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 차 중론 10. 자아에 대한 분석
불교에서는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한다.
십이처(十二處)이론, 십팔계(十八界)이론, 75법 이론 등이 그것이다.
불교 경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분류방식으로 오온(五蘊)이론이 있다.
오온(五蘊)은 ‘다섯무더기’라는 뜻으로
1) 물질(色) - 색(물질)에는 외부대상도 포함되지만 우리 몸도 포함된다.
2) 느낌(受) - 수(느낌)는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덤덤한 그저그런 느낌이다.
3) 생각(想) - 상(생각)은 의미와 언어를 떠올리는 마음의 작용이다.
4) 조작(行) - 행(조작)은 온갖 번뇌와 의지 그리고 감정들이다.
5) 마음(識) - 식(마음)이란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생각하는 작용이라는 여섯가지 지각기관 각각을 통해 파악된 지각내용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중 어느 한 가지를 ‘나’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중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그 어디에도 아뜨만은 없다.
중론의 논증을 살펴보기로 하자.
만일 자아가 오온이라면
자아는 생멸하는 것이리라.
만일 자아가 오온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온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온일 뿐이다.
자아가 존재한다면 오온 중 어느 하나여야 할 텐데 ‘색수상행식’의 오온은 모두
찰나찰나 생멸한다. 그렇다면 자아 역시 생멸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오온과 같을 수가 없다(不一)
그렇다고 오온과 다른 자아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온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아가 오온과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不異)
이렇게 자아가 없다는 점, 즉 무아의 진리를 철저히 깨달은 사람에게는 나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도 사라진다.
용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속한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무아의 지혜를 얻은 자라고 부른다.
나는 모든 욕심과 분노의 구심점이다.
이를 불교 용어로 욕심을 탐(貪), 분노를 진(瞋), 어리석음을 치(痴)라고 부른다.
이 세가지 마음(三毒心)을 제거하는 것이 불교수행의 최종 목표가 된다.
‘내가 존재한다’는 어리석음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우리 마음속에서 분노심과
욕심은 발생한다. 가장 뿌리깊은 어리석음(치심)을 제거하기 위해 색수상행식의
오온 하나하나를 점검해 보는 수행을 해야 한다.
이 수행을 통해 위 게송에서 무아의 지혜를 얻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깨달을 경우 다시는 윤회의 세계 속에 들어오지 않는 열반을 성취하게 된다.
용수는 다음가 같이 말한다.
안에서건 밖에서건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취착(取着)이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일도 없게 된다.
불교의 윤회설에서는 모든 생명체는 죽은 후 다시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그 생명체의 종류로 육도중생(천신, 아수라, 인간, 짐승, 아귀, 지옥)을
삼선도/삼악도로 무한한 세월 이전부터 탄생과 사망을 되풀이하며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선도(천신,아수라,인간)에 태어난 중생이 다시 삼선도에 태어날 확률이 ‘맹구어목’의 예를 들어 설명 한 것처럼, 인간계 이상 태어날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윤회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될 때, 우리는 ‘윤회의 세계중 좋은 곳에 태어나야 하겠다’는 마음보다 ‘아예 윤회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렇게 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려 하는 마음‘이 바로 ’열반하려는 마음‘이다.
(무여의열반과 유여의열반은 수십번 반복한 것이라 설명은 생략한다.)
발보리심이다.!
이렇게 발심하고 탐진치가 제거되면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바로 지혜를 얻은자이다.
불교에서는 철저하게 ‘자아가 없다(無我)’고 가르친다. ‘무아설(無我設)이라고 부른다.
‘무아의 가르침’의 원래 목적은 ‘변치않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착각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지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념을 심어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무아의 가르침은 불교발생 당시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추구하던 ‘영원한 아뜨만’의 별을 치료하는 약과 같은 것이었다. 병이 나으면 더 이상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아뜨만을 추구하던 수행자들에게는 ‘무아’의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이런 가르침의 취지를 모르고 누군가가 ‘무아’의 가르침에 집착할 경우에 부처님께서는 ‘무아’조차 부정하셨다.
이를 용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때로는 ‘자아가 있다’고 가르치셨고,
때로는 ‘자아가 없다’가 가르치셨으며,
때로는 ‘자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아가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가르치셨다.
자업자득의 인과응보의 가르침에서는 자아의 존재를 설정한다.
‘아뜨만의 발견’을 궁극적 목표로 삼은 수행자에게 ‘그런 아뜨만은 없다’고,
무아의 가르침을 베푸셨고,
진정한 종교적 목적은 그런 아뜨만을 찾아 안주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아뜨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뜨만이 있다거나 아뜨만이 없다는 것을 하나의 이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뜨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뜨만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가르치셨다.
불교의 가르침을 ‘병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라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아뜨만이 있다’고 가르치면 ‘극단적 낙천주의’에 빠지게 되고,
‘아뜨만이 없다’고 가르치면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대의 수준에 따라 다른 가르침을 베푸는 불교적 방식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부른다.
용수는 위의 게송을 통해 무아의 가르침이 우리 마음속의 분노와 탐욕을 제거해 주는 가르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가르침에 집착하여 이를 하나의 이념으로 삼을 경우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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