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21대 왕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의 홍문(紅門)이다.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烈女)’로 기록되고 있다.그는 남편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 병으로 죽자 곡기를 끊고 14일 만에 따라 죽었다.
영조가 화순옹주의 집에 찾아와 미음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화순옹주의 조카인 정조는 고모의 사후 25년인 1783년 고모의 정절을 기리며 월성위 부부의 무덤이 있는
충남 예산에 열녀문(화순옹주 홍문)을 세웠다.
“부부의 의리를 중히 여겨 같은 무덤에 묻히려고 결연히 뜻을 따라 죽기란 어렵지 않은가.
… 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에 빛이 나지 않겠는가. … 아! 참으로 어질도다.” 정조는 이렇게 칭송했다.

묘막터 정문 위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판각되어 있다.
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孝公金漢藎配和順翁主之門 上之七年 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
(열녀수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배화순옹주지문 상지7년 계묘 1월12일 특명정려)
조선왕조실록은 화순옹주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영조 34년 1월 17일 갑진 1번째기사 <화순 옹주의 졸기>를 그대로 옮겼다.
화순 옹주가 졸(卒)하였다. 옹주는 바로 임금의 첫째 딸인데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동복 누이동생(同母妹)이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시집가서 비로소 궐문을 나갔는데, 심히 부도(婦道)를 가졌고 정숙(貞淑)하고
유순함을 겸비(兼備)하였다. 평소에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복식(服飾)에 화려하고 사치함을 쓰지 않았으며,
도위(都尉)와 더불어 서로 경계하고 힘써서 항상 깨끗하고 삼감으로써 몸을 가지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어진 도위와 착한 옹주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고 하였는데, 도위가 졸하자, 옹주가 따라서 죽기를 결심하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그 집에 친히 거둥하여 미음을 들라고 권하자,
옹주가 명령을 받들어 한 번 마셨다가 곧 토하니, 임금이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돌아왔는데, 이에 이르러 음식을 끊은 지 14일이 되어 마침내 자진(自盡)하였다.
정렬(貞烈)하다. 그 절조(節操)여! 이는 천고(千古)의 왕희(王姬) 중에 있지 아니한 바이다.
조정에 받들어 위로하고 정후(庭候)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부인(婦人)의 도(道)는 정(貞) 하나일 뿐이다. 세상에 붕성지통(崩城之痛)을 당한 자가 누구나 목숨을 끊어 따라가서
그 소원을 이루려고 하지 아니하겠는가마는, 죽고 사는 것이 또한 큰지라, 하루아침에 목숨을 결단하여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보는 이는 대개 적다. 그러나 정부(貞婦)·열녀(烈女)가 마음의 상처가 크고 슬픔이 심한 즈음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자인(自引) 하는 것은 혹시 쉽게 할 수 있지만, 어찌 열흘이 지나도록 음식을 끊고 한 번 죽음을 맹세하여
마침내 능히 성취하였으니, 그 절조가 옹주와 같은 이가 있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비록 군부(君父)의 엄하고 친함으로서도
능히 감동해 돌이킬 수 없었으니, 진실로 순수하고 굳세며, 지극히 바른 기개(氣槪)가 분육(賁育)이라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할 바가 있지 아니하면 능히 이와 같겠는가? 이는 진실로 여항(閭巷)의 필부(匹婦)도 어려운 바인데,
이제 왕실의 귀주(貴主)에게서 보게 되니 더욱 우뚝하지 아니한가? 아! 지극한 행실과 순수한 덕은 진실로
우리 성후(聖后)께서 전수(傳授)하신 심법(心法)이므로, 귀주가 평일에 귀에 젖고 눈에 밴 것을 또한 남편에게 옮겼던 것이다.
아! 정렬하도다. 아! 아름답도다."

열녀문 담장 안쪽을 들여다보니 기초석이 여기저기 남아 있어 당시의 건물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1758년 영조는 급히 궁을 나와 딸 화순옹주의 집으로 향했다.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들었다. 애타는 마음은 알겠으나
아비를 생각하여 미음이라도 한 술 들도록 하거라.”
화순옹주는 하는 수 없이 미음을 넘겼으나 곧 토해내고 말았다.
“이미 뜻을 정했으니 차마 목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어허 대체 이를 어찌할꼬…”
영조의 둘째 딸로 태어난 화순옹주는 성품이 유순하고 행실이 바르며 검소했다.
“옹주에게 보석과 노래기를 앞에 펼쳐놓았는데 일부러 눈을 감고 보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그것이 정말인가? 정말 기특한 아이구나.”
영조는 화순옹주를 특히 예뻐하며 <소학>, <열녀전> 등을 읽어주고 도리를 가르치곤 했다.
이렇게 아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옹주였지만 그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옹주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이듬해 병사했다.
아홉 살 때에는 한 살 위인 오라버니 효장세자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열 살 때는 한 궁인이 자신의 처우에 앙심을 품고 옹주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
다사다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화순옹주는 열세 살 때 동갑인 김한신과 결혼을 했다.
“인물도 훤칠하고 머리도 영민하며 몸가짐이 항상 겸손하니 옹주의 짝으로 더할 나위가 없겠구나.”
김한신은 왕의 사위가 돼서도 비단옷을 걸치지 않았고 그가 왕의 사위인지 주변사람들이 모를 정도였다.
부부 사이도 남달리 좋아 당시 사람들은 이 부부를 ‘어진 부마와 착한 옹주’라 부르며 칭송했다.
하지만 화순옹주에게 다시금 비극이 찾아왔다. 김한신이 서른 아홉 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를 애통해하던 화순옹주는 남편을 따라서 죽기로 결심하고 음식을 끊었다.
“옹주가 남편이 죽은 뒤로 7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하니 이를 내버려두면 어찌 아비 된 도리라 하겠는가.”
궁으로 돌아간 영조는 옹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장문의 편지까지 썼다.
옹주는 끝내 음식을 끊은 지 14일만에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비통한 마음으로 옹주의 상에 참석한 예조판서는 영조에게 이렇게 청했다.
“남편을 여의고 슬픔이 심할 때 그 자리에서 자결하기는 쉬우나 열흘 넘게 음식을 먹지 않고
절조를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리기를 청하옵니다.”
하지만 영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궁궐로 돌아왔다.
“딸의 장례를 지켜보는 것도 비통한데 열녀문을 내리라고 청하다니…”
당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효와 정절을 중시 여겼다.
그래서 죽은 남편을 따라 죽은 여인을 열녀로 칭하였고 집이나 마을 앞에
붉은 문을 세우고 노역을 면하는 혜택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열녀문이다.
대신들이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릴 것을 재차 청하자 영조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옹주가 비록 정절은 지켰으나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효에는 모자람이 있었소.
그러하니 아비가 자식에게 열녀문을 내리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소.”
“전하의 말씀은 지당하오나 훌륭한 정절을 그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는 것은 정절에 달려있지 열녀문에 달려 있지 않다.
앞으로 다시는 이 일을 논하지 말라.”
영조는 끝내 사랑하는 딸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은 내려지지 않았다.
“정절도 중하지만, 효 또한 중한 것이오. 또한 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않은 것은
만일 내가 옹주의 죽음을 칭송할 경우 앞으로 남편을 먼저 보낸 여인들에게 죽음을
강요할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오.”

화순옹주 홍문 바로 옆에는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김한신은 본관이 경주(慶州), 자는 유보(幼補),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이며, 어머니는 평시령 황하영(黃夏英)의 딸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1732년 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인물이 잘생기고 총명하여 영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벼슬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귀한 신분임에도 평소에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시책문을 많이 썼으며, 팔분체(八分體)와 전각(篆刻)에도 뛰어났다.
1758년 후사 없이 요절하자 부인 화순옹주도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묘소 앞 비문에는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곡장 뒷편에서 바라본 김한신 부부 무덤 앞 전경은 탁 트인게 참으로 좋았다.
맥세를 타고 무덤으로 가는 잉(孕) 역시 볼록한 게 아주 실하고 실한게 좋아 보였다.
김한신은 노론이었지만 당파에 치우치지 않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39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를 조선왕조실록에는 다만 "김한신이 卒하였다…
어찌 한 병으로 효험이 없을 것을 뜻하였겠는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1809년 25세 때에 아버지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을 따라 중국 연경을 다녀오면서
붓대 속에 백송씨를 넣어 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의 묘 앞에 심어 키운 것이 <예산 용궁리 백송>이다.
<예산 용궁리 백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그루의 백송 중 하나로 본래 3가지 중 한 가지만 남아 매우 빈약한 모습이나
추사 김정희가 심었고 당시 중국과의 교류 관계를 알 수 있는 오래된 나무로 문화적 가치가 크다.



조선 후기의 문신 김흥경(金興慶)의 묘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龍宮里)의 김정희선생고택(金正喜先生古宅)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천연기념물 예산 용궁리 백송이 있는곳에 있다. 묘는 동향으로 조성하였으며, 앞에 상돌, 돌기둥 2개, 석인상(石人像)이 있다.
2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이 있다. 비석은 사각형의 대좌 위에 흑요암으로 만든 비신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올렸다.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고조부이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파직되었다가 영조 즉위 후 복직하였다. 이후 탕평책에 반대하다 다시 파직되었으며,
복직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