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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신 또는 자연> - 강 영 안 (서강대 철학)
1.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관심
스피노자는 오직 삶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가 남긴 책 제목이나 {지성개선론} 서두 가운데 몇귀절만 뽑아 읽어 보면 그의 철학의 근본 관심은, 어떻게 인간은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었음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초기 저서인 {소론}(Korte Verhandeling)은 {신과 인간과 그의 행복에 관한 짧은 고찰}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그의 논의의 목적은 결국 복된 삶을 실현할 근거와 방법을 찾기 위한 것임을 제목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주저인{에티카}도 이유없이 에티카, 즉 윤리학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윤리학'이란 표제를 달고
있는 다른 책들과는 분명히 다르긴 하지만 그의 관심은 자유인의 삶, 즉 인간의 행복
(beatitudo)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윤리학의 범주에 들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1)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철학적 문제는 애당초 실천 영역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그렇
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야 하고, 그러자면 지적 노력
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또한 그의 신념이었다. 인간의 실천적 삶
에 관심을 두면서도, 그것을 종교적 수행이나 사회적 투쟁을 통해 '실천적으로' 해결
해 보려고 하기 보다는 철저하게 이론적이고 과학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해결해 보고
자 하였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매우 특이한 모습을 띠게 된다. 윤리적, 종교
적 문제에 관심을 두면서도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통상 이해하는 바의 윤
리나 종교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 무윤리적이고 비종교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삶과 구
원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 것이었다.2)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파악해야 한다.3) {에티카} 1
부에서 펼치고 있는 그의 형이상학은 일차적으로 진리를 찾는 이론적이고 인식적인 노
력이다. 하지만 그것의 궁극적 목표는 '윤리적,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자신의 철학에 대한 입문으로 의도했던 {지성개선론}에 좀 더 분명
하게 표현되어 있다. 일상생활의 헛됨과 무익함을 경험을 통해 체험한 이후, 스피노자
는 지속적이고 영원한 기쁨, 영속적인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최고선)과 그것에 이를
수 있는 수단(참된 선)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결국 지속적인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정신과 자연 전체의 하나됨의 인식'(cognitio unionis quam mens cum tota Natura
habet)이라 보고 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예컨데 의학이나 기술 개발을 들고 있
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연에 대한 인식이고 자연을 올바르게 인
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성을 정화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보았다.4)
자연에 대한 인식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단지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인식에만 한정
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 또는 자연 전체(tota natura)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이다. 형이상학적 인식 또는 진리에 대한 인식의 소유는 인간 행위와 윤리, 의학
과 기술 개발 보다 앞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목적은 진리
를 소유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진리 속에 깊이 침투하여, 선과 악의
피안에서 진리와 더불어 즐거워 하고 기쁨의 삶을 누리는 것이었다. 진리와 함께 즐거
워 하고 기뻐하는 삶, 로고스(logos)의 삶은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에토스
(ethos)이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에토스와 로고스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에토스는
정념(파토스)을 통제하고 덕스러운 삶의 습관을 형성하는 일과 관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에토스는 하나의 이상(노예 상태로 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고 그것에 이를 수 있
는 수단을 얻어내는 데 있었다.(노예상태로 부터의 해방, 즉 자유인의 삶은 인간에게
실제 가능한 것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삶의 조건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전적으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윤리학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정념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수단은 인간 정념의
정체를 바르게 인식하고 제 3의 인식을 얻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성적 인식(로고
스)을 통해 인간의 정념(파토스)을 지배할 수 있고 그 때 비로소 인간은 정념의 노예
로 부터 벗어나 자유인으로서의 삶(에토스)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로고스의 삶,
즉 이성적 인식의 삶은 여기서 정념을 제거하는 수단일 뿐아니라 그 자체 목적이다.
왜냐하면 정념을 벗어난 자유인의 삶(에토스)는 바로 이성적인 삶(로고스에 따른 삶)
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에토스와 로고스는 서로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
다. 에토스는 정념을 통제하고 선한 습관을 얻음으로써 덕스러운 삶을 실천하는 것이
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덕스러운 삶은 다름 아닌 로고스에 의한 삶이다. 에토
스의 관점에서 보면 로고스는 정념을 통제(제거)하는 수단이다. 이 수단은 일상적인
관심사는 모두 잊어버리고 오직 진리에 관심을 둘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로고스의 관점에서 보면 로고스는 그 자체로 목적이고 로고스를 따르는 삶은
곧 덕스러운 삶이다.5)
2.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
자연에 대한 인식, 즉 로고스적 삶의 전형을 스피노자는 17세기 유럽에서 출현한
근대 과학에서 찾았다. 최고선에 이르는 전략을 자연 과학적인 인식과 태도에서 찾았
다는 점에서 그는 여러 동양의 선사나 수행자들과 달랐다. 특히 선불교와 같은 전통
에서는 과학적 인식을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근대 자연과학을 로
고스적 삶의 전형이라고 해서 그가 배운 것을, 자연에 관한 개별적 지식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근대 자연과학에서 그가 배운 것은 자연에는 어떤 특정한 의도가 없다는
것, 즉 자연은 그 자체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운동한다는 것, 그리고 자
연을 탐구하는 자는 개인적 편견이나 신념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 즉 자연은 객관적
으로, 개인의 인격과 상관없이 거리를 두고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요약
하자면, 근대 자연과학에서 스피노자가 배운 것은 자연에 대한 의인론적, 인간중심적
관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인론 또는 인간 중심주의는 스피노자가 형이상학
(특히 그의 신과 자연 개념)을 통해 비판하고자 한 일차적인 표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에티카} 1부 끝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부분은 스피노자의 형이상
학을 실제로 이해하는 데 좋은 열쇠가 된다. 스피노자가 역설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사물 전체 체계(자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평가할 때 필연적으로 어떤 편견에 사로
잡힐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지적하는 모든 편견은 어떤 한가지 편견에 근거한다. 즉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물이 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을 위하여 움직인다고 생
각하며, 더욱이 그들은 신이 모든 것을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이끈다고 확신한다. 왜냐
하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신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
간을 만들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6)
스피노자가 문제삼는 편견은 모든 것을 목적론적으로 또는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
는 편견이다. 이와 같은 편견이 생긴 이유를 그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물의 원인
을 모른채 태어났으며, 또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이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욕구와 충동을 의식
하지만 그와 같은 욕구와 충동을 일으킨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이로 부터 자신은 늘
자유롭다는 착각을 갖게 되고,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모든 자
연물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고찰하기 때문에 자연물에는 그것의 존재 목적
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수단은 분명히 자신이 만든 것
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들을 만들고 지배하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각 사람마다 그 신
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총애하며 자연 전체로 하여금 자기의 맹목적 욕구와 끝없
는 탐욕을 만족시키게끔 여러가지 모양의 신에 대한 경배를 자신들의 성품에 따라 생
각해 내었다고 스피노자는 보고 있다. 이것은 신도 사람과 꼭같은 성정을 가진 것으로
상상하게 하고 이로써 사물에 대한 참다운 인식에 도달하기는 커녕 오히려 '무지의 피
난처'로 인간을 도피하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질서와 혼란 등을 참된 인식을 통해 파악하기 보다 단지 감각적인 표상에 의
해서 평가하는 우를 범하게 했다고 스피노자는 한탄한다.7)
스피노자는 만일 우리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고, 주변의 모든 사물은 모두 우리 자
신을 위해 존재하며, 자연물은 모두 신의 자유로운 창조의 결과이며신도 우리와 같은
성품(인격)을 갖는다면, 지속적인 비애와 허무로 몰아넣는 일상사의 비극으로 부터 인
간이 벗어날 길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의인론적, 인간중심적, 목적론적 자연관과
신관으로 부터 벗어남으로써 전혀 다른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역설적
이게도 그와 같은 해결책은 진리 자체에 대한 인식, 즉 사물과 우리 자신에 대한 비
의인론적, 탈인간중심적 관점을 획득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스피노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은 전적으로 근대 자연과학이 거둔 성과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었다.
이와 같은 사정을 미루어 볼 때, 그의 형이상학의 골격이 된 이론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전통적인 의인론과 인간중심주의에 커다란 타격을 입히고 있음은 전혀 우연이라
고 할 수 없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1. 그의 주장대로 만일 신과 자연은 같은 것(Deus sive natura)임을 긍정하면 인격신
(인격신)과 창조주로서의 신은 부인된다.
2. "신은 무한한 속성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모든 속성은 아무 차별
없이 다같이 신의 본질을 표현하기 때문에, 신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성과 사물의 질서
속에서의 정신의 예외적인 위치를 원칙적으로 부인할 수 밖에 없다.
3. 자연 속에 일어나는 일이 모두 결정되어 있고, 다시 말해 이 세계는 신의 본성으로
부터 필연적으로 우러나온 결과이고 지성과 의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
이 생각하는 통상적인 자유는 부정된다.
4. 신 또는 자연만이 '실체'이고 다른 모든 사물은 신 또는 자연의 '양태'라면 우리
자신의 삶과 존재의 근원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이나 우리는 창조적으로 사고할 수 있
고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의식하며 마음대로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로 생각해 오던 버릇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인간중심적 사고를 무너뜨리게 함으로써 스피노자가 겨냥한 것은 존재의 기반에 대
한 전혀 새로운 이해이었고, 이것은 또한 노예의 삶으로 부터 자유인의 삶으로 인간을
이끌고자 하는 일종의 '선교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었다. {에티카} 1부에서 신과 신의
본질에 관해 다룬 다음, 2부로 넘어가면서 스피노자는 신의 본질 가운데는 "무한히 많
은 것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생기지 않을 수 없지만" "단지 인간의 정신과 그것의
최고의 지복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게 하는 데에" 논의를 제한하고자 한다고 밝힌
것을 보더라도 신에 관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복된 삶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
다.8) 스피노자는 참된 인식 또는 지식(진리)을 구원과 해방의 길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리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믿은 점에서 그는 그 이전의 스승들과 다를
바 없었다.9) 그러면 이제 좀 구체적으로 스피노자의 신은 누구이며 그 신과 세계는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자.
3. 신, 실체, 속성
{에티카} 1부에서 스피노자는 "정의 1.자기 원인(causa sui)이란 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정의 2. 같은 본성을 가진 다른 것에 의하여 한정될 수 있는 사물은
자신의 유 안에서 유한하다고 일컬어진다...", "정의 3. 실체(substantia)란 자신 안
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정의 4. 속성이란 지성이 실
체에 관하여 그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정의
5. 양태란 실체의 변용으로, 또는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고 정의한 다음 정의 6에 이르러서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로 이해한다"고 신에 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어서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는 공리를 비롯해서 7가지의 공리를 바탕으로 그 다음에 이어 나오는
정리들을 증명한다. 첫 정리들을 통해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바는, 실체는 오직 하나이
고(정리 5), 그 실체는 본성상 존재하며(정리 7) 그것은 절대로 무한하다(정리 8)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체,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정리 10 주석)의 존재를 일
단 확인한 다음 "신 또는 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정리 11),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도 없다"(정리 14)고 결론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는 정리 14 보충1과 2를 통해 일관성에 결여된 데카르트의 실
체 이원론에 대해 마지막 결정타를 가한다. "보충 1. 이로부터 가장 명백하게 첫번째
로 귀결되는 것은 신은 유일하다 것, 즉 자연[사물의 세계] 안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
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다. 보충 2. 두번째로 연장된 사물
(res extensa)과 사유하는 사물(res cogitans)은 신의 속성이거나 아니면 신의 속성
의 변용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을 증명한 다음 정리 15이후에는 신 또는 유일
한 한 실체가 모든 사물의 근원임을 주장하게 된다.10)
처음에 제시된 14개의 정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스피노자를 공
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다.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ens
absolute infinitum)라고 부르는 것은 전통적인 신 이해와 일치한다. 이것에 대해 논
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과 동격으로 붙인 "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
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는 무엇을 뜻하며, 더구나 정의 3에서보듯 "지
성이 실체에 관하여 그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
다면, 실체 즉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과 속성은 어떤 관계인
가, 더구나 신은 "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먼저 두가지 서로
다른 해석을 살펴보자.
첫번째 해석은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관념적' 또는 '주관주의적'으로 보는 견해이
다.11) 이 해석에 따르면 속성은 신의 실질적 내용(realitas)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
라 그 자체로 전혀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실체, 즉 절대적 일자(일자)로 존
재하는 신을 인간 지성이 파악해 보는 방식에 불과하다. 유한한 인간 지성은 유일 실
체 즉 신을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파악해 보려고 시도할 수 있지만 결코 어떤 방식
으로 규정할 수 없는 절대자를 완전히 그려내지는 못한다. 따라서 속성이란 신에게
'실제로' 속한 것이 아니라 신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인간 지성에게 속한 하나의 '개
념'에 불과하다고 본다. 관념론적 해석에 따르면 속성이란 실체에 관하여 지성이 생각
할 때 마치 그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처럼)(tanquam) 그렇게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해석은 속성에 관한 스피노자의 정의와 실제로
어긋난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성에 의해 지각된 것이다(정의
4). 지성은 단지 대상을 머리 속에 파악하는 능력이 아니라 있는 현실(실재)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능력이고, 이런 의미에서 진리가 자리잡은 곳이다. 실체의 실질적인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지성을 통해 파악되었다면 그것은 곧 본질을 실제로 이루고 있
는 것이 틀림없다(공리 6참조)12)
이와 반대로 실재론적 해석에 의하면 속성은 신적 실체의 실질적 본질을 구성한
다.13) 신은 무한히 많은 본질들, 즉 무한히 많은 속성들의 통합(결합)으로 보는 것이
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의도에 훨씬 가까운 해석임은 틀림없지만 이러한 해석 역시 문
제를 안고 있다. 이 해석이 안고 있는 문제는 신의 통일성이 폐기되어버리는 것이다.
신은 무한히 많은 속성들의 집합으로 환원되고 신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
이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풀 수 있는가? 게루의 해결 방식은 간단하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기하학자가 도형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스피노자는 신에 관해서 이해
하고 있다. 정리 1에서 8까지는 도형(이 경우는 물론 신)의 기본 요소들에 관한 연구
이고, 이 요소들을 통합한 결과 정리 9에서 11의 인식에 이르렀다. 그와 같은 통합은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은 신에 대한 이념(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이 우리 지성 속
에 이미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요구된 것이다. 우리 지성 속에 주어진 '절대적으로 무
한한 존재자'라는 이념의 강요와 통제를 통해 우리는 요소들을 통합하고 그렇게 함으
로써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유일한 실체로
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을 통해 게루는 앞에서 제기한 난점을 해소한다.
속성들의 통합은 신 속에서, 즉 하나의 유일한 실체 속에서 발생하는 통합이기 때문
에, 다시 말해 실체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라는 이념
의 강요아래 실체 내부에서 진행되는 통합이기 때문에 신은 무한한 속성들의 단순한
집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면 신, 실체, 속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실재론적 해
석이 관념론적 해석보다 스피노자의 의도를 훨씬 더 잘 반영해 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게루의 해석에는 결점이 전혀 없지 않다. 애컨데, 게루는 정리 1에서 8까지를 실체를
구성, 통합할 수 있는 요소들, 즉 속성들에 관한 연구로 보고 있으나 실제로 이 부분
은 '실체', 즉 그 자신으로 부터 존재하며 그 자신에 의해서 생각될 수 있는 '사물'
(res)이 일반적으로 지닌 여러 성질들에 관한 연구로 보아야 한다. 실체는 하나 밖에
있을 수 없고, 그것은 본성상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또한 필연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
여기에 밝혀져 있다. 그러면 신, 실체, 속성, 이 3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수 있는가?
'신', '실체', '속성', 이 세 개념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정리
10의 주석에서 찾을 수 있다.14) 이것을 살펴보기 전에 스피노자의 정의를 먼저 분명
히 이해하고 넘어가자. 스피노자가 이해하는 '실체'는 그 자신으로 부터 존재하며 그
자신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성질을 가
리켜 '속성'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속성은 실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체의
본성, 본질, 실제의 실질적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속성은 속성은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실체와 그것의 본질을 구성
하는 속성 간에는 실제 내용적인 구별인 '실질적 구별'(distinctio realis)이 없다.
실체는 그것의 속성들을 통해서 실체로서의 존재를 지닐 수 있다. 역으로, 속성은 실
체의 본질로서, 그리고 정의상 실체의 본질로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신은 각각
그 자체로 볼 때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 또는 본성(natura)을 표현하는 무한 수의 속성
으로 구성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이다. 각 속성은 무한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속한 유에 한정되어 그렇다(정의 6 해명15)).
이제 {에티카} 1부에 실린 정리들을 다시 살펴보자. 정리 10 주석에 언급된 '실질
적 구별'이란 개념이 우리에게 이 정리들을 이해하는 데 좋은 도움을 줄 것이다. 스피
노자에 의하면 자연 속에는 오직 두가지의 사물만 존재할 수 있다. 공리 1의 표현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은 '실체'이고, 다른 것 안에 다른 것에 의존
해서 존재하는 것은 '양태'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실체 아니면 양태로 존재한
다. 이렇게 보면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사물, 즉 완전히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사물
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실체로든 또는 실체의 양태로든 간에, 사물 사이에 실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정리4 증명).16) 만일 실체들 간에 실질적으
로 구별이 있다면 그것은 곧 본질 또는 속성에 차이가 있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정리
4와 그 증명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정리 4와 그 증명은 사물들(실체들)의
실질적인 구별과 그 속성의 차이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속성은 곧 실체(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 자체로 파악되는 사물의 속성)의 속성이란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매우 간단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종류상 다른 속성들이 있다는 것으로 부터 실체들
간의 실질적 구별이 결코 추론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실체들 간의 실질적 구
별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면 그것으로 부터 그 실체들은 다른 종류의 속성을 지니
고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실체들은 각각 그것들이 소유한 속성과
종류상(유적으로) 같은 것이 된다. 이것에 주목해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출발점은 게루가 생각한 것처럼 속성의 이념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 부터
존재하며 그 자신에 의해서 파악되는 사물, 즉 실체의 이념이다.
실질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실체들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면 그 실체의 온갖 성질들
을 증명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자연 안에는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동일한 속성을 가진
두개의 실체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것이 가진 본질에 있어서 유일한 것이어야 한
다(정리 5). 실질적 구별은 단순히 수적 구별이 아니라 성질(본성, 속성)의 차이를 뜻
한다. 그리고 실체들은 그 자신의 원인이고(정리 6) 필연적으로 존재하며(정리 7) 무
한하다(정리 8). '자기 원인', '필연적 존재', '무한'과 같은 것은 실체의 본질 자체
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실체의 특성들(propria)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까지 우리는 줄곧 "실체들 사이에 실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출발점으
로 삼았다. 그런데 실제로 자연 속에 실질적 차이가 있는 둘 이상의 실체가 존재하는
가? 이것이 스피노자의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정리 9와 10, 그리고 10의
주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 단계를 다시 구성해 보자.
1. 우선 우리는 '하나 이상의 속성을 가진 실체'를 아무 모순없이 생각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논변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우리는 하나 이상의 속성을 가진 사물
(실체)을 생각할 수 있다(정리 9:"각각의 사물이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소유하
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속성이 그 사물에 귀속된다.") 2) 실체의 각 속성은 그 자
체를 통해 파악되지 않으면 안된다(정리 10). 왜냐하면 속성이란 그 자체로 파악될 수
있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정리 10 증명). 3) 실체의 속성들이 지닌 이와
같은 성질(그 자체를 통해 파악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성질)은 하나 이상의 속성을 지
닌 실체가 없음을 함축하기 보다 다수의 속성을 지닌 실체를 생각하는 것은 아무 모
순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정리 10 주석 첫부분).17)
실체의 각 속성은 그 자체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하나의 속성은 다
른 속성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속성들은 서로 실질적으로 구별
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하지만 속성들 사이의 실질적 구별로 부터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두개의 실체가 따로 존재할 수 있다는 추론을 해낼 수 없다. 속성 간의 실질
적 구별이 곧 실체들 사이의 실질적 구별을 함축하려면( 따라서 하나의 속성만을 지닌
다수의 실체가 가능하려면) '다수의 속성, 즉 하나 이상의 속성을 가진 실체'라는 이
념이 내적 모순을 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의 각
속성은 그 자체로 생각될 수 있고 그 자체로 생각될 수 있는 본질들은 서로 실질적으
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2. 우리는 무한 수의 속성을 가진 실체의 이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논증의 두번
째 단계이다(정리 10 주석 후반부).18) 하나의 동일한 실체에 하나 이상의 다수의 속
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 없다. 하지만 그와 같은 실체가 자연 속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스피노자의 답은 간단하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ens absolute infinitum), 즉 신에 대한 이념이 우리의 정신 안에 선
천적으로 주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답이다. 이 존재자는 절대적으로
무한하기 때문에 각각 그것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 수의 속성들을
가진 실체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무한 수의 속성들은 신만이 가진 것
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정리 10 주석 후반부; 정리 11)19)
3. 그와 같은 실체는 자연 속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실체이고, 그 실체는 곧 신이다
(정리 14와 증명 참조).20) 실체로서의 신은 자연과 일치한다.21) 이것은 정리 11과
그 이후의 정리와 연결되면서 동시에 앞 에서 던졌던, 자연 속에는 실질적으로 구별되
는 다수의 실체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답을 주게 된다.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또는'무한한 속성을 지닌 실체'이고 실체로서의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고(정리 11), 분할될 수 없고(정리 12,13) 유일하다(정리14).
필연적 존재, 불가불할성, 유일성 등은 실체로서의 신으로 부터 필연적으로 펼쳐지는
신의 특징들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우리가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속성
가운데서 단지 사유와 연장,이 두 속성과 실체로서의 신으로 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
는 신의 특징들 뿐이고 그 외 더 이상 신에 대한 내용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신에 대한 인식은 비록 한정되어 있지만 신이 무엇인지 알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적합한 인식'이라고 스피노자는 보고 있다. 이와 같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의 신 인식조차 없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그
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식은 결국 신에 대한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기 때
문이다. 신 인식 문제가 사람들 사이에 그토톡 논란이 된 이유는 우리의 사유를 통해
신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라는 이름을 부당하게 쓰기 때문이
다.22)
4. 신, 실체, 양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스피노자는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도 없
다"(정리 14)는 명제를 증명한 뒤, 곧장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
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정리 15)는 명제를 내세운다. 신 이외
에는 아무런 실체도 존재하지 않고, 신 외에 존재하는 것은 양태 뿐이며, 양태는 실체
없이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신은 신 이외, 신의 양태로서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자의 존
재 근거이며 동시에 인식 근거이다. 이로 부터 스피노자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생성하는 모든 것은 오직 신의 무한한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만 생기고 또 신의 본질의
필연성으로 부터 생긴다"고 결론짓는다(정리 15 주석; 정리 17참조). 이로 부터 다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 "신의 본성의 완전성 이 외에는 신을 외부 또는 내
부에서 활동하게끔 자극하는 어떠한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정리 17 보충 1). 둘째,
"오로지 신만이 자유 원인이다."(정리 17 보충 2).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스피노자는
그리스도교 창조 사상을 부인한다. 존재하는 세계는 신의 지성과 선택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신의 최고 능력 또는 신의 무한한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유출"된 결과 라는 것
이다(정리 17 주석). 이어서 스피노자는, 신은 모든 것의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
재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정리 18). 왜냐하면 신은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의 원인 이
며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
은 영원하고(정리 19), 신에게는 존재와 본질이 동일하며(정리 20), 신의 속성의 절대
적 본성에서 생긴 것은 모두 항상 영원하고 무한하며(정리 21), 그것의 변용들도 마
찬가지로 영원하고 무한하다(정리 22와 23)는 것을 증명하고, 신은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며 동시에 본질 원인임(정리 24와 25)을 밝힌 다음 "개별 사물(res
particulares)들은 단지 신의 속성의 변용 혹은 신의 속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
는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정리 25 보충).
스피노자의 주장은 전통적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볼 때 크게 세가지의 문제를
안고 있다.23) 첫째, 만일 모든 사물이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 부터 유출된다고 보면
당연히 신의 자유로운 창조가 부인된다. 둘째, 신은 모든 사물의 초월적 원인이 아니
라 내재적 원인이라면 당연하게도 세계에 대한 신의 초월성이 부인된다. 신의 세계 바
깥에 서서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이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세계 자체로서 세계를
산출, 보존하는 셈이 된다. 셋째, 모든 개체들이 결국 신의 양태로서 존재한다면, 개
체들은 신과 마찬가지로 모종의 '신성'을 지녀야 한다. 이것을 역으로 표현하면 신도
개체들과 마찬가지로 '연장성' 또는 '신체성'을 지닌 존재로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
다면 스피노자의 이론은 유출론이나 범신론의 비난을 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문
제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 즉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그것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존
재인 신 또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양태, 즉 실체에 의해서 존재하고 실
체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개체들 또는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24)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열쇠는 {에티카} 제 2부 정리 10 주석에서 찾을 수 있
다. 여기에 보면 양태는 신(실체)없이 존재할 수 없고 생각될 수도 없지만 신은 그렇
다고 해서 양태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지적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의 본
질은 그것이 주어지면 어떤 사물이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어떤 사물이 없어지는
것, 또는 그것이 없으면 어떤 사물이 존재할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그리고 반대로
어떤 사물이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그러한 것으로 필연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25) 양태는 신없이 존재할 수 없고 생각될 수 없지만 신은
양태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생각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제 1부 정리 16에서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 부터 무한하게 많은 사물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필연
적으로 생긴다(유출된다)"고 한 것을 볼 때 양태들이 없이는 신은 존재할 수 없고, 생
각될 수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앞에서 인용한 "신은 양태의 본
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를 분명하게 해명
하지 못한다면 스피노자의 주장은 모든 양태는 신 속에 존재하며(1부 정리 15), 신은
모든 양태를 자신 속에서 생산한다는 뜻 뿐만 아니라(1부 정리 18) 양태는 모두 신이
라는 뜻조차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곧 어떤 종류의 초월성
도 신에게 허용하지 않는 범신론에 귀결되고 만다.
이 문제에 대해서 스피노자 자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철
학적 질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신의 본성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한다고 믿거나, 아
니면 피조물은 신 없이도 존재하거나 생각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인식의 질서나 존재
질서에서 볼 때 신의 본성은 최초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고찰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사람들은 감각 대상들이 마치 최초의 것인 줄 알고 그것을 먼저 고찰한다. 그 다
음, 그것을 바탕으로 신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에 신에 대한 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
다.26) 그러므로 신과 신의 양태인 개별 사물의 관계를 생각하려면 무엇보다도 사유의
질서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필연적으로 신을 양태와 혼동해서 생각하는 범
주 착오를 빚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생긴 문제는 신과 양태를 동일한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볼 때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난점이다.
만일 양태없이 신은 존재할 수도 없고 생각될 수도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신은 그 자체로 전혀 활동하지 않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신은 활
동적인 존재, 즉 활동적인 본질 (esentia actuosa)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과 어긋난
다.27) 양태라는 것은 사실은 신적 실체의 양태일 뿐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
다. 양태는 신을 떠나서 어떠한 실질적 내용을 가질 수 없고 신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양태를 통해서 규정될 수 없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무한한 수의 속성을
산출시킬 수 없는 실체는 물론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체가 속성에 인식론
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신은 양태들의 실체
로서 양태 '안에' 또는 양태 '배후에' 늘 존재한다. 가장 보잘 것없는 것들 조차도 모
든 사물들을 근거지우고 가능케 하는 힘인 이 실체를 바탕으로 비로소 존재한다. 말하
자면 실체는 존재론적 근거로서 모든 양태에 현존하고, 모든 양태는 실체를 전제한다.
그런데 신의 속성 가운데 한 속성을 통해 모든 양태는 실체의 양태로서 일종한 유의
본질(예컨데 사유의 양태 또는 연장의 양태)을 갖는다. 그러므로 신은 양태의 실체이
고, 양태는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 들 중의 하나의 측면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신과 양태는 공통된 본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은 양태의 본질에는 속
하지 않는다고 스피노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양태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유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양태는 신(Deus)이 아니라 단지
그의 속성들 가운데 하나로 양태화된 '한에서 신'(Deus quatenus)이다.28)
여기에서도, 우리의 지성 속에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신의 이념은 현실 내의 관
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소산
적 자연은 능산적 자연을 통해서 비로소 그것이 존재하는 바대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하고 발생하는 것은 모두 능산적 자연, 즉 신을 통해, 신 안에서 존재하
고 신 안에서 발생한다. 그렇지만 소산적 자연이 곧 능산적 자연 또는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작해야 신(실체)의 양태화로 표현된 '한에서 신'(Deus quatenus)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소산적 자연은 무한하게 표현된 양태들의 총합이고 또한 능산적
자연을 통해 생산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양태일 수 밖에 없고 결코 실체성을 가진
능산적 자연이 될 수 없다.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필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되, 전자는 후자에 대해서 언제나 절대적 지배권을 유지한다. 왜냐하면 실체성은 오
직 능산적 자연 즉 신에게만 부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양태는 유일한 실체인
신의 양태라는 것은 신 이외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론적 자립성을 절대적으로 가
질 수 없고 모두 신에게 의존해 있음을 보여준다.29)
5. 신에 대한 지적 사랑
{에티카} 1부에 제시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자유인으로서 인간의 복된 삶, 또는
인간의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신 또는 자연을 실체로 이
해한 것은 윤리적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1부 부록에서 보듯이 스피노자가 처음에
겨냥한 것은 의인론적, 인간중심론적 사고의 틀을 깨뜨리고 제 3자적 객관적 관점에서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사고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었다. 이런
목적에서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임이 증명되었다. 신은 인간처럼 어떠한 의
도도, 목적도 갖지 않고 단지 그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도 누누히 지적
하였다.30) 하지만 신의 본질에 대한 객관적, 보편적 인식으로는 삶의 태도 변경이 아
직 완전히 일어나지 않는다.31)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스피노자의 전략이 여기에 와서는 출발점의 그것과 정반
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출발점에서는 의인론적, 인간 중심론적 사고를
벗어나 신과 자연에 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던 눈을, 말하자면 일인칭적 관점을 삼인칭적 관점으로 바꾸게 하자는 것이었다. 하
지만 만일 내가 삼인칭적 관점에서신과 자연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으로만 남아 있을 경우 나의 정신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
로 이제 신에 대한 인식은 제 3자적인 객관적 인식에서 나의 체험된 인식, 즉 세번째
종류의 인식인 직관지로 다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전환은 어떻게 일어
날 수 있는가?
신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 신에 대한 체험적 인식으로의 전환은 후자를 전자의 결
과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객관적 인식이 인식자의 의식 속
에 실제로 깊이 스며들어 그의 감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때, 그 때 비로소 가능하
다. 형이상학적, 객관적 인식에서부터 갑작스럽게 새로운 통찰이 생길 수 있고 이로
인해 정신이 영향을 받게 된다.32) 이와 같은 인식, 즉 직관지는 개념을 통한 보편적
인식(두번 째의 인식 즉 지성지)과 달리 신의 본성을 표현하는 속성을 통해 사물의 개
별적 본질을 파악하는 것임을 스피노자는 강조한다.33) 그것은 단지 사물에 대한 보편
적 인식에 그치지 않고 개별적인 것의 본질을, 예컨데 나의 신체의 본질을 신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다.34) 신 안에서의 나의 개별적인 본질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직관지는
가능하지 않다. 신과 양태, 그리고 특히 신과 양태 하나 하나 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
은 객관적인 인식에 머물지 않고 인식자의 태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
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활동을 신 또는 전체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예
컨데 나의 신체를 신 또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신 또는 자연의 양태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35) 만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면 나는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용기와 관용을 가지고 삶을 사랑할 수 있다. 따라서 신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나와 상관없는 인식이 아니라 나와 관계된, 나의 존재 근거이며
인식 근거인 신에 대한 사랑으로 결국 전환된다.
신에 대한 사랑, 즉 직관적 인식으로 인해 나는 나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보는 생
각을 버리고 나와 다른, 나보다 큰 '타자'를 경험하게 된다. 이 '타자'를 일컬어 스피
노자는 '신'이라고 부르고 좀 냉정하게 표현할 경우는 '자연' 또는 '실체'라고 부른
다. 나는 그와 전혀 상관없이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의 한 양태, 그의 표현으
로 스스로를 체험한다. 나를 신, 자연 또는 실체의 양태적 표현으로 생각하고 그 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나 이외의 모든 사물들도 나와 동일한 존재임을 체험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만물을 신 또는 자연의 표현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지복을 누릴 수 있다고 스피노자는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에
대한 사랑은 사실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다.36) 이렇게 볼 때
신은 스피노자의 철학의 시작이며 동시에 끝이다. 그러므로 그의 {에티카}는 신에서
부터 시작하여 신으로 끝난다. 그것은 신에 대한 인식과 사랑에 인간의 최고 행복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37)
(주)
1) 스피노자 철학의 윤리적 동기에 대해서는 Ernst Cassirer, Das
Erkenntnisproblem in der Philosophie und Wissenschaft der neueren Zeit (Berlin:
Verlag Bruno Cassirer, 19112), Bd.2, 84면 이하; Manfred Walther, Metaphysik als
Anti-Theologie. Die Philosophie Spinozas im Zusammenhang der religionsphilo-
sophischen Problematik(Hamburg:Felix Meiner, 1971), 2면 이하 참조; 강영안, "스피
노자: 자기 보존을 위한 철학" {철학과 현실} 1993년 가을호 (서울: 철학문화연구소),
127-143면 참조.
2) H. de Dijn, Einstein en Spinoza. Mededelingen vanwege het Spinozahuis 64
(Delft: Ebron, 1991), 1-13면 참조.
3)스피노자는 형이상학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해
설에 이어 부록으로 붙인 {형이상학적 사유 결과}(Cogitata metaphysica)를 제외하고
는 '형이상학'이란 용어는 그의 글 가운데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외적인 경우는
빌름 반 블레이은베르그(Willem van Blijenbergh)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 볼 수 있
다.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을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인식에 앞서 알아야 할
사물의 필연성에 관한 인식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서신} 27 참조. B. de Spinoza,
Briefwechsel. Uebersetzung und Anmerkungen von Carl Gebhardt. Herausgegeben mit
Einleitung, Anhang und erweiterter Bibliographie von Manfred Walther (Hamburg:
Felix Meiner, 19863), 134-135면 참조; {에티카} 1부에서 3부까지의 내용을 넓은 의
미에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어휘를 좁은 의미
로 한정시켜야 한다면 신에 관해서 다루는 1부만은 적어도 이 말이 담고 있는 범위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H.J.Hubbeling, Spinoza (Baarn: Het Wereldvenster, 1978),
62-63면 참조.
4){지성개선론} 서문에 관한 논의는 강영안, 앞의 글과 Th.H.Zweerman, Spinoza's
Inleiding tot de Filosofie. Een vertaling en structuuranalyse van de inleiding
der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benevens een commentaar bij deze tekst
(Leuven, 1983) 참조.
5) Zweerman, 앞의 책. 280면 이하 참조.
6) {에티카} 제1부 부록: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울: 서광사, 1990),
56면.
7) {에티카} 제1부 부록(강영계 옮김, 55-64면).
8) {에티카} 제2머리말(강영계 옮김, 67면). 이 문제는 5절에서 좀더 자세하게 논
의한다.
9)여기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논의할 수 없다. 존재 유지 욕구(conatus)와 세가지
종류의 인식 방식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점진적인 해방 과정에 대한 논의는
A.Matheron, Individu et Communaut chez Spinoza. Nouvelle Edition (Paris: Les
Editions de Minuit, 1988), 81면 이하 참조.
10)여기에서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것의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존재하
는 것을 우리는 실체로 이해한다"(R.Descartes, Prinicpiorum Philosophiae Pars I,
51)고 정의하면서도 신 이외에 '사유하는 것'과 '연장하는 것'을 실체로 보았다. 이것
은 스피노자가 보기에 실체 개념에서 보면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실체는 스피노
자 철학에서 존재론적 독립성과 인식론적 독립성('그 자체 안에 존재하며 그 자 체로
이해될(파악될, 생각될) 수 있는 것')을 띠고 있다. 데카르트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Henry E. Allison, 앞의 책. 44-48면; Edwin Curley, Behind the Geometrical Method.
A Reading of Spinoza's Ethics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6면 이하 참조.
11)M.A. Wolfson, The Philosophy of Spinoza. 2 vols.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1934), I권 5장; Edwin Curley,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408면 각주 2
참조.
12){에티카} 제 1부 공리6은 다음과 같다. "참다운 관념은 자신의 대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Ernst Cassirer, 앞의 책, 116면 이하;
Henry E. Allison, Benedict de Spinoza. An Introduction. Revised Edition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87), 48면 이하 참조.
13) 실재론적 해석의 대표자는 게루(Martial Gu roult)이다. M.Gu roult, Spinoza.
I.Dieu (Paris: Aubier-Montaigne, 1968) 428-461면 참조.
14) 이것은 드 데인의 제안이다. Herman de Dijn, "God, Substantie, Attribuut,
Modus. Sleutels voor het verstaan van Ethica I", in: Wijsgerig Perspectief op
Maatschappij en Wetenschap, 17 (1976-77), 97-113면 참조.
15){에티카} 1부 정의 6 해명: "나는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고 말하기 보다 절
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단지 자신의 유 안에서만 무한하다면 어떤 것
에 대해서도 우리는 무한한 속성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6) {에티카} 1부 정리 4 증명: "존재하는 것은 자신 안에 또는 다른 것 안에 존재
한다. 곧 지성을 제외하고는 실체와 그것의 변용 이외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성을 빼놓고는 실체 또는 실체의 속성과 변용 이외에는 여러 사물들을 서로
구별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7) 에티카 제 1부 정리 10 주석:" 비록 두 속성이 실제로 서로 다른 것으로 파악
된다고 할지라도, 곧 한 속성이 다른 속성의 도움없이 생각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로부터 그 두 속성이 두개의 존재자 또는 두개의 서로 다른 실체를 구성한다고 결론
짓지 못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속성이 그 자체를 통하여 파악된다는 것은 실체의 본성
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실체가 소유하는 모든 속성은 언제난 실체 안에
함께 있으며, 하나가 다른 것으로 부터 산출될 수 없고, 각각의 속성이 실체의 실재성
또는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실체에 여러가지 속성을 귀속시키는
것은 결코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18) {에티카} 제 1부 정리 10 주석 후반부:"오히려 반대로 각각의 존재자가 어떤
속성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또한 각각의 존재자 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가지면 가질수록 각각의 존재작가 필연성이나 영원성 그리고 무한성을 표현하
는 더 많은 속성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명백한 것은 자연 안에 없다."
19) {에티카} 제1부 정리 11: "신 또는 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20) {에티카} 제1부 정리 14: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 없다."
21)'신 또는 자연'(Deus sive Natura)이란 표현은 {에티카} 제 4부 머리 말과 정리
4 증명에 등장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론}(1부 2장 12절)에서 제시한 짧은 언급 이
외에는("Uijt alle deze dan volgt: dat van de natuur alles in alles gezeijt word,
en dat alzo de natuur bestaat van oneijndelijke eijgenschappen, van de welke een
ieder des zelfs, in sijn geslgt, volmaakt is. Het welk ten eenemaal overeenkomt
met de beschrijvinge, die men aan God geeft")(Spinoza, Korte Verhandeling van
God, de Mensch en deszelves Welstand, in: Spinoza, Korte Geschriften. F.Mignini
et al(ed.)(Amsterdam: Wereldbibliotheek, 1982), 258면) 이 표현을 정당화할 수 있
는 체계적 논의는 어디에도 없다. Heinrich Oldenburg에게 보낸 편지({서신} 6과 {서
신} 73)에도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언급은 발견된다.
22) {에티카} 제 2부 정리 47 주석: "인간이 신에 관하여 공통 개념과 같은 명료한
인식을 갖지 못한 것은, 신을 물체처럼 그림을 그려낼 수 없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
고 우리가 보통 보는 사물들의 상과 '신'의 이름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신학정치
론} 제 6장 각주 6:신에 관한한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하고 혼란된 관념만을 가
지고 있는 한, 우리는 신의 존재와,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한다. 삼각
형의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삼각형의 세각의 합은 두 직각의 합과 같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신의 본성을 혼란되게 이해하는 사람은, 존재한다는 것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제, 신의 본성을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
하게 이해하려면 공통 개념이라고 부르는, 몇개의 매우 단순한 개념에 관심을 써야 하
고 이것을 도움으로 해서 신적 본성의 속성으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결합하고
자 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어디에나 존재하
며, 우리의 모든 이해는 그 속에 신의 본성을 포함하고 그를 통해 이해된 것임이 명백
하게 될 것이다."(B.de Spinoza, Theologisch-Politischer Traktat. Auf der
Grundlage der Uebersetzung von Carl Gebhardt, neu bearbeitet, eingeleitet und
herausgegeben von Guenter Gawlick (Hamburg: Felix Meiner, 1984), 97면.
23) Sylvain Zac, "Spinoza et judaisme," in: idem, Essais spinozistes(Paris:
J.Vrin, 1985), 89-103면 참조. 이 세가지 문제는 모두 전통적인 유대교 사상과 조화
될 수 있다는 것이 자크의 논지이다.
24) 스피노자는 어디서도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은 능산적 자연을 그 자체 안에 존재하며 그 자신에 의하
여 파악되는 것, 아니면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실체의 속성 곧 자유로운
원인으로 고찰되는 신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소산적 자연을 신의 본성
이나 신의 각 속성의 필연성에서 생기는 모든 것, 즉 신 안에 존재하며 신 없이는 존
재할 수도 없고 파악될 수 도 없는 그런한 것으로 고찰되는 신의 속성의 모든 양태로
이해한다."(정리 29 주석).
25){에티카} 제 2부 정리 10 주석; {에티카} 제 2부 정의 2: "그것이 주어지면 사
물이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사물이 필연적으로 없어지는 것, 또는 그
것이 없으면 사물이 그리고 반대로 사물이 없으면 그것이 있을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그러한 것을 나는 사물의 본질(essentia)이라고 이해한다."
26) {에티카} 제2부 정리 10 주석.
27) {에티카} 제2부 정리 3 주석: 제1부 정리 34 참조.
28) H. de Dijn, 앞의 글. 111면; "신은 양태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표현과
관련된 방법론적인 질문(causa proxima의 문제)에 관해서는 H. de Dijn, Conceptions
of Philosophical Method in Spinoza: Logica and Mos Geometricus", in: Review of
Metaphysics 40(1986), 55-78 면 참조; 신과 자연을 동일시 할 때 스피노자가 뜻하는
바는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외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임을 말하는 것("모
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그 안에서 활동한다")이며 결코 어떤 질량이나 물질을 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변호한다. {서신} 73 (1675년 경 하인리히 올덴부르크에게
보낸 편지): B. de Spinoza, Briefwechsel. 276면 참조; 실체와 양태의 관계를 '표현'
의 문제로 다룬 들뢰즈의 관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의 연구에 대한 논의는 다른 기회
로 미룬다. 자세한 것은 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 me de l'expression
(Paris: Les Editions de Minuit), 1968 참조.
29) Rudolf Boehm은 스피노자의 실체에 대한 정의를 바로 이해할 때 실체는 신이
나 자연, 즉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das Sein selbst)이고, 이런 의미에
서 스피노자는 근대의 '주체성'의 철학, 즉 존재 자체를 모든 존재자의 존재 근거
(ultimum subjectum로 보는 철학을 정립한 사람으로 본다. Rudolf Boehm, "Spinoza
und die Metaphysik der Subjektivit t", in: Zeitschrift f r philosophische
Forschung 22(1968), 165-186면.
30) 이것은 제 4부 머리말에서 선과 악의 상대성과 관련해서 또다시 강조되고 있
다. {에티카} 제 4부 머리말: "우리는 사람들이 사물의 참다운 인식에 의해서가 아니
라 오히려 편견에 의해서 습관적으로 자연물을 완전하다든가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제 1부의 부록에서 자연은 목적으로 위하여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신 또는 자연(Deus sive
Natura)이라고 부르는 저 무한한 존재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필연성을 가지
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31){에티카} 5부 정리 36 주석 참조: "나는 제 1부에서 모든 것이 (따라서 인간의
정신도 역시) 본질과 존재에 관해서 신에게 의존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제시했지만 그
증명이 비록 정당하고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 증명은 우리들이 신
에게 의존한다고 말한 각 개물의 본질 자체에서 이러한 것이 결론내려질 때처럼 우리
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32) {에티카} 제5부 정리 36 참조.
33) 세가지 종류의 인식의 구별에 대해서 {에티카} 제2부 정리 40 주석 참조.
34) {에티카} 제5부 정리 22와 증명 참조: "그렇지만 신 안에는 이 그리고 저 인간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35) {에티카} 제5부 정리 39 주석 참조.
36) {에티카} 제5부 정리 35: "신은 무한한 지적 사랑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
한다."; 정리 36: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
의 일부이다."
37) {신학정치론} 제4장 (B. de Spinoza, Thelogisch-Politischer Traktat, 68-69
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