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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아계 이산해 초상.
어릴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고 문장,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벼슬도 문형인 대제학을 거쳐 삼정승에 올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묘지를 옮긴 후 맏형인 이지번이 아들을 가졌는데 그가 이산해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문장이 탁월했고 글씨와 산수화에도 뛰어난 재주를 발휘한 팔방미인이었다.
조정에서 이조·형조·병조판서로 일하면서 사대부의 최고 영예인 대제학을 겸직했으며 삼정승에도 올라 최고 요직을 모두 섭렵했다. 죽창한화는 이산해의 비범했던 유년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산해가 처음 났을 적에 토정이 그 우는 소리를 듣고 백형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이하니 잘 기르도록 하십시오. 우리 집안이 이제부터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다섯 살이 되자 처음 병풍글씨를 쓰는데 붓 움직이는 것이 신과 같고 글자 획들이 완연히 용과 뱀이 달려가는 것 같았으므로 신동이라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시 고관들이 와서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먹물을 발바닥에 칠하고 종이 끝에 찍어 어린아이의 솜씨임을 표시했으며 인가에 지금도 전해오면서 보고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학문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었지만 인품도 뛰어나 당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말과 글이 거침 없었던 율곡 이이(1536~1584)마저도 퇴계를 추앙했다.
선조 3년(1570) 12월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이이는 장문의 글로써 최고 지성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이가 쓴 <석담일기>는
"이황은 성품과 도량이 온순했으며 세속의 이익과 화려함을 뜬구름처럼 여겼다. 경전 외에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세상에 나섬과 물러남, 사양함과 받음, 취함과 줌의 지조에 있어서는 털끝 만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당대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 이후로는 비할 사람이 없고 재주와 기개는 비록 조광조에 못 미치지만 의리를 깊이 연구해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한다"이라고 극찬했다.
이이는 심지어 이황을 문묘(공자와 중국과 한국의 유교 성현 112명의 위패를 봉헌한 신성한 공간)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조6년(1573) 8월 성균관과 사학(四學·한성부 동부, 서부, 남부, 중부에 설치된 향교)의 유생들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현을 문묘에 올리기를 청했다.
선조는 "오랜 공론이 필요하다"며 거부한다. 하지만 <석담일기>는
"고려시대 배향한 정몽주, 설총, 최치원, 안향 중 정몽주를 제외한 3인은 도덕과 무관한 인물들이니 문묘에 올린 것은 잘못이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기풍과 뜻이 미약해 잘 드러나지 못했고 이언적은 근거가 불분명해 불가하다. 조광조는 도학을 주창했으며 이황도 의리에 몰입해 일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두 사람을 내세워 모신다면 누가 문제 삼겠는가. 조광조, 이황만이 배향할 만한 인물"이라고 적었다.
그런 퇴계에게는 형제가 여섯이었다. 퇴계는 막내이다. 그의 넷째형, 이해(1496~1550)도 대사헌, 대사간, 예조참판 등 요직을 역임했다. 이해는 그러나 퇴계와 달리 성격이 불같고 공명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미운 사람은 기필코 탄핵해서 파직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그는 벼슬을 사양하는 동생이 늘 불만이었다. 박동량(1569~1635)의 <기재잡기>는 "(이해가) 퇴계에게 서신으로 '언제나 한가하게 물러서 있기만 하면 일평생 배운 것을 언제 펴보겠느냐'고 책망하자 퇴계가 답서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와 분수를 지키십시오'라고 권고했다"고 기술했다.
동생의 충심 어린 충고를 무시한 이해는 청홍도(충청도) 관찰사 시절, 역모 고변자를 처형했다가 화를 입는다. 이해와 대립했던 이홍남(충주역모사건의 고변자)이 대간을 부추겨 "이해가 역모를 은폐하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고 탄핵했다. 이해는 의금부에 붙들려와 모진 고문을 받는다.
"(이해가)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는데 때가 마침 한여름이어서 시체가 불어터졌다. 예로부터 화를 당한 예는 많았으나 이처럼 심한 참상은 없었다. 퇴계 선생이 영원히 벼슬에서 떠나려는 뜻은 이때 더욱 결연해졌을 것"이라고 <기재잡기>는 서술한다.
남명 조식이 노년에 살았던 지리산 자락 산천재
안동 출신의 퇴계가 경상좌도 성리학의 스승이라면, 합천에서 태어난 남명 조식은 경상우도 성리학의 선구자다. 조식의 문하에서 정구, 김우옹, 정인홍, 정탁, 최영경, 곽재우 등 당대를 풍미한 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그런 조식이 과대평가됐다고 깎아내렸다.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지만, 학문을 하면서 실제로 체득한 주장과 견해가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방책은 없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세상에 나와서 벼슬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잘 다스렸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정구, 정인홍, 김우옹 등의 문인들이 그를 추앙해 도학군자라고 하지만 이는 진실로 지나친 말이다."
경북 포항시 남구연일읍 달천리 문원공 이언적 묘역
앞은 회재 이언적의 묘이고 뒤는 정경부인 함양 박씨의 묘이다.주자를 본받겠다는 일념으로 그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유래한 ‘회재(晦齋)’를 호(號)로 삼았다.
이이는 주리론의 대가인 회재 이언적도 비판했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하는 데는 큰 재질이 없고 벼슬에 올라서도 절개가 없었다. 을사사화(명종이 즉위한 1545년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윤임의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때 신문을 맡아 올바른 사람들을 추국해 공신이 됐다.
곽순이 신문당할 때 언적을 쳐다보고 '우리가 언적의 손에 죽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라고 한탄했다"며 "언적은 옛 전적을 많이 읽고 저술을 잘했을 뿐, 가정에서는 부정한 여색을 멀리하지 못했고 조정에 나와서는 도를 행하지 못했다. 그의 두드러진 재주가 세상에 흔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를 어찌 도학자로서 추천할 수 있겠는가"라고 혹평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10권력에 집착하다가 처참하게 죽은 퇴계의 형 [실록 밖의 인물評1]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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