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경남의 바닷가를 따라가는 길은 하나의 거대한 횟집이다. 내륙 쪽 음식은 소담스럽다. 곳곳에 숨어 있는 맛집을 찾다 보면 '경상도 음식이 짜고 맛없다는 사실은 경상도 사람만 모르고 전국이 다 안다'는 말이 무색해진다. 어찌 세치 혀에 닿는 것만 맛일까. 정갈하나 야무진 경상도 음식문화가 여기 있다.
(7) 맛 멋 그리고 낭만-남해별곡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청년이 있었다. 다녀본 이 땅 어디가 아름답지 않으랴마는 그는 고향 남해가 더없이 좋았다. 대학을 마치고 고향에 눌러 앉았다. 누구나 와서 놀다갈 수 있는 문화사랑방을 하나 만드는 꿈을 키우면서….
그 사람 류경완(40)씨가 마침내 소망을 이룬 것이 3년 전.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언덕 위에 집을 짓고 ‘남해별곡’이라 이름지었다. 나무와 흙과 돌을 썼다. 집안에서 제재소를 운영하던 터라 나무 다루는 법을 아는 게 큰 도움이 됐다. 이웃마을에서 황토를 가져와 벽을 발랐다. 광양만으로 떨어지는 해를 즐기고 싶어 서쪽으로 큰 창들을 냈다. 마당의 오리나무 밑둥치를 두른 평상에 앉으면 시리디 시린 쪽빛바다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밤이면 여수와 광양의 불빛이 바다를 건넌다.
계절·날씨·시간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는 집. 별곡의 맛은 작은 무쇠솥 안의 낙지에 숨어있다. 산낙지볶음이 그것. 인근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 꽃낙지는 뻘낙지보다 크고 통통하다. 느타리 표고 미나리 양파 콩나물 호박 등 10여 가지 야채 위에 꼬물거리는 산낙지가 올라간다. 야채에서 나온 물기와 양념이 섞이며 자글자글 끓기 시작하면 주책없이 군침이 돈다. 낙지는 살짝 익혀야 꼬들꼬들한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맵지 않아 아이들도 좋아한다. 반주로는 직접 담근 유자막걸리 한잔. 향이 은은하다. 남은 양념에 김 등을 넣어 밥을 볶아 먹으면 식사 끝.
한달에 한번 정도 문화행사를 연다. 주인과 친분이 깊은 김원중 박문옥 김현성씨 등이 무대에 오른다. 시낭송회도 있다. 맛과 멋, 낭만을 찾아 유명인사들도 종종 들른다. 그들의 사진이나 사인을 왜 걸어놓지 않았냐는 물음에 선한 눈매의 류씨는 씩 웃고 만다. 주인의 품성이 그렇다. 진산 민산 어린 두 아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퍼지는 남해별곡의 뒤란에는 석류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남해읍에서 지방도로를 타고 서상리 스포츠파크까지 간 뒤 우회전. 예계 마을 쪽으로 조금 가면 있다. 남해대교로 들어간다면 창선대교 쪽으로 나오자. 눈이 즐겁다.
산낙지가마솥볶음(3,4인 기준 30000원). 돼지갈비 바비큐(3,4인 기준 30000원). 별채에서 민박 가능. 식당 안에 진열해 놓고 팔기도 하는 진메옹기는 인근에 사는 김용태(김용택 시인의 친동생)씨가 구웠다. 055-862-5001.
(8) 대장금 납시오 - 합천 고가식당
할머니의 음식솜씨를 아까워하던 잘 아는 교수의 권유로 식당을 낸 것이 1990년이다. 집안 손님들을 대접하던 소박한 음식을 그대로 차려낸다. 멸치 등을 우려낸 육수에 곱게 채 썰어 말아내는 메밀묵채(3000원)는 으뜸 요깃거리. 물에 불린 콩의 껍질을 까서 만든 제포두부(4000원)는 탱탱하다. 촌된장 정식 5000원. 7대째 전해오는 집안 술인 '고가송주 대장금'을 맛보지 않으면 섭섭하다. 은은한 솔향에 적당히 달고 신맛이 혀끝에 착착 감긴다. 375㎖ 1병 6000원. 문화재로 지정된 은진 송씨 옛집의 멋을 둘러보는 것도 큰 재미다. 식당 손님들에겐 민박 무료. 합천호를 끼고 도는 1089번 도로 옆. 055-933-7225.
(9) 너희가 비빔밥을 아느냐 - 진주 천황식당
청정미인 산청쌀로 지은 밥 위에 8, 9가지의 부드러운 나물과 신선한 육회를 얹어낸다. 나물은 철 따라 달라지는데 여름에는 호박을 주로 쓴다. 1927년 문을 연 이래 3대째 지금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맛에 '중독'돼 타지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단골들이 많다. 육회는 입에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는다. 선지를 숭숭 썰어 넣은 국물이 전주식과 다른 점. 칠 벗겨진 나무식탁, 찌르릉 울리는 자석식 전화기, 안마당 한쪽을 꽉 채운 장독대…. 수십 년 전으로 가는 시간여행은 또 다른 재미다. 중앙시장 안에 있다. 1인분 5000원. 055-741-2646.
(10) 국수냐 오징어회냐 - 부산 미포 하얀집
어떻게 썰었기에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는 오징어가 흐물흐물 흘러내린다. 칼질에 손이 워낙 많이 가 주인은 어깨 병까지 얻었단다. 하루 내놓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어 언론에 소개되는 것도 부담스럽다. 주문 받고서 칼질을 시작하기 때문에 꽤 기다려야 한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 하얀 접시에 담겨 나오는 새하얀 고깃결이 '예술'이다. 초장을 살짝 찍어 입에 넣으니 국수처럼 보들보들하다. 달맞이고개 입구 LG주유소 옆. 오후 6시에 문 열고 오전 5시에 닫는다. 걸어 5분 거리의 베스타온천에서는 통 큰 창으로 탁 트인 바다를 즐길 수 있다. 1만5000원, 먹통오징어순대 15000원. 051-742-7590.
(11) 멍게젓갈 비빔밥 - 거제 백만석 식당
맛이 가장 좋을 때인 5 ~ 7월의 멍게를 잡아 내장을 빼낸 뒤 1년간 숙성시켜 쓴다. 네모꼴의 다진 멍게를 올리고 김과 깨.참기름을 살짝 쳐서 낸다. 기름기 잘잘 흐르는 따뜻한 밥을 비벼 한술 뜨면 멍게 특유의 쌉쌀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반찬으로 나오는 멍게젓갈에 다짜고짜 젓가락이 간다. 잘 삭은 깻잎장아찌도 맛보시라. 말갛게 끓여내는 탕은 생선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다. 놀래미.우럭 등 그날 그날 잡히는 놈을 산 채로 쓴다. 거제시청 옆에 있어 찾기 쉽다. 멍게젓갈비빔밥 1만원, 해삼젓갈비빔밥 2만5000원. 055-637-6660.
(12) 김밥의 제왕 - 통영 충무김밥 거리
충무가 통영으로 바뀌는 데 따라 모든 이름이 바뀌었지만 김밥만큼은 여전히 충무김밥이다. 단순한 재료로 단순하지 않은 맛을 내는 게 세월이 갈수록 명성을 쌓아가는 비결이다. 앙증맞은 김밥을 양념에 버무린 오징어와 함께 입에 넣는다. 넓적넓적하게 썰어 멸치젓으로 담근 무김치를 한 입 와삭 씹으면 맛의 완성. 옛 여객터미널 거리의 뚱보할매김밥(055-645-2619)이 누구나 인정하는 원조다. 할머니들의 푸근한 서빙이 재미있다. 포장해 갈 생각이면 그 옆의 한일김밥(055-645-2647)이 전문. 새 여객터미널 거리에도 가게들이 모여 있다. 1인분 3000원.
출처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