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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뉴스, 배드 뉴스(눅 2:8-21)
* 미국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이 “굿뉴스와 배드 뉴스가 있는데 어느 쪽부터 들을래?”라고 묻는 장면이 가끔 등장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지난주에도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이 있었다. 기쁜 소식은 순천에서 당선된 국회위원 이정현이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 시절 KBS의 세월호 보도에 개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는 지난 19일 이 의원을 방송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 이정현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직후 KBS가 해경 등 정부 대처와 구조 활동의 문제점을 주요 뉴스로 다루자 당시 KBS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뉴스 편집에서 빼달라", "다시 녹음해서 만들어 달라"며 편집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됐다. 방송의 자유와 독립 보장을 위해 제정된 방송법은 제4조와 제105조에 방송 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침해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 이정현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 방송법 조항이 도입되고 나서 형사 처벌되는 첫 사례에 해당하고, 형량에 따라 의원직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사장이 교체되고 해직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등 정상화의 길을 걷고 있는 MBC에 비해, KBS는 아직도 100일 이상 파업을 계속하며 고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공영방송인 KBS가 권력의 도구로 악용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하루속히 정상화되었다는 희소식이 전해지길 바란다.
* 반면, 나쁜 소식은 지난 21일 제천 노블 휘트니스센터에서 발생한 화재로 29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비극이 발생한 뒤 들리는 이야기는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었음에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안전관리 소홀로 인해 애꿎은 목숨이 희생됐다는 한탄이다. 이번 화재에서도 여성 사우나가 있던 2층에서만 20명이 사망했고 고층부인 6-8층에서 나머지 9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 2층에서 사망한 20명은 대부분 사우나 출입문 앞에서 발견됐다. 2층은 1층 발화지점과 가장 가까운 층이라 연기와 불길이 가장 강한 층이다. 비상계단이 층별로 있지만 비상계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출입문으로 몰려가다가 연기에 질식해 숨졌을 가능성이 높다. 출입문 버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들린다. 반면 남성 사우나가 있던 3층과 4-5층에 있던 이용객들은 비상계단 등으로 대피해 모두 살았다.
* 한 가족이 여성 사우나가 있던 2층과 남성 사우나가 있던 3층을 나눠 이용하다가 생과 사가 나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니, 삶과 죽음의 길이 때로는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갈라진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1-2분만 늦었으면 자신들도 죽었을 거라고 간발의 차이로 사지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하는데, 간발의 차이로 사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는 할 말을 잊게 된다.
* 제천시 모산동 소방서에서 화재 현장까지는 3㎞ 남짓 거리다. 3시 53분에 화재 신고가 접수된 후 지휘차와 펌프차 등 선발대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4시였다. 7분이나 걸린 것이다. 게다가 사다리차는 덩치가 커서 현장에 바로 접근하지 못했다. 대형마트 뒤, 상가와 주택가로 이어지는 골목길 곳곳에 차가 주차돼 있었고, 일부 도로엔 2차로 두 쪽 모두 주차돼 있어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통행할 정도였다.
* 결국 사다리차는 500m 정도 우회로를 거쳐 가까스로 현장에 도착했다. 이때가 화재신고 접수 후 20분이 지날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30여m까지 펼 수 있는 사다리를 제대로 펼 수 없었다. 사다리를 올리려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고정 다리(아우트리거)를 먼저 펴야 하는데 공간이 부족했다. 이번에도 주변에 주차된 차들 때문이었다. 결국 시민들이 벽돌로 창문을 깨고 견인하고 나서야 자리를 잡고 사다리를 올릴 수 있었다.
* 하지만 각도를 못 맞춰 사다리를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다 시민 한 명을 구조한 시각은 출동하고 1시간을 넘긴 5시 20분이었다. 소방서 사다리차가 자리조차 못 잡는 사이 시민 이양섭씨가 가져온 민간 사다리차가 옥상에서 3명을 구조했다. 사다리차 등 스카이장비 대여업체를 운영하는 이씨는 3년 전에 1억 5천여만 원을 주고 산 장비가 불에 탈 수도 있었던 상황을 무릅쓰고 귀한 목숨을 구해냈다.
* 화재가 난 건물 주위의 불법 주차가 구조의 ‘골든타임’을 빼앗은 것은 사실이지만 소방 장비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사다리차는 1명을 구조한 후 불을 끄기 시작했는데 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물을 공급하는 알루미늄 관이 터져 처음에는 약하게 새던 물줄기가 시간이 갈수록 분수가 터진 듯 콸콸 새나갔다. 화재 지점으로 뿜어야 하는 물줄기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촌각을 다투는 화재현장에서 이는 누군가의 목숨과도 연결될 수 있는 일이다.
* 건물을 탈출한 사람들의 “1-2분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불법주차 등으로 지체된 몇 분의 시간 동안, 그리고 사다리차가 자리를 잡기 위해 허비한 몇 십분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게다가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연말연시라고 다소 들뜬 분위기에서 이런 비극이 발생해 더욱 안타깝다.
* 이런 비보를 접할 때마다 세월호처럼 바다 한가운데도 아니고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삶의 현장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좋은 소식이나 기쁜 소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쁜 소식이나 슬픈 소식만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은 함께 존재한다. 물론 좋은 소식이 더 많거나 나쁜 소식이 더 많거나 하는 차이는 있을 것이다.
* 우리가 만들려고 노력하는 좋은 세상은 좋은 소식만 존재하고 나쁜 소식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나쁜 소식보다 좋은 소식이 더 많은 세상일 것이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대림절 넷째 주일 설교 제목을 ‘굿뉴스 배드 뉴스’로 정한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기독교인들이 당연하게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하는 예수 탄생이 당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반길 만한 소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 마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은 헤롯대왕이었다. 동방박사들로부터 새로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헤롯은 예수를 죽이려 하고, 천사의 도움으로 그 계획이 좌절되자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그가 이런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 물론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역사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태는 헤롯이라는 폭군이 지배하는 시대에 태어난 예수의 출생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메시야 탄생에 대한 예언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동방박사 이야기와 함께 헤롯의 유아 학살 이야기를 첨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의 기록처럼 단기간에 대규모로 벌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일은 비일비재했다.
* 헤롯대왕은 유대인이 아니었는데도 유대인의 왕이 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허약했다. 에돔 출신이었던 헤롯은 하스몬 왕가의 가신으로 일하다 로마의 정치적 전략에 의해 왕이 되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그의 집권을 강력하게 거부했고 저항했다. 기원전 37년 권좌에 오른 헤롯(BCE 4년까지 33년 재임)은 로마 군사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유대인들의 대규모 저항을 진압하는데 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 헤롯은 말년에 극도의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주변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다. 그래서 모든 대중 집회를 금지시키고 나라 전체에 첩자들을 풀어 백성들을 감시했다. 심지어 후임 문제로 인한 갈등 때문에 하스몬 왕조의 공주였던 아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까지 처형시키기까지 했다(기원전 7년). 사망 직전에는 다른 아들을 살해하도록 지시했고 마을의 지도자들을 잡아들여 자신의 사망 시점에 맞춰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 마태가 헤롯이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듣고 그를 죽이려 했고, 실패하자 유아 살해를 지시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예수 탄생을 전후해 일어났던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 소식을 기뻐하며 반기지 않은 사람이 헤롯뿐이었을까. 자신이 정혼한 여인이 자신과 상관없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과연 한 남자로서 마리아의 잉태가 기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한 남자로서 자신이 결혼하기로 한 여인이 혹시 부정을 저지른 것은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유대의 율법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남자에 대한 엄청난 모욕으로 간주된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성적으로 부정한 행위는 사형에 처해질 만큼 중하게 다스려졌고,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정혼한 사이는 남편과 아내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남편 요셉과 관계하지 않은 마리아의 임신은 부정한 행위의 결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유대사회에서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요셉과 같은 의로운 남자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해 여자의 부정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알려 부정을 정죄하고 파혼을 선포해야 했다. 모세의 율법에 의지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사는 것은 마찬가지로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유대사회에서 이는 당연한 결정이었지만, 요셉이 파혼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기록은 그가 약혼녀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마태복음은 요셉이 꿈에 나타난 천사의 음성을 듣고 “주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감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 그러면 마리아의 경우는 어땠을까? 누가복음에 따르면 마리아는 "은혜를 입은 사람아,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천사의 인사를 듣고 몹시 놀랐다. 그리고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궁금해했다. 천사의 설명을 들은 후 "보십시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천사님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였다.
* 그러나 과연 성경의 기록처럼 모든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뤄졌을까? 가브리엘이 어느 날 와서 뜬금없이 처녀의 몸으로 메시야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마리아가 아무 생각 없이 “보시오 저는 주의 여종이니 모든 일이 천사의 말씀대로 내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물론 마리아는 자신에게 전해진 놀라운 소식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를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노력했다.
* 사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를 잉태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처럼, 여자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믿으라는 요구는 억지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억지로 이해하기보다 마태와 누가가 마가는 아예 기록하지 않았고 요한은 다른 식으로 표현했던 예수 탄생의 신비를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맞게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 어찌됐던 2천 년 전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해진 예수 수태 소식은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 당사자들에게 축복이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마태의 기록대로 메시야 탄생의 기쁜 소식은 헤롯을 비롯한 집권층에게는 굿 뉴스가 아니라 배드 뉴스였을 것이다. 당사자인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굿 뉴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드 뉴스일 수도 있는 소식을 굿 뉴스로 승화시키는 것이 신앙이라면 그들의 신앙은 훌륭한 것이다.
* 두 사람은 당시 상황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수태 소식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처지나 현실보다 자신들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마태와 누가가 강조하고자 했던 부분도 그런 그들의 태도였을 것이다. 오늘 분문은 역사상 최초의 성탄절을 경배한 목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누가가 유대사회에서 배척당하던 목자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고 기록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 누가가 유대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던 목자들을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메시야의 탄생을 가장 고대하던 기층 민중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은 성탄의 첫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목자였다는 사실 외에도 그들이 전해들은 내용이다. 10-12절에 기록된 천사의 말 중 핵심은 당연히 11절이다.
*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라는 천사의 말은 오늘 본문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주목한 대목은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는 14절("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이다.
* 다시 한번 이 구절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앞부분은 “지극히 높은 곳”(개역), “더없이 높은 곳”(새번역), “하늘 높은 곳”(공동번역) 등으로, 뒷부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개역),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새번역),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공동번역) 등으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지만 뜻은 일맥상통한다. 천사들의 찬양은 예수 탄생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의 소식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 이는 마태복음이 기록한 헤롯의 유아학살에서 드러나듯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리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메시야의 탄생과 같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지배계급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0절의 “온 백성” 또는 “모든 백성”이라는 표현 역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세상의 구조 때문이다.
* 우리가 이미 경험했듯이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명명백백 밝혀졌음에도 모든 사람들이 그에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박근혜가 탄핵되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음에도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과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다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사고하고 똑같이 느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예수 탄생의 소식에 대해서 엄청나게 다른 입장들이 기록된 것은 그래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헤롯이나 그 추종자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요셉과 마리아처럼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고 난감해했지만 점차 그 의미를 깨달으며 배드 뉴스를 굿 뉴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동방박사와 목자들,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처럼 처음부터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소수지만 역시 존재한다.
* 기독교의 역사는 기쁜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널리 전하려 노력했던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언제나 기쁜 일만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얼마든지 슬퍼하고 괴로워할 수 있는 일도 기쁨으로 승화시켜내면서 감사할 수 있었던 참된 신앙인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하며 절망하던 제자들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고 성령체험을 통해 변화된 것도 그런 자세 때문일 것이다.
* 그런 마음으로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성탄절을 맞이하기 바란다. 성탄절임에도 춥고 배고프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기쁨이 없을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추운 겨울날 파업을 하며 고생하는 노동자들도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면서 그들과 평화의 소식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성탄의 소식이 일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