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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갈 5:1-26
자유롭게 하셨으니
I. 여는 말
1.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의 한 구절.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
2.
II. 문맥
1. 지난 주 강론 요약
1) 바울은 율법이 일시적이고 제한적 목적을 가진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일시적이라 함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잠정적인 기간 동안 유효하였다는 것이고, 제한적 목적이라 함은 개인교사에서 보듯이 어린 주인 아이가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기 위해 엄히 훈육하는 역할을 맡았다.
2) 그 맥락에서 사라 vs. 하갈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사라가 주인과 약속을 상징한다면, 하갈은 노예와 율법을 의미한다. 그 결론은 우리가 하갈이 아닌 사라의 자녀이고, 아브라함과 이삭을 잇는 믿음과 약속의 계보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또한 자유인이라는 것이었다.
3) 따라서 이제부터는 믿음과 약속에 따른 자유를 누린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2. 오늘의 요지
1) 5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요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주제이다.
2) 주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5장 1-12절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13절부터 26절은 육체로부터의 자유를 다룬다.
3) 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5장 1-15절이 전반부, 16절부터 26절이 후반부이다. 나 바울이 말합니다, 로 시작하고, 1절과 16절은 자유에 대한 핵심 강령을 진술하고, 마지막인 15절과 26절은 아주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 지침을 하달한다. 전반부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후반부는 육체의 욕망을 채우지 마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4) 조금 애매한 것은 13절부터 15절인데, 내 나름대로 자세히 뜯어보니, 앞 부분에 갖다 붙여도 되고, 후반부에 집어넣어도 된다. 그렇다면, 앞과 뒤를 잇은 고리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되겠다.
5) 나는 구조에 맞추기 보다는 주제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려고 한다.
6) 다시 말하면, 1장 4절을 기준으로 삼아 구분한다. 전반부는 악한 세대로부터의 자유이고, 후반부는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는 삶에 관한 것이다.
III. 자유의 대강령(1절)
1. 5장에 나타난 자유를 마르틴 루터 만큼 잘 파악한 사람도 없으리라. 그 문장을 옮겨 본다. 그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자의 첫 부분에 있는 글이다.
1)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主)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從)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2) 아무에게도,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2절부터 13절까지라면, 아무에게, 모든 것에 예속된다는 것이 14절 부터의 내용이다.
3) 자유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from 이다. 다른 하나는 to 이다. 자유는 한편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으로의 구원이다.
2.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모든 굴레에서 해방시켜 참 자유를 주시고 누리게 하는 것이다.
1) 그것은 예수 =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분 자신이 자유이기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자유에 관한 기독교의 일체의 논의는 예수 = 자유라는 공식에 기초를 두고 진행된다.
2)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예수의 십자가 = 우리의 자유이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십자가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종이 되는 삶으로 이끈다.
3. 자유자 예수가 주는 자유의 삼중적 의미
1) 신학적 : 하나님은 자유
2) 인간적 :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
3) 사회적 : 모든 억압을 철폐한다.
4. 5장 1절의 의미를 나는 최갑종이 참으로 잘 정리하였기에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이 자유는 현 세대의 악한 능력으로부터의 자유(1:4), 이방인 신자가 할례를 통해 유대인이 되지 않고 이방인으로 그대로 남아 있을 자유(2:2-4), 율법의 행위를 신분의 조건으로 삼는 것으로부터의 자유(2:18-20),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3:13), 모든 인종, 신분, 성적 차별로부터의 자유(3:26-28), 율법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4:4-5), 세상의 초등 원리로부터의 자유(4:3, 9), 그리고 옛 세대를 대변하는 육으로부터의 자유이다(4:21-31).”(최갑종, 554)
5. 종의 멍에
1) 맥락에서 우리를 종의 멍에를 지우는 것은 앞쪽으로 가면, 율법이요, 뒤로 가면 할례이다. 그것이 우리를 종으로 만든다.
2) 후반부와 연결지으면, 육체의 종이 되지 않는 것이다.
3) 뒤에서 말하겠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종이다. 율법과 할례, 죄의 종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와 의의 종인가, 라는 것만 다르다.
6. 굳게 서라!
1) 의미 설명
2) 자칫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사한 자유가 종의 멍에가 될 수 있다.
3) 흔들리거나 밀리지 않도록 제 자리에 지금처럼 그대로 서 있으라!
IV. 할례로부터의 자유(2-12절)
1. 2-4절
1) 그 동안 바울은 명토박아 할례를 말한 적이 없다. 이제야 그 정체를 콕 집어서 밝히고 공략한다.
2) 할례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한 마디로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게끔 만드는 것이고(2절), 그것을 두 마디로 하면, ⑴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도 받아들여야 하고, ⑵ 그리스도와 은혜로부터 멀어진다.
3) 할례가 뭐라고 그런 일이 벌어지나?
4) 먼저 3절이다. 선동자/대적자들이 할례의 유익을 아무리 말하더라도, 할례 하나만 떼어놓고 받아들일 수 없다. 할례는 하나의 패키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할례가 작동하기 위한 시스템이 절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율법이라는 시스템이 없으면 할례는 할례가 아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는 순간, 그는 율법의 모든 의무를 지켜야 할 의무도 받아들여야 한다.
5) 여기서 권연경의 해석에 관하여 : 6장 12, 13절을 갖고 와서 해석하면, 대적자들은 할례 하나만 지키라고 했을 뿐,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⑴ : 마태복음 23장 23절
⑵ 마 6장에서 구제, 기도, 금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자기 경건을 과장하고 과시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6) 내 생각 : 4절과 누룩 이야기에서 이 대목에서의 율법 전체를 지키라는 것은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7)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 : 전체 율법도 아니고, 할례를 받았고, 특정 절기를 지키고, 식사 대상자를 가려 먹는다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건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8) 하나님과 인간/타인과의 올바른 관계는 미가서 6장 6-8절이 아닐까?
9) 어쨌든, 저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포함한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 건강할 리 없다.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멀어질 밖에.
10)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브룩스 하틀렌
2. 5-6절
1) 여기서 칭의는 종말론적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소망이다. 이것을 유독 강조하는 이가 권연경 교수이다.
2) 5절의 의미
3) 6절
⑴ 할례 유무가 1도 안 중요하다. cf. 침례의 형식(고전 1:17)
⑵ 왜 그런가? 형식이 구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난 사람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⑶ 누가 사랑하느냐, 무엇이 사랑하게 만드는가, 가 중요하다.
⑷ 사랑으로 표현된 믿음이 척도이다.
3.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한다.
1)
여기서 우리는 할례로 상징되는 율법이 없으면, 과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윤리적 실천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과 반문에 대답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뭘로 알 수 있겠느냐는 도전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2) 바로 ‘사랑’이다. 믿음은 사랑으로 반드시 나타나고야 만다. cf. 요일 3:7-8
3) 믿음은 신실함이라고 했다. 신실하게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 아니겠는가. 사랑하니까 신실하게 기다려주고, 믿어주는 것이다. cf. 6장 9절.
4) 믿음은 사랑을 통해 나타난다고 했을 때의 그 믿음 혹은 사랑은 1장 4절의 실천이고, 3장 28절처럼 인종과 민족, 신분과 계급, 성적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다.
5) 그리고 성령의 열매 맺기이다.
6) “옛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하는 모든 의무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새 언약 시대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책임을 향한 자유이다.”(최갑종, 564쪽)
7) ex) 교회 정관 만들기 운동, 그리고 예배 순서나 교회 건물 vs. 사랑
4. 7절 : 다른 복음, 다른 길로 빠지지 말라.
1) 경기 도중이나 결승점 도착 전에 누군가 난입해서 선수의 경주를 방해하는 일이 고대에는 종종 있었다.
2) 신자의 삶에는 반드시 방해자가 등장한다. ex) 예수의 광야 유혹과 출애굽
3) 영국에서 있었던 일. 5천명이 참석한 마라톤 대회에서 1등 한 명만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가 실격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2, 3위로 달리던 선수가 코스를 이탈했고, 뒤를 따라오던 선수들 모두 264미터를 달리지 못한 것이다.
4) 마라톤 1위(?) 선수에게 뛰어들어 방해하였으나 그래도 끝까지 달린 선수
5) 처음에는 믿음으로 서로 사랑하였는데, 6장 9절처럼 뭔가 지치고 힘들 때, 선동자들이 나타나서 너무 간단하고 쉬운 해결책을 주었다. 포경 수술을 받으면 된다! 한 두 조항만 지키면 그만인데, 나머지 율법은 애써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갈라디아의 교인들이 혹할 밖에.
5. 8-10절
1) 할례 주장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꾐과 꼼수이다. 스칸달론으로서의 십자가를 중화시키고, 십자가의 고난과 박해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와 욕망의 발로이다.
2)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밀가루 반죽에 넣는 누룩처럼 소수이지만, 그리고 그들이 전파한 사상도 누룩과 같아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3) ‘누룩’은 성경에 긍정과 부정적 의미로 모두 사용된다.
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 누룩은 긍정적 의미(마 13장)이다.
⑵ 출애굽 전날 밤, 누룩을 넣지 않는 빵에서 누룩은 부정적 의미이다.
⑶ 바울은 출애굽 이야기를 근거로 말하고 있다.
4) 선동자들과 신자들을 분리해서 바울은 말한다. 신자들은 꾐에 넘어간 그냥 어리숙한 실수를 한 것이고,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 대적자들에게는 그들의 행위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5) 그들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교란’ 행위이다(cf. 1:7).
6)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잘못된 복음을 전하고, 교회론적으로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제자도에 있어서는 십자가를 기피하게 만들고, 개인적으로는 욕망을 부추기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도록 물꼬를 터주었으니 심판을 받을 밖에.
6. 십자가는 스칸돌론이다.(11-12절)
1) 바울도 한때나마 할례를 전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선동자들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할례와 율법의 수호자이었다.
2) 그가 그때의 모습 그대로 할례를 고수했다면, 적어도 유대교 내에서 승승장구했을 것이고, 기독교로 전향한 다음에도 예루살렘 교회 내의 할례주의자들과의 갈등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3) 그러나 십자가는 스캔들이다.(고전 1:23)
⑴ 이성적 헬라인이 보기에, 신이 구태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치욕을 스스로 떠맡는 것은 바보 천치도 하지 않을 짓이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것이다.
⑵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이 보기에, 십자가의 예수는 하나님의 표식/표지가 아니었다. 오리라 기다렸던 메시야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시쳇말로 쪽 팔린다. 그러니 에잇, 그게 어디 메시야냐, 라며 침을 뱉고 돌아선다.
4) 할례는 일체의 걸림돌을 한 방에 제거하는 신의 한 수 이었으리라, 선동자들과 일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는.
5) 외모, 외모라고 했을 때의 육체적인 조건과 지위, 곧 타고난 그래서 내가 달리 어찌할 도리 없이 그대로 편입된, 내 자유 의사와 무관한 것들, 유대인, 남자, 주인이라는 것만 있으면 그대로 천국 직행이니 어찌 좋지 않으리.
6) 좀 더 나가면, 돈이나 권력, 지위, 신분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데 도움이 된다니 이 얼마나 좋으리.
7)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 1장 4절, 3장 28절,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8) 바울은 시니컬하게 말한다(12절).
⑴ 그렇게 할례가 좋으냐? 그러면 포피만 자르지 말고 아예 전체를 싹둑 잘라버리지 그러냐? ㅋㅋㅋ
⑵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이 된다면, 전부를 제거하면 얼마나 사랑 받겠느냐, 이 바보 멍청아!
⑶ 과장된 수사에 담긴 바울의 열정어린 분노와 사랑이 느껴진다.
V. 욕망으로부터의 자유(13-26절)
1. 13-15절
1) 마르틴 루터의 말이 이 본문을 정확하게 해설하는 것이기에 다시 인용한다.
2)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主)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從)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3) 지금은 루터의 저 말 중에서 후자의 것에 관한 것이다.
4)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이전에 우리를 규정하고 강제하던 일체의 것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새로운 종이 된다.
5)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는 율법의 종에서 자유하여 다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자유이고(고전 7:22, 엡 6:6), 할례와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다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는 자유이며,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곧 의의 종이 되는 자유이다(롬 6:18, 22)”(최갑종, 557쪽)
6) 자, 어찌되었건 바울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자유인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단 하나의 이유이다. 더는 종살이 하지 말라고. 아, 눈물 나게 고맙다!
7)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은 앞에서 조금 언급했고, 뒤에서 자세히 말할 것이다.
8)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했을 때의 사랑도 앞에서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에서 말했고, 뒤의 성령의 열매를 할 때 다시 말하겠다.
9)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서로’이다.
⑴ 사랑은 상호적이다.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서로’라는 단어가 5번이다(5:13, 15, 17, 26, 6:2)
⑵ 이사하면서 버린 워렌 위어스비의 책 중에, 제목도 잊어버린 책인데, 신약 성경에서 나타난 ‘서로’라는 단어로 성도의 제자도를 설명한 것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대접하라, 서로 기도하라 등등.
⑶ 이기적이고 자아 중심적 사랑, 그것을 바울은 ‘욕망’이라고 부른다.
10) 또 하나는 섬기라고 했을 때의 그 단어는 종노릇하라는 말이다.
⑴ 아마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빌립보서 2장이 생각났을 것이다.
⑵ 신적 존재가 종이 되었다.
⑶ 종이 되심으로 우리가 매인 종의 멍에를 풀어주신 이가 다시 우리를 새로운 종노릇으로 부르신다.
11) 바울 사도의 이 한 마디면 족하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
12) 진정한 자유는 무엇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무엇을 함, 곧 사랑하는 자유, 남을 섬기는 자유이다. 사랑 받으려는 자유, 섬김을 받을 자유가 아니다.
13) 사랑은 율법의 완성(14절)
⑴ 놀랍게도 율법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고 핵심이라고 말한다. 바로 레위기 19장 18절이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⑵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이후에 쓰여진 로마서에서 보다 명료하게 정식화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⑶ 모든 율법을 지키고도 사랑이 없으면 율법을 어긴 것이 된다.
⑷ 그 많고 많은 율법의 규칙과 명령을 다 잊어도 좋다. 딱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서로 사랑하라!’
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 “사랑하라, 그리고 네 멋대로 하라”
14) 15절
⑴ 이 구절은 갈라디아 교회 내에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거나, 그런 일이 발생할 조짐이 보였기에 바울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다보니 저런 일이 자연발생적으로 벌어졌을 터.
⑵ 학자들은 갈라디아 교회 내의 파벌을 언급하곤 하는데, 지금까지의 맥락에서는 그런 문제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각 가정교회들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⑶ 그냥 육체적 욕망을 따라 살다보니 저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⑷ 한 번 생각해 보라. 홉스가 말한 것처럼 만인에 대한 만인의 군주 노릇을 하려고 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적자들의 거짓 복음으로 모두가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려고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모두가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하고, 자신이 섬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야말로 정글이 아니고 무엇일까.
⑸ 그러다가 다 죽는다. 폭삭 망한다.
15) 질문 : 나는 남을 종으로 섬기는가? 나는 남을 종으로 부렸는가?
2. 16-18절
1) 바울의 대안은 ‘성령을 따라 살라’이다.
2) 이처럼 추상적이고 허망할 수가 있을까. 율법처럼 구체적으로 이건 하고, 저건 말고, 라고 말을 해 주어야 하든 말든 하지. 그래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3) 나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뭐가 뭔지 몰라서 우리가 그렇게 안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핑계다.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기 싫은 거다. 섬기기 싫은 거다. 종이 되기 싫은 거다. 그래서 온갖 논리로, 게다가 성경 까지 들먹이며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자기를 변명할 힘으로 순종하고 사랑할 것인지. 아, 우리는 얼마나 바보인지...
4)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규칙은 제시하지 않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모습은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것은 뒤에서 말하겠다.
5)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육체와 성령의 대결 구조이다.
⑴ 이 둘은 ‘스토이헤이아’이다. 우리를 지배하려는 세력이다. 서로가 종주권을 행사하려고 싸우는 두 실체이다.
⑵ 육체는 주인 노릇하려다가 종이 되고, 성령은 종으로 섬기니 주인이 되는 길이다. 육체는 서로 물고 뜯지만, 그러다가 모두 죽고 망하지만, 성령은 서로 사랑으로 섬기다가 모두 살고 흥한다.
⑶ 육체와 성령의 전투에서 중립지대란 없다. 둘 중 하나다. 키에르케고르가 악마적 논리라고 비판한 both - and가 바로 이것이다. 생명의 논리는 either - 이다.
⑷ ‘너희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애매하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심중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욕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잘 살고 싶은 마음, 제대로 잘 살고 싶은 거다. 참답게 살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길은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보여주듯이 남을 밟고 올라가는 기둥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꼬치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육체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나의 진정한 소원을 이루어준다.
⑸ 우리의 영혼/내면 혹은 몸은 전쟁터이다.
⑹ 존 듀이의 말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해외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태도와 우리 자신의 제도 속에는 외적 권위와 규율, 획일성, 외국의 지도자에 대한 의존이 승리를 거울 수 있게 해준 조건들이 존재하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따라서 싸움터는 이곳, 우리 자신과 우리 제도의 내부에도 존재한다.”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22쪽에서 재인용
6)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육체에 대한 이해이다.
⑴ 1장 4절에서 말했고, 누차 강조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의 제자도, 삶은 예수님처럼 내 몸으로 타인의 몸을 섬기는 것이다.
⑵ 그렇다면 여기서 육체는 뭔가?
⑶ sarx vs soma를 간단히 설명할 것. 여기서 육체는 sarx이고, 욕망을 가리킨다. 신체 자체가 아니다.
⑷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나오는 육체 이해와 바울의 육체 이해.
3. 육체 vs. 성령(19-26절)
1) 15가지 악덕 혹은 육체의 행실과 9가지 미덕 혹은 성령의 열매는 체계적인 목록인가?
⑴ 그렇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꽤 많다. 그들이 구분은 대략 이렇다.
⑵ 악덕 목록 구분
a. 성적인 죄: 음행, 더러움, 방탕
b. 종교적인 죄: 우상숭배, 마술
c. 사회적인 죄: 원수맺음, 다툼, 시키, 분냄, 분쟁, 분열, 파당, 질투
d. 무절제한 죄: 술취함, 흥청망청 먹고 마심, 그 外
⑶ 미덕 목록 구분
a. 하나님을 향한 태도: 사랑, 기쁨, 화평
b. 사회에 대한 태도: 인내, 친절, 선함
c. 자신에 대한 태도: 신실, 온유, 절제
⑷ 상당히 작위적인 구분이지만, 이해를 위해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더 이상 진전할 필요도, 해서도 안 된다.
2) 무작위적 그러나 처음과 끝이 중요하다는 견해
⑴ 무작위적이다. 이는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언급한 미덕과 악덕 목록과 비교해 보면 단박에 안다. 각 서신 마다 다르다. 겹치는 것이 많지 않다.
⑵ 각 서신 마다 목적과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고 보면 된다.
⑶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의 경우, 처음으로 언급된 사랑과 맨 마지막의 절제가 핵심 포인트이다. 사랑은 앞에서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라는 것에서, 절제는 욕망과 관련해서 중요하다.
3) 어느 쪽을 택하든 무방하다. 내가 보기에 무작위적 그러나 처음과 끝이 중요하다는 쪽에 손을 들겠다.
4) 그러나 이 목록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혹은 바울이 의도한 것은 저런 조직적으로 잘 짜여진 미덕과 악덕의 목록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짧게 말하면, ‘관계’이고, 좀 더 멋을 부려 말하면, 갈라디아서 1장 4절로 읽으면 좋겠다. 즉,
남의 몸을 대속물로 바치느냐? 나의 몸을 대속물로 바치느냐?
⑴ 관계의 측면 : 악덕은 관계와 공동체를 부숴뜨리는 행동의 목록이고, 미덕은 관계를 돈독히 하고, 공동체가 하나되고 거룩하게 만드는 행동의 목록이다.
⑵ 권세의 측면 : 악덕은 남을 희생해서 자기의 이익과 안위를 도모하는 것들이고, 미덕은 나를 희생해서 남의 이익과 안위를 추구하는 것이다.
⑶ 타인을 지배하고, 조정하고 이용하려는 일련의 행동이 악덕이다.
타인을 존중하고, 섬기고, 높이려는 일련의 행동이 미덕이다.
⑷내가 보기에, 악덕은 구체적인 행동을 가리킨다면, 미덕은 내적인 성품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의 좋은 나무 이야기를 기억하라. 나무를 보아 열매를 알고, 열매를 통해 그 나무를 안다. 바로 그것이 성품(character)이다.
⑸ 각각의 개별적 악덕과 미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롱에네커의 WBC주석을, 특별히 미덕에 관해서는 필립 케네슨의 <열매맺다>(새물결플러스)를 참조하라.
4. 논쟁점 :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짓?
1) 육체의 행실로 구원이 취소되는가? 예정론 vs. 자유의지
2) 사전에 미리 말하였고, 수차례 이야기하였다.
3) 이것은 경고인가? 사실인가?
4) 어쨌든, 이 본문은 인간의 선택과 행위에 따라, 인간이 신의 주권적 선물인 구원을 취소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5) 내 결론은 이렇다. 예정론만 있거나 자유의지만 있다면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절름발이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인간의 삶을 주도적으로 인도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포기하거나 단념하지 않으신다는 그분의 무시무시한 주권적 의지가 없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것만 있다면 어떨까?
6) 인간이 동물이나 노예, 기계가 아니기에 자율과 자유를 강조하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면, 인간은 동물이나 기계와 하등 다를 바 없으며, 그런 인간을 신은 뭣 하러 만들었단 말인가.
7) 나는 <가룟 유다 딜레마>에서 장미의 꽃과 가시의 관계로 설명한 바 있다.
5.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의 두 가지 의미
1) 성령을 따라 살고, 성령을 따라 열매 맺는 삶을 뉘라서 굳이 반대하겠느냐
2) 율법이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3) 성령을 따라 사는 자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지 못하게 할 어떤 방법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포도나무가 포도를 맺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듯이, 성령의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할 어떤 방도가 없다. 위에서 말한 대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6:7).
4) 25절도 위의 것과 동일하게 해석된다.
⑴ 7절에서 말했듯이, 경주를 가로막은 방해자들이 있든 말든, 할례를 주장하든 말든,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손 잡아 이끄시는 대로 걸어간다.
⑵ 나무가 제 때를 맞춰 조용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그리고 그것이 필연이듯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7. 24절
1) 2장 20절을 기억하라.
2) 예수를 따름 = 자기 부인(막 8:34, 눅 9:23)
8. 26절
1) 육체를 자랑하고 중시하는 이면에는 자기 영광이 자리한다. 잘난 체 말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높아지고 싶은 마음. 선악과를 먹었던 그 원초적 욕망 말이다. 이것은 반드시 타인 지배와 연결된다.
2) 육체를 따라 살면, 나보다 남이 높아지는 것을 못 봐준다. 그런 상대방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그래서 폭력적으로 상처를 주고 싶으리만치 질투/투기한다.
3) 바울은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데도 너희들은 육체와 율법을 따르는 삶을 살거냐, 라고 묻는다.
VI. 닫는 말
1. 요약하지 않겠다. 그러나 강론에 포함시키지 못한 것들이 많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크 엘륄의 <자유의 투쟁>, 그리고 월터 셔든의 <침레교의 정체성>이다.
2. 나를 옭아매는 종의 멍에는 무엇인가?
3. 내 삶의 일과 열매는 무엇인가?
4. 다음 주는 6장 전체이다. 드디어 마지막이다. 50번 읽기가 목표가 아니다. 그만큼 말씀을 읽으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