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사람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고병권
글/그린비 )』를 읽고
분노하라! 저항하라! 참여하라! 전 세계적으로 분노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물결이라면 ‘대의’라고 명명할 수 있을
텐데, 하나로 묶을 수 없을 만큼
이유도 다양하다. 도대체 그들이 분노하고
저항하고 참여하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더 이상 투쟁이나 싸움에서 ‘민주주의’란 명분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대신
‘반값 등록금
투쟁’이나 ‘무상급식’, 혹은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나 ‘장애인 복지기금 삭감
반대’라는 이름으로 분노한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노라고 외치지 않는다. 각자의 이익을 되찾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혁명! 우리는 이 말을 쓰지 않은지
오래다. 그런데 왜 혁명이라는 말이
오가는 걸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을까, 레지스탕스 출신 프랑스
할아버지가 쓴 책의 출간을 기념하는 한 강연회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환경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다. 강연이 끝난 뒤 질의
응답시간이 주어졌다. 이제 막 취업전선에 뛰어든
20대 청년은 삶이 불안하다고
말한다. 전 세계적인 분노의 물결을
느끼고 있지만 무엇을 위해 왜 분노해야하는지, 더 솔직히 말해
분노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지 알고
싶단다. 30대 직장인은 분노를
느끼고 참여하고 싶지만 먹고 살기 바빠서 시간이 없단다. 70대 노인은 최근에 벌어진
다양한 시위현장에 참여하면서 왜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는지 슬프고 우울하다고 호소한다. 나는 사회초년생도
아니고, 시간에 쫓길 만큼 치열하게
살지도 않으며,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느낀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이곳에서
분노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까?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분노’를 알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대한민국엔 2008년 촛불집회를 통한
시민의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촛불집회 이후는 현
정권에 대한 분노에 몰두함으로써 결국 모든 걸 MB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정말 정권교체가 되면 세상이
달라질까? 내가 뽑은 대통령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일까?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문이
적혀있다. 이 조문의 뜻을 제대로
깨달으려면 민주주의에 대한 앎이 전제돼야 한다. 그렇다면 헌법을 읽으면 모든
의문이 풀릴 수 있을까?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겠노라고 취임식에서 선언한 대통령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다. 현실이 그 헌법을 무시하고
있을 때 그 현실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것 역시 우리의 의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국민이기를 포기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방법 외에 어떤 길이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만약 내가 아르바이트에
쫓기고 대학등록금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대학생이었다면 이런 현실에 더 자발적으로 분노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런 현실에
구차하다고 생각하며 절망하고 무기력해질지 모른다. 먹고사는 문제로 인한 절망은
모욕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 모욕감은 대의나 명분을
위한 싸움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그 상처가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비명을 지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거다. 희망의 버스를 타고 부산을 향하는 사람들도,독재정권에 신음하던 아랍국가의 민중봉기도, 영국 젊은이들의 등록금
시위도, “집도 없고 일도 없고
연금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고 외치는 스페인 광장에
모인 시민들도 분노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무척이나 닮아 있다. “그들은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 한다”는 구호! 벼랑 끝에 몰린 자들의
눈뜸. 잠에서 깨어나 광장을 점거한
사람들의 움직임은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법 이전에 존재하는 이런
‘결사의 자유’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다. 이런 무관심 계층의 대대적인
정치참여 활동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이익을
대변할(대의할, 대표할)정권이나 대타자를 기다리느니
우리가 직접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고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이제는 진짜
민주주의를(Democracia Real Ya)"이라는 구호는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불가능)을 가능한 현실로 만들어가는
에너지가 되기에 충분하다.
민주정권이나 민주주의라는 말 속에 숨어있던 오해와
무관심이 지금의 현실을 뼈아프게 되묻고 있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이냐고. 주권이 있는 국민에 의해
다수결의 원칙으로 대의제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정말 민주주의냐고 묻고 있다. “주권의
저편에서, 인민(국민)의
저편에서, 그리고
표상(대의, 대표)의 저편에서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하는
삶’을 시도할
때, 민주주의는 삶의 그 공통
평면이 가질 수 있는 마땅한 이름이 될 것이다.(민주주의란 무엇인가, 78쪽)”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을
그대로 풀면 ‘데모스(민중,demos)의
힘’이다. 완성되는 것도
아닌, 대의 되는 것도 아닌
‘데모스의
힘’은
“자기 삶에 대한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는 자리에 자신은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을 때, 다시 말해 자기 삶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아래 놓여 있다는 판단이 들 때, 직접 자기 삶의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힘이다.
히틀러를 만들고, MB정권을 가능케
한, 그리고 또 다른 괴물을
가능케 할지도 모를 시민사회의 침묵과 무관심, 그리고 비뚤어진 욕망이
우리도 공범임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삶을 가꾸는 능력이 없을
때, 대중은 삶을 지배하는 권력에 자신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같은 책 109쪽)
“권력이 유포하는 유혹이나
공포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 삶을 꾸려 갈 수 있는 능력의 크기, 권력조차 그런 관점에서 다룰
수 있는 능력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광장에 모이고 연대하는 것이리라. 거리에서든, 인터넷에서든, 일상에서든 좋은 세상을
꿈꾸고, 상상하고, 가꾸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데모스의
힘’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