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도는 섬이 아니다(?)
2012년 국토해양부 보도자료의 100대 섬 목록에 미륵도는 없다.
미륵도는 수면위에 있는 육지이지만 그 수면의 일부가 인공으로 만든 통영운하라고 섬으로 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통영운하 이전에 그 곳에 배가 다닐 수는 없지만 좁은 물길이라도 있어
밀물일 때에 사방이 바닷물로 둘러싸였다면
당초부터 섬이니
좁은 물길을 넓혀 배가 다닐 수 있는 운하를 만들었다고해도
섬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말사전의 섬>
「명사」 『지리』 주위가 수역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 분포 상태에 따라 제도(諸島)ㆍ군도(群島)ㆍ열도(列島)ㆍ고도(孤島)로 나누며, 생겨난 원인에 따라서는 육도(陸島)와 해도(海島)로 나눈다. (우리말샘)
<국제법상의 섬>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
제121조 섬제도
1. 섬이라 함은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밀물일 때에도 수면위에 있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지역을 말한다
김포섬?
김포시의 거의 전부와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 지역과 검암경서동 일부 및 계양구 계양1동 일부,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일부로 이루어진 섬. 한강, 아라뱃길, 강화 해협에 둘러싸인 섬이다. 면적은 355㎢이다. 김포도(島), 검단섬, 검단도(島)라고도 한다.
경인 아라뱃길이 개설된 이후부터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서 섬이 된 김포시(정확히는 김포반도)를 장난삼아 부르는 별명이다.
출처:위키백과
*경인아라뱃길(京仁아라뱃길) 또는 경인운하
한강 하류의 행주대교에서 인천광역시 서구 오류동과 시천동을 연결하는 운하이다.사업 구간은 길이 18km, 폭 80m의 대수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9년 1월부터 2011년 10월까지 2조 2,500억여 원을 들여 완공하고 2012년 5월 25일 개통식을 열었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운하는 고려 고종 때 최충헌의 아들 최이가 건설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그 이후 조선 중종 때 김안로가 다시 건설하려고 했으나 한남정맥 사업구간에 암반석산 구간이 발견되어 운하건설에 실패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한강하구의 선박 운행이 힘들어짐에 따라 운하를 건설해야 된다는 주장도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근대에 들어 홍수 피해가 잦은 굴포천 일대의 물을 서해로 빠져 나가게 하기 위한 방수로를 만들겠다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이는 1987년 7월 굴포천에 대홍수가 발생하면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급기야 제13대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대선에서 경인운하 건설을 공약으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노태우 정부의 성립으로 1991년에 굴포천 방수로 사업의 기본계획이 수립되었고 1995년에 경인 운하 건설로 변경되어 민간투자대상사업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 타당성 부족과 환경 파괴 논란 등을 이유로 사업 재검토 결정이 내려졌으나, 이명박 정부가 사업을 한국수자원공사가 진행하는 공공사업으로 전환해 경인운하를 완공시켰다.
출처:위키백과
경인 아라뱃길은 한남정맥이 지나가는 육지에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로써
수면위에 있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가 아니므로 김포는 섬이 아니다
미륵도
통영시 남쪽에 있으며 2개의 다리와 충무해저터널로 통영반도와 연결돼 있다. 본래 이곳은 섬이 아니었으나 1932년 통영운하가 생기면서 육지와 40여 m 너비의 물길로 분리되었는데, 운하 북쪽과 함께 통영 시내를 이루고 있다.
도천동과 미수동·봉평동 사이가 통영운하이다.(위키백과)
통영 운하(統營運河)
통영시의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를 관통하는 길이 1,420m(해상준설 구간 1,170m 포함), 너비 42~55m, 간조수심 3.1m의 운하이다.
1928년 5월에 착공해 4년6개월 후인 1932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위키백과)
통영운하 이전
원래 미륵도는 폭 200여 m의 지협에 의해 통영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통영 운하 건설 전에도 간조시에는 땅이 드러나 걸어서 건널 수 있지만 만조시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너비 10여 m의 물길이 있었다.
임진왜란의 한산도 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게 쫓긴 왜선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들어왔다가 퇴로가 막히자 모래를 파고 이 물길을 더 크게 내어 도망치려 했다고 하여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를 '판데목'(착량, 鑿梁)이라고 부르는데, 무수히 많은 일본군이 죽어 시체가 되었다는 뜻으로 '송장목'이라고도 한다.
출처:위키백과
착량교(鑿梁橋) : 폰데다리, 굴량교(掘梁橋), 옛날 이곳은 육지와 미륵도가 연결된 가늘고 작은 목으로, 그 후 배가 지나다닐 수 있게 파낸 곳이라 하여 「판데(목)」또는 「폰데(목)」으로 불렸으며, 옛 문헌에는 굴포(掘浦) ·굴량(掘梁) ·착포량(鑿浦梁) ·착량(鑿梁) 등으로 칭했다.
영조33년(1757) 이곳에 나무다리를 세우고 「굴량교(掘梁橋)」라 이름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철거와 재건을 되풀이 하다가 1915년 김삼주(金三柱)가 사재를 들여 이곳에 돌다리를 세우고 다시 「착량교(鑿梁橋·폰데돌다리)」라 하였다.
그후 이 돌다리를 헐고 1932년 이곳에 통영운하와 해저터널을 준공하였으며, 1967년 이 해협 위로 「충무교(忠武橋)」를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한산신문 2012.6.19
정리하면
1598.12 노량해전 이전 - 만조시에 좁은 물길이 있었는지 여부 불분명.
1598.12 노량해전 이후 - 도망하는 일본군이 모래를 파내 물길을 더 크게내어 도망했다.
간조시에는 땅이 드러나 걸어서 건널 수 있지만 만조시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너비 10여 m의 물길이 있었다.
1757 영조33년 나무다리 세움.
1915 개인 김삼주가 돌다리 착량교 세움
1928.8.5~1932.11.20 통영운하 건설.
물길이 없던 곳이 통영운하로 분리되었다면 미륵도는 김포반도와 같이 섬으로 볼 수 없겠지만
노량해전 이전 부터 배가 다닐 수는 없지만 만조 때 바닷물이 들어오는 좁은 물길이라도 있었고
일본군이 이 물길을 넓혀 도망했다면
통영운하는 물길을 넓힌 것에 불과하므로 미륵도는 섬이다(라고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