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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철학 1
나는 근검한 농업인 부부의 5남매 중 서열은 누나에 이어 2번째지만 맏아들로 태어났다. 올 살배기 라고 초등학교는 일곱 살에 입학했으나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채 철없이 육 년을 보냈던 것 같다. 중학교는 1학년을 마칠 무렵 신병을 앓아 한 해 휴학을 하면서 맥없이 3년을 보냈다.
내가 나름 철이 든 것은 한 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것이 휴학과 고입 재수를 거치면서 오히려 한 해 늦게 자리를 잡은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물론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일기 쓰기와 시작 활동은 고등학교 시절에 와서 삶과 생명에 대한 고뇌가 깊어지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 그리고 여자친구와 펜팔을 하면서 철학적 배경을 깔게 되었다.
그때부터 근면 검소를 생활 바탕으로 한‘성실 인내 절충’을 생활훈으로 정하였고 공부도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삶은 중학교 시절 어머니의 이른 타계로 흔들렸고 고등학교 때까지도 영향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지극한 뒷바라지로 빗나가지 않고 올바르게 자리잡아 타의 모범이 되기 시작했다. 대학과 대학원, 종묘회사에서의 직장생활도 모범이 되었다.
나의 철학에 관해서는 나의 2번째 저서‘특별한 한 권의 책’(2004년 1월 발간) 가훈집에서 자세히 논술하였다.
나의 삶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에 연유하여 중학교 시절 한때 학업을 소홀히 하여 방황했던 것 말고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때로 어려움이 닥쳐왔어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였는데 그 믿음의 근간은 나의 사주팔자였다.
나는 일찍부터 주역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으로부터 알게 된“신의 예정조화론과 개운론”을 모두 신뢰하였다. 현대 과학은 세상 만물의 생성원리가 빅뱅 이론으로 설명지만 나는 음양오행설을 신뢰했었다. 중성자 격인 태극을 중심으로 음과 양의 기운 조화로 만물이 생성되고 오행[ 화(火)·수(水)·목(木)·금(金)·토(土))의 원리로 변화하며 팔괘(하늘·땅·못·불·지진·바람·물·산)의 원리로 세상이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나의 믿음이 주역을 깊이 공부한 사람이 보면 어설플지 모르지만, 그것이 나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의 사주는 말띠(午年)午日午時生 사주팔자는 묻지도 말라고 했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서 자랐다. 즉 나의 당사주는 천복, 천복, 천복 三天福이고 一天孤이다. 여하튼 하는 일마다 더러 실패가 없지는 않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고 대부분 마음 편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외로움은‘군중 속의 고독’처럼 나의 고질병이기도 했다. 일생동안 사주풀이나 신년운세를 보면 양호하였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삼재 시기의 어려움도 최악의 불운은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신통한 것은 고등학교시절 한 짚시 여인이 주인집 할머니를 따라 나의 자취방 앞으로 왔는데 끄때 내 미래에 대해 주문한 말이 수십 년이 지나서 그대로 맞은 것이 기막힌 일이었다. 생년월일시 외에는 다른 정보를 준 일도 없는데 그대로 맞았다. 맏이지만 맏이 노릇을 못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따라 타관으로 돌았기 때문에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직접 모시지 못했고 동생이 가까이서 보살폈다. 그리고 훗날 한 자식이 나에게 불복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맞았다.
그러면 사주팔자가 좋다고 해서 즉 신의 예정조화론을 믿고 요행을 바라며 살았는가?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언제나 근면한 자세로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생활했으며 사치와 낭비를 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기본으로 하였고 결단의 행동은 상식과 양심적인 판단에 따랐다.
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경우도 그냥 놀면 심심해서 무슨 일이든지 만들어서 해야 하는 근면한 성품이라 주경야독하는 자세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풍수지리에도 관심이 깊었다. 풍수지리는 미신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바람과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주어진 땅의 이득를 구하는 자연과학이다. 그것을 능히 헤아린다면 재해를 예방할 수 있다. 그래서 안전하고 포근함과 안락함을 주는 자리가 곧 재해가 없는 곳이 명당名堂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나는 사주팔자(신의 예정조화론)를 믿으며 일을 가려 선택했고 어려움이 다가올 때는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였다. 즉 운명을 개척하는 개운론으로 삶을 바꾸는 노력을 해왔는데 개운론의 저변에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이 있었다. 그것으로부터 현명함을 깨치고 그것으로부터 신중하게 행동함을 얻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어떤 사람은 죽으라고 열심히 일했는데 하는 일마다 망가지고 되는 일이 없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른바 운때가 맞아 겉보기에 별로 고통받거나 힘들이지 않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러 가지 영향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최대 인자가 유전적이고 천부적인 사주팔자와 관련이 있지는 않겠는가.
그렇다. 사주팔자는 천부적인 능력 즉 유전적인 소양이다. 이른바 부모 찬스 즉 금수저도 그 인자가 되겠지만 후천적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유전적 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평등을 주장하면 그 사회는 하향 평준화가 되고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가 백을 구한다는 말처럼 사주팔자가 흡족하지 않으면 운수 없는 몸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개운론에 치중하여 살아야 한다. 비록 하늘이 돕지 않은 자도 허욕의 늪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면 대성은 못 해도 웬만큼은 성공한다는 것이다.
농가월령가 12월령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 - 농사는 믿는 것이 내 몸에 달렸느니 절기도 진퇴 있고 연사도 풍흉 있어 수한 풍박 잠시 재앙 없다고야 하랴마는 극진히 힘을 들여 가솔이 일심하면 아무리 살년에도 아사는 면하느니 - - -〉 그렇다. 인생 농사도 농작물 농사와 그 원리가 다르지 않다.
나는 이제 황혼의 나이 종심에 이르러 돌아본즉 실패한 일이나 미처 살피지 못해 발생한 가슴 아픈 일이 없지는 않지만 평생을 가늠하여 평균해 본다면 나름대로 아주 열심히 살았으니 대단한 후회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극복할 수 없이, 연습할 겨를도 없이 너무나 빨리 흘러 가버린 일생, 어느새 늙어진 생명에 대한 애착과 동시에 할 일과 싶은 일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세모)
나의 삶 나의 철학 2
나의 삶 나의 철학 1의 이야기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1993년에 제정한 나의 가훈집에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그 대략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인생 목표는‘모든 여유 있는 삶의 창조’이고 좌우명은 초기 청소년시절부터 청년기까지는 "誠實, 忍耐, 折衷" 이었으며 결혼 이후부터는 ①하느님을 생각하고 늘 기도한다 ②아버님의 노고와 건강을 생각한다 ③어머님의 유지를 생각한다 ④가정의 어려움을 생각한다 ⑤독도와 황금의 잠언을 생각한다 ⑥나의 인생목표를 생각한다 ⑦이웃과 조국을 생각한다 등 7개 항목으로 정하고 실천하며 노력하였으나 솔직히 좋은 점수를 얻기는 어렵다.
한편, 청년기 이후 나의 생활훈은‘탓은 나의 탓이고 덕은 남의 덕이다’로 정하고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는 노력을 하였다.
이와 같은 내 지난 시절의 생활토대와 아버지의 생활철학을 바탕으로 가훈을 제정하였다.
가훈은 "원만한 ᄒᆞᆫ 사람이 되자"로 정하였다.
가훈 제정의 경과는 1970年代는 필요성 인식과 기초적인 발상을 하였고 1980年代는 구체적으로 철학적인 배경을 설정하고 논리화하기 시작하였으며 1993年 한여름에 마침내 완성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2003年 초여름에 극히 일부를 가필과 정정하였다.
가훈의 바른 실천을 위하여 3대 기본강령과 8대 실천강령을 두었는데 기본강령은 ①우아한 품성의 배양 ②아름다운 심성의 함양 ③원만한 인간성 추구이고 8대 실천강령은 ①도덕의 완성 ②철학의 완성 ③종교의 완성 ④배움의 완성 ⑤명예의 완성 ⑥생활의 완성 ⑦일의 완성 ⑧가정과 가문의 완성이다.
가훈제정의 철학적 배경은 운명론과 개운론, 즉 사주팔자론과 운명개척론이 바탕이 되었다. 기본강령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이고 경우 바른 품성과 심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서술한 가훈 제정의 철학적 배경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서 간단하게 부연해 본다.
품성(品性=品格)에는 천성과 인성 그리고 지성이 있다.
천성은 가장 내부에 위치하며 인성으로 포위되어 있다.
인성 중에도 자연환경에 의해 형성된 인성이 인문환경에 의해 형성된 인성보다 더 깊숙이 내재 되어 얼핏 보기에는 천성과 같아 보인다.
지성은 가장 외곽에 위치하며, 천성과 인성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꽃의 향기와 같은 품성으로 철학과 종교에 의해 승화되면 정점을 이룬다. 이들 품성의 합리적인 조화가 원만함을 이루는 첩경이 된다.
심성(心性)에는 상심과 중심 그리고 하심이 있다. 상심(上心)은 행동의 기본으로 적극적인 마음, 노력하는 마음, 추구하는 마음이고 중심(中心)은 사고의 기본으로 주관이 분명한 마음, 사려가 깊은 마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마음이며 하심(下心)은 사랑의 기본으로 배려하는 마음, 베풀고 봉사하는 마음, 협동하는 마음이다. 이들 심성의 균형적인 개발이 합리적인 사고와 가치 있는 행동, 원만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관건이 될 것이다.
나의 가훈제정의 철학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이 모든 생명의 당연함이요 생명 체의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에게 똑같이 한정된 현상이지만 인간이기에 주어진 대로 살 것이 아니라 마땅히 고민하고 갈등하고 개척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태어나서 살고 죽을 때까지의 숱한 인생사 가운데 나 개인의 원인과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채로 이루어지는 것이 꼭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곧 태어남이다. 태어남(즉 태여남)은 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변동될 수 없는 일로 숙명이니 곧 소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인생사는 선택되는 인연으로 개척 변동될 수 있는 운명이니 즉 사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명적인 숙명은 수임 사항으로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이며 사명적인 운명은 선택사항으로 피함이 가능한 상대적인 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남은 필연적인 만남이라 큰 축복인 것이요 죽음은 반 선택적인 이별이라 큰 슬픔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긍지를 가지고 반드시 태어나야 했던 내가 죽음에는 왜 하필이면 “나”인가 하는 마음으로 참담하게도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는 것은 나 자신의 관리 불찰임과 동시에 생명체의 변함없는 순리인 것이다.
예로부터“그 사람 팔자가 그렇다지.” 또는“그 사람 운명이 그런 게지.”라고 하는 것은 팔자와 운명을 동일시 한 것이고 “그 사람 타고난 팔자가 그런가 보지.”라고 하는 것은 팔자와 숙명을 동일시 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팔자는 숙명과 운명을 포괄한 포함의 관계로 팔자가 곧 인생 전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그 사람 운명이 그렇지 타고난 운명이 그런 게야”라고 하는 것은 운명과 숙명을 혼동한 표현이다. 한편 사주팔자란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니 곧 한 인생의 존재를 뜻하는데 비록 그것이 그 존재의 숙명과 운명을 예감할지언정 이미 예정된 삶의 모양새나 부동의 틀은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숙명과 운명을 한자어로 풀어보면 宿命이란 잠자는 명, 즉 내재 되고 잠재된 명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명이니 곧 천명이요 소명인 것이다.
한편, 운명(運命)은 일어나는 명, 즉 움직이는 명으로 후천적으로 개척되고 변화되는 명이니 곧 인명(=지명)이요 사명인 것이다. 운명을 팔자로 본 격언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남의 팔자를 알아야 나의 팔자를 안다.”또“남의 팔자는 보기 나름이고 나의 팔자는 마음 먹기 나름이다.” 이것은 모두 운명의 개척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인명은 재천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자위하고 타의 고통을 위로하고자 하는 지극히 소극적인 방편어에 지나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주 행운과 불운을 논한다. 운에도 음의 덕과 양의 덕이 있다. 음덕(陰德)에는 하늘로부터 받는 천기, 즉 태기로 부여되는 천운과 조상으로부터 음우받는 덕, 즉 지기로 부여되는 지운(地運)이 있다. 양덕(陽德)이 란 나의 노력의 소산으로 내재 되어 흐르다가 자신이 인지할 수 없을 때 예상 밖으로 돌아오는 간접적인 선택의 결과이니 득운(得運)이라 하겠다. 아무쪼록 늘 기도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상을 잘 섬기는 일이 음덕을 받는 일이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양덕을 받는 득운 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운명을 개척하고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만남(因緣)과 관심(表現)과 사랑(實踐)이다. 그런 데 이 만남과 관심과 사랑의 본체, 바야흐로 근원적이고도 원초적인 본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법(法)의 근원이요 운명 창조의 발원지이며 제행의 출발점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다양하여 무량지수의 형상을 가진 다름 아닌 바로 마음(心)인 것이다. 인연(만남)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 면 관심이 없고 관심이 없으면 존재나 대상에 대한 사랑이 잉태되지 아니하고 사랑이 분만되지 않으면 운명도 개척 창조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심성과 품성 즉 품격으로 표출 구성된다.
심성(心性)에는 상심과 중심 그리고 하심이 있다. 상심(上心)은 행동의 기본으로 적극적인 마음, 노력하는 마음, 추구하는 마음이고 중심(中心)은 사고의 기본으로 주관이 분명한 마음, 사려가 깊은 마음, 불의와 타협 하지 않는 마음이며 하심(下心)은 사랑의 기본으로 배려하는 마음, 베풀고 봉사하는 마음, 협동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심성은 긍정적으로 표출될 경우이고 부정적으로 표출될 경우는 그 반대가 된다. 이들 심성의 균형적인 개발이 합리적인 사고와 가치 있는 행동, 원만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관건이 될 것이다.
품성(品性=品格)에는 천성과 인성 그리고 지성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철학• 종교 | ||||||
인문환경 | 지성 | |||||
자연환경 | 성 | |||||
천성 | 인 | |||||
| 원 만 |
첫째 천성은 천격으로 본성이며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유전 받은 태성이다. 이 천부적인 천성은 통상 잠재되며 극한 상황에서 표출되고 교육이나 교양으로 수정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잠재기질이다.
둘째 인성은 곧 인격으로 살면서 보고 듣고 접하고 느끼면서 형성되는 학습적 습성으로 생활환경에 따라 변화 되며 일상활동 중에 늘 표출되는 기질이다. 인성을 형성 하는 생활환경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하나는 자연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환경이다.
자연환경 요인이란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사는 곳이 어디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즉 도시냐, 시골이냐, 도시라도 어떤 도시냐, 또 시골이면 산촌이냐, 평야지냐, 해안지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게다가 산촌이라고 해도 강원도 같은 산악이냐 아니면 경상도냐 전라도냐에 따라서 다르고 그 가운데서도 북도와 남도가 다르고, 고을에 따라 다르고, 그 안에서도 지형과 지세에 따라서 또 다르게 영향한다. 말할 것도 없이 지구상의 어디라도 모두 같은 원리로 인격 형성에 적용된다고 본다. 이 이론은 곧 풍수지리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인격 형성에 자연환경만이 독립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자연환경은 초기 인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천성 다음으로 깊숙이 내재 되며 마치 본성과 혼동될 경우도 없지 않다. 흔히들 모 지방 사람들의 기질은 모모하고, 아무 지방 사람들의 기질은 아무하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지역에 따라서 사람들의 기질이 독특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유전적인 차이도 있지만 자연환경의 차이에 기인된 것이며 비록 먼 지방이라 하여도 자연환경이 유사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 비슷한데 그것은 일종의 생태형 집단이 되는 까닭이다.
인격 형성의 또 다른 요인인 인문환경의 주인자는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 등이다. 인문환경의 구성인자가 곧 표출되는 인격의 형성에 영향하는 주인자가 되므로 이것이 성장기의 가정, 학교, 사회환경에 보통사람들이 큰 관심을 가지는 기본 이유가 된다. 그것은 통상 사회관념이 내면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면의 모습으로 상과 벌을 논하고 우열을 정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에 쉽게 매혹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환경요인이 인격 형성의 요체가 되므로 환경을 "제2 의 어머니" 라고도 하는 것이다.
인성의 최고봉은 원만함이다. 원만이란 모가 없고 둥굴어서 상대에게 부담이나 불편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환대받고 칭송받는 인성이다. 뒤집어 보면 개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시ㆍ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원만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끊임없는 추구를 하는 것이 값지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인격의 변천 과정을 시내를 여행하는 바윗돌에 비유한다. 이것은 마치 산기슭의 암벽에서 오랜 풍화작용을 받아 떨어진 돌(=천성만 갖고 갓 태어난 아기)이 계곡을 거쳐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여행하는 것과 같다. 물과 수많은 이웃하는 환경 인자들(모래, 흙, 돌 기타)과 접촉 마찰하면서 모가 없어지고 둥근 차돌이 되듯 인격도야도 그렇게 되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충돌에 깨어져 다시 모가 난 돌이 되는 것처럼 환경에 따라 그렇게 인격도 변화되고 표출되는 무상함을 가지는 것이다.
여하튼 인성은 학습에 의해 형성되는 습성으로 살면서 습득하는 것이니 교육이나 교양을 통하여 비교적 쉽게 교정될 수가 있다.
셋째 지성은 곧 지격으로 천성과 인성이 조화되어 타인에게 풍김으로 영향을 주는 마치 꽃의 향기와 같은 품성이다. 또한 지성은 천성과 인성이 어떻게 조화되느냐에 따라서 무한한 형상을 갖게 될 뿐 아니라 잠재와 표출의 양면성도 갖고 있다. 지성은 상대가 느끼는 부드러움이지만 명확하게 단정하여 평판하기가 쉽지 않다. 대개“그 사람 지성적이더라.”또는“그 사람 매우 지성이 있어 보이더라”의 형태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지성은 한 사람의 종합적이고도 총체적인 가장 외곽적인 품성으로 그 기울기 값은 고정 인자인 천성보다는 변수가 많은 인성의 값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결코 지성이 인성과 동일하거나 그 자체일 수는 없다.
한편, 품성과 심성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합동이거나 대칭되지는 않고 이들은 원초적인 마음인가 하면 또 후발적인 마음이기도 하여 선후가 없으며 그다음에 발하는 것이 행동이요 실천이다.
이상과 같은 논리로 아름다운 심성을 가꾸고 우아한 품성을 길러 합리적이고 조화된 마음을 갖추는 방법, 적극적이면서 분명하고 베풀 줄 아는 원만한 ᄒᆞᆫ 사람인 동시에 창조적인 삶, 가치 있는 삶, 보람된 삶을 사는 방법을 우선 내가 실천하고 나의 자랑스럽고 믿음직한 후손들에게 항상 일깨워 주기 위하여, 그동안 내가 아버지의 실천 철학으로부터 영향받은 것과 내 스스로 경험하고 보고 듣고 배우며 깨우친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원만한 ᄒᆞᆫ 사람이 되자"로 가훈을 제정하는 바이다. (1993년, 2022년 12월 가필)
박애구현과 존재간의 거리모식도
모든 일체의 대좌적 존재는 나라는 절대적 존재를 중심으로 출발하여 동심윤문상으로 일정한 거리 차이에 위치 한다.
※ 모식도의 설명
1 : 자아(자애) 2 : 혈연(가족애)
3 : 지연(사회애) 4 : 학연(사제 및 교우애)
5 : 겨레와 민족(동포애) 6 : 범인류(인류애)
7 : 범생명체(생명애) 8 : 범존재(박애)
따라서 박애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발하며 자학이나 자포자기는 고귀한 삶을 포기하는 것만 아니라 일체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자학이나 자포자기는 소명적으로 태어나고 사명적으로 살아야 할 자기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며 조상과 창조주에 대한 배신이며 가장 큰 죄악임과 동시에 직무유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부터 사랑하여야 한다. 이것은 분명 이기주의와는 다름을 알아야 한다. (1993년)
자연과 사람의 구조적 비교
태초는 어둠이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
먼저 어둠 속에 빛을 내려 생명을 기르는 명암인 해와 달을 만들고 범존재를 조화롭게 하는 기운인 음양 즉 하늘과 땅을 만들어 존재의 터전을 마련한 뒤 생산의 근원인 생명의 자웅 즉 사람과 모든 생명들 만들었다. 그리고 무생명을 포함한 범존재를 만들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니 삼라만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법에 따라 창조된 암과 음과 자 그리고 명(明)과 양(陽)과 웅(雄)은 서로 동일하며 쌍방 간에도 서로 상통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 창조자는 모든 것의 중심인 태극이시다.
태극은 명암과 음양 그리고 자웅이 구별되지 아니하니 명(明)인가 하면 암(暗)이고, 음(陰)인가 하면 양(陽)이며 자(雌)인가 하면 웅(雄)이라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니 곧 전지전능하신 천지창조주라 함이다. 한편, 빛의 모태가 어두움이듯 암과 음과 자(♀)는 명과 양과 웅(♂)의 근원인 모태이다. 성질은 명과 양은 강하고 직선적인데 반해 암과 음은 부드럽고 우회적이며 웅(♂)은 공격적이고 자(♀)는 포용적이다. 범 존재를 조화롭게 하는 기운인 음양의 관계는 명(밝음)을 생산한 암(어둠)이 명을 동반하며 지배하듯 음이 양을 동반지배하며, 자 또한 웅을 동반함과 동시에 지배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원칙을 벗어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명암과 자웅 중의 남녀의 경우이다. 어순에 있어서 암명ㆍ여남이 아니고 명암ㆍ 남녀인 것은 음양과 자웅의 경우와는 반대이다. 생성의 순서에 의하면 바른 어순은 암명ㆍ여남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명암의 경우는 태초의 어두움에서 다음에 빛이 오자 빛의 강함으로 인해 명이 암을 지배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경우이다. 이것을 단순한 습관으로 보기에는 좀 다른 의미가 있다. 태초부터 암이 명을 생산하였던 만큼 실제로는 어두움이 밝음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과학적 실험근거가 있다.
원예학에 있어서 동국(冬菊) 전조재배 시 그전에는 일조가 짧아지는 늦여름 일몰시각부터 조명하여 명의 길이를 길게 하고 암의 길이를 8시간 이내로 짧아지게 하는 방법으로 재배했다. 물론 효과는 있었지만 전조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Night Break 효과"라고 하여 밤 11시∼01시 사이에 약 2시간 정도만 전조하여도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실용화하고 있다. 양계장의 전조 사육의 경우도 밤을 짧게 하고 낮을 길게 하여 사료를 공급하여 산란율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이것을 "장일효과"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단야효과"인 것이다. 낮은 활동이고 밤은 휴식이기 때문에 낮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또한 남녀의 경우도 태초에 어두움이었고 다음에 빛이 온 것처럼 사람을 만들 때, 여자부터 먼저 만들고 남자를 만들었다면 이 말의 논리적 순서는 여남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제는 음양의 창조 순서를 어기고 거꾸로 남자를 먼저 만들고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던 것이다. 이 예외적인 사건으로 인해 서열이 무너짐으로써 남녀 간에 우위를 위한 경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명암, 음양, 남녀≠자웅으로 기초적인 논리적 순서가 상실되었고 세상에는 혼돈과 혼란 그리고 약육강식의 전쟁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도 하나의 원죄로 사료된다.
그러면 성경에 하느님이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였는데 인내천(人乃天)이면 천은 하늘로 창조신임과 동시에 자연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 또한 자연이고 그렇다면 사람이 곧 소우주인 것이다. 자연과 사람의 모습을 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 연 | 사 람 |
1일 12시간 24시간 1년 12개월 24절기 | 늑골 좌우 12개씩 24대 |
1년 365일 | 혈맥 365개소 |
전기 하늘 : + ㆍ 땅 : - | 전기 남:+ㆍ여:― 상반신+ㆍ하반신- / 몸외부+ㆍ몸내부- |
지구 5대양 6대주ㆍ70% 수분 | 인체 5장 6부ㆍ70% 수분 |
지각(지표) | 피부 |
수풀 | 모발과 털 |
지하수 | 혈류(혈관) |
샘물 | 눈물과 땀 |
암반 | 뼈 |
용암 | 골수 |
춘하추동 | 소년ㆍ청년ㆍ장년ㆍ노년 |
기후기상 | 인생사의 제반 갈등 |
◄▪ 월별 계절풍과 시각표와의 관계 ▪► 1月=01時=北東風 2月=02時=東北風 3月=03時=東風 4月=04時=東南風 5月=05時=南東風 6月=06時=南風 7月=07時=南西風 8月=08時=西南風 9月=09時=西風 10月=10時=西北風 11月=11時=北西風 12月=12時=北風 |
◄▪숫자와 사람의 비교▪► 숫자:1, 2, 3, 4, 5, 6, 7, 8, 9, 0ㆍ9수10진/사람·9혈10공 (0과 치부는 무순으로 처음이자 곧 끝이다.) |
(1993년)
가목(家木)과 가화(家花)를 정하다
나는 가훈을 제정하면서 평소 살면서 받은 의미 부여한 가목과 가화도 정하였다. 먼저 가목에 대하여 피력하고자 한다.
가목(家木)은 수양버들로 정했다. 수양버들이나 능수버들은 언제나 가지의 끝이 땅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자라지만 결코 땅에 닿는 일이 없이 하늘을 향해 자란다. 언덕과 같은 높은 곳에서 자라면 가지는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보다도 더 아래로 자라 드리워지지만 분별없이 땅에 닿도록 자라는 일이 없다.
이들 버들은 언제나 아래로 자라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고 위로 자라는 목적을 이루며 또 위로 자라지만 전혀 거만하지 않고 저자세로 항상 겸허하다.
바람이 불면 강하게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면서 어울려 무난하게 적응하고 계절의 첫 신호등으로서 봄 일찍 푸르면서도 가을 늦게까지 푸르름이 남아있으니 드러나되 거만하거나 난하지 않고 오히려 수수하여 소탈하고 서민적이며 대중적이다.
특히 작은 잎으로도 그늘을 짙게 하여 행인에게 한여름 무더위를 가시게 하는 음덕을 베풀면서도 대가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의 고향정서의 소재 중 진달래와 더불어 제일의 대상이기도 한 이 버들의 모습을 본받고자 고교시절부터 지금까지는 나의 나무로 흠모해 왔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의 가목으로 정한다.
다음 가화(家花)는 아카시아꽃으로 정했다. 아카시아 꽃은 숨어 있으나 드러나 보이고 드러나나 화려하지 않고 희나 청승맞지 않고 더러움 타지 않으며 피어도 수수하여 거만하지 않고 어디에나 있어도 천하지 않고 하나이나 더불어 있는 고향산천의 다정다감한 이웃 같은 꽃이다.
아카시아 향은 진하나 독하지 않고 그윽하나 난하지 않고 널리 퍼지나 가볍지 않고 유혹하나 속이지 않는다. 아카시아 향은 매일 함께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아카시아는 꿀도 많이 생산하는데 향이 부드럽고 그윽하여 꿀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으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그처럼 진하고 감미롭고 향기로운 삶, 지성이 가득한 삶이 되도록 느껴 배울만 하다.
또 아카시아 나무는 어릴 적에는 가시가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시가 없어지며 여물어지고 베어서 마르면 매우 단단한 목재가 된다. 갈수록 내면이 좋아지는 생태를 본받을 만하다.
이와 같은 아카시아 나무와 꽃의 내외면 세계를 본받고자 고교 시절부터 지금까지는 나의 꽃으로 사모해 왔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의 가화로 정한다. (1993년 가훈집 중에서)
나의 삶 나의 고향
고향이라고 말하면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부모님이라는 말 다음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부득이하게 고향을 떠나 일본이나 만주, 미국 등지로 떠난 사람들이나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 그리고 해방이 되었지만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통탄할 남북분단에 이어 잔인한 육이오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강제로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이므로 그들에게 고향이란 말은 더없이 그립고 서러운 단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러는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실감을 안고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고향을 생각하기보다는 언제나 신기루 같은, 무릉도원 같은 신천지를 동경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그런 불운들이 지나간 직후 시기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두메산골 같은 깡촌 시골도 아니고 바닷가 어촌도 아닌 산과 들판이 적당하게 어울어져 있는 중간지대로 경상북도 선산군 산동면 적림동(죽리) 266-3번지였다. 지금은 경북 구미시 산동읍 적림리(죽리) 268번지로 바뀌었다.
그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7개월 후인 1954년 2월 28일(음력 정월 스무닷새)이다. 그 당시 한국은 일제강점기 수탈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곧 육이오전쟁을 겪은 직후라서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1980년 이후부터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싹을 틔운 한강의 기적이 탄력이 붙어 오늘날처럼 이렇게 발전하리라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도 못하였다. 농민이 70% 이상 되는 농경국가였지만 어떻게 해서 끼니를 이어갈지 고민해야 하는, 70년대 말까지 이어진 처절한 보릿고개 시대였다. 세계 7대 경제대국이 된 지금의 세대들은 도무지 유추할 수 없는 가난한 나라,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최후진국이었다.
따라서 나의 고향도 크게 다른 바가 없었다. 땔감이 부족하여 산에 초목이 자라지 못하였고 들나물 산나물 심지어 나무껍질까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거나 맹물을 마시며 끼니를 건너뛰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던 때였다. 쌀밥은 일부에게나 있는 것이고 보리밥과 국수라도 배불리 먹으면 큰 행복이었으며 고구마 감자도 호식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던 부모님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금지옥엽 대접을 받으며 쌀밥을 먹으며 유복하게 자랐던 고향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향에서 자랐으나 중학교 시절부터 110여 리 떨어진 대구에서 대학원까지 학업을 하였고 주말이라든가 가고 싶은 마음이 내키는 때면 이내 고향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학창시절에 비록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어도 객지 생활을 한다는 마음은 강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이카시대가 되기 전까지는 객지 생활의 정서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첫 직장을 구해 김해(주촌)로 갔을 적엔 멀리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곧 대구로 돌아와 영업부 직장생활을 할 적에는 출장길에 수시로 잠시나마 들릴 수 있어서 부모님 등과의 소통과 안부를 아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 본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먼 거리에서 살았다. 그랬지만 몸과 마음은 늘 고향을 중심으로 맴을 돌았으며 1998년부터 2013년 벽두까지는 사슴과 비육 한우농장을 겸업 경영하면서 주말마다 방문했지만 일만 하다가 돌아오니 수시로 변해 가는 고향 모습을 인지하는 감각은 많이 둔감했었다.
내 지금까지 70 평생 중, 격동의 세월 55년 동안의 변화는 그 이전 500년간의 변화보다 더 컸다. 공동묘지 아홉산 고개가 주민의 반대를 뿌리치고 골프장으로 바뀌고 구미국가산업단지 1, 2, 3공단에 이어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4공단과 5공단이 우리 면에 들어서면서 고향 산동면은 읍(邑)이 되고 고향의 산야와 전답들은 무리한 도시개발로 잠식되어 아파트촌이 내 농장에서 바라보던 유학산과 천생산의 그 멋진 조망을 막는 병풍처럼 들어서는 등 상전벽해로 크게 탈바꿈을 해갔다. 이것은 짧은 내 생애에 일어난 개벽과 같은 일로 과거 1000년의 변화보다 더 대단한 변화이다.
극심한 가뭄에 산천이 타들어 가던 건천, 그 백사장 좋던 내 고향의 하천은 이미 습지 갈대밭으로 변한 지가 오래되었고 옛 모습은 전혀 없다. 성수동, 백현동, 적림동 큰마(큰마을)와 밤재골 방향은 아직도 옛 모습이 상당히 남아있지만, 면 소재지인 적림리 대부분을 비롯해서 임봉리, 동곡리, 인덕리, 신당리, 도중리 등은 상전벽해로 크게 변해서 지금은 고향에서 나도 점점 낯설어져 이방인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다. 말뚝에 묶인 소처럼 고향이란 말뚝을 중심으로 두고 마음과 몸이 늘 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처럼 고향이 나의 중심축이 된 것은 나의 고향 바라기가 컸던 까닭일 것이다. 젊어서 직장을 따라 객지를 돌다가 중년 이후에는 고향에 정착하여 살고자 마음을 먹기도 했으나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그런 바람은 이루지 못하고 결국 서울과 양평(단월)이 그 대체 무대가 되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좋은 새 이웃을 만나면 뒤늦게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며 오히려 저 사람이 누군가 하며 쳐다보는 이방인 고향보다 더 낫지 아니한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고향이 그리운 것은 나의 추억과 역사가 향기로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부모님을 비롯한 형제 친척 그리고 이웃들의 흔적이 있어 나의 현재와 연결되기 때문에 고향은 늘 내 삶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와 고향을 연결하는 많던 구성요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거나 너무 오래되어 흐릿한 기억 속에 빛바랜 추억이 되니 안타깝고 애석하고 무정한 세월이 야속하기까지 하면서 고향은 다만 마음속에만 간직하게 되는 것 같다.
애착이 강하면 집착하게 되고 마음이 식으면 정도 시들해지듯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언제나 찾아갈 수 있기에 그런지 나의 고향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특별한 애환이나 애수가 없기에 그리움도 없어지는 것 같다. 아니 식어 가는 것 같다. 대저 핍박과 압박의 설움에서 강한 향수가 우러나오듯이 강제당할 때, 빼앗길 때 나와 거리가 멀어질 때 고향이 그리워지는가 싶다. (2022년 12월)
시인·시조시인·정책학박사 月湖, 溢泉 宇澤
경북대학교 대학원 농학석사,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도시계획학석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정책학박사(재난관리전공), (사)한국통일문인협회 이사장,강동문인협회 회장,(사)한국시조협회 이사·한국문인협회 회원 겸 서울강동지부장, 강동예총부회장, 세종문학 자문위원, 저서: 시조집『님의불굴가나의노래되다』,시집 『내 죄 사함을 위하여 내 인간 사랑함을 위하여』,『독도사랑 30년』,『살면서 느끼면서』,『살면서 느끼면서2』, 전기집『고려말 호국충절 불굴당 대은 변안열』, 양친 회고록 겸 가훈집『특별한 한권의 책』 기행문집『原州氏先祖歷史文化探訪記』등 다수
나는 근검한 농업인 부부의 5남매 중 서열은 누나에 이어 2번째지만 맏아들로 태어났다. 올 살배기 라고 초등학교는 일곱 살에 입학했으나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채 철없이 육 년을 보냈던 것 같다. 중학교는 1학년을 마칠 무렵 신병을 앓아 한 해 휴학을 하면서 맥없이 3년을 보냈다.
내가 나름 철이 든 것은 한 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것이 휴학과 고입 재수를 거치면서 오히려 한 해 늦게 자리를 잡은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물론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일기 쓰기와 시작 활동은 고등학교 시절에 와서 삶과 생명에 대한 고뇌가 깊어지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 그리고 여자친구와 펜팔을 하면서 철학적 배경을 깔게 되었다.
그때부터 근면 검소를 생활 바탕으로 한‘성실 인내 절충’을 생활훈으로 정하였고 공부도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삶은 중학교 시절 어머니의 이른 타계로 흔들렸고 고등학교 때까지도 영향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지극한 뒷바라지로 빗나가지 않고 올바르게 자리잡아 타의 모범이 되기 시작했다. 대학과 대학원, 종묘회사에서의 직장생활도 모범이 되었다.
나의 철학에 관해서는 나의 2번째 저서‘특별한 한 권의 책’(2004년 1월 발간) 가훈집에서 자세히 논술하였다.
나의 삶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에 연유하여 중학교 시절 한때 학업을 소홀히 하여 방황했던 것 말고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때로 어려움이 닥쳐왔어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였는데 그 믿음의 근간은 나의 사주팔자였다.
나는 일찍부터 주역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으로부터 알게 된“신의 예정조화론과 개운론”을 모두 신뢰하였다. 현대 과학은 세상 만물의 생성원리가 빅뱅 이론으로 설명지만 나는 음양오행설을 신뢰했었다. 중성자 격인 태극을 중심으로 음과 양의 기운 조화로 만물이 생성되고 오행[ 화(火)·수(水)·목(木)·금(金)·토(土))의 원리로 변화하며 팔괘(하늘·땅·못·불·지진·바람·물·산)의 원리로 세상이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나의 믿음이 주역을 깊이 공부한 사람이 보면 어설플지 모르지만, 그것이 나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의 사주는 말띠(午年)午日午時生 사주팔자는 묻지도 말라고 했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서 자랐다. 즉 나의 당사주는 천복, 천복, 천복 三天福이고 一天孤이다. 여하튼 하는 일마다 더러 실패가 없지는 않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고 대부분 마음 편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외로움은‘군중 속의 고독’처럼 나의 고질병이기도 했다. 일생동안 사주풀이나 신년운세를 보면 양호하였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삼재 시기의 어려움도 최악의 불운은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신통한 것은 고등학교시절 한 짚시 여인이 주인집 할머니를 따라 나의 자취방 앞으로 왔는데 끄때 내 미래에 대해 주문한 말이 수십 년이 지나서 그대로 맞은 것이 기막힌 일이었다. 생년월일시 외에는 다른 정보를 준 일도 없는데 그대로 맞았다. 맏이지만 맏이 노릇을 못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따라 타관으로 돌았기 때문에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직접 모시지 못했고 동생이 가까이서 보살폈다. 그리고 훗날 한 자식이 나에게 불복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맞았다.
그러면 사주팔자가 좋다고 해서 즉 신의 예정조화론을 믿고 요행을 바라며 살았는가?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언제나 근면한 자세로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생활했으며 사치와 낭비를 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기본으로 하였고 결단의 행동은 상식과 양심적인 판단에 따랐다.
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경우도 그냥 놀면 심심해서 무슨 일이든지 만들어서 해야 하는 근면한 성품이라 주경야독하는 자세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풍수지리에도 관심이 깊었다. 풍수지리는 미신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바람과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주어진 땅의 이득를 구하는 자연과학이다. 그것을 능히 헤아린다면 재해를 예방할 수 있다. 그래서 안전하고 포근함과 안락함을 주는 자리가 곧 재해가 없는 곳이 명당名堂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나는 사주팔자(신의 예정조화론)를 믿으며 일을 가려 선택했고 어려움이 다가올 때는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였다. 즉 운명을 개척하는 개운론으로 삶을 바꾸는 노력을 해왔는데 개운론의 저변에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이 있었다. 그것으로부터 현명함을 깨치고 그것으로부터 신중하게 행동함을 얻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어떤 사람은 죽으라고 열심히 일했는데 하는 일마다 망가지고 되는 일이 없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른바 운때가 맞아 겉보기에 별로 고통받거나 힘들이지 않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러 가지 영향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최대 인자가 유전적이고 천부적인 사주팔자와 관련이 있지는 않겠는가.
그렇다. 사주팔자는 천부적인 능력 즉 유전적인 소양이다. 이른바 부모 찬스 즉 금수저도 그 인자가 되겠지만 후천적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유전적 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평등을 주장하면 그 사회는 하향 평준화가 되고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가 백을 구한다는 말처럼 사주팔자가 흡족하지 않으면 운수 없는 몸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개운론에 치중하여 살아야 한다. 비록 하늘이 돕지 않은 자도 허욕의 늪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면 대성은 못 해도 웬만큼은 성공한다는 것이다.
농가월령가 12월령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 - 농사는 믿는 것이 내 몸에 달렸느니 절기도 진퇴 있고 연사도 풍흉 있어 수한 풍박 잠시 재앙 없다고야 하랴마는 극진히 힘을 들여 가솔이 일심하면 아무리 살년에도 아사는 면하느니 - - -〉 그렇다. 인생 농사도 농작물 농사와 그 원리가 다르지 않다.
나는 이제 황혼의 나이 종심에 이르러 돌아본즉 실패한 일이나 미처 살피지 못해 발생한 가슴 아픈 일이 없지는 않지만 평생을 가늠하여 평균해 본다면 나름대로 아주 열심히 살았으니 대단한 후회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극복할 수 없이, 연습할 겨를도 없이 너무나 빨리 흘러 가버린 일생, 어느새 늙어진 생명에 대한 애착과 동시에 할 일과 싶은 일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세모)
나의 삶 나의 철학 2
나의 삶 나의 철학 1의 이야기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1993년에 제정한 나의 가훈집에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그 대략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인생 목표는‘모든 여유 있는 삶의 창조’이고 좌우명은 초기 청소년시절부터 청년기까지는 "誠實, 忍耐, 折衷" 이었으며 결혼 이후부터는 ①하느님을 생각하고 늘 기도한다 ②아버님의 노고와 건강을 생각한다 ③어머님의 유지를 생각한다 ④가정의 어려움을 생각한다 ⑤독도와 황금의 잠언을 생각한다 ⑥나의 인생목표를 생각한다 ⑦이웃과 조국을 생각한다 등 7개 항목으로 정하고 실천하며 노력하였으나 솔직히 좋은 점수를 얻기는 어렵다.
한편, 청년기 이후 나의 생활훈은‘탓은 나의 탓이고 덕은 남의 덕이다’로 정하고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는 노력을 하였다.
이와 같은 내 지난 시절의 생활토대와 아버지의 생활철학을 바탕으로 가훈을 제정하였다.
가훈은 "원만한 ᄒᆞᆫ 사람이 되자"로 정하였다.
가훈 제정의 경과는 1970年代는 필요성 인식과 기초적인 발상을 하였고 1980年代는 구체적으로 철학적인 배경을 설정하고 논리화하기 시작하였으며 1993年 한여름에 마침내 완성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2003年 초여름에 극히 일부를 가필과 정정하였다.
가훈의 바른 실천을 위하여 3대 기본강령과 8대 실천강령을 두었는데 기본강령은 ①우아한 품성의 배양 ②아름다운 심성의 함양 ③원만한 인간성 추구이고 8대 실천강령은 ①도덕의 완성 ②철학의 완성 ③종교의 완성 ④배움의 완성 ⑤명예의 완성 ⑥생활의 완성 ⑦일의 완성 ⑧가정과 가문의 완성이다.
가훈제정의 철학적 배경은 운명론과 개운론, 즉 사주팔자론과 운명개척론이 바탕이 되었다. 기본강령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이고 경우 바른 품성과 심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서술한 가훈 제정의 철학적 배경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서 간단하게 부연해 본다.
품성(品性=品格)에는 천성과 인성 그리고 지성이 있다.
천성은 가장 내부에 위치하며 인성으로 포위되어 있다.
인성 중에도 자연환경에 의해 형성된 인성이 인문환경에 의해 형성된 인성보다 더 깊숙이 내재 되어 얼핏 보기에는 천성과 같아 보인다.
지성은 가장 외곽에 위치하며, 천성과 인성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꽃의 향기와 같은 품성으로 철학과 종교에 의해 승화되면 정점을 이룬다. 이들 품성의 합리적인 조화가 원만함을 이루는 첩경이 된다.
심성(心性)에는 상심과 중심 그리고 하심이 있다. 상심(上心)은 행동의 기본으로 적극적인 마음, 노력하는 마음, 추구하는 마음이고 중심(中心)은 사고의 기본으로 주관이 분명한 마음, 사려가 깊은 마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마음이며 하심(下心)은 사랑의 기본으로 배려하는 마음, 베풀고 봉사하는 마음, 협동하는 마음이다. 이들 심성의 균형적인 개발이 합리적인 사고와 가치 있는 행동, 원만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관건이 될 것이다.
나의 가훈제정의 철학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이 모든 생명의 당연함이요 생명 체의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에게 똑같이 한정된 현상이지만 인간이기에 주어진 대로 살 것이 아니라 마땅히 고민하고 갈등하고 개척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태어나서 살고 죽을 때까지의 숱한 인생사 가운데 나 개인의 원인과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채로 이루어지는 것이 꼭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곧 태어남이다. 태어남(즉 태여남)은 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변동될 수 없는 일로 숙명이니 곧 소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인생사는 선택되는 인연으로 개척 변동될 수 있는 운명이니 즉 사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명적인 숙명은 수임 사항으로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이며 사명적인 운명은 선택사항으로 피함이 가능한 상대적인 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남은 필연적인 만남이라 큰 축복인 것이요 죽음은 반 선택적인 이별이라 큰 슬픔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긍지를 가지고 반드시 태어나야 했던 내가 죽음에는 왜 하필이면 “나”인가 하는 마음으로 참담하게도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는 것은 나 자신의 관리 불찰임과 동시에 생명체의 변함없는 순리인 것이다.
예로부터“그 사람 팔자가 그렇다지.” 또는“그 사람 운명이 그런 게지.”라고 하는 것은 팔자와 운명을 동일시 한 것이고 “그 사람 타고난 팔자가 그런가 보지.”라고 하는 것은 팔자와 숙명을 동일시 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팔자는 숙명과 운명을 포괄한 포함의 관계로 팔자가 곧 인생 전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그 사람 운명이 그렇지 타고난 운명이 그런 게야”라고 하는 것은 운명과 숙명을 혼동한 표현이다. 한편 사주팔자란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니 곧 한 인생의 존재를 뜻하는데 비록 그것이 그 존재의 숙명과 운명을 예감할지언정 이미 예정된 삶의 모양새나 부동의 틀은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숙명과 운명을 한자어로 풀어보면 宿命이란 잠자는 명, 즉 내재 되고 잠재된 명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명이니 곧 천명이요 소명인 것이다.
한편, 운명(運命)은 일어나는 명, 즉 움직이는 명으로 후천적으로 개척되고 변화되는 명이니 곧 인명(=지명)이요 사명인 것이다. 운명을 팔자로 본 격언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남의 팔자를 알아야 나의 팔자를 안다.”또“남의 팔자는 보기 나름이고 나의 팔자는 마음 먹기 나름이다.” 이것은 모두 운명의 개척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인명은 재천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자위하고 타의 고통을 위로하고자 하는 지극히 소극적인 방편어에 지나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주 행운과 불운을 논한다. 운에도 음의 덕과 양의 덕이 있다. 음덕(陰德)에는 하늘로부터 받는 천기, 즉 태기로 부여되는 천운과 조상으로부터 음우받는 덕, 즉 지기로 부여되는 지운(地運)이 있다. 양덕(陽德)이 란 나의 노력의 소산으로 내재 되어 흐르다가 자신이 인지할 수 없을 때 예상 밖으로 돌아오는 간접적인 선택의 결과이니 득운(得運)이라 하겠다. 아무쪼록 늘 기도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상을 잘 섬기는 일이 음덕을 받는 일이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양덕을 받는 득운 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운명을 개척하고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만남(因緣)과 관심(表現)과 사랑(實踐)이다. 그런 데 이 만남과 관심과 사랑의 본체, 바야흐로 근원적이고도 원초적인 본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법(法)의 근원이요 운명 창조의 발원지이며 제행의 출발점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다양하여 무량지수의 형상을 가진 다름 아닌 바로 마음(心)인 것이다. 인연(만남)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 면 관심이 없고 관심이 없으면 존재나 대상에 대한 사랑이 잉태되지 아니하고 사랑이 분만되지 않으면 운명도 개척 창조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심성과 품성 즉 품격으로 표출 구성된다.
심성(心性)에는 상심과 중심 그리고 하심이 있다. 상심(上心)은 행동의 기본으로 적극적인 마음, 노력하는 마음, 추구하는 마음이고 중심(中心)은 사고의 기본으로 주관이 분명한 마음, 사려가 깊은 마음, 불의와 타협 하지 않는 마음이며 하심(下心)은 사랑의 기본으로 배려하는 마음, 베풀고 봉사하는 마음, 협동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심성은 긍정적으로 표출될 경우이고 부정적으로 표출될 경우는 그 반대가 된다. 이들 심성의 균형적인 개발이 합리적인 사고와 가치 있는 행동, 원만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관건이 될 것이다.
품성(品性=品格)에는 천성과 인성 그리고 지성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철학• 종교 | ||||||
인문환경 | 지성 | |||||
자연환경 | 성 | |||||
천성 | 인 | |||||
| 원 만 |
첫째 천성은 천격으로 본성이며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유전 받은 태성이다. 이 천부적인 천성은 통상 잠재되며 극한 상황에서 표출되고 교육이나 교양으로 수정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잠재기질이다.
둘째 인성은 곧 인격으로 살면서 보고 듣고 접하고 느끼면서 형성되는 학습적 습성으로 생활환경에 따라 변화 되며 일상활동 중에 늘 표출되는 기질이다. 인성을 형성 하는 생활환경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하나는 자연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환경이다.
자연환경 요인이란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사는 곳이 어디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즉 도시냐, 시골이냐, 도시라도 어떤 도시냐, 또 시골이면 산촌이냐, 평야지냐, 해안지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게다가 산촌이라고 해도 강원도 같은 산악이냐 아니면 경상도냐 전라도냐에 따라서 다르고 그 가운데서도 북도와 남도가 다르고, 고을에 따라 다르고, 그 안에서도 지형과 지세에 따라서 또 다르게 영향한다. 말할 것도 없이 지구상의 어디라도 모두 같은 원리로 인격 형성에 적용된다고 본다. 이 이론은 곧 풍수지리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인격 형성에 자연환경만이 독립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자연환경은 초기 인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천성 다음으로 깊숙이 내재 되며 마치 본성과 혼동될 경우도 없지 않다. 흔히들 모 지방 사람들의 기질은 모모하고, 아무 지방 사람들의 기질은 아무하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지역에 따라서 사람들의 기질이 독특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유전적인 차이도 있지만 자연환경의 차이에 기인된 것이며 비록 먼 지방이라 하여도 자연환경이 유사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 비슷한데 그것은 일종의 생태형 집단이 되는 까닭이다.
인격 형성의 또 다른 요인인 인문환경의 주인자는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 등이다. 인문환경의 구성인자가 곧 표출되는 인격의 형성에 영향하는 주인자가 되므로 이것이 성장기의 가정, 학교, 사회환경에 보통사람들이 큰 관심을 가지는 기본 이유가 된다. 그것은 통상 사회관념이 내면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면의 모습으로 상과 벌을 논하고 우열을 정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에 쉽게 매혹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환경요인이 인격 형성의 요체가 되므로 환경을 "제2 의 어머니" 라고도 하는 것이다.
인성의 최고봉은 원만함이다. 원만이란 모가 없고 둥굴어서 상대에게 부담이나 불편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환대받고 칭송받는 인성이다. 뒤집어 보면 개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시ㆍ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원만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끊임없는 추구를 하는 것이 값지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인격의 변천 과정을 시내를 여행하는 바윗돌에 비유한다. 이것은 마치 산기슭의 암벽에서 오랜 풍화작용을 받아 떨어진 돌(=천성만 갖고 갓 태어난 아기)이 계곡을 거쳐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여행하는 것과 같다. 물과 수많은 이웃하는 환경 인자들(모래, 흙, 돌 기타)과 접촉 마찰하면서 모가 없어지고 둥근 차돌이 되듯 인격도야도 그렇게 되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충돌에 깨어져 다시 모가 난 돌이 되는 것처럼 환경에 따라 그렇게 인격도 변화되고 표출되는 무상함을 가지는 것이다.
여하튼 인성은 학습에 의해 형성되는 습성으로 살면서 습득하는 것이니 교육이나 교양을 통하여 비교적 쉽게 교정될 수가 있다.
셋째 지성은 곧 지격으로 천성과 인성이 조화되어 타인에게 풍김으로 영향을 주는 마치 꽃의 향기와 같은 품성이다. 또한 지성은 천성과 인성이 어떻게 조화되느냐에 따라서 무한한 형상을 갖게 될 뿐 아니라 잠재와 표출의 양면성도 갖고 있다. 지성은 상대가 느끼는 부드러움이지만 명확하게 단정하여 평판하기가 쉽지 않다. 대개“그 사람 지성적이더라.”또는“그 사람 매우 지성이 있어 보이더라”의 형태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지성은 한 사람의 종합적이고도 총체적인 가장 외곽적인 품성으로 그 기울기 값은 고정 인자인 천성보다는 변수가 많은 인성의 값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결코 지성이 인성과 동일하거나 그 자체일 수는 없다.
한편, 품성과 심성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합동이거나 대칭되지는 않고 이들은 원초적인 마음인가 하면 또 후발적인 마음이기도 하여 선후가 없으며 그다음에 발하는 것이 행동이요 실천이다.
이상과 같은 논리로 아름다운 심성을 가꾸고 우아한 품성을 길러 합리적이고 조화된 마음을 갖추는 방법, 적극적이면서 분명하고 베풀 줄 아는 원만한 ᄒᆞᆫ 사람인 동시에 창조적인 삶, 가치 있는 삶, 보람된 삶을 사는 방법을 우선 내가 실천하고 나의 자랑스럽고 믿음직한 후손들에게 항상 일깨워 주기 위하여, 그동안 내가 아버지의 실천 철학으로부터 영향받은 것과 내 스스로 경험하고 보고 듣고 배우며 깨우친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원만한 ᄒᆞᆫ 사람이 되자"로 가훈을 제정하는 바이다. (1993년, 2022년 12월 가필)
박애구현과 존재간의 거리모식도
모든 일체의 대좌적 존재는 나라는 절대적 존재를 중심으로 출발하여 동심윤문상으로 일정한 거리 차이에 위치 한다.
※ 모식도의 설명
1 : 자아(자애) 2 : 혈연(가족애)
3 : 지연(사회애) 4 : 학연(사제 및 교우애)
5 : 겨레와 민족(동포애) 6 : 범인류(인류애)
7 : 범생명체(생명애) 8 : 범존재(박애)
따라서 박애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발하며 자학이나 자포자기는 고귀한 삶을 포기하는 것만 아니라 일체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자학이나 자포자기는 소명적으로 태어나고 사명적으로 살아야 할 자기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며 조상과 창조주에 대한 배신이며 가장 큰 죄악임과 동시에 직무유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부터 사랑하여야 한다. 이것은 분명 이기주의와는 다름을 알아야 한다. (1993년)
자연과 사람의 구조적 비교
태초는 어둠이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
먼저 어둠 속에 빛을 내려 생명을 기르는 명암인 해와 달을 만들고 범존재를 조화롭게 하는 기운인 음양 즉 하늘과 땅을 만들어 존재의 터전을 마련한 뒤 생산의 근원인 생명의 자웅 즉 사람과 모든 생명들 만들었다. 그리고 무생명을 포함한 범존재를 만들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니 삼라만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법에 따라 창조된 암과 음과 자 그리고 명(明)과 양(陽)과 웅(雄)은 서로 동일하며 쌍방 간에도 서로 상통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 창조자는 모든 것의 중심인 태극이시다.
태극은 명암과 음양 그리고 자웅이 구별되지 아니하니 명(明)인가 하면 암(暗)이고, 음(陰)인가 하면 양(陽)이며 자(雌)인가 하면 웅(雄)이라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니 곧 전지전능하신 천지창조주라 함이다. 한편, 빛의 모태가 어두움이듯 암과 음과 자(♀)는 명과 양과 웅(♂)의 근원인 모태이다. 성질은 명과 양은 강하고 직선적인데 반해 암과 음은 부드럽고 우회적이며 웅(♂)은 공격적이고 자(♀)는 포용적이다. 범 존재를 조화롭게 하는 기운인 음양의 관계는 명(밝음)을 생산한 암(어둠)이 명을 동반하며 지배하듯 음이 양을 동반지배하며, 자 또한 웅을 동반함과 동시에 지배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원칙을 벗어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명암과 자웅 중의 남녀의 경우이다. 어순에 있어서 암명ㆍ여남이 아니고 명암ㆍ 남녀인 것은 음양과 자웅의 경우와는 반대이다. 생성의 순서에 의하면 바른 어순은 암명ㆍ여남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명암의 경우는 태초의 어두움에서 다음에 빛이 오자 빛의 강함으로 인해 명이 암을 지배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경우이다. 이것을 단순한 습관으로 보기에는 좀 다른 의미가 있다. 태초부터 암이 명을 생산하였던 만큼 실제로는 어두움이 밝음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과학적 실험근거가 있다.
원예학에 있어서 동국(冬菊) 전조재배 시 그전에는 일조가 짧아지는 늦여름 일몰시각부터 조명하여 명의 길이를 길게 하고 암의 길이를 8시간 이내로 짧아지게 하는 방법으로 재배했다. 물론 효과는 있었지만 전조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Night Break 효과"라고 하여 밤 11시∼01시 사이에 약 2시간 정도만 전조하여도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실용화하고 있다. 양계장의 전조 사육의 경우도 밤을 짧게 하고 낮을 길게 하여 사료를 공급하여 산란율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이것을 "장일효과"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단야효과"인 것이다. 낮은 활동이고 밤은 휴식이기 때문에 낮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또한 남녀의 경우도 태초에 어두움이었고 다음에 빛이 온 것처럼 사람을 만들 때, 여자부터 먼저 만들고 남자를 만들었다면 이 말의 논리적 순서는 여남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제는 음양의 창조 순서를 어기고 거꾸로 남자를 먼저 만들고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던 것이다. 이 예외적인 사건으로 인해 서열이 무너짐으로써 남녀 간에 우위를 위한 경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명암, 음양, 남녀≠자웅으로 기초적인 논리적 순서가 상실되었고 세상에는 혼돈과 혼란 그리고 약육강식의 전쟁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도 하나의 원죄로 사료된다.
그러면 성경에 하느님이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였는데 인내천(人乃天)이면 천은 하늘로 창조신임과 동시에 자연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 또한 자연이고 그렇다면 사람이 곧 소우주인 것이다. 자연과 사람의 모습을 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 연 | 사 람 |
1일 12시간 24시간 1년 12개월 24절기 | 늑골 좌우 12개씩 24대 |
1년 365일 | 혈맥 365개소 |
전기 하늘 : + ㆍ 땅 : - | 전기 남:+ㆍ여:― 상반신+ㆍ하반신- / 몸외부+ㆍ몸내부- |
지구 5대양 6대주ㆍ70% 수분 | 인체 5장 6부ㆍ70% 수분 |
지각(지표) | 피부 |
수풀 | 모발과 털 |
지하수 | 혈류(혈관) |
샘물 | 눈물과 땀 |
암반 | 뼈 |
용암 | 골수 |
춘하추동 | 소년ㆍ청년ㆍ장년ㆍ노년 |
기후기상 | 인생사의 제반 갈등 |
◄▪ 월별 계절풍과 시각표와의 관계 ▪► 1月=01時=北東風 2月=02時=東北風 3月=03時=東風 4月=04時=東南風 5月=05時=南東風 6月=06時=南風 7月=07時=南西風 8月=08時=西南風 9月=09時=西風 10月=10時=西北風 11月=11時=北西風 12月=12時=北風 |
◄▪숫자와 사람의 비교▪► 숫자:1, 2, 3, 4, 5, 6, 7, 8, 9, 0ㆍ9수10진/사람·9혈10공 (0과 치부는 무순으로 처음이자 곧 끝이다.) |
(1993년)
가목(家木)과 가화(家花)를 정하다
나는 가훈을 제정하면서 평소 살면서 받은 의미 부여한 가목과 가화도 정하였다. 먼저 가목에 대하여 피력하고자 한다.
가목(家木)은 수양버들로 정했다. 수양버들이나 능수버들은 언제나 가지의 끝이 땅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자라지만 결코 땅에 닿는 일이 없이 하늘을 향해 자란다. 언덕과 같은 높은 곳에서 자라면 가지는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보다도 더 아래로 자라 드리워지지만 분별없이 땅에 닿도록 자라는 일이 없다.
이들 버들은 언제나 아래로 자라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고 위로 자라는 목적을 이루며 또 위로 자라지만 전혀 거만하지 않고 저자세로 항상 겸허하다.
바람이 불면 강하게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면서 어울려 무난하게 적응하고 계절의 첫 신호등으로서 봄 일찍 푸르면서도 가을 늦게까지 푸르름이 남아있으니 드러나되 거만하거나 난하지 않고 오히려 수수하여 소탈하고 서민적이며 대중적이다.
특히 작은 잎으로도 그늘을 짙게 하여 행인에게 한여름 무더위를 가시게 하는 음덕을 베풀면서도 대가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의 고향정서의 소재 중 진달래와 더불어 제일의 대상이기도 한 이 버들의 모습을 본받고자 고교시절부터 지금까지는 나의 나무로 흠모해 왔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의 가목으로 정한다.
다음 가화(家花)는 아카시아꽃으로 정했다. 아카시아 꽃은 숨어 있으나 드러나 보이고 드러나나 화려하지 않고 희나 청승맞지 않고 더러움 타지 않으며 피어도 수수하여 거만하지 않고 어디에나 있어도 천하지 않고 하나이나 더불어 있는 고향산천의 다정다감한 이웃 같은 꽃이다.
아카시아 향은 진하나 독하지 않고 그윽하나 난하지 않고 널리 퍼지나 가볍지 않고 유혹하나 속이지 않는다. 아카시아 향은 매일 함께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아카시아는 꿀도 많이 생산하는데 향이 부드럽고 그윽하여 꿀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으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그처럼 진하고 감미롭고 향기로운 삶, 지성이 가득한 삶이 되도록 느껴 배울만 하다.
또 아카시아 나무는 어릴 적에는 가시가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시가 없어지며 여물어지고 베어서 마르면 매우 단단한 목재가 된다. 갈수록 내면이 좋아지는 생태를 본받을 만하다.
이와 같은 아카시아 나무와 꽃의 내외면 세계를 본받고자 고교 시절부터 지금까지는 나의 꽃으로 사모해 왔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의 가화로 정한다. (1993년 가훈집 중에서)
나의 삶 나의 고향
고향이라고 말하면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부모님이라는 말 다음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부득이하게 고향을 떠나 일본이나 만주, 미국 등지로 떠난 사람들이나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 그리고 해방이 되었지만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통탄할 남북분단에 이어 잔인한 육이오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강제로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이므로 그들에게 고향이란 말은 더없이 그립고 서러운 단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러는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실감을 안고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고향을 생각하기보다는 언제나 신기루 같은, 무릉도원 같은 신천지를 동경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그런 불운들이 지나간 직후 시기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두메산골 같은 깡촌 시골도 아니고 바닷가 어촌도 아닌 산과 들판이 적당하게 어울어져 있는 중간지대로 경상북도 선산군 산동면 적림동(죽리) 266-3번지였다. 지금은 경북 구미시 산동읍 적림리(죽리) 268번지로 바뀌었다.
그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7개월 후인 1954년 2월 28일(음력 정월 스무닷새)이다. 그 당시 한국은 일제강점기 수탈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곧 육이오전쟁을 겪은 직후라서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1980년 이후부터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싹을 틔운 한강의 기적이 탄력이 붙어 오늘날처럼 이렇게 발전하리라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도 못하였다. 농민이 70% 이상 되는 농경국가였지만 어떻게 해서 끼니를 이어갈지 고민해야 하는, 70년대 말까지 이어진 처절한 보릿고개 시대였다. 세계 7대 경제대국이 된 지금의 세대들은 도무지 유추할 수 없는 가난한 나라,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최후진국이었다.
따라서 나의 고향도 크게 다른 바가 없었다. 땔감이 부족하여 산에 초목이 자라지 못하였고 들나물 산나물 심지어 나무껍질까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거나 맹물을 마시며 끼니를 건너뛰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던 때였다. 쌀밥은 일부에게나 있는 것이고 보리밥과 국수라도 배불리 먹으면 큰 행복이었으며 고구마 감자도 호식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던 부모님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금지옥엽 대접을 받으며 쌀밥을 먹으며 유복하게 자랐던 고향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향에서 자랐으나 중학교 시절부터 110여 리 떨어진 대구에서 대학원까지 학업을 하였고 주말이라든가 가고 싶은 마음이 내키는 때면 이내 고향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학창시절에 비록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어도 객지 생활을 한다는 마음은 강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이카시대가 되기 전까지는 객지 생활의 정서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첫 직장을 구해 김해(주촌)로 갔을 적엔 멀리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곧 대구로 돌아와 영업부 직장생활을 할 적에는 출장길에 수시로 잠시나마 들릴 수 있어서 부모님 등과의 소통과 안부를 아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 본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먼 거리에서 살았다. 그랬지만 몸과 마음은 늘 고향을 중심으로 맴을 돌았으며 1998년부터 2013년 벽두까지는 사슴과 비육 한우농장을 겸업 경영하면서 주말마다 방문했지만 일만 하다가 돌아오니 수시로 변해 가는 고향 모습을 인지하는 감각은 많이 둔감했었다.
내 지금까지 70 평생 중, 격동의 세월 55년 동안의 변화는 그 이전 500년간의 변화보다 더 컸다. 공동묘지 아홉산 고개가 주민의 반대를 뿌리치고 골프장으로 바뀌고 구미국가산업단지 1, 2, 3공단에 이어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4공단과 5공단이 우리 면에 들어서면서 고향 산동면은 읍(邑)이 되고 고향의 산야와 전답들은 무리한 도시개발로 잠식되어 아파트촌이 내 농장에서 바라보던 유학산과 천생산의 그 멋진 조망을 막는 병풍처럼 들어서는 등 상전벽해로 크게 탈바꿈을 해갔다. 이것은 짧은 내 생애에 일어난 개벽과 같은 일로 과거 1000년의 변화보다 더 대단한 변화이다.
극심한 가뭄에 산천이 타들어 가던 건천, 그 백사장 좋던 내 고향의 하천은 이미 습지 갈대밭으로 변한 지가 오래되었고 옛 모습은 전혀 없다. 성수동, 백현동, 적림동 큰마(큰마을)와 밤재골 방향은 아직도 옛 모습이 상당히 남아있지만, 면 소재지인 적림리 대부분을 비롯해서 임봉리, 동곡리, 인덕리, 신당리, 도중리 등은 상전벽해로 크게 변해서 지금은 고향에서 나도 점점 낯설어져 이방인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다. 말뚝에 묶인 소처럼 고향이란 말뚝을 중심으로 두고 마음과 몸이 늘 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처럼 고향이 나의 중심축이 된 것은 나의 고향 바라기가 컸던 까닭일 것이다. 젊어서 직장을 따라 객지를 돌다가 중년 이후에는 고향에 정착하여 살고자 마음을 먹기도 했으나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그런 바람은 이루지 못하고 결국 서울과 양평(단월)이 그 대체 무대가 되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좋은 새 이웃을 만나면 뒤늦게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며 오히려 저 사람이 누군가 하며 쳐다보는 이방인 고향보다 더 낫지 아니한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고향이 그리운 것은 나의 추억과 역사가 향기로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부모님을 비롯한 형제 친척 그리고 이웃들의 흔적이 있어 나의 현재와 연결되기 때문에 고향은 늘 내 삶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와 고향을 연결하는 많던 구성요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거나 너무 오래되어 흐릿한 기억 속에 빛바랜 추억이 되니 안타깝고 애석하고 무정한 세월이 야속하기까지 하면서 고향은 다만 마음속에만 간직하게 되는 것 같다.
애착이 강하면 집착하게 되고 마음이 식으면 정도 시들해지듯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언제나 찾아갈 수 있기에 그런지 나의 고향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특별한 애환이나 애수가 없기에 그리움도 없어지는 것 같다. 아니 식어 가는 것 같다. 대저 핍박과 압박의 설움에서 강한 향수가 우러나오듯이 강제당할 때, 빼앗길 때 나와 거리가 멀어질 때 고향이 그리워지는가 싶다. (2022년 12월)
시인·시조시인·정책학박사 月湖, 溢泉 宇澤
경북대학교 대학원 농학석사,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도시계획학석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정책학박사(재난관리전공), (사)한국통일문인협회 이사장,강동문인협회 회장,(사)한국시조협회 이사·한국문인협회 회원 겸 서울강동지부장, 강동예총부회장, 세종문학 자문위원, 저서: 시조집『님의불굴가나의노래되다』,시집 『내 죄 사함을 위하여 내 인간 사랑함을 위하여』,『독도사랑 30년』,『살면서 느끼면서』,『살면서 느끼면서2』, 전기집『고려말 호국충절 불굴당 대은 변안열』, 양친 회고록 겸 가훈집『특별한 한권의 책』 기행문집『原州氏先祖歷史文化探訪記』등 다수
나는 근검한 농업인 부부의 5남매 중 서열은 누나에 이어 2번째지만 맏아들로 태어났다. 올 살배기 라고 초등학교는 일곱 살에 입학했으나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채 철없이 육 년을 보냈던 것 같다. 중학교는 1학년을 마칠 무렵 신병을 앓아 한 해 휴학을 하면서 맥없이 3년을 보냈다.
내가 나름 철이 든 것은 한 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것이 휴학과 고입 재수를 거치면서 오히려 한 해 늦게 자리를 잡은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물론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일기 쓰기와 시작 활동은 고등학교 시절에 와서 삶과 생명에 대한 고뇌가 깊어지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 그리고 여자친구와 펜팔을 하면서 철학적 배경을 깔게 되었다.
그때부터 근면 검소를 생활 바탕으로 한‘성실 인내 절충’을 생활훈으로 정하였고 공부도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삶은 중학교 시절 어머니의 이른 타계로 흔들렸고 고등학교 때까지도 영향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지극한 뒷바라지로 빗나가지 않고 올바르게 자리잡아 타의 모범이 되기 시작했다. 대학과 대학원, 종묘회사에서의 직장생활도 모범이 되었다.
나의 철학에 관해서는 나의 2번째 저서‘특별한 한 권의 책’(2004년 1월 발간) 가훈집에서 자세히 논술하였다.
나의 삶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에 연유하여 중학교 시절 한때 학업을 소홀히 하여 방황했던 것 말고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때로 어려움이 닥쳐왔어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였는데 그 믿음의 근간은 나의 사주팔자였다.
나는 일찍부터 주역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으로부터 알게 된“신의 예정조화론과 개운론”을 모두 신뢰하였다. 현대 과학은 세상 만물의 생성원리가 빅뱅 이론으로 설명지만 나는 음양오행설을 신뢰했었다. 중성자 격인 태극을 중심으로 음과 양의 기운 조화로 만물이 생성되고 오행[ 화(火)·수(水)·목(木)·금(金)·토(土))의 원리로 변화하며 팔괘(하늘·땅·못·불·지진·바람·물·산)의 원리로 세상이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나의 믿음이 주역을 깊이 공부한 사람이 보면 어설플지 모르지만, 그것이 나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의 사주는 말띠(午年)午日午時生 사주팔자는 묻지도 말라고 했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서 자랐다. 즉 나의 당사주는 천복, 천복, 천복 三天福이고 一天孤이다. 여하튼 하는 일마다 더러 실패가 없지는 않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고 대부분 마음 편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외로움은‘군중 속의 고독’처럼 나의 고질병이기도 했다. 일생동안 사주풀이나 신년운세를 보면 양호하였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삼재 시기의 어려움도 최악의 불운은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신통한 것은 고등학교시절 한 짚시 여인이 주인집 할머니를 따라 나의 자취방 앞으로 왔는데 끄때 내 미래에 대해 주문한 말이 수십 년이 지나서 그대로 맞은 것이 기막힌 일이었다. 생년월일시 외에는 다른 정보를 준 일도 없는데 그대로 맞았다. 맏이지만 맏이 노릇을 못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따라 타관으로 돌았기 때문에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직접 모시지 못했고 동생이 가까이서 보살폈다. 그리고 훗날 한 자식이 나에게 불복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맞았다.
그러면 사주팔자가 좋다고 해서 즉 신의 예정조화론을 믿고 요행을 바라며 살았는가?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언제나 근면한 자세로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생활했으며 사치와 낭비를 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기본으로 하였고 결단의 행동은 상식과 양심적인 판단에 따랐다.
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경우도 그냥 놀면 심심해서 무슨 일이든지 만들어서 해야 하는 근면한 성품이라 주경야독하는 자세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풍수지리에도 관심이 깊었다. 풍수지리는 미신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바람과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주어진 땅의 이득를 구하는 자연과학이다. 그것을 능히 헤아린다면 재해를 예방할 수 있다. 그래서 안전하고 포근함과 안락함을 주는 자리가 곧 재해가 없는 곳이 명당名堂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나는 사주팔자(신의 예정조화론)를 믿으며 일을 가려 선택했고 어려움이 다가올 때는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였다. 즉 운명을 개척하는 개운론으로 삶을 바꾸는 노력을 해왔는데 개운론의 저변에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이 있었다. 그것으로부터 현명함을 깨치고 그것으로부터 신중하게 행동함을 얻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어떤 사람은 죽으라고 열심히 일했는데 하는 일마다 망가지고 되는 일이 없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른바 운때가 맞아 겉보기에 별로 고통받거나 힘들이지 않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여러 가지 영향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최대 인자가 유전적이고 천부적인 사주팔자와 관련이 있지는 않겠는가.
그렇다. 사주팔자는 천부적인 능력 즉 유전적인 소양이다. 이른바 부모 찬스 즉 금수저도 그 인자가 되겠지만 후천적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유전적 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평등을 주장하면 그 사회는 하향 평준화가 되고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가 백을 구한다는 말처럼 사주팔자가 흡족하지 않으면 운수 없는 몸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개운론에 치중하여 살아야 한다. 비록 하늘이 돕지 않은 자도 허욕의 늪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면 대성은 못 해도 웬만큼은 성공한다는 것이다.
농가월령가 12월령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 - 농사는 믿는 것이 내 몸에 달렸느니 절기도 진퇴 있고 연사도 풍흉 있어 수한 풍박 잠시 재앙 없다고야 하랴마는 극진히 힘을 들여 가솔이 일심하면 아무리 살년에도 아사는 면하느니 - - -〉 그렇다. 인생 농사도 농작물 농사와 그 원리가 다르지 않다.
나는 이제 황혼의 나이 종심에 이르러 돌아본즉 실패한 일이나 미처 살피지 못해 발생한 가슴 아픈 일이 없지는 않지만 평생을 가늠하여 평균해 본다면 나름대로 아주 열심히 살았으니 대단한 후회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극복할 수 없이, 연습할 겨를도 없이 너무나 빨리 흘러 가버린 일생, 어느새 늙어진 생명에 대한 애착과 동시에 할 일과 싶은 일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세모)
나의 삶 나의 철학 2
나의 삶 나의 철학 1의 이야기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1993년에 제정한 나의 가훈집에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그 대략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인생 목표는‘모든 여유 있는 삶의 창조’이고 좌우명은 초기 청소년시절부터 청년기까지는 "誠實, 忍耐, 折衷" 이었으며 결혼 이후부터는 ①하느님을 생각하고 늘 기도한다 ②아버님의 노고와 건강을 생각한다 ③어머님의 유지를 생각한다 ④가정의 어려움을 생각한다 ⑤독도와 황금의 잠언을 생각한다 ⑥나의 인생목표를 생각한다 ⑦이웃과 조국을 생각한다 등 7개 항목으로 정하고 실천하며 노력하였으나 솔직히 좋은 점수를 얻기는 어렵다.
한편, 청년기 이후 나의 생활훈은‘탓은 나의 탓이고 덕은 남의 덕이다’로 정하고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는 노력을 하였다.
이와 같은 내 지난 시절의 생활토대와 아버지의 생활철학을 바탕으로 가훈을 제정하였다.
가훈은 "원만한 ᄒᆞᆫ 사람이 되자"로 정하였다.
가훈 제정의 경과는 1970年代는 필요성 인식과 기초적인 발상을 하였고 1980年代는 구체적으로 철학적인 배경을 설정하고 논리화하기 시작하였으며 1993年 한여름에 마침내 완성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2003年 초여름에 극히 일부를 가필과 정정하였다.
가훈의 바른 실천을 위하여 3대 기본강령과 8대 실천강령을 두었는데 기본강령은 ①우아한 품성의 배양 ②아름다운 심성의 함양 ③원만한 인간성 추구이고 8대 실천강령은 ①도덕의 완성 ②철학의 완성 ③종교의 완성 ④배움의 완성 ⑤명예의 완성 ⑥생활의 완성 ⑦일의 완성 ⑧가정과 가문의 완성이다.
가훈제정의 철학적 배경은 운명론과 개운론, 즉 사주팔자론과 운명개척론이 바탕이 되었다. 기본강령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이고 경우 바른 품성과 심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서술한 가훈 제정의 철학적 배경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서 간단하게 부연해 본다.
품성(品性=品格)에는 천성과 인성 그리고 지성이 있다.
천성은 가장 내부에 위치하며 인성으로 포위되어 있다.
인성 중에도 자연환경에 의해 형성된 인성이 인문환경에 의해 형성된 인성보다 더 깊숙이 내재 되어 얼핏 보기에는 천성과 같아 보인다.
지성은 가장 외곽에 위치하며, 천성과 인성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꽃의 향기와 같은 품성으로 철학과 종교에 의해 승화되면 정점을 이룬다. 이들 품성의 합리적인 조화가 원만함을 이루는 첩경이 된다.
심성(心性)에는 상심과 중심 그리고 하심이 있다. 상심(上心)은 행동의 기본으로 적극적인 마음, 노력하는 마음, 추구하는 마음이고 중심(中心)은 사고의 기본으로 주관이 분명한 마음, 사려가 깊은 마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마음이며 하심(下心)은 사랑의 기본으로 배려하는 마음, 베풀고 봉사하는 마음, 협동하는 마음이다. 이들 심성의 균형적인 개발이 합리적인 사고와 가치 있는 행동, 원만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관건이 될 것이다.
나의 가훈제정의 철학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이 모든 생명의 당연함이요 생명 체의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에게 똑같이 한정된 현상이지만 인간이기에 주어진 대로 살 것이 아니라 마땅히 고민하고 갈등하고 개척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태어나서 살고 죽을 때까지의 숱한 인생사 가운데 나 개인의 원인과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채로 이루어지는 것이 꼭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곧 태어남이다. 태어남(즉 태여남)은 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변동될 수 없는 일로 숙명이니 곧 소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인생사는 선택되는 인연으로 개척 변동될 수 있는 운명이니 즉 사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명적인 숙명은 수임 사항으로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이며 사명적인 운명은 선택사항으로 피함이 가능한 상대적인 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남은 필연적인 만남이라 큰 축복인 것이요 죽음은 반 선택적인 이별이라 큰 슬픔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긍지를 가지고 반드시 태어나야 했던 내가 죽음에는 왜 하필이면 “나”인가 하는 마음으로 참담하게도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는 것은 나 자신의 관리 불찰임과 동시에 생명체의 변함없는 순리인 것이다.
예로부터“그 사람 팔자가 그렇다지.” 또는“그 사람 운명이 그런 게지.”라고 하는 것은 팔자와 운명을 동일시 한 것이고 “그 사람 타고난 팔자가 그런가 보지.”라고 하는 것은 팔자와 숙명을 동일시 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팔자는 숙명과 운명을 포괄한 포함의 관계로 팔자가 곧 인생 전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그 사람 운명이 그렇지 타고난 운명이 그런 게야”라고 하는 것은 운명과 숙명을 혼동한 표현이다. 한편 사주팔자란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니 곧 한 인생의 존재를 뜻하는데 비록 그것이 그 존재의 숙명과 운명을 예감할지언정 이미 예정된 삶의 모양새나 부동의 틀은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숙명과 운명을 한자어로 풀어보면 宿命이란 잠자는 명, 즉 내재 되고 잠재된 명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명이니 곧 천명이요 소명인 것이다.
한편, 운명(運命)은 일어나는 명, 즉 움직이는 명으로 후천적으로 개척되고 변화되는 명이니 곧 인명(=지명)이요 사명인 것이다. 운명을 팔자로 본 격언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남의 팔자를 알아야 나의 팔자를 안다.”또“남의 팔자는 보기 나름이고 나의 팔자는 마음 먹기 나름이다.” 이것은 모두 운명의 개척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인명은 재천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자위하고 타의 고통을 위로하고자 하는 지극히 소극적인 방편어에 지나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주 행운과 불운을 논한다. 운에도 음의 덕과 양의 덕이 있다. 음덕(陰德)에는 하늘로부터 받는 천기, 즉 태기로 부여되는 천운과 조상으로부터 음우받는 덕, 즉 지기로 부여되는 지운(地運)이 있다. 양덕(陽德)이 란 나의 노력의 소산으로 내재 되어 흐르다가 자신이 인지할 수 없을 때 예상 밖으로 돌아오는 간접적인 선택의 결과이니 득운(得運)이라 하겠다. 아무쪼록 늘 기도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상을 잘 섬기는 일이 음덕을 받는 일이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양덕을 받는 득운 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운명을 개척하고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만남(因緣)과 관심(表現)과 사랑(實踐)이다. 그런 데 이 만남과 관심과 사랑의 본체, 바야흐로 근원적이고도 원초적인 본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법(法)의 근원이요 운명 창조의 발원지이며 제행의 출발점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다양하여 무량지수의 형상을 가진 다름 아닌 바로 마음(心)인 것이다. 인연(만남)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 면 관심이 없고 관심이 없으면 존재나 대상에 대한 사랑이 잉태되지 아니하고 사랑이 분만되지 않으면 운명도 개척 창조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심성과 품성 즉 품격으로 표출 구성된다.
심성(心性)에는 상심과 중심 그리고 하심이 있다. 상심(上心)은 행동의 기본으로 적극적인 마음, 노력하는 마음, 추구하는 마음이고 중심(中心)은 사고의 기본으로 주관이 분명한 마음, 사려가 깊은 마음, 불의와 타협 하지 않는 마음이며 하심(下心)은 사랑의 기본으로 배려하는 마음, 베풀고 봉사하는 마음, 협동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심성은 긍정적으로 표출될 경우이고 부정적으로 표출될 경우는 그 반대가 된다. 이들 심성의 균형적인 개발이 합리적인 사고와 가치 있는 행동, 원만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관건이 될 것이다.
품성(品性=品格)에는 천성과 인성 그리고 지성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철학• 종교 | ||||||
인문환경 | 지성 | |||||
자연환경 | 성 | |||||
천성 | 인 | |||||
| 원 만 |
첫째 천성은 천격으로 본성이며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유전 받은 태성이다. 이 천부적인 천성은 통상 잠재되며 극한 상황에서 표출되고 교육이나 교양으로 수정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잠재기질이다.
둘째 인성은 곧 인격으로 살면서 보고 듣고 접하고 느끼면서 형성되는 학습적 습성으로 생활환경에 따라 변화 되며 일상활동 중에 늘 표출되는 기질이다. 인성을 형성 하는 생활환경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하나는 자연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환경이다.
자연환경 요인이란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사는 곳이 어디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즉 도시냐, 시골이냐, 도시라도 어떤 도시냐, 또 시골이면 산촌이냐, 평야지냐, 해안지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게다가 산촌이라고 해도 강원도 같은 산악이냐 아니면 경상도냐 전라도냐에 따라서 다르고 그 가운데서도 북도와 남도가 다르고, 고을에 따라 다르고, 그 안에서도 지형과 지세에 따라서 또 다르게 영향한다. 말할 것도 없이 지구상의 어디라도 모두 같은 원리로 인격 형성에 적용된다고 본다. 이 이론은 곧 풍수지리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인격 형성에 자연환경만이 독립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자연환경은 초기 인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천성 다음으로 깊숙이 내재 되며 마치 본성과 혼동될 경우도 없지 않다. 흔히들 모 지방 사람들의 기질은 모모하고, 아무 지방 사람들의 기질은 아무하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지역에 따라서 사람들의 기질이 독특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유전적인 차이도 있지만 자연환경의 차이에 기인된 것이며 비록 먼 지방이라 하여도 자연환경이 유사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 비슷한데 그것은 일종의 생태형 집단이 되는 까닭이다.
인격 형성의 또 다른 요인인 인문환경의 주인자는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 등이다. 인문환경의 구성인자가 곧 표출되는 인격의 형성에 영향하는 주인자가 되므로 이것이 성장기의 가정, 학교, 사회환경에 보통사람들이 큰 관심을 가지는 기본 이유가 된다. 그것은 통상 사회관념이 내면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면의 모습으로 상과 벌을 논하고 우열을 정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에 쉽게 매혹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환경요인이 인격 형성의 요체가 되므로 환경을 "제2 의 어머니" 라고도 하는 것이다.
인성의 최고봉은 원만함이다. 원만이란 모가 없고 둥굴어서 상대에게 부담이나 불편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환대받고 칭송받는 인성이다. 뒤집어 보면 개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시ㆍ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원만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끊임없는 추구를 하는 것이 값지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인격의 변천 과정을 시내를 여행하는 바윗돌에 비유한다. 이것은 마치 산기슭의 암벽에서 오랜 풍화작용을 받아 떨어진 돌(=천성만 갖고 갓 태어난 아기)이 계곡을 거쳐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여행하는 것과 같다. 물과 수많은 이웃하는 환경 인자들(모래, 흙, 돌 기타)과 접촉 마찰하면서 모가 없어지고 둥근 차돌이 되듯 인격도야도 그렇게 되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충돌에 깨어져 다시 모가 난 돌이 되는 것처럼 환경에 따라 그렇게 인격도 변화되고 표출되는 무상함을 가지는 것이다.
여하튼 인성은 학습에 의해 형성되는 습성으로 살면서 습득하는 것이니 교육이나 교양을 통하여 비교적 쉽게 교정될 수가 있다.
셋째 지성은 곧 지격으로 천성과 인성이 조화되어 타인에게 풍김으로 영향을 주는 마치 꽃의 향기와 같은 품성이다. 또한 지성은 천성과 인성이 어떻게 조화되느냐에 따라서 무한한 형상을 갖게 될 뿐 아니라 잠재와 표출의 양면성도 갖고 있다. 지성은 상대가 느끼는 부드러움이지만 명확하게 단정하여 평판하기가 쉽지 않다. 대개“그 사람 지성적이더라.”또는“그 사람 매우 지성이 있어 보이더라”의 형태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지성은 한 사람의 종합적이고도 총체적인 가장 외곽적인 품성으로 그 기울기 값은 고정 인자인 천성보다는 변수가 많은 인성의 값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결코 지성이 인성과 동일하거나 그 자체일 수는 없다.
한편, 품성과 심성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합동이거나 대칭되지는 않고 이들은 원초적인 마음인가 하면 또 후발적인 마음이기도 하여 선후가 없으며 그다음에 발하는 것이 행동이요 실천이다.
이상과 같은 논리로 아름다운 심성을 가꾸고 우아한 품성을 길러 합리적이고 조화된 마음을 갖추는 방법, 적극적이면서 분명하고 베풀 줄 아는 원만한 ᄒᆞᆫ 사람인 동시에 창조적인 삶, 가치 있는 삶, 보람된 삶을 사는 방법을 우선 내가 실천하고 나의 자랑스럽고 믿음직한 후손들에게 항상 일깨워 주기 위하여, 그동안 내가 아버지의 실천 철학으로부터 영향받은 것과 내 스스로 경험하고 보고 듣고 배우며 깨우친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원만한 ᄒᆞᆫ 사람이 되자"로 가훈을 제정하는 바이다. (1993년, 2022년 12월 가필)
박애구현과 존재간의 거리모식도
모든 일체의 대좌적 존재는 나라는 절대적 존재를 중심으로 출발하여 동심윤문상으로 일정한 거리 차이에 위치 한다.
※ 모식도의 설명
1 : 자아(자애) 2 : 혈연(가족애)
3 : 지연(사회애) 4 : 학연(사제 및 교우애)
5 : 겨레와 민족(동포애) 6 : 범인류(인류애)
7 : 범생명체(생명애) 8 : 범존재(박애)
따라서 박애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발하며 자학이나 자포자기는 고귀한 삶을 포기하는 것만 아니라 일체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자학이나 자포자기는 소명적으로 태어나고 사명적으로 살아야 할 자기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며 조상과 창조주에 대한 배신이며 가장 큰 죄악임과 동시에 직무유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부터 사랑하여야 한다. 이것은 분명 이기주의와는 다름을 알아야 한다. (1993년)
자연과 사람의 구조적 비교
태초는 어둠이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
먼저 어둠 속에 빛을 내려 생명을 기르는 명암인 해와 달을 만들고 범존재를 조화롭게 하는 기운인 음양 즉 하늘과 땅을 만들어 존재의 터전을 마련한 뒤 생산의 근원인 생명의 자웅 즉 사람과 모든 생명들 만들었다. 그리고 무생명을 포함한 범존재를 만들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니 삼라만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법에 따라 창조된 암과 음과 자 그리고 명(明)과 양(陽)과 웅(雄)은 서로 동일하며 쌍방 간에도 서로 상통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 창조자는 모든 것의 중심인 태극이시다.
태극은 명암과 음양 그리고 자웅이 구별되지 아니하니 명(明)인가 하면 암(暗)이고, 음(陰)인가 하면 양(陽)이며 자(雌)인가 하면 웅(雄)이라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니 곧 전지전능하신 천지창조주라 함이다. 한편, 빛의 모태가 어두움이듯 암과 음과 자(♀)는 명과 양과 웅(♂)의 근원인 모태이다. 성질은 명과 양은 강하고 직선적인데 반해 암과 음은 부드럽고 우회적이며 웅(♂)은 공격적이고 자(♀)는 포용적이다. 범 존재를 조화롭게 하는 기운인 음양의 관계는 명(밝음)을 생산한 암(어둠)이 명을 동반하며 지배하듯 음이 양을 동반지배하며, 자 또한 웅을 동반함과 동시에 지배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원칙을 벗어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명암과 자웅 중의 남녀의 경우이다. 어순에 있어서 암명ㆍ여남이 아니고 명암ㆍ 남녀인 것은 음양과 자웅의 경우와는 반대이다. 생성의 순서에 의하면 바른 어순은 암명ㆍ여남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명암의 경우는 태초의 어두움에서 다음에 빛이 오자 빛의 강함으로 인해 명이 암을 지배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경우이다. 이것을 단순한 습관으로 보기에는 좀 다른 의미가 있다. 태초부터 암이 명을 생산하였던 만큼 실제로는 어두움이 밝음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과학적 실험근거가 있다.
원예학에 있어서 동국(冬菊) 전조재배 시 그전에는 일조가 짧아지는 늦여름 일몰시각부터 조명하여 명의 길이를 길게 하고 암의 길이를 8시간 이내로 짧아지게 하는 방법으로 재배했다. 물론 효과는 있었지만 전조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Night Break 효과"라고 하여 밤 11시∼01시 사이에 약 2시간 정도만 전조하여도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실용화하고 있다. 양계장의 전조 사육의 경우도 밤을 짧게 하고 낮을 길게 하여 사료를 공급하여 산란율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이것을 "장일효과"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단야효과"인 것이다. 낮은 활동이고 밤은 휴식이기 때문에 낮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또한 남녀의 경우도 태초에 어두움이었고 다음에 빛이 온 것처럼 사람을 만들 때, 여자부터 먼저 만들고 남자를 만들었다면 이 말의 논리적 순서는 여남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제는 음양의 창조 순서를 어기고 거꾸로 남자를 먼저 만들고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던 것이다. 이 예외적인 사건으로 인해 서열이 무너짐으로써 남녀 간에 우위를 위한 경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명암, 음양, 남녀≠자웅으로 기초적인 논리적 순서가 상실되었고 세상에는 혼돈과 혼란 그리고 약육강식의 전쟁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도 하나의 원죄로 사료된다.
그러면 성경에 하느님이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였는데 인내천(人乃天)이면 천은 하늘로 창조신임과 동시에 자연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 또한 자연이고 그렇다면 사람이 곧 소우주인 것이다. 자연과 사람의 모습을 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 연 | 사 람 |
1일 12시간 24시간 1년 12개월 24절기 | 늑골 좌우 12개씩 24대 |
1년 365일 | 혈맥 365개소 |
전기 하늘 : + ㆍ 땅 : - | 전기 남:+ㆍ여:― 상반신+ㆍ하반신- / 몸외부+ㆍ몸내부- |
지구 5대양 6대주ㆍ70% 수분 | 인체 5장 6부ㆍ70% 수분 |
지각(지표) | 피부 |
수풀 | 모발과 털 |
지하수 | 혈류(혈관) |
샘물 | 눈물과 땀 |
암반 | 뼈 |
용암 | 골수 |
춘하추동 | 소년ㆍ청년ㆍ장년ㆍ노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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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가목(家木)과 가화(家花)를 정하다
나는 가훈을 제정하면서 평소 살면서 받은 의미 부여한 가목과 가화도 정하였다. 먼저 가목에 대하여 피력하고자 한다.
가목(家木)은 수양버들로 정했다. 수양버들이나 능수버들은 언제나 가지의 끝이 땅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자라지만 결코 땅에 닿는 일이 없이 하늘을 향해 자란다. 언덕과 같은 높은 곳에서 자라면 가지는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보다도 더 아래로 자라 드리워지지만 분별없이 땅에 닿도록 자라는 일이 없다.
이들 버들은 언제나 아래로 자라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고 위로 자라는 목적을 이루며 또 위로 자라지만 전혀 거만하지 않고 저자세로 항상 겸허하다.
바람이 불면 강하게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면서 어울려 무난하게 적응하고 계절의 첫 신호등으로서 봄 일찍 푸르면서도 가을 늦게까지 푸르름이 남아있으니 드러나되 거만하거나 난하지 않고 오히려 수수하여 소탈하고 서민적이며 대중적이다.
특히 작은 잎으로도 그늘을 짙게 하여 행인에게 한여름 무더위를 가시게 하는 음덕을 베풀면서도 대가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의 고향정서의 소재 중 진달래와 더불어 제일의 대상이기도 한 이 버들의 모습을 본받고자 고교시절부터 지금까지는 나의 나무로 흠모해 왔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의 가목으로 정한다.
다음 가화(家花)는 아카시아꽃으로 정했다. 아카시아 꽃은 숨어 있으나 드러나 보이고 드러나나 화려하지 않고 희나 청승맞지 않고 더러움 타지 않으며 피어도 수수하여 거만하지 않고 어디에나 있어도 천하지 않고 하나이나 더불어 있는 고향산천의 다정다감한 이웃 같은 꽃이다.
아카시아 향은 진하나 독하지 않고 그윽하나 난하지 않고 널리 퍼지나 가볍지 않고 유혹하나 속이지 않는다. 아카시아 향은 매일 함께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아카시아는 꿀도 많이 생산하는데 향이 부드럽고 그윽하여 꿀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으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그처럼 진하고 감미롭고 향기로운 삶, 지성이 가득한 삶이 되도록 느껴 배울만 하다.
또 아카시아 나무는 어릴 적에는 가시가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시가 없어지며 여물어지고 베어서 마르면 매우 단단한 목재가 된다. 갈수록 내면이 좋아지는 생태를 본받을 만하다.
이와 같은 아카시아 나무와 꽃의 내외면 세계를 본받고자 고교 시절부터 지금까지는 나의 꽃으로 사모해 왔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의 가화로 정한다. (1993년 가훈집 중에서)
나의 삶 나의 고향
고향이라고 말하면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부모님이라는 말 다음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부득이하게 고향을 떠나 일본이나 만주, 미국 등지로 떠난 사람들이나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 그리고 해방이 되었지만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통탄할 남북분단에 이어 잔인한 육이오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강제로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이므로 그들에게 고향이란 말은 더없이 그립고 서러운 단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러는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실감을 안고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고향을 생각하기보다는 언제나 신기루 같은, 무릉도원 같은 신천지를 동경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그런 불운들이 지나간 직후 시기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두메산골 같은 깡촌 시골도 아니고 바닷가 어촌도 아닌 산과 들판이 적당하게 어울어져 있는 중간지대로 경상북도 선산군 산동면 적림동(죽리) 266-3번지였다. 지금은 경북 구미시 산동읍 적림리(죽리) 268번지로 바뀌었다.
그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7개월 후인 1954년 2월 28일(음력 정월 스무닷새)이다. 그 당시 한국은 일제강점기 수탈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곧 육이오전쟁을 겪은 직후라서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1980년 이후부터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싹을 틔운 한강의 기적이 탄력이 붙어 오늘날처럼 이렇게 발전하리라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하지도 못하였다. 농민이 70% 이상 되는 농경국가였지만 어떻게 해서 끼니를 이어갈지 고민해야 하는, 70년대 말까지 이어진 처절한 보릿고개 시대였다. 세계 7대 경제대국이 된 지금의 세대들은 도무지 유추할 수 없는 가난한 나라,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최후진국이었다.
따라서 나의 고향도 크게 다른 바가 없었다. 땔감이 부족하여 산에 초목이 자라지 못하였고 들나물 산나물 심지어 나무껍질까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거나 맹물을 마시며 끼니를 건너뛰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던 때였다. 쌀밥은 일부에게나 있는 것이고 보리밥과 국수라도 배불리 먹으면 큰 행복이었으며 고구마 감자도 호식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던 부모님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금지옥엽 대접을 받으며 쌀밥을 먹으며 유복하게 자랐던 고향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향에서 자랐으나 중학교 시절부터 110여 리 떨어진 대구에서 대학원까지 학업을 하였고 주말이라든가 가고 싶은 마음이 내키는 때면 이내 고향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학창시절에 비록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어도 객지 생활을 한다는 마음은 강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이카시대가 되기 전까지는 객지 생활의 정서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첫 직장을 구해 김해(주촌)로 갔을 적엔 멀리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곧 대구로 돌아와 영업부 직장생활을 할 적에는 출장길에 수시로 잠시나마 들릴 수 있어서 부모님 등과의 소통과 안부를 아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 본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먼 거리에서 살았다. 그랬지만 몸과 마음은 늘 고향을 중심으로 맴을 돌았으며 1998년부터 2013년 벽두까지는 사슴과 비육 한우농장을 겸업 경영하면서 주말마다 방문했지만 일만 하다가 돌아오니 수시로 변해 가는 고향 모습을 인지하는 감각은 많이 둔감했었다.
내 지금까지 70 평생 중, 격동의 세월 55년 동안의 변화는 그 이전 500년간의 변화보다 더 컸다. 공동묘지 아홉산 고개가 주민의 반대를 뿌리치고 골프장으로 바뀌고 구미국가산업단지 1, 2, 3공단에 이어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4공단과 5공단이 우리 면에 들어서면서 고향 산동면은 읍(邑)이 되고 고향의 산야와 전답들은 무리한 도시개발로 잠식되어 아파트촌이 내 농장에서 바라보던 유학산과 천생산의 그 멋진 조망을 막는 병풍처럼 들어서는 등 상전벽해로 크게 탈바꿈을 해갔다. 이것은 짧은 내 생애에 일어난 개벽과 같은 일로 과거 1000년의 변화보다 더 대단한 변화이다.
극심한 가뭄에 산천이 타들어 가던 건천, 그 백사장 좋던 내 고향의 하천은 이미 습지 갈대밭으로 변한 지가 오래되었고 옛 모습은 전혀 없다. 성수동, 백현동, 적림동 큰마(큰마을)와 밤재골 방향은 아직도 옛 모습이 상당히 남아있지만, 면 소재지인 적림리 대부분을 비롯해서 임봉리, 동곡리, 인덕리, 신당리, 도중리 등은 상전벽해로 크게 변해서 지금은 고향에서 나도 점점 낯설어져 이방인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다. 말뚝에 묶인 소처럼 고향이란 말뚝을 중심으로 두고 마음과 몸이 늘 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처럼 고향이 나의 중심축이 된 것은 나의 고향 바라기가 컸던 까닭일 것이다. 젊어서 직장을 따라 객지를 돌다가 중년 이후에는 고향에 정착하여 살고자 마음을 먹기도 했으나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그런 바람은 이루지 못하고 결국 서울과 양평(단월)이 그 대체 무대가 되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좋은 새 이웃을 만나면 뒤늦게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며 오히려 저 사람이 누군가 하며 쳐다보는 이방인 고향보다 더 낫지 아니한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고향이 그리운 것은 나의 추억과 역사가 향기로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부모님을 비롯한 형제 친척 그리고 이웃들의 흔적이 있어 나의 현재와 연결되기 때문에 고향은 늘 내 삶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와 고향을 연결하는 많던 구성요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거나 너무 오래되어 흐릿한 기억 속에 빛바랜 추억이 되니 안타깝고 애석하고 무정한 세월이 야속하기까지 하면서 고향은 다만 마음속에만 간직하게 되는 것 같다.
애착이 강하면 집착하게 되고 마음이 식으면 정도 시들해지듯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언제나 찾아갈 수 있기에 그런지 나의 고향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특별한 애환이나 애수가 없기에 그리움도 없어지는 것 같다. 아니 식어 가는 것 같다. 대저 핍박과 압박의 설움에서 강한 향수가 우러나오듯이 강제당할 때, 빼앗길 때 나와 거리가 멀어질 때 고향이 그리워지는가 싶다. (2022년 12월)
시인·시조시인·정책학박사 月湖, 溢泉 宇澤
경북대학교 대학원 농학석사,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도시계획학석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정책학박사(재난관리전공), (사)한국통일문인협회 이사장,강동문인협회 회장,(사)한국시조협회 이사·한국문인협회 회원 겸 서울강동지부장, 강동예총부회장, 세종문학 자문위원, 저서: 시조집『님의불굴가나의노래되다』,시집 『내 죄 사함을 위하여 내 인간 사랑함을 위하여』,『독도사랑 30년』,『살면서 느끼면서』,『살면서 느끼면서2』, 전기집『고려말 호국충절 불굴당 대은 변안열』, 양친 회고록 겸 가훈집『특별한 한권의 책』 기행문집『原州氏先祖歷史文化探訪記』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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