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입문 8] 불교의 자각과 실천 / 정병조
대체적으로 불교의 승단 구성에 대하여 말할 때, 불. 법 승 삼보를 언급한다. 그리고 불교인이 되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귀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처님이 어떤 분인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즉, 삼보 가운데 불(佛)에 대해서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제 법(法)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법이라는 개념은 시대적으로 상당히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불교는 지역적으로 보면 아시아의 여러 곳에서 호 응을 받았고, 연대로 보아도 2천 5백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부처님의 법, 진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아함의 법이란 석가모니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뜻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법인이라고 한다. 그것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의 네 가지이다 그중에서 일체개고를 제외하고 삼법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삼법인이건 사법인이건 간에 그 대의는 대동소이하다.
사법인
첫째, 제행무상이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들의 모든 행위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외면 적인 무상을 지적한 것이다. 서양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였다. 만물은 유전한다. 아무도 동일한 강물에서 다시 목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흐르는 물도, 그 물에서 목욕하는 나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자세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분명히 어릴 때의 모습이 아니다. 얼굴, 목소리 모두 변했다. 또 얼마 후에는 죽음이라는 영겁의 피안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모습과는 다른 것이다. 즉, '나'라고 하는 개인적인 주체를 놓고 보았을 때 그 모습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모습과 달라져서 끝내는 무의 모습으로 화하게 된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들이 동일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또 생물 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그러하다. 예를 들면 광물까지도 변화한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광물도 플러스, 마이너스의 스핀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그 실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것이 제행무상의 법이다
둘째, 제법무아란 앞서 말한 제행무상이 외형적이고 시 간적인 표현인데 반해, 내면적이고 공간적인 표현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에는 내면적으로 변할 수 없는 어떤 성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끊임 없이 변화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종교의 목표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아트만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반면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대 인도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영원한 자아, 아트만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은 내면적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어떤 성품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내면적으로 변할 수 없는 어떤 것, 서양 종교에서 흔히 영혼이라고 표현하는 그러한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만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육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결합함으로써만 제 기능과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육신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논리적으로 보면 고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변할 수 없는 어떤 내재적인 성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제법무아라고 하였던 것이다.
셋째, 일체개고란 모든 것은 괴롭다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 한 곳에 고정된 것들은 썩기 마련이다. 인간의 불행, 생명의 불행은 어디서 싹트는가? 제법무상하고 제법 무아인 도리를 알지 못하기에 괴로움과 슬픔이 생겨난다. 다시 말해, 제행은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도리를 깨닫는다면 일체가 괴롭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상한 제행을 무상하지 않다고 고집하고, 무아인 제 법을 아(我)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싹튼다는 것이다. 비탄과 슬픔, 그 모든 것들은 사물의 실상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겨난 오류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괴롭게 인식되는 까닭은 그와 같은 그릇된 사고방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어느 날 세미나를 마치고 나오면서 "떨어지는 것은 떨어지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왜 자꾸 사람들은 떨어진 것을 집어 올리려고 하는가?"라고 말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썩는 것은 썩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썩는 것을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방부제를 쓰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떨어진 것은 떨어진 채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떨어진 것을 자꾸 들어 올리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흘러가 버린다. 결국 모든 것이 흘러가 버리고 늙고 병든다고 하는 그 엄연한 진실을 외면 하려고 하는데서 우리들의 슬픔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넷째, 열반적정이다. 여기서 열반이라는 개념은 탐, 진 치 삼독심의 극복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고통의 원인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고 내면적인 것이다. 즉,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세 가지 마음의 작용들로 말미암아 모든 고통이 유발된다. 이러한 고통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면의 잘못된 생각들을 고쳐나가는 방법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이라는 개념 자체가 탐, 진, 치를 극복한 적정한 경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적정이란 고요하고 맑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경지이다. 즉, 어떤 진리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열반이라는 위대한 경지 를 증득함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 나중 에 문제시되는 것이지만, 이 열반적정을 실재하는 어떤 세계로 생각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오해와 혼선이 빛어진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 사법인은 사성제 팔정도라는 가르침을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줄여서 말한 것이다. 네 가지의 법에 관련 된 진리, 이것은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생명의 실상이다 이와 같은 사법인, 네 가지의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범부의 깨달음, 그 차이는 영속성과 일시성에 있다. 부처님은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 속에 있 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깨달음을 일순간만 깨닫고 그 다음 순간에는 잊어버리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내재화시킬 뿐만 아니라 영속화시켜야 한다. 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초기 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법을 37각지 또는 도를 얻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하여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이라고도 하는데,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가 그것으로, 이 모든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이다. 먼저 사념처와 사정근에 대해서 알아본다
사념처(四念處)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올바른 생각을 가져야 한 다는 것이다. 먼저 1) 신념처(身念處)란 몸이 깨끗하지 못함을 아는 것이다. 2)수념처( 受念處)는 모든 생각은 허무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3)심념처(心念處)란 마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마음은 늘 대상에 따라 변화하고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욕심이 있다면 욕심이 있는 참뜻을 알고, 욕심이 없다면 욕심이 없는 참뜻을 알아 모든 마음의 참뜻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4)법념처(法念處)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만다는 무아의 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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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념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바르게 깨닫기 위한 수행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늘 있지 않는 세계를 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할 수 없는 것을 영원하다고 믿기에 번뇌와 집착이 생기고 서러움과 비탄에 젖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하지 않다고 함을 깨달아야 한다. 이 세상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괴로운 세상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때문에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이 생겨난다. 이상과 같이 사념처는 열반의 네 가지 특징인 상락아정을 그릇되게 알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를 <반야심경>에서는 전도견(顚倒見)이라고 한다. 즉, 뒤바뀐 꿈과 같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깨끗하지 못한 몸을 깨끗하다고 착각하고, 고통스러운 감각을 즐겁다고 생각하며, 무상한 모든 생각을 영원하다고 고집하고, 또 모든 것이 무아(無我)인데도 불구하고 '아'(我)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착각이 생긴다. 이 전도견에 관련된 인도설화가 있다. 나는 중생을 낳은 아버지인데, 내 아들인 중생들이 나를 자기의 아들로 삼아 버렸다.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인간들이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돈의 노예가 되고만 현대인의 모습에서도 이 설화와 같은 뜻을 찾아 볼 수 있다. 인간과 욕망은 분명히 같은 범주에 있지만 상위개념이다. 그러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전도의 삶을 살아간다. 주와 객의 전도현상이 빛어지는 것이다.
사념처가 철학적인 반면 사정근(四正勤)은 보다 윤리적인 면이 강하다.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하라.
이미 생긴 악은 아주 끊어버려라.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게 하라.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증장시켜라.
이것은 나중에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라는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미리 방지해야 한다. 그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마치 잡초의 뿌리를 뽑아 제거하듯이 번뇌나 악도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것은 무명을 없애는 것이며, 삼독 중의 치(癡)와 같은 근원적인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일이다. 단, 이미 생겼던 죄는 참회해야 한다. 우리가 절에 가서 신행을 할 때는 부처님같이 되고자 하는 원행을 심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업장을 소멸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진실한 불교의 수행이다. 동시에 똑같은 논리로, 아직 생기지 않은 선에 대해서도 생각 할 수 있다. 아주 극악한 사람일지라도 조금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남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는 마음은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맑게 가꾸는 일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 갖고 있는 진리의 샘터에서 이와 같은 선, 용솟음치는 선에의 의지를 북돋워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자기 성찰 내지 자기 노력 없이 결코 선인이 될 수 없다. 또, 이미 생긴 선을 더욱 증대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사정근은 윤리적인 실천에 해당한다. 사념처와 사정근을 통해서 철학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갖도록 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 <37조도품>의 제일 첫머리에 언급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사신족(四神足)이란 사여의족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은 이 네 가지의 신통스러운 자유자재로움을 얻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오근과 오력이란 수행 정진하는데 필요한 다섯 가지의 마음가짐과 힘이다.
첫째는 신(信)으로 믿음이다.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믿음만 강조하는 것은 불교를 왜소화시키는 것이다. 우선은 불. 법. 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이 세상의 어려움과 이데올로기적인 갈등과 혼란을 없앨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이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승단이야말로 가장 화합된 집단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연후에 삼보를 확인하는 일심이야말로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교적 믿음을 단순하게 절대자를 믿는 것으로 왜소화시켜서는 안 된다. <37조도품>을 닦아 나가는데 있어 필요한 다섯 가지 힘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힘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둘째는 정진(精進 )으로 노력이다.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 채찍질이 있어야 인격의 발전이 있게 된다. 고려의 명승 보조국사 지눌은 '사람이 태어 날 때 몸 안에 여섯 도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귀. 코. 혀. 몸. 마음의 도적이 날뛰는 것을 바로 잡는 것이 올바로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불교 공부란 이러한 여섯 도적이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진이란 쉼 없는 채찍질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이러한 정진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셋째는 염(念)으로 올바른 기억이다.
넷째는 정(定 )으로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다섯째는 혜(慧)로 올바른 지혜이다 이와 같이, 오근과 오력이란, 다섯 가지 마음가짐과 그로부터 발휘되는 다섯 가지 힘을 말한다. 지금까지 근본불교의 실천수행법 중 가장 근간이 되는 <37조도품>에 대 해서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