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가 " 태산이 높다하되 ··· ”의 배경이 평창 삼방산인 이유
봉래 양사언은 출생부터 성장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양사언은 어려서 외숙모 유씨 밑에서 성장하였다.
부친과 모친이 같이 사망하였고 6년간 시묘하였다. 1555 함흥에 부임하자마자 칭병으로 사직하였다.
1558 대제학 정사룡과 신사헌의 내통문제에 관련하여 추국을 당하기도 하였다. 관료를 들어와서는 평창군수로 3년, 강릉부사 7년, 안변부사 4년을 지낸 것 외에는 수시로 칭병사직과 복직을 번복한다. 안변부사 재직 당시 1581년 7월에 지릉에 화재 사건에 책임을 지어 유배되었고 1584년 귀로 길에 사망하였다.
양사언은 평창고을 수령을 끝으로 1964년 이후부터는 이전과는 구별되는 삶을 사는데, 유자(孺子)의 길인 현실정치에서 거리를 두고 선도(仙道)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문인이고 서예가이다. 태산가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국민시조로 국민에게 깊게 각인되어 있는 시조이고 시조창으로도 널리 부르고 있다. 태산가는 무형의 가치가 매우 크다. 따라서 양사언의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의 배경이 평창이라고 가설을 세우고 입증하려고 하였다.
한 인간의 가치체계 형성과 환경에 대한 태도는 시공간에서 무수히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기에 양사언이 살았던 시대에 정치 사상적, 사회문화적, 교류관계를 살펴보았다. 이어 태산가 배경지 평창의 추론적 요소로 ①양사언이 태산가의 지은이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②조선시대 ‘내륙의 독도’ 평창군 입지의 특성과 여건의 분석, ③열악했던 평창의 군세(郡勢), ④조선개국 직후 종묘와 함께 조성했던 국구사우, ⑤잇단 재해(災害)와 무능한 수령들, ⑥평창 백성의 처절(悽絶)한 삶에 대한 연민(憐憫), ⑦평창의 미륵사상 전래 등을 삼았다. 이를 통하여 평창이 태산가의 배경이라는 접근점을 찾아보았다.
첫째, 봉래 양사언이 마지막으로 현실정치에서 강한 불꽃을 피웠던 고을이 바로 평창이기 때문이다.
양사언은 눈물을 흘리며, 명종에게 올린 상소를 통해 10년간 조․용․조의 부담을 없게 하였다. 상소를 올린 다음해인 1562년 4월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창 고을에 서쪽에서 태풍이 크게 불어 모래와 돌멩이가 날고 수목이 뽑히고 부러졌으며 지붕이 모두 날아갔다. 백성에 대한 양사언의 안타까움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절체절명에서 현장에 나가서 백성들을 위무했다.
연이어 닥쳐오는 난관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근면과 권학을 불러일으켜야 했고 백성들에게 힘을 북돋아 줘야만했다. 시조 ‘태산가’는
평창 고을 백성의 처지에 맞는 시조였다.
둘째, 봉래 양사언은 평창에서 겪었던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상과 중앙정치에서 큰 회의를 느꼈고 절망했기에, 평창 수령의 직위를 마지막으로 유교라는 정신세계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셋째, 평창은 목조 처가의 고을이다. 조정에서도 관심이 큰 고을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궁핍하여 애가 탔을 것이고 탈피하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우렸다. 관아도 매우 좁아 작은 고을이었기에 백성들의 생활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었기에 백성들의 애환을 몸소 느껴 잘 알 수 있었으며 애처로움이 각별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한 가지로 태산가를 지어 읊었을 것이다.
넷째, 거문고를 봉래금(蓬萊琴)이라 부르기도 했던 만큼 양사언은 음악에 대한 이론이 해박할 뿐만 아니라 연주에도 아주 탁월했다.
그는 현금으로 연주하며 시조를 읊어 고단함을 위안으로 승화시켰다. 이때 지은 시조가 태산가 였을 것이다.
평창 백성들의 곤궁한 삶에 대한 감정의 표현을 보면, “주민들은 모두 섶을 엮어 입구를 가린 암굴에서 짐승처럼 거쳐하며 비탈진 밭을 경작하며 근근이 수확하면서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은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를 않습니다.”했었다. 평창 백성들 처지를 극복하기 위한 계몽의지로 태산가를 지었을 것이다.
다섯째, 양사언은 조선 창업부터 국구의 고을인 평창 백성들의 암울한 생활상을 보고, 애민사상이 각별했던 그가 걱정이 앞서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고을 앞에 높이 솟아 길게 어둠의 장막을 치고 있는 듯한 관아의 앞 산 삼방산. 그 산은 마치 고을 백성의 희망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절망의 상징과도 같았을 것이다. 평창의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하여 노력했다.
현실의 타개의 의지를 드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근면과 권학을 장려하기 위한 시조를 지었다고 본다. 태산가는 평창 관아 문루였던 대외루(大畏樓)에서 삼방산을 바라보며 백성들에게 보냈던 교훈이었고 하늘에 빌었던 기원문이었다.
한국의 태산은 강원도 평창의 삼방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