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용인문학
◎실용인문학#26》0822 삶이 증명한 살아 있는 지혜
by관찰작가의 여유시간
10시간전
누군가 내게 물었다. "실용인문학이 뭐냐?"
목소리에 확신이 넘쳤다. 궁금해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답을 정해놓고 던지는 물음이었다.
나는 웃었다.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저 사람은 인문학을 어디서 배웠을까.
교과서였을 것이다. 강의실이었을 것이다. 책장 속 활자였을 것이다.
나는 다르게 배웠다.
인문학은 내게 책이 아니었다. 현장이었다.
사람을 겪으며 배웠다. 실패하며 배웠다. 관계가 무너지고 다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배웠다. 삶이 나를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실용인문학이라 부른다.
이론으로 시작한 인문학과, 경험으로 도착한 인문학은 다르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뿌리가 다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일수록 목소리가 크다. 정의를 내리려 든다. 경계를 그으려 든다.
"네가 틀렸다." "그건 인문학이 아니다."
엔지니어가 피스톤이 없는 차는 차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피스톤이 있던 기차는 무엇인가.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새가 아니면 하늘을 날 수 없으니 비행기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새의 날개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다. 새가 아닌 방식으로 하늘을 날았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피스톤은 자동차의 본질이 아니다. 한 시대가 사용했던 동력 방식일 뿐이다.
전기차가 등장했다고 자동차가 자동차가 아닌 것이 아니다.
방식이 바뀐 것이다. 본질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인문학도 다르지 않다.
교과서에서 배웠다고 인문학이고, 강의실에서 배웠다고 인문학이며, 삶에서 배웠다고 인문학이 아닌 것이 아니다.
배우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디에서 왔느냐가 아니라, 사람과 삶을 이해하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실제 삶을 바꾸었는가 다.
자신이 배운 방식만을 기준으로 다른 방식으로 도달한 지혜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배운 인문학의 피스톤에 매달려 새로운 시대의 날개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SNS에서 자주 만난다. 그들은 대체로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자신이 배운 것만이 정답이라 믿는 사람. 다른 방식으로 도달한 지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학습이 특별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사람.
그들에게 실용인문학은 위협이었을 것이다. 교과서 없이도, 강의실 없이도, 삶 자체가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요즘은 AI에게 물어보면 몇 초 걸리지 않아 답을 준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묻는다. "네가 틀렸다." "그건 인문학이 아니다."
몇 초면 확인할 수 있는 것조차 확인하지 않고 목소리부터 높이는 것, 그것이 그들의 학습무능이다.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는다.
인문학이 교과서에서 왔든, 현장에서 왔든, 결국 묻는 것은 하나다. 그것이 삶을 바꾸었는가.
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인문학은 지식일 뿐이다.
바꾼 인문학은,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든, 살아 있는 지혜다.
나는 그렇게 얻은 지혜를 실용인문학이라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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