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온 국민의 관심사는 17대 대통령 선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던 중 지난 12월 7일 ‘부패세력 집권 저지와 민주대연합을 위한
비상시국회의’가 결성식을 가지고 소설가 황석영씨가 성명서를 낭독하였다. 황석영, ‘오래된 정원’의 저자이다. 5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난 후
작가가 발표한 ‘오래된 정원’은 무엇이었을까?
이야기에서 ‘오래된 정원’의 장소는 주인공 오현우와 한윤희가 사랑을 나누었던 그곳, 갈뫼를 의미한다. 갈뫼라는 공간은
험난한 시대의 탄압으로부터 현우가 몸을 숨길 수 있었던 곳, 몸을 숨기되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곳, 그래서 떠나야만 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현우에게 오래된 정원은 무엇이었을까? 한윤희에게 오래된 정원은 무엇이었을까?
오현우는
수배자이다. 그 시대에는 오현우와 같은 죄인들이 많았다. 얼룩진 역사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던 사람들은 모두 경찰에게 잡히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오현우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오현우는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경찰을 피해 도망을 쳤고 몸을
숨기기에 이곳은 좋은 장소였다. 이곳에서 오현우는 자신을 탄압하는 그 세력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 곳엔 한윤희가 있었다. 현우와 윤희는 연인이 되었다. 이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큰 이유를 차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곳은 둘만의 행복한 공간이 되었다. 이들은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마음을 다해 사랑을 나누었다. 현우는 밭을 갈고,
윤희를 위한 도시락을 싸고 이들은 일상적인 행복을 누리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사랑할 수 있는 곳 그 어느
이유보다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공간, 천국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오래된 정원이 무엇이었는지 물으면 위와 같이 설명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의 이유에 더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버스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가야하는 현우를 ‘양심’이라는 이유로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양심이 사랑하는 사람을 무책임하게 두고
가는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였을까? 어쩌면 그 이유는 ‘양심’의 이유만은 아니었으리라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쯤 나는 작게나마 생각해
보았다.
이야기의 중반부에 오현우가 딸 은결이에게 전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이 아버지, 어머니와 친했던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현우는 딸과의 통화 중 이러한 얘기를 한다. “그 때는 자기만 행복하면 나쁜 놈이 되었거든. 그래. 바보 같지.” 나는 중얼거려 보았다.
‘자기만 행복하면 나쁜 놈이 되었다.’ 그리고 곧 ‘그 시대는 그랬구나’ 생각해 본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현실의 편안함을 내던지고 험난한 투쟁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래 바보 같지” 라고 하는
현우를 나무랄 수 없는 사람들 역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래 바보 같지. 바보였을까. 바보 같았을까. 바보로 산 것이 아닐텐데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은결이에겐 바보로 보일뿐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현우는 그 말에 동의한다. 바보와 바보가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본다.
17년 전,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현실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시 돌아온 현우에게 오래된 정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고 싶다.
오현우는 16년 8개월만에 감옥에서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 동안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오현우는 곧 알게 된다.
핸드폰이라는 낯선 물건을 만나게 되고 ‘복부인’이 되어버린 어머니가 사주는 비싼 양복을 입고, 세월에 ‘순응’하는 동지들과 마주하게 된다.
당연히 오현우는 그 오랜 시간들에 적응하기란 쉽지가 않다.
오현우가 출감하던 날, 그를 담당하던 교도감은 그에게 말한다. “ 그 동안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 선생도
한 몫 하신 거겠죠.”
많이 변한 세상, 그 세상이란 어떤 세상을 말하는가. 80년대의 일상적 풍경은 시위, 학습, 노래, 선동, 술 논쟁,
야학, 분노, 눈물, 욕설, 최루탄, 투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90년대의 일상적 풍경이란 압구정동, 맥주, 무라카미 하루키, 오락,
오렌지족, 신세대, 문화, 락카페라고 할 수 있다. 오현우는 80년대를 살다가 감옥에 가고 90년대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가 수감되어 있는
17년 동안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너무도 많이 변했다.
주인공이 바라던 민주주의는 87년 6월 항쟁을 통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급속도로 이루어진 경제발전은 1997년 IMF라는 위기를 맞게 된다. 6·15 공동선언을 이루고, 경의선을 개통하면서 남과 북이라는
이름이 아닌 통일된 한반도라는 이름을 다시금 꿈꿀 수 있는 시대가 도래 되었다.
그 세월을 살아오면서 ‘사람’ 또한 어찌 변하지 않았겠는가. 정의에 피 끓던 젊은이들의 주름에는 과연 무엇이 깃들어
있을까.
감옥에서 나온 현우는 변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한 괴리감을 느낀다. 강남에서 알아주는 부동산 아줌마가
되어버린 엄마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시절 함께 했던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친구들은 각자의 모습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시절 같이
감옥에 간 남편을 기다리던 친구는 미쳐서 죽었고 남편이라는 친구는 멀쩡하지 않은 몸으로 혼자 살아남아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과거에서 온 현우를
반갑게 맞이하는 친구는 이 뿐이다. ‘성공한’ 친구들과 ‘성공하지 못한’ 친구들이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간다.
“뭔놈의 사회주의자가 그려. 남의 돈 떼어 먹고.”, “너희는 돈 하나 못 떼먹고 뭐하냐 맨날 술이나 쳐 먹고.”, “인생은 길고 혁명은 짧아서
그래.” 그들이 역사와 혁명에 던졌던 순수한 사랑은 그렇게 잊혀져가고 있다. 다 같이 술을 먹었던 그 친구들은 이제 이렇게 다른 것을 먹고
있다. 성공한 친구들은 돈을 떼어 먹었다. 성공하지 못 한 친구들은 술이나 쳐 먹었다. 이제 현실에 나온 현우는 돈을 먹어야 하는 것인가 술을
먹어야 하는 것인가. 다만 그 시절의 술보다 지금의 술은 조금 더 쓰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모든 것이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지갑 속 한윤희 사진과 그 시절의 추억 뿐이다. 그래서 현우는 변하지 않은 그
곳, 갈뫼를 찾아간다. 그 속에 있는 윤희를 만나고, 그 추억을 만나고 젊은 시절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갈뫼는 그에게 왜 오래된 정원이었을까? 정원이라하면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떠 올리는지 생각해 보자. 예쁜 꽃들과 듬직한
나무가 자리하는 곳, 나비와 벌들이 날아다니고 아이들과 강아지가 뛰어 놀 수 있는 따뜻한 그 곳,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고요한 쉼터라고 표현하고
싶다.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곳이다. 그렇다면 ‘오래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보자.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오래됨의 깊이를 더하는
정원이다. 늘 변치 않는 관심과 애정으로 정원을 가꾼다면 식물들도 스스로를 가꾸고 곤충들 또한 해마다 많이 찾아 올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정원은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만들고 그 안에 거하는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다른 하나의 정원은 더 이상 정원이라 불릴 수
없는 피폐한 정원이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낡은 정원, 아름답지도 푸르르지도 않은 생명력을 잃은 정원에는 누구하나
찾아오는 이 없을 것이고 이는 더 이상 정원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현우에게 오래된 정원이란 한때의 추억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고, 혼란의 시대와
마주한 그 열정 그에게 80년대는 그런 정원이었다. 이제 시간이 흘러 정원은 역사 속에 묻히고 현우 또한 흰머리가 지긋한 중년의 사내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도 그 오래된 정원은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은결이는 말한다. “우리 자주 봐요. 아버지.” 이 시대에, 중년의 나이에,
그러나 그 열정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관록의 힘을 더해 과거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여 새로운 정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20살의 새내기에게 어떤 느낌이 들었냐고 물었다. 새내기는 답답했다라고 말을 하였다. 과거에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그 시대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서는 왜 자신의 기능을 다 못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냥 슬펐어요 라고 말하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이 새내기에게서 또 다른 정원을 그려 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정원을 가지고 있다. 그 정원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나의 정원은 지금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오랜 시간이 흘러 나의 정원을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게, 그렇게 살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삶이 부끄럽지 않게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이 시대에 태어난 나의 정원은 훗날 나에게 따뜻한 오래된 정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최미경이 분신하여 죽은 자리에 영락이에게 누워 보라고 한 후 한윤희가 혼자 흘리던 눈물과 말이 생각난다.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겠냐.” 그러나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중들은 외로웠으되 외롭지 않을 것이다. 민들레처럼 살아간
그들을, 수천 수백의 꽃씨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꽃씨가 피워낸 민들레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꽃씨를 나눠 주고 있다. 우리
가슴에 민들레꽃을 뿌리 내리고 세상에 홀씨를 흩날릴 수 있는 이 시대의 참 주인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