게 있어서 구름과의 비유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사대[地·水·火·風]로 이루어진 육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육신의 아픔에는 어쩔 수 없이 이성理性도 끌려 다니고 있는 게 한심스럽다"가 그것인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그의 불교적 인식은 비교적 소박하지만 육화된 사상으로 보인다.
불교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생겨난 사상 철학이며 종교다. 고통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떤 깨달음을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종교다. 그래서 불교는 다분히 인간적이지 신神적이지 않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불교는 시작된다. 그 때문에 불교 사상과 문학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된다.
이를 박진서 수필은 진솔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끌어 낸다. 우주를 구성하는 6가지의 요소인 밀교에서의 육대六大 중 '지·수·화·풍' 4대만을 끌어들이고 '공대空大'와 '식대識大'를 접은 것만 보아도 그의 불교적 관심이 선적 혹은 신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삶 혹은 '정'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에게서 인간적인 수필 또는 체험 수필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가 아님을 안다. 육화된 불교 사상을 문학적인 감각으로 통해 표출해낼 때 그의 수필이 독보적인 생활 불교 수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시각으로 그의 수필을 폄하한다 해도 곳곳에서 뜬금 없이 나타나는 불교적인 인식의 감각적 표현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의 수필세계에서의 새 지평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