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 왜관)

부산 용두산공원 올라가는 마지막 계단 입구에.,표지석.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이 표지석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든다.
표지석에는 용두산공원과의 관련성을 알기 힘든., '초량왜관.'
초량왜관과 용두산공원은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용두산공원과 주변은 조선후기 초량왜관이 있었던 곳.'
'초량왜관'이란 이름 자체가 대부분의 방문객들에게 생소.
그 주변에는 짐작해볼만한 초량왜관의 흔적이 거의 없기 때문.
변박의 초량왜관도
초량왜관은 옛 그림과 기록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그중 조선 후기 화가 변박이 그린 초량왜관도(1783년 작품).
그의 그림을 보면 초량왜관의 위치와 규모를 잘 알 수 있다.
장방형 담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초량왜관.
초량왜관도 중앙에 그려져있는 산이 용두산.
용두산은 초량왜관을 둘로 갈랐는데
동남쪽에 있는 동관, 서쪽에 있는 서관.
초량왜관 부지는 10만평 정도로 추정된다.
1675년부터 1678년까지 3년에 걸쳐
125만명 인원이 투입되어 만들어졌다.

1903년 부산지도
1903년 부산 지도를 보면 초량왜관을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지도 중심의 산이 용두산, 오른쪽 맨아래 부분이 현재 롯데백화점.
오른쪽 위 바다 부분 점선은 당시 매립계획지역인데 모두 매립된 상태.
변박의 그림에 있는 방파제가
1903년 지도에 그대로 남아있다.
선창의 방파제와 용두산을 기준으로
두 그림을 맞춰보면 초량왜관의 위치를
오늘날에도 지도상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초량왜관이 자주 소개되는 기록으로는 변례집요가 있다.
1598년(선조)~1841년(헌종) 한일 외교관계를 기록한 책.
임진왜란 이후부터 일본을 믿지 못한 조선 조정은
일본사신, 무역상인을 부산 이상 못올라오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 대일 외교와 무역은 부산에서만 이뤄졌다.
바로 그 때의 대일관계를 기록한 변례집요
그래서 초량왜관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부산은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고들 말한다.
개항 후 항구로 발전하면서 동래까지 잡아먹어 컸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조선시대 부산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부산에서 초량왜관을 삭제한 역사다.
초량왜관에 거주한 일본인만 500명 이상.
그들을 상대하는 조선 측의 관리와 상인들과
초량왜관 경제권 내의 민간인들이 또 있었다.
초량왜관은 조선의 인삼, 중국에서 들여온 생사.
일본에서 들여온 은이 교역된 동북아 중계 무역지.

'동북아 최대의 중계무역지'인 부산이
조선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그럴리는 없다. 조선시대 유명한 동래상인이
바로 부산의 왜관을 근거지로 활동한 상인들.
조선시대 동래상인들은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
숙종 때 소론이 주도한 갑술환국에 정치자금을 대준
주요한 상인 5명 중 2명(의금부 수사기록인 '추안급국안').
동래상인이었고 이 사건으로 장희빈은 폐위되었고
정치자금을 받은 소론은 다시 정치 주도권을 갖는다.

변승업은 통신사로 일본에도 다녀왔다.
상상관 가마를 타고 있는 사람이 변승업.
부산은 조선시대 최고의 갑부도 만들었다.
초량왜관의 전신
두모포왜관 때부터
'왜학역관'이던 변승업.
변승업은 왜관의 최고 책임자인 훈도에까지 올라갔고
조선시대 초량왜관에서 획기적으로 재산을 불렸던 것.
변승업은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도 등장하는데
허생이 돈을 꾸는 장안 최고 부자가 변승업의 조부.
조부 윤영에게 집안의 치부 유래를 듣는 손자로 등장.
사진출처 : 동래구청
임진왜란 때 일본은 부산을 통해 들어왔다.
이전에도 부산은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다.
조선은 부산을 국방상의 요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본 일본의 무력은 상당했다.
일본과의 적대 정책은 비용이 많이 들고 손실도 컸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조선은 부산에 군사적 성격의 진성이 많이 축조하였지만
왜관을 통해 교역하고 통신사도 보내며 달래는 정책도 병행.
조선시대 동래부사청 대문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
그러한, 당시 조선의 입장과 정책이 잘 반영되어 나타나 있다.
동래가 '경주진영'에서 독립했음을 알리는 대문의 현판
'동래독진대아문'이 동래가 중요한 지역 임을 알리고 있다.
왼쪽 기둥의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은 군사적 요충 지역.
오른쪽 기둥의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는 일본사신 접대 관아.
조선시대 부산이 경제적은 물론 외교적으로도 요충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은 초량과 동래 두 도심축으로 성장한 도시.
조선시대 동래에는 전통적 삶이 꽃피우고 있었고
초량은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국제적 교류가 있었다.
초량이 있기에 동래의 영향력이 훨씬 커질 수 있었고
동래가 있기에 초량은 국제적 교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부산의 역사에서 초량왜관을 삭제한다면
부산에서 반쪽의 역사만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옛 조상들이 동래부 대문에 내걸었던
편액 하나를 떼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
부산이 초량왜관을 다시 기억해야하는 이유.
매일 조선인, 일본인 간 무역시장이 열린 초량왜관
양산, 접부채, 모기장, 일본도 등 고가의 일본산 사치품.
문화가 다른 두 민족이 한 공간에서 문화 교류도 이어졌다.
당시 불교의 영향으로 네발짐승 고기를 기피하였던 일본인.
조선의 영향을 받은 초량 일본인은 손님상에 고기를 올렸다.
일본 음식도 초량왜관 일본인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전해졌다.
초량 왜관을 찾은 조선인들이 가장 즐겼던 음식은 스기야키.
삼나무 상자에 도미 전복 각종 채소와 육수를 부어 끓인 요리.
당시 조선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스기야키는 어떤 맛이었을까?
조선과 일본, 양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오가던 초량왜관
그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 한가지는 바로 여인이었다.
엄격한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은 왜관에 여인의 출입을 금지.
하지만, 1690년, 조선인 이명원이
자신의 처와 딸, 여동생을 남장시켜
초량왜관에 들여보낸 사건이 발각된다.
이 사건에 관계된 조선인은 모두 극형을 받고,
그중 5명은 왜관 밖에서 효시 되었지만 이후에도
조선인 여인과 일본인 남성의 교간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동래부사 권이진은 왜관 밖 시장에 조선여자들이
채소를 팔러 나오면 왜인들이 채소가 좋건 나쁘건 몰리자
교간을 막으려 조선남자들만 초량 왜관 시장에 나오라고 설득.
동래부사 권이진의 백성들에 대한 '통제와 설득'
조선에 기녀, 유녀의 기반이 있으면서도 엄벌주의,
'왜관에 매춘부 유입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시 조선과 일본의 매춘에 대한 인식은 아예 달랐다.
조선여자와 성관계로 사형, 효시를 납득 못한 일본인들.
일본 또한 나가사키에 '데지마'라는 네델란드 상관을 운영.
나가사키 관료들은 데지마에 게이샤 출입을 허용.
'나가사키 항구의 인공섬' 데지마에 게이샤를 투입.
중국인이 돈쓰게 하여 무역적자를 흑자로 돌리는 묘수.
또 외국인과 게이샤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나가사키 시설에서 키웠기 때문에 장래에 그 아이들이
서양의학을 전수받은 의사가 되거나 통역사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한 왜인들은 조선의 조처에 납득을 못한 것.
왜관 관수는 사건이 터지면 당사자 왜인을 대마도로 도주시켰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폐쇄하였던 왜관을 조선 정부는
1607년 일본과 국교 재개 후, 절영도(영도)에 허락하였다.
절영도(영도).,왜관.
이후 왜관은 두모포로 이전되었다가
1675년 초량에 10만평의 부지에 용두산
이쪽, 저쪽에 동관과 서관으로 완공된 것.
5백 명의 왜인이 공무를 핑계로 파견 거주했는데
일본여자 입국을 허용하지 않아 발생한 교간 사건들.
쌍방을 모두 사형시킨다고 공포했던 것과 달리 실제로
왜인은 대마도로 도주하고 조선 여인 만 효시 또는 사형.
1711년(숙종 37년) 통신사까지 파견,
조선과 일본은 교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신묘약조(일명 '교간약조) 3항을 체결하였다.
1. 왜인이 조선여자를 강간하면 사형
2. 조선여자와 화간 또는 강간 미수는 유배
3. 왜관 내에서 교간한 자는 그 밖의 죄를 적용.
이로써 조선에서도 중개업자는 효수형이지만
교간한 조선여자는 장죄(杖罪)나 유죄(流罪)로 감형.
금녀(禁女)의 공간, 왜관에서 벌어졌던 교간사건의 전말.
1872년, 일본은 초량왜관을 무력 침탈.
그리고 4년 후, 조선 최초 강화도조약 체결
그후, 초량왜관은 2백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덧 말.
일본이 태평양 전쟁 당시 만들었던.,'종군위안부'.
희대미문의 만행을 일본인은 부끄러움 없이.,'미화'
일본인의 '외국인 성접대 문화' 역사가 있어서 아닐까?
'전시 일본군 성노예'를 제도적으로 시행했으면서도
피해자들을 자발적으로 군대를 따라 위로를 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동한 '종군위안부'라고도 주장하는 영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