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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판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송암 이노(1544∼1598)가 쓴 전쟁일기를 새긴 것이다.
용사일기(龍蛇日記)란 1592년임진년(壬辰年) 용의해 용 자와 1593년계사년(癸巳年) 뱀의해 사자를 합해서
용사일기 라 한다
이노는 일찍이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선조 24년(1591)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와 함께 김성일 휘하로 들어가 의병을 모으는 등 크게 공을 세웠다.
그 뒤 형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선조 30년(1597)에 『용사일기』를 완성하였으며, 그 이듬해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는 선조 25년(1592)에서 선조 30년(1597)까지의 기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 전쟁의 진행과정, 전란 속의 민심동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조 39년(1763)에 후손 이당혁에 의해 비로소 간행되어 유포되었다.
처음에는 서문 2매, 본문 74매, 장계 7매, 발문 5매 등 총 88매로 제작되었으나, 상당부분 훼손되고 잃어버려 현재는 약 40여판이 함휘각에 보존되어 있다. 이 목판은 이순신의『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목판은 함휘각(含輝閣)에 보관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 경상도(慶尙道)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기록을 송암(松巖) 이노(李魯)(1544∼1598) 선생(先生)이 용사일기(龍蛇日記)에 담은 것을 선생의 후손인 이당혁(李當赫)이 박달나무 52매의 양면에 새긴 것이다. 선조의 유물을 잘 보존하기 위해 1970년에 건평 5평의 함휘각을 세워 목각판을 수장(收藏)하였다.
용사일기 서문
鶴峯(학봉) 金誠一(김성일)의 『龍蛇日錄(용사일록)』은 곧 松巖(송암) 李魯(이노)가 저술한 바이다.
만력 임진(1592)년에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입을 걱정하여서, 김성일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하였으나, 행렬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왜구가 가득하였다. 인하여 영남초유사의 명을 받았는데, 대소헌 조종도와 송암 이노를 서로 기약하지 않고 서로 만났다. 눈물을 흩뿌리며 檄文(격문)을 초안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를 권장하였다. 요해지를 나누어 지켜 강한 도적을 무찌르니, 마침내 낙동강 우측 일대가 糜爛(미란, 썩거나 헐어서 문드러짐)에 이르지 않았다.
대체로 백 년 동안 나라가 태평하여, 백성들은 병란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다만 東萊(동래) 부사 宋象賢(송상현, 1551~1592)이 순국한 이외에는 별송이처럼 널려 있던 여러 고을이 하루아침에 바람에 쓰러지듯 하고 마니, 곧 ‘河北(하북) 24군에 한 명의 義士(의사)도 없다.’라는 당나라 현종의 탄식처럼 불행하게도 근접하였다.
적어도 김성일이 招諭(초유)한 노력과 조종도와 이노가 참모한 성의가 아니었다면, 어찌 온 도를 感激(감격) 시키고 聳動(용동, 몸을 솟구쳐 뛰듯 움직임)하게 하였겠는가. 피를 서로 마시면서 倡義(창의)하여, 親上死長(친상사장, 윗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침)을 경쟁하듯 본받아, 결국 江淮(강회, 당나라 장순이 수양성을 지켜 강소성과 안휘성을 보전하였다는 뜻. 여기서는 경상우도 일대를 말함)를 막아낸 공을 세웠다.
이때에 망우당 곽재우와 송암 김면과 같은 여러 사람이 있어, 매우 뛰어나게 의병대장이 되었으니, 학봉 김성일은 곧 영남 좌·우도를 번갈아 옮겨가며 안찰하였다. 조종도와 이노가 시종일관 휘하에 있으면서, 협찬하고 계책을 꾀하여, 兵糧(병량)을 區劃(구획)하였다. 관군과 의병으로 하여금 서로 협력하고, 나누어지지 않게 하여, 한마음으로 적을 막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게 하였다. 곧 이 한 권의 책은 대개 그 막하에서 방패를 갈아 틈틈이 기록한 것이다. 학봉 김성일이 경인(1590)년에 일본에 使行(사행)한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계사(1593)년 5월 학봉이 지리산에서 고향으로 返葬(반장) 하는 일에서 마쳤다.
오호! 왜란이 일어난 뒤 15개월간에 무릇 대포와 칼날이 搶攘(창양, 몹시 혼란하고 수선스러움)하고, 남녀의 세찬 물결 같은 참사와 관리가 도망하여 숨으면서도 의병을 중상모략한 상황을 죄다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격문을 돌려서 많은 사람들을 勉勵(면려)한 것은 곧 한나라 말기에 역신 董卓(동탁)을 제거하기 위해서 함곡관에 모였다는 저 關外臨壇(관외임단)의 맹세와 같은 것이고, 晉(진)나라 豫州刺史(예주자사) 조적(祖逖)이 북벌에 나서며 장강에서 뱃전을 두드리며 중원을 회복할 것을 서약했다는 豫州擊楫(예주격즙)과 같다.
병화 중에서도 농사를 권장하고, 군량을 힘써 준비한 것은 곧 한나라 말 魯肅(노숙)이 친구 周瑜(주유)에게 군량 3천 석을 주었다는 江東指囷(강동지균)의 의리와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屯田(둔전)을 경작하였다는 漢濱畊屯(한빈경둔)의 거사라 할 것이다.
슬픈 가락으로 죽음을 맹세하며, 다툼을 해결하여 적에 대한 의분을 가지게 한 것은 文天祥(문천상)이 正氣歌(정기가)를 지어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文山正氣(문산정기)의 끝남과 같은 것이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당나라의 郭子儀(곽자의)와 李光弼(이광필)이 安祿山(안녹산)의 난을 만나 서로 눈물로써 격려하였다는 牙門泣別(아문읍별)의 忠義(충의)와 같은 것이다.
榜文(방문)으로 타이르고, 書狀(서장)으로 권장하여, 狀啓(장계)로써 아뢰고, 공문서로 통지함은 당나라 이름난 문장가 陸贄(육지)와 李綱(이강)의 간절함이며, 문장으로 이름난 한나라 말기의 陳琳(진림)과 당나라 韓虎(한호)의 敏活(민활)함에 비길만한 琳虎書記(임호서기)의 翩翩(편편)함이다.
임금을 그리워하여 함양에서 酒案(주안)을 사양하고, 적을 무찔러 營門(영문)에 나간 것은 곧 송나라 충신 岳飛(악비)가 북벌을 결심하며, 술을 끊었다는 武穆斷酒(무목단주)의 정성이고, 송나라 王玠(왕개)가 누른 감을 보내 금나라 군사를 도주하게 하였다는 和原遺柑(화원유감)의 신묘함이다.
머리를 베어 노획한 것을 진상시키지 못하게 하여, 문관의 품계를 받지 못하게 한 것은 화려한 치장을 아뢰는 것을 금지한 지혜와 같은 것이고, 당나라 현종이 안녹산이 반드시 반역할 것이라고 예언한 곡강사람 張九齡(장구령)을 칭찬하였다는 曲江先見(곡강선견)의 明晳(명석)이더라.
軍務(군무)에 혼신을 다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나라를 걱정함은 곧 제갈량의 죽음에 蜀漢(촉한)의 부녀들이 머리를 풀고 통곡하였다는 蜀婦髽哭(곡부좌곡)의 비통함이며, 송나라 張浚(장준)이 직간을 하다가 귀양지에서 죽었다는 魏公葬衡(위공장형)의 마음이라 할 만하다.
비록 시운이 어렵고 불행하며, 하늘을 수명을 빌려주지 않아, 학봉 김성일로 하여금 왜적을 殲滅(섬멸)하지 못하게 하여, 진양성이 함락에 이르게 한 것은 더욱 온 사람의 옷깃에 눈물을 적시게 하였다. 하지만 다행히 이 일록이 오래 남아 있어서, 그가 왜란에 임하여 정성을 다하고, 충의를 격분하게 하여 彝倫(이륜)을 부양한 공은 歷歷(역력)하게 보는 것과 같다.
이로써 영남의 선비들로 하여금 忠勇(충용)의 義理(의리)를 분명히 알게 한 즉, 이 일록을 나무판자에 새겨 길이 전하고자 함은 또한 마땅하지 아니하랴!
松巖(송암)의 자는 汝唯(여유)이고, 鐵城人(철성인)이다. 20대에 서애 유성룡이 그의 종숙부 묘지명을 청해서 짓게 하였던 즉, 文辭(문사)가 일찍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말미에 붙인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 보낸 장계문은 지금 읽어도, 글자마다 눈물이 맺히니, 그 나라를 위한 血忱(혈침,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생각할 수 있다.
송암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正言(정언)에 이르렀는데, 아우 柏庵(백암) 처사 旨(지)와 함께 임진란에 從事(종사)하였다. 이에 그 후손 一華(일화)와 一藎(일신) 등이 이 일록을 판각하고자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내가 마침 의령의 현감으로 있을 때인 즉 의령은 송암의 출생지고, 학봉과 제 의병장들이 군사회의를 하던 곳이라서, 의령에 있어서 이 기록은 참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나를 돌이켜보지 소홀하고 문장이 거칠어, 일찍이 이러한 글을 지어본 적이 없지만, 사적이 곧 느껴지는 것이 있어, 이에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여기 이 役事(역사)를 돕는 것이다. 다만 학봉 김성일의 遺事(유사)는 年譜(연보)와 문집이 간행되어 있고, 일본에 使行(사행)한 일에 관해서는 곧 백사 이항복이 鎭靜(진정)의 상소와 택당 이식의 壁立(벽립)을 칭한 것 모두 논지가 확실한 고로, 이제 疊床之論(첩상지론, 상 위에 상을 포개어 놓은 것과 부질없는 의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할 따름이다.
임진란 이후 167년 임오(1762)년, 임오 2월에 달성인 서명서가 愛民軒(애민헌, 의령현 관아의 東軒(동헌)을 말함. 현감 서명서가 1761년에 지었다)에서 쓰다.
龍蛇日記序
[晩翁徐命瑞]
金鶴峰『龍蛇日錄』, 卽李松巖魯所著也. 萬曆壬辰, 朝廷軫南憂, 以鶴峰除嶺南右節度, 行未到, 倭寇已充斥. 仍承招諭之命, 與趙大笑軒及李松巖, 不期相遇. 抆涕草檄, 勸起義兵. 分守要害, 勦却强寇, 竟使江右一帶, 不至糜爛. 盖百年昇平, 民不見兵. 秖有宋萊侯立殣之外, 星羅列邑, 風靡一朝, 則‘河北二十四郡, 無一義士者’, 不幸而近之矣. 倘非鶴峰招諭之力趙·李參謀之誠, 則烏能激聳一道. 沫血倡義, 爭效親上死長之忠, 卒辦蔽遮江淮之功乎.
時則有若郭忘憂·金松庵諸人, 傑然爲義兵大將而鶴峰, 則迭移按察于左右道. 趙·李二公, 終始在麾下, 協贊謨猷, 區畫兵糧. 使官軍義兵, 相協而不遂歧, 一心禦敵, 誓酬國恩. 則惟此一錄, 盖其幕裏, 磨盾之餘筆也. 起自鶴峰庚寅泛槎之行, 迄于癸巳五月鶴峰歸櫬之事焉.
嗚呼! 亂起後十有五朔之間, 凡礮鋩搶攘, 士女奔波之慘, 官守逃竄, 惎剋義旅之狀, 無不畢錄. 而至若邂逅許心, 馳檄勵衆, 則關外臨壇之盟, 豫州擊楫之誓也. 兵間勸農, 行辦軍粮, 則江東指囷之義, 漢濱畊屯之擧也. 悲歌矢死, 解紛敵愾, 則文山正氣之闋, 牙門泣別之忠也. 榜諭書責, 奏狀交關, 則陸·李奏議之懇懇, 琳·虎書記之翩翩也. 戀主辭宴, 衝賊赴營, 則武穆斷酒之誠, 和原遺柑之神也. 止獻鹵獲, 摧挫望士, 則金籠不奏之智, 曲江先見之明也. 盡瘁軍務, 至死憂國, 則蜀婦髽哭之悲, 魏公葬衡之志也.
雖其時運屯厄, 天未假年, 使不能手殲寇奴, 以至於晉陽之城沉, 尙有滿襟之淚矣. 而幸賴此錄之長留, 歷歷如見, 其臨亂, 効誠激義, 扶彝之功. 使此鄒魯之鄕, 明知忠勇之義, 則此錄付諸剞劂, 永壽其傳, 不亦宜乎?
松巖字汝唯, 鐵城人. 弱冠時, 柳西厓倩撰, 其從叔墓誌, 則文辭之夙就可知也. 且錄末所附天將啓, 至今讀之, 字字可涕, 想見其爲國血忱. 登第, 官正言, 與弟柏庵處士旨, 同事於壬辰. 而其後孫一華·一藎等, 鋟是錄, 請余弁之. 余適來監宜春, 春卽松巖誅茅之地而鶴峰及諸義將, 論兵之所, 則此錄之於宜春, 誠不可闕也. 顧余鹵莽, 未曾爲此等文字, 而事乃有相感者, 茲不得牢辭而相其役焉. 第鶴峰遺事, 自有譜集刊行而海槎之役, 則李白沙鎭靜之奏, 李澤堂壁立之稱, 皆確論. 故今不必疊床云爾.
壬辰後, 百有六十七年壬午, 玄馬兎月, 達城徐命瑞, 書于愛民軒.
용사일기 발문
[대산 이상정]
象靖(상정)은 매번 학봉 김성일 선생의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시구를 暗誦(암송)하면, 아닌 게 아니라 분격(憤激)하여 팔을 휘두르며, 감동하여 탄식함에 그 사람됨을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체로 임진왜란을 당하여서는 영남이 맨 먼저 병화에 갈라졌다. 선생은 오로지 招諭(초유)의 직분을 안고서, 정성과 있는 힘을 다해, 끝내 순국하였거니와, 대소헌 조종도와 송암 이노 두 공이 실로 그 막료가 되어 협찬하고 기획한 도움이 더불어 이에 많았다.
선생의 精髓(정수)한 충성과 위대한 功烈(공렬)은 참으로 이미 나라의 역사와 家牒(가첩)에 실려 있어, 거의 사람마다 가지고 있고, 집집마다 외우듯 하지만, 유독 두 공이 치밀하게 행한 謀議(모의)는 왕왕 침몰하고 없어져 세상에 널리 전하지 못하였으니, 옛것을 좋아하고, 의리를 사모하는 선비들은 대체로 이것을 깊이 원망하였다.
이제 와서 송암공이 저술한 『龍蛇日錄(용사일록)』이라는 것을 받아 이를 읽어 보니, 학봉 선생이 난리를 겪은 전말을 기록한 것을 行狀(행장)과 年譜(연보)에 기재된 것과 비교해서 보니, 더욱 자상하였으며, 두 공이 周旋(주선)하여 도와서 보충한 공로 또한 간간이 첨부하여 여기에 드러내었다. 무릇 선생은 두 공을 얻고서 하늘이 나를 도왔다고 기뻐하였으니, 그 사람됨을 알아보고 선임한 것이라 진실로 알만하고, 두 공이 追從(추종)할 바를 택하되, 가벼이 남에게 許與(허여) 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아! 矗石(촉석) 일면은 즉 영남의 울타리이니, 그 존망은 선생의 한 몸에 걸려 있었다. 바야흐로 세 장사가 둘러앉아, 눈물을 흩뿌리며, 장강을 가리키며, 서약할 때에, 장차 그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으리라는 壯志(장지)는 이미 가슴속에 본래부터 작정한 것이었다.
하늘로 하여금 戰禍(전화)를 내린 것을 후회한다는 의미로 선생에게 몇 해만 빌려주었더라면, 요망한 기운을 모조리 소탕하고, 구역을 깨끗이 하는 것은 날을 정해 기약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大勳(대훈)이 아직 모이기도 전에 장수별이 거연히 떨어졌으니, 이것은 진실로 時運(시운)에 관계된 바이다. 그러나, 의려를 초유하고, 方略(방략)을 마련해서, 다른 날 다시 회복하는 사업에 터전으로 한 것은 실제 선생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다.
이에 송암공은 곧 창과 방패가 몹시 혼란한 틈 속에서 사건에 따라 붓을 들어 기록하여, 전말을 갖추어 저술하니, 百世(백세) 뒤에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역력(歷歷)히 하였으니, 마치 자신이 직접 겪고, 눈으로 보는 것처럼 하였다.
巖廊(암랑) 즉 조정에서 石畫(석획, 국사를 계획하는 일)을 하는 志士(지사)들이, 평소에 관심을 두고 보아두었다가, 창졸지간의 위급한 때에 수용한다면 곧, 이것은 참으로 학봉 선생이 남긴 계책과 공적이겠지만, 송암이 부지런히 힘써 일하여 採錄(채록)하여, 후인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니, 그 공적 또한 어찌 적다고 할 것인가?
문득 象靖(상정)은 거듭 느끼는 것이 있다. 『禮記(예기)』에 “患亂(환란)을 막다가 순직하면 제사하고, 큰 재난을 막으면 곧 享祀(향사)한다.”라고 하는 글이 있기로, 옛날 睢陽(수양)의 雙廟(쌍묘, 당나라의 張巡(장순)과 許遠(허원)을 기리는 사당)가 바로 이것이다. 만약 矗石樓(촉석루) 아래에 몇 칸의 사당을 두고, 세 현인을 아울러 제향한다면, 죽지 않는 魂(혼)으로 하여금 영원히 향사에 보답하게 한다면 곧, 고을 백성들의 百世(백세) 思考(사고)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에 대한 소식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義(의)를 崇尙(숭상)하고, 절개를 사모하는 志士(지사)는 반드시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능히 시행하는 자가 있을 것이지만, 일이라는 것은 진실로 기다림이 있는 것이다.
송암공의 6세 奉祀孫(봉사손) 垕晩(후만)이 감히 이 서책을 사사로이 하지 못하여, 마침 가래나무 판에 새겨 오래도록 遺傳(유전)하려고 하니, 곧 孝孫(효손)과 孝子(효자)가 마음을 쓴 바이다. 여기에 의령현감 徐命瑞(서명서)가 그 일을 계획하고 처리해 주었으니, 역시 힘쓸 바를 안다고 이를 만하다. 이로써 끝머리에 아울러 쓴다.
임오(1762)년 10월 상순 韓山人(한산인) 李象靖(이상정) 跋(발)하다.
龍蛇日記跋
[李象靖]
象靖每誦鶴峯先生「矗石樓中三壯士」之句, 未嘗不扼腕感欷, 想見其爲人. 蓋當壬辰之亂, 嶺南首刳於兵. 先生膺一路招諭之寄, 殫誠竭力, 卒以身殉國而趙大笑·李松巖二公, 實爲之佐幕, 協贊籌畫之助, 與爲多焉. 先生精忠偉烈, 固已載諸國乘家牒, 殆人有而戶誦; 獨二公密勿之謨, 往往沈佚而不大傳於世, 好古慕義之士, 蓋深病焉.
今得松巖所爲『龍蛇日錄』者而讀之, 記先生履難臨本末, 視狀譜所載, 尤加詳而二公周旋裨補之烈, 間亦附見焉. 夫先生得二公而喜其天贊我, 則其知人善任, 固可知而二公之擇於所從而不輕以許人, 又可見已.
嗟乎!矗石一面, 卽嶺南之藩蔽而其存亡係先生之一身. 方其鼎坐, 揮涕, 指長江, 爲誓; 其忘身死國之志, 已素定於胷中矣. 使天意厭禍, 假先生數年, 其蕩掃妖氛, 廓淸區域, 可指日以期, 而大勳未集, 將星遽霣, 是固時運所係. 然其招諭義旅, 制置方略, 以基異日重恢之業者, 實自先生發之. 而松巖乃於干戈搶攘之餘, 隨事筆錄, 備著首末, 使百世之下歷歷, 如身履而目睹. 巖廊石畫之士, 得以平居覽觀, 受用於倉卒危難之際, 則是固先生之遺謨餘烈, 而松巖所爲辛勤采錄, 以嘉惠後人, 其功又曷可少哉?
抑象靖重有感矣. 『禮』有:“死事捍患之祀, 能捍大患, 則祀”, 古者睢陽之雙廟是已. 若於矗石之下, 置數間之祠而並祭三賢, 使不死之魂, 永有報享, 則足以慰州民百世之思, 而迄未有聞焉. 尙義慕節之士, 必有以此聞於朝而能施行者, 事固有待焉.
松巖公六世奉祀孫垕晩, 不敢私是書, 方鋟梓以壽其傳, 卽慈孫孝子之所用心. 而徐侯命瑞, 實經紀其事, 亦可謂知所務矣. 是庸並書于後.
歲壬午, 孟冬之月上澣, 韓山李象靖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