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희
1990년 시집『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물빛창』『그늘을 사는 법』『가끔은 문밖에서 바라볼 일이다』『내 마음의 습지』『어쩌자고 제비꽃』, 시선집『영원이 어떻게 꽃 터지는지』, 산문집『슬픔이 익다』, 도예 개인전 <흙과 불로 빚은 詩 (2005년, 경인미술관)
시인의 말
백년 만에 도착했네
꽃이 아니어도 꽃피지 않아도 서럽지 않은
무등 無等
내 생애 초대받은 그 자리에
2023년 가을
안영희
안나 카레니나 외 2편
안영희
어쩌자고
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했느냐?
신호대기하고 있는 동부고속화도로
진입로 가에
진홍진홍 지인홍··· 꽃구름 레이스
줄 놓치면 죽을까 봐
고개 한 번 돌려보지 못하고
줄줄줄 따라가는 꼭두각시들의 시대를,
열정 제거당한 허허한 저녁나절을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느냐
무엇으로 뭉클뭉클 그리 치명매혹으로 터져 나와서는
삶은 때로 혼절할 듯한 전율이다! 고
오래 커튼 내린 내 마음 잿빛 유리창
차앙! 팔매를 치고 있느냐
절정의 덩굴장미, 장미 안나 카레니나여
아, 직도 고웁네
알아보시겠어요?
건네는 내 인사에
큰 눈을 들어 한참이나 건너다보기만 하던
삼십 년 만에 마주친 그 사람
···아, 직도 고웁네,
그 한마디 더디게 나오기까지 그는 내게서
무엇을 읽고 있었을까?
입동 가까이
어제는 비가 내렸고
나뭇잎들 찢긴 편지처럼 휘날렸네
절정을 치던 광채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는
보문사 긴 담장 나뭇잎 축제의 길을
짠하게 배어오는 애잔함으로 걸었네
그도 읽고 있었을까? 내 얼굴에서
어언 다녀간 비와 바람 서릿발 치고 간 흔적들을
아닌 듯
죽음이 색을 풀어 추연히 스며든
조락의 통증 같은
저 아름다움을
초록 명주이불
검은 이불보에 싸여
매양 높다랗게 대마무 시렁 위에 모셔져 있던
진자주 깃을 댄
고모의 초록 명주 이불은 어떻게 되었을까
광 한 칸 건너 골방에서
다른 여자의 애 셋을 만드는 사내를 두고
잠 못드는 밤엔
펼쳐놓고 하염없이 바라만 보던
서럽도록 눈 시린 우리 고모의 초록 이불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어서야 절골떡 절골 양반한테로 가네!
삽을 든 마을 장정들 알아서 퍽퍽,
일흔 넷의 고모 지아비의 백골에게로 합방시킨 후
전주이씨 종가 기운 대문의 안채에는 자물통이 물려 있었네
신용 불량자 가족이 산다고 했네
워어매, 시상에! 이것이 누구당가! 뭔 일이당가이잉~
싯누렇게 뜬 일기장을 펼쳤네 임실댁 원동댁 매월댁들은
흙담 주저앉는 고샅들 뒤로하고,한 줌 종자들인 양 오종종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건드리면 깊은 어딘가에 여직도 분홍물 번지는
내 유년을 증언하고 있었네
어디로 갔을까
棺가마 타고 우리 고모 백골 길 떠나실 때
함께 풀어 넣어줄 것을
매양 시렁 위에 고이 모셔져만 있던, 시집올 때 가져온
눈 시린 그 초록 명주 이불
- 시집 『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했다』 에서
그러나 이 저녁
어둠 밀물 쳐 든, 유리창 밖 막막 허공에
동, 동, 동, 동...
한사코 따라오는 둥근 저 등燈불은
- (저녁기차)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