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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슬픔
한반도 중간쯤 되는 서울에서도 그것도 실시간으로 남쪽 동네 봄소식쯤은 쉽게 들을 수 있는 시대다. 비가 그치니 바람이 분다. 마냥 차갑지만은 않은 조금은 봄기운 담긴 그런…. 내 고향 입암 가사천변에도 지금쯤이면 버들개지에 잔뜩 물이 올라있을 게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인자, 참말로 봄이다 그자?”
‘그자?’
이 입과 몸 전체에 착착 감기는 경상도 사투리. 표준말로 ‘그렇지 않니?’ 하는 순간 봄날 같은 따숩고 정겨운 뉘앙스는 저 멀리 사라지고 만다. ‘그자?’는 그야말로 동의를 구하는 보조 문장 중 단연 으뜸이다. 표준말은 물론, 충청도 말 ‘안 겨?’나 전라도 말 ‘그라제 잉?’은 ‘쨉’도 안 된다.
어렸을 때는 수없이 구사하곤 했던 이 소중한 표현, 어느 샌가 내 말 안에 없다. 입암에서도 잘 사용하지 않는 죽은 언어가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아쉽다.
남쪽 섬진강가 하동, 광양에 매화가 만발했단다. 징조는 보이지만 서울은 아직 봄이 아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남 말 할 형편이 못된다. 내 처지도 그렇다. ‘춘래불사춘’ 하니 대뜸 최백호의 노래 <그쟈?>가 연상된다.
최백호-그쟈
‘봄날이 오며는 뭐하노 그쟈?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꽃잎이 피면 뭐하노 그쟈?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래도 우리 맘이 하나가 되어 암만 날이 가도 변하지 않으면
조금은 외로워도 괜찮다 그쟈? 우리는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우리 북도에선 ‘그자’라고 하는데 남도에선 ‘그쟈’라고 하는 갑다. 공교롭게 이 노래는 내 졸병 시절에 나왔다. 한 40년 전 쯤 전이었다. 어느 봄날 일요일, 부대 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묘지에서 모포를 말리다가 답장 없는 여친을 그리워하면서 흥얼거렸다.
어찌 그리도 내 절절한 심정을 잘 드러냈는지, 마치 내가 노래의 주인공인 양 착각할 정도였다. 하기사 유행가 가사만큼 우리의 서러운 심정을 잘 헤아려 주는 건 없다. 소위 고급문화 생산자나 향유자들도 마음병을 앓을 때, 특히 실연을 당하면 어김없이 술을 마시고 유행가를 불러댄다.
유행가를 싸구려 감성 배출구 정도로 폄하하는 사람들도 적어도 한번쯤은 유행가 노랫말에 자신의 처지를 대입하는 일이 있다는 말이다. 왜인가? 본디 우리의 삶이란 통속적이기 때문이다. 아픈 마음은 지성과 이성만으로 위로를 받을 수 없다. 감정이란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느낀 그대로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으로 떡칠한 상태로는 통속적인 우리 마음을 위로할 수 없다. ‘조금은 외로워도 괜찮다 그쟈? 우리는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뭐, 이따위 유행가 풍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계속 보내 봤지만 더 이상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에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는 소식은 첫 휴가 때 들었다.
“나∼쁜 년!”
당시 난 ‘쿨’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욕을 퍼부었다. 난 이렇게 갇혀서 ‘뺑이’치고 있는데 비겁하게 딴놈을 만난다고? 밀폐되어 있는 자들의 지극히 이기적인 보상심리다. 그럼 어쩌라고, 피 끓는 처자가 나 하나만 믿고 3년을 버티라고? 입장 바꾸어 그녀가 군바리라고 생각해 보자. 아마 그녀가 떠난 그 주말쯤 난 다른 여자와 데이트 약속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양심상(?) 양다리 정도?
그 이후 봄은 나에게 약간의 트라우마가 된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마력을 주는 동시에 이처럼 누군가에겐 더러 상처를 주기도 한다. 봄이 주는 화사함에 동참할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에게는 외로움만 더해진다. 명절날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떠들썩한 남들의 귀향행렬을 바라볼 때 느끼는 괴리감처럼.
하여간, 그 때는 내 어린 마음이 무지 아팠다. 춘래불사춘, 마음이 아프니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았고, 소리 내는 것들까지 다 아파보였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자작나무의 하얀 키가
하늘을 향해 자라는 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김재진의 시에서
알고보면, 사람 사랑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또 없다. 그러나 빛에는 그림자가 따른다. 역설적이게도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가슴 아픈 일이 꼭 동반된다. 알고 보면, 사람 사랑하는 것만큼 외로운 일이 또 없다. 만나지 못해 괴롭고, 상대도 나만큼 날 사랑하는지 염려스럽고, 혹 떠나버리지나 않을까 안절부절 못한다. 사랑 한번쯤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사랑의 기쁨
반면에, 사랑이 시작되는 그 즈음은 늘 봄날이다. 북쪽 동네 식 표현으로 치자면 그저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내리는 비도 아름답고, 부는 바람도 아름답다. 심지어 미세먼지까지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의 들뜬 심정을 표현한 대표적인 노래라면 단연 <한 연인을 위한 협주곡A Lover’s Concerto>가 아닐까? 빌리 할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미국 여성재즈 3대 보컬리스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새러 본Sarah Vaughan이 불렀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미뉴엣 G단조Menuet G minor>, 사랑에 빠진 여인의 마음이 그러하듯 목소리에도 환희와 힘이 넘쳐난다.
Sarah Vaughan-A Lover’s Concerto
How gentle is the rain that falls softly on the meadow.
초원에 살포시 내리는 빗방울이 너무 부드럽다, 그자?
Birds high up on the trees serenade the flowers with their melodies, Oh~~~
나무에 높이 앉은 새들은 꽃들에게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네. 오~~~
See there beyond the hill the bright colors of the rainbow.
언덕 위에 뜬 밝은 빛깔의 무지개 좀 봐.
Some magic from above made this day for us just to fall in love.
뭔가 신비한 것이 오늘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어.
Now I belong to you from this day until forever.
난 오늘부터 영원히 당신의 사랑이 될 거야.
Just love me tenderly and I'll give to you every part of me
날 부드럽게 사랑해줘, 당신한테 모든 걸 다 줄 거니까.
Don't ever make me cry through long lonely nights without love.
길고 외로운 밤, 당신 없이 홀로 울게 내버려 두면 안 돼.
Be always true to me, keep it stay in your heart eternally
날 항상 진실하게 대해 주고 영원히 당신 마음속에 간직해야 해.
Someday we shall return to this place upon the meadow,
언젠가 우린 다시 이 초원에 돌아와
We'll walk out in the rain hear the birds above singing once again.
새소리를 들으며 빗속을 함께 거닐겠지.
You'll hold me in your arms and say once again you love me.
당신은 날 품에 안고 다시 날 사랑한다고 말하겠지?
And if your love is true, everything will be just as wonderful.
그리고 당신의 사랑이 진실이라면 모든 것이 너무 황홀할 거야.
Everything will be just as wonderful.
Bach-Menuet G minor
1965년에 발매된 이 노래는 30년이 지난 1997에 제작된 영화 《접속》으로 비로소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졌다. 영화에서 ‘접속’이란 지금 SNS가 대체하고 있는 8,90년대의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의 PC통신망 접속이다.
하이텔, 천리안? 요즘 아이들에겐 ‘듣보잡’일 테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인 20여 년 전에는 이른바 ‘얼리 어댑터early adopter’들이나 즐겼던 PC통신망이다. 전화선 모뎀은 필수, 당시로서는 첨단 통신 시스템이었지만 PC통신 중에는 집전화가 먹통이 된다는 것이 함정.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는 그 시스템으로도 숱한 커플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영화 《접속》 역시 서로 다른 사랑의 상처를 가진 두 남녀가 하이텔을 통하여 가까워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한석규가 실연의 아픔을 겪은 동현 역을 맡았고, 여주인공 수현 역은 명품 배우 전도연이 맡았다.
라디오 음악프로 담당 PD인 동현은 갑자기 사랑하는 여자가 홀연히 사라진 이후부터 냉소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친구도 애인도 없다. 한편, 홈쇼핑 채널 쇼핑가이드인 수현은 언감생심, 룸메이트 희진의 애인 기철에 대한 짝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중이다.
퇴근 후, 두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대상은 오로지 PC통신뿐. 동현의 ID는 ‘해피엔드’ 수현의 ID는 심플하게 ’여인2’. 어느 날, 수현이 자동차 사고를 목격한 그때 라디오를 통해 듣고 매료된 노래를 신청한다. <A Lover's Concerto>다.
첫댓글 인자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그자,
어제 그만 눈이 억수로 와뿌래잔아, 그자.
봄아 오다가 도망쳐 버린기라 그자.
어제 울산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오는데
산에 나무에 내린 눈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雪花가 春花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좋은 음악과 글 잘 감상했네...
기쁨 가득한 새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