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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평
일상에 새겨진 낯선 기억-언어의 무늬
박성현
(시인, 문학박사)
만일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과거의 일들을 모조리 망각하는 존재라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될까. 무엇보다 인류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 당연한 귀결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꽃피운 모든 문명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기억이 우리의 오감을 최대로 열고 지성을 활성화하면서 그것을 육체에 각인하려는 치열한 행위라는 사실은 흘러온 ‘사건-이미지’를 저장하고 기록하는 단순한 반경을 넘어선다. 이러한 과정에서 죽음이 항시 노출된 인간은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장애로부터 비켜서게 된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죽음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기억이란 대상을 향한 주체의 태도이고 행동이며 저항이자 생生에 대한 의지인 셈이다.
더욱이 기억은 ‘기억하는 자’의 자아와 그 정체성에 잇닿는다.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1982)에서 ‘레플리칸트’가 기억 이식을 끝으로 인조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나 혹은 영화 <토탈 리콜>(폴 버호벤, 1990)에서 한 인간에게 잠재된 두 기억—정부 조직원으로서의 당초 기억과 저항세력으로서 이식된 기억—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것처럼 ‘기억’은 인간 존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근본 조건이 되기도 한다. 영화 <메멘토>(크리스토퍼 놀란, 2001)도 마찬가지. 아내의 살인범을 추적하는 주인공은 단 10분 전의 일만 기억하는 병에 걸렸는데 당연히 그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기억은 존재의 1차 증명서다.
문제는 그 ‘기억’이 오감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기억은 ‘반드시’ 언어를 매개로 하며 언어에 연결되지 않는 기억들은 모체를 잃어버린 단순한 감각의 더미에 불과하다. 언어는 기억 자체이며 언어에 포획되지 않은 장면들은 어떤 설명도 묘사도 불가능하다. 물론 감각에 직접적으로 남아 있으므로 감정(혹은 기분)의 보이지 않는 실마리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그조차도 언어를 통해서만 눈을 뜨게 된다. 이것이 라캉이 언급한바,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문장의 근간이다.
그러나 기억은 결정하지 않는다. 끼어들지도 간섭하지도 않으면서 물러나고 가라앉았다가 쌓이면서 지워진다. 다만 나타날 뿐인 기억은 한시성을 가지며 수동적이기도 하다. 언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기억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존재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와 무게가 출중한데도 기억은 차갑고 음산한 해저처럼 침잠해 있다. 언어의 낚싯줄에 걸려 수면 위로 올라와야지만 기억은 자신의 배경을 말한다.
이처럼 기억의 펼쳐짐이란 자신의 궤적과 그 궤적들의 느슨한 등고선, 그 세부적인 밑그림, 혹은 미세한 부분이나 포괄적인 윤곽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기억은 ‘언어’가 건져 올리는 이미지의 더미다. 주의할 것은 언어-기억이 그것의 ‘사실’과는 상관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기호와 지시 대상과의 관계에서 출발하며, 오직 그것만이 언어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허구 또는 거짓말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는 기억을 볼모로 하여 사실과 대치한다.
위와 같은 사정은 특수한 상황에 해당한다. 대부분 언어-기억은 사실을 배척하지 않는다. 다소간 시차視差는 있겠지만 우리는 이 언어의 핍진함을 통해 일상을 지속하며, 엄밀한 인과와 논리를 기반으로 비가시적 세계를 탐구하고 발견하며 정식화한다. 물론 사실을 끊어버리거나 다시 쓰면서 축성한 ‘허구’가 특정 영역의 언어 본질일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허구는 언어가 기억에 닿아 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사실을 수렴하고 투사한다.
바로 이 좌표가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며 특히 언어가 시로 고양되는 시점으로 시작詩作을 통해 시인들이 통찰했으며 강조했던 시와 시인의 일체성이다. 생전 수많은 이명異名을 통해 작품을 구획했던 페르난두 페소아 또한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이재무 시인은 기억과 언어, 사실의 트라이앵글의 일치를 작품에 녹이며 자칫 덧없이 흘러가 버릴 일상을 구원한다.
과일가게 아저씨가 돌아왔다.
휴가 엿새 만에 아저씨가 돌아왔다.
아저씨와 함께 과일들이 돌아왔다.
나는 아저씨가 어디에서 무얼 하며
휴가를 보냈을까? 궁금했지만
숫기가 없어 물어보지 못했다.
새벽 다섯 시면 시계처럼
문을 여는 과일가게 아저씨
아저씨가 없는 동안 나는
아침에 과일을 먹지 못했다.
단골 과일가게 아저씨
휴가를 마치고 검게 탄 얼굴로
돌아왔다. 아침이 제때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의 시각이
몰라보게 환해졌다.
— 이재무, 「과일가게 아저씨」 전문(문예바다, 2024년 가을호)
정확히 “휴가 엿새 만에” 과일가게 아저씨가 돌아왔다. 시인은 아저씨가 보이지 않던 날로부터 날짜를 세면서 그의 복귀를 기다린다. 문 닫힌 상점을 지날 때마다 내심 그가 어디서 무얼 하며 휴가를 보내는지 궁금하다. 아마 숫기가 없어 그가 돌아와도 묻지는 못할 테지만 묘하게도 마음 한곳에 자리 잡은 몇 개의 질문은 이미 뿌리를 내렸다. 휴가 전 아저씨는 새벽 다섯 시에 문을 열고 장사를 시작했으며 싱싱한 과일을 사는 것으로 시인은 아침을 열었다. 그런 날들이 무려 엿새 동안 멈춰버린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다섯 시에 아저씨는 문득 돌아왔다. 시인의 아침은 아저씨가 규칙적으로 안배한 시간에 다시 포섭된다. 시인은 과거를 상기하며 ‘루틴’이 되어버린 행동을 다시 취했다. 사실 아저씨의 휴가 전에도 그는 가급적 오차를 벗어나지 않았다. 일정 시간에 가게를 열면서 자신의 공간을 시계처럼 만들었던 것과 동일하게 그 또한 가게의 시간-속-에 접속하면서 자신의 하루를 이어 나갔다. 시인은 이 집요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그 정체성을 완성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다른 가게에서 과일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시인이 설정한 회로를 벗어나는 일이었고 그 반경을 벗어나는 즉시 그는 이물이 만드는 불편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과일가게 아저씨가 돌아왔다. 시계처럼 새벽 다섯 시에 문을 열고 싱싱한 과일을 판다. 아저씨가 없는 동안 ‘나’는 과일을 먹지 못했다. 꾸준히 이어졌던 아침이, ‘아침’이 아니게 된 것이다. 휴가를 마치고 온 아저씨는 무척 검게 탄 얼굴이다. 기억 속의 그 ‘얼굴’ 그대로, 그 몸짓 그대로, 그리고 문을 여는 순서 그대로. 비로소 시인에게 아침은 “제때 찾아오기 / 시작”했다. 아저씨의 시간은 ‘나’를 공유하고 ‘나’ 또한 아저씨의 시간을 움직인다. 양자역학처럼 대상의 존재는 ‘간섭’으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 이가 빠진 톱니처럼 뭔가 맞물리지 못한 ‘시각’이 몰라보게 환해진다.
그대 눈 바라볼 수 없어
등을 대고 앉았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 힘차게 달려옵니다
그대와 함께한 시간
영원히 머물고 싶은 마음이
나를 따라 줄창 달려옵니다
무엇이 그대를 멈추게 했나요
무엇이 그대 돌아서게 했나요
무엇이 그대를 그대 속으로 걷게 했나요
돌아앉으니 비로소 모든 것과 마주하게 됩니다
— 김완하, 「역방향」 전문(문예바다, 2024년 가을호)
우리는 사고의 회로를 돌려 ‘미래’를 예측하고 기대한다. 온갖 과학기술을 동원해 어느 정도까지는 근접한 예상치를 산출하고,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운명의 방향을 설정한다. 그럼에도 뭔가 불편하다. 미래는 과거로부터 흘러온 시간이 여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인과因果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통상 우리는 시간에도 법칙이 있고 미래는 투명할 것이라 믿는다. 요컨대, 감각적 직관과 사유의 엄밀성을 통해 그 ‘법칙’을 찾아낸다면 사후事後는 예측대로 자연스럽게 도래한다는 것—물론 이러한 세계관은 근대로 깊숙이 파고들면서 ‘물신’物神이라는 왜곡된 괴물을 낳는 원인이 되었지만.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은 이미 과거에 붙박여 있으며, 오로지 과거를 통해서만 현재와 미래의 사건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뒷걸음치고 있다는 것(슬라보예 지젝). 시간은 미래로 흐르지 않고 ‘옛날’로부터 와서는 ‘지금’이라는 벽에 부딪히고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과거로 흐르는 시간, 그 단순하고 간결한 방향이 시간의 비밀이 아닐까.
어느 날 시인은 애틋하고 동정과 사랑이 가득 찬 눈으로 ‘그대’를 바라본다. 무슨 이유인지, 오늘만큼은 그대의 눈을 바라볼 수 없다. ‘그대’와 함께 숨 쉬고 밥을 먹으며 수많은 일들을 도모했고 앞으로도 그리할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한껏 고양된 시선은 방향을 고정할 수 없을 정도로 산만하다. ‘그대’라는 이름의 이 항구적인 명확성은 어망처럼 속이 텅 비어 있다. 그럴 것이라 당연히 믿었던 시간은 바닥부터 균열하고, 심장을 찢으며 불안이 스멀거리기 시작한다. 잠식된 것이다. 자포자기한 듯 시인은 ‘그대’의 등을 대고 앉는다. 그대와의 장밋빛 미래를 밀어버리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단지 그렇게 앉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것들이 / 더 힘차게 달려”온다는 기분이 든다. 옛일이라 치부했던 시간이 한꺼번에 열린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대’가, 무심코 지나쳤던 ‘그대’가, 온갖 이유를 들어 배척했던 ‘그대’가 온전히 그 자리에 있다. 멈췄고 돌아섰고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그대 속으로만 고립시켰던 ‘나’의 일기日記가 거기에 있다. 그것을 깨달으니 “비로소 모든 것과 마주하게” 되는 경이로운 사태가 더욱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대와 함께한 시간 / 영원히 머물고 싶은 마음이 / 나를 따라 줄창 달려”오면서 그대를 완성하는 것이다.
얼굴이 구겨진 뒤로 깊은 자국이 남았다
전에 본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나요?
진하게 떠오르는 글을
나는 금세 읽었다
몇 번째 같은 장소에 마주 앉은 당신과
무엇도 알 수 없는 모호한 인사말
우리는 입을 잠근 채
눈길을 피했다
떠 있는 다 식은 아메리카노
돌아가고 싶지 않은 쓰디쓴 문장을
눈처럼 덮어다가
남몰래 꺼내본다
연이어 떨어져 나간 몬스테라 잎처럼
더 이상 내 것이라 말할 수 없는 말들
생각을 털어내면서
다시 길을 접는다
— 이송희, 「흰 종이」 전문(문예바다, 2024년 가을호)
기억이 사후事後에 오는 경우도 있다. 이를 기시감이라고 말하는데, 앞으로의 일을 먼저 경험하고, 그 경험이 현실과 일치할 때 우리는 종종 그런 기분이 든다.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묵시적 예언 혹은 예지와는 다르다. 기시감은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일들 속에서 한 특정 영역이 정형화되어 나타날 수도 있고, 과거의 사건 중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유사한 사건이 또다시 등장할 수도 있다.
기시감은 점점 더 모호해지고, 그럴수록 막연한 두려움이 팽배해진다. 작품 속에서 시인이 대화창에서 마주한 사람에게서 느낀 감정이 그것이다. “전에 본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나요?”라고 묻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표정이 떠오르는 것은 구겨진 ‘깊은 자국’이다. 시인은 진하게 떠오르는 글을 금세 읽지만 도무지 문장에 생략된 주어를 찾아낼 수 없다. 입을 잠근 채로, 대화창의 여유 있는 이미지 속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그 빈틈에 집중하지만 이미 그 말-문장들은 “연이어 떨어져 나간 몬스테라 잎처럼 / 더 이상 내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시인은 노트북을 켜고 SNS를 연다. 대화창이 열리고 누군가에게 접속한다. 그 사람은 거래처 사람이거나 직장 동료나, 친구, 연인, 혹은 낯선 대화를 즐길 뿐인 사람이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대화창이 열리는 순간 펼쳐졌던 대화창이 사라지고 한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환상—몇 번째 같은 장소다—에 사로잡힌다. 매번 “무엇도 알 수 없는 모호한 인사말”을 나누었지만, 그때마다 이물감으로 넘치는 불편한 감정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그들은 “입을 잠근 채 / 눈길을 피”한다. 마치 사이버 공간을 통해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실은 상대방과 시인의 사이에는 ‘대화창’이라는 막연한 노트가 있고 그들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대화하고 있다. 다 식은 아메리카노처럼 쓴맛만 둥둥 떠 있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쓰디쓴 문장”을 주고받으면서.
흰 종이는, 그러므로 대화가 기록되는 순간-들의 대화창이다. 단지 SNS가 구현시킨 프로그램 일부만이 아니라, 현실의 일상에서 오가는 모든 말의 보이지 않은 비물리적 공간이다.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은 소리 그 자체가 고막에 닿고 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면서 언어로 번역되는 회로라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기시감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말은 거의 무한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사과는 뱀으로부터 키워지고
박힌 이빨은 사납게 아름다워
별이 지나는 길을 알려 준 뱀만이
사과의 전부
길을 끌어안고 사과가 자라고 새가
웃는 사과를 보며 이쁘다 이쁘다 울지
비산하는 울음따라
시큼하게 휘도는 핏빛
뱀이 놓고 간 텅 빈 웃음
그 안에서 사과는 썩도록 웃어
썩은 사과 속으로 새가 뛰어들어도
이 별에서 저 별까지로 끄덕이는 이별
제일 반짝이는 별이 이별이라던
말의 끝이 툭-
잠든 나무가 후드득 깨어났고
시들지 않는 이빨만 남긴 채
뱀은 사과를 돌아보지 않지
혼잣말이 끝난 거야
ㅡ 오늘, 「네 어른을 내게 줘」 전문(문학과 사람, 가을호)
만일 뱀이 없었다면 기억의 최초이자 최고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창세의 신화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물론 ‘뱀’에 필적하는 악惡을 소환해 어떤 식으로든 마침표를 찍었겠지만, 우리가 아는 유대의 창세기는 그 핵심 줄거리를 바꿔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뱀이 표상하는 이미지는 다른 짐승들과는 무척 다르기 때문이다. 뱀은 무엇보다 간교하고 영악하며 침묵 속에서 모호하다. 더욱이 뱀은 그 자체로서 이미 공포를 수반한다. 똬리를 틀고 고개를 빳빳이 세운 이 짐승 앞에서는 도무지 저항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신화가 언어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기억은 시차視差를 만들어낸다. 뱀에 무게를 두지 않고, 뱀이 여자에게 건넨 ‘사과’에 집중했다면 과연 그 서사는 또 어떻게 변형되었을까. 오늘 시인은 과감하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과’에 시선을 두고, 천천히 그 숨은 힘과 이력을 살핀다—뱀은 모종의 일탈과 균열, 반역을 계획하고 ‘사과’를 키우기 시작한다. 사과는 여자를 유혹하기 좋은 과일이다. 탐스럽게 익은 붉은 껍질과 흰 속살에 깃든 달콤한 향과 식감은 흘려보내기가 어렵다. 뱀은 사과를 키우고 그 맛을 보며 여자를 유혹할 최적의 시간을 준비한다. 사과 박힌 이빨은 사납게 아름답다. 마치 별이 지나는 길처럼 간결하고 명확하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사과는 오로지 ‘뱀’을 향한 존재로, 도구로 뒤바뀐다. 이것도 뱀의 계획이다.
사과가 자란다. 사방을 끌어안고 새의 청량한 울음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사과는 자라면서 가끔 제 일이 골몰하여 사라지는 뱀의 텅 빈 웃음에 웅크리기도 한다. “시큼하게 휘도는 핏빛”의 껍질은 어쩌면 뱀의 웃음이겠다. 사과는 뱀이 돌아올 때까지 “그 안에서 썩도록 웃”는다. 반짝이며 썩어가는 사과 속으로 새가 뛰어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 별에서 저 별까지로 끄덕이는 이별”이라는 일종의 도약이다. 사과는 이미 유혹의 최대치까지 익어버린 것이다. 유혹을 완성하는 사과—뱀이 남긴 이빨 자국은 문신처럼 표식이 된다. 비록 뱀이 사과를 돌보지 않아도, 그 표식은 지워지지 않는다.
온갖 안색을 뒤지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각별합니다.
모양이 모양 속으로 들어갈 때
어떤 형태는 둘이 되기도 하지요.
말코손바닥사슴을 탐색하는 일이란
버즘나무에 흰 새를 접붙여서 날려보는 것과 같습니다.
나이 들수록 죽은 아버지와 닮아간다는 말,
죽어서도 생김새는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가 봅니다.
여러 모양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끝이고,
대칭을 이루는 다른 세계와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습니다.
바다에서 민물로 돌아온 고래의 위기는 인간의 다른 모양일 수 있답니다. 변하는 피부는 부피의 표면이면서 내면이고 흘러넘칠 수 있는 위험일 수 있겠습니다.
모든 형태는 굴욕의 완성태입니다.
끝없이 패배하고 일어선 굴절들
저기, 돌을 깨보면
굴복의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상흔을 발견합니다.
살고 있는 모습과
죽어가는 모습으로 평화롭습니다.
너, 정말 몰라보겠다는 말
알 수 없는 무늬가 속속들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겠지요.
더 늙기 전에 보자는 말을 뒤로한 채
더 멀리 달아난 시간의 얼굴이겠습니다.
우리가 거절할 수 있는 일과 수긍할 수 있는 일들의 간극엔
아주 사소한 마음이 판형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 정지우, 「말코, 버즘, 고래」 전문(문예바다, 2024년 가을호)
표정은 대상과 잇닿을 때 생기는 주체의 반응이다. 대상과 함께 생성되며, 대상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표정 속에 대상은 항상 주어져 있으며 표정의 수만큼이나 그의 감성 상태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면, 굳이 현상학을 빌지 않아도 대상을 향한 얼굴의 지향으로 이 ‘표정’을 개념화할 수 있다. 요컨대,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는 표정은 없다는 것—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대해 특정한 관점에서 보거나 생각하거나 기억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표정을 만든다. 이를 증명하듯 시인은 “온갖 안색을 뒤지면 /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각별합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표정은 기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주체의 내적 감정이 어떤지를 암시한다. 이것은 일종의 ‘징후’로서 기억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의식적으로 수정될 때도 있지만 ‘주체’의 기복起伏은 표정을 통해 직접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교차한다. 그런 의미에서 표정은 감정의 모양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모양’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덧칠하며 식민화하는 경향이 있다. “저기, 돌을 깨보면 / 굴복의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상흔을 발견”하는 만큼 우리는 웃으면서 통곡할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이 예리하게 포착하는 바와 같이 “모양이 모양 속으로 들어갈 때 / 어떤 형태는 둘이 되기도” 하는데, 비유하자면, “말코손바닥사슴을 탐색하는 일”과 “버즘나무에 흰 새를 접붙여서 날려보는 것”의 유사성이다.
시인은 나이가 들수록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아간다는 말을 듣는다. 고인의 죽은 표정(혹은 ‘생김새’)은 유전되며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유사성’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하나의 표정으로, 징후와 암시로 수렴되기에 이른다—“바다에서 민물로 돌아온 고래의 위기는 인간의 다른 모양일 수 있답니다. 변하는 피부는 부피의 표면이면서 내면이고 흘러넘칠 수 있는 위험일 수 있겠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표정은 대상을 향한 주체의 지향이다. 나아가 대상이 겪어온 숱한 시간의 그림자에 대한 투사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몰라보겠다는 ‘말’에는 “알 수 없는 무늬가 속속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당혹스럽지만 자연스럽게 우리는 더 늙기 전에 보자면서 대화를 끝낸다. 대부분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 그 기묘한 간극에는 ‘표정’이 있고, 그것은 “아주 사소한 마음이 판형”이다. (*)
박성현 | 2009년 중앙일보로 등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201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2018).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2020). 문학나눔 선정(2021).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발표지원,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