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古今島關王廟修護事上書均役廳 (壬申)
(고금도 관왕묘수호를 위해 균역청에 올린 글 1752)
「全羅道幼學某等謹齊沐再拜上書于均役廳閤下伏以萬古英烈之士不知何限而若其顯聖於明祖勦僞之時神助於我東勘亂之際者未有如漢關王者矣 天朝東救之將非不多也而至於董率水軍連成大功者陳都督是也壬辰之中興諸將非不林林而若其百戰百勝使一倭終不得上岸西向者李忠武是也噫此英靈異蹟將烈嵬勳將與我東天地長存而不磨者則惟彼寥寥寂寂寄享於滄海中古今一小島使蚩蚩僧徒掌其廟者己豈非大可哀乎哀此可哀之一廟今將廢去而又不得爲廟焉則亦豈非可哀中尤可哀者歟顧惟生等以湖南㳂海之人距古今島不遠故目見其可哀之狀敢此齊聲仰龥而溯源以陳之冀垂省察焉粤在壬辰亂後己亥正月劉提督綎自南原凱還天朝也戒我國立廟於京之東南城外以享關王又使標下旗敲官徐姓者領軍五百監建關王廟於南原至于今享之此乃劉提督取以慕其義感乎夢而有是擧則帶方聞記可按覩也若夫此古今島關王廟則陳都督璘之所創也盖都督之率廣師來救我東也載來關王木像多頼神兵之陰助洎其班師關王之靈又於宵寐願留此古今島中則其建祠實在是槩以逞神時於此地者多而其水碧沙明殆與黃陵等英魂托些之意誠不偶然則古今之島雖小惟彼關王之廟不可廢也
〈해설〉전라도 유학 세옥(世鈺) 등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균역청(16)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만고에 영웅 열사들을 어떻게 한계를 지을 수 없으나 명나라 왕조 때 성덕을 나타내어 거짓계략을 꾸미는 무리들을 초멸(剿滅)하고 우리나라의 감난(勘亂)(17)을 평정할 때에 신조를 해 준 분은 한(漢)나라 관왕의 영혼만 같은 이가 없습니다.
* 합하 : 왕세손이나 대원군을 호칭할 때 붙이는 존칭이지만, 정1품 관리들에게 붙이기도 했음
(각주)
(16) 균역청 : 균역법의 실시에 따른 여러 사무를 맡은 관아. 영조22년에 설치하여 동 29년에 선혜청으로 통합하였음.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만든 법률
(17) 감란(勘亂) : 난리를 평온하게 진정시킴
천조(天朝)에서 우리나라를 구원할 장수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군(水軍)들을 인솔하고 연속 큰 공을 이룬 데는 도독(都督) 진린(陳璘)장군입니다. 임진(壬辰)년 난리를 평정시키고 중흥(中興)을 맞이하던 시기에 모든 장수들이 모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중에서도 백번 싸워 백번 승리하고 왜적들로 하여금 한명도 끝까지 해안에 올라와서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한 사람은 이충무공(李忠武公)이었습니다.
아! 그 영령(英靈)들의 특이한 자취와 장렬(壯烈)하고 높은 공훈은 장차 우리나라에서 천지(天地)와 더불어 깊이 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유적을 쓸쓸한 창해(滄海)의 가운데 기탁하여 향사(享祀)를 지내는 작은 고금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승도(僧徒)들로 하여금 그 사당의 관리를 맡기고 있을 뿐이니 이 어찌 크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애처롭고 애처로운 한 묘사(廟祠)가 황폐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또 뜻과 같이 이 사당을 보전할 수도 없으니 또한 어찌 애절한 가운데 더욱 애절한 일이 아니겠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저희들은 호남(湖南)의 바닷가 사람들로 고금도(古今島)와 거리도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민망스러운 양상을 목견(目見)하게 되어 감히 이렇게 같은 목소리로 우러러 호소를 드리고 근원(根源)을 소급(遡及)하여 진술하오니 바라옵건대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지나간 임진(壬辰)년 난리를 겪은 이후 기해(己亥:1599)년 정월(正月)에 유정(劉綎)제독은 남원(南原)에서 개선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때 우리나라에 경계의 말을 남겼습니다. 서울에서 동남쪽 성 밖에다 사당을 세우고 관왕(關王)의 향사(享祀)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또 밑에 딸린 표하병 기고관(旗敲官) 서(徐)라는 자를 시켜서 남원(南原)에 관왕묘(關王廟)를 지은데 감독을 하게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곧 유정제독(劉綎提督)이 의(義)를 우러러 취한 것이며, 꿈속에서 감응을 받아 한 것이며, 대방문기(帶方聞記)라는 책에서도 살펴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고금도에 있는 관왕묘(關王廟)를 말한다면 곧 진린(陳璘)도독이 창건한 것입니다. 도독(都督)은 많은 군사들을 인솔하고 우리나라에 구원하러 오면서 관왕(關王)의 목상(木像)을 실고 왔기에 신병(神兵)의 음조(陰助)에 많은 힘을 입었습니다.
그들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갈 때에 미쳐서도 관왕(關王)의 영혼은 잠자리에 나타나서 여기 고금도(古今島)에 머물러있기를 원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당(祠堂)을 건립한 이유도 실제 여기에 있는 것이며 대개 이 지역에서 신(神)의 영험을 보이는 점이 많았던 것은 그 푸른 물결과 밝은 백사장이 거의 황릉(黃陵)과 같으므로 그 영혼(英魂)이 의탁할 뜻을 둔 것이며 이는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고금도가 비록 작다고는 하나 오직 관왕의 사당(祠堂)을 모시는 일 만큼은 폐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붙임]
(144-054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53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53일차에도 '간암공(위세옥)의 유작'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 주) 53-54일차에는 '간암공의 고금도관왕묘수호사상서균역청(임신)'이 이어집니다.
[본문내용- 고금도관왕묘수호사상서균역청
(임신)①]/ 무곡
임진왜란 이후 관왕의 사당이 여러 곳에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동묘(동관왕묘)'에 있는 관왕 사당이 라고 보입니다. 이 글은 '고금도'에서도 관왕의 사당을 계속 모실수 있도록 균역청에 소를 올리는 청원글로 사료됩니다./ 무곡
"간암공은 서울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무반가 출신에 대한 차별적 취급과 그에 따른 한계를 실감했던것 같다. 무반가는증조부 위덕화(1551-1598), 조부 위정철(1583-1657), 부친 위동전(1649-1713)인데, 부친 군수공 '위동전'은 민씨집안의 쟁쟁한 인물들 민진장(1649-1700, 민정중子), 민진후(1659-1720,민유중子), 민진원(1664-1736, 민유중子)의 수행군관(비장)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그 민진원의 아들들 '민창수, 민형수'등과 간암이 가까워진 것이다. 그러나 위씨 무반가 3대의 자부심도 여흥민씨 경화사족 앞에서는 낭패감으로 바뀌었을 것" (후략)
('간암선생 특집, 제27호 종보'에서 발췌)
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도, 간암공은 상기의 글 외에도 '임계탄'과 '상소문' 등 많은 기록을 남겨 성공한 선조로서 자리 매김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의외의 변수'와 '반전의 법칙'이 있어 더욱 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두줄칼럼,이동규)은 인생은 '높이'나 '깊이' 가 아니라 '부피'라는 명언을 남긴 것 같습니다. 저도 1000% 공감합니다.
여기서 게재자도 인생은~ 무곡
간암공의 관우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입니다. 사실 관우는 유비보다 후세들에 의해 더 추앙받는 인물이죠. 관우의 덕성은 유비를 능가한다고 보입니다./ 벽천
위윤기 님
맞습니다.
유비가 촉한의 왕이라면,
원래 유비의 신하였던 관우는
죽어서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신(충의와 절개의 화신)이 되어 유비보다 한참 더 높은 형국이 되었죠./ 무곡
茂谷(무곡) 위상환 님
관우가 중국에서 신의 경지까지 오른 것은 재물을 가져다준다는 재복의 의미와 관우의 넓은 덕성이 적절히 결합한 결과로 해석됩니다./ 벽천
그런데 사실 관우는 꽤 오만방자해서 요충지 형주를 신출내기 육손에게 내어주고(사실은 여몽의 지략이라고 봐야 겠죠) 본인도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죠.
만약 형주를 손권에게 내주지 않고
관우가 죽지 않았다면, 유비가 관우의 원혼을 갚는다고 무리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유비도 백제성에서 허무하게 죽지 않았겠죠.
냉정히 말해 관우는 과대평가 된 면이 많아요.
이게 다 명나라에서 임진왜란때 나라를 되찾아 주었다고 (재조지은이라고 하나요)시켜서 조선에 관우상이 많이 만들어진 것이죠. 임란 이후 있는돈 없는돈 다 끌어 모아서 관우사당 만드느라 당시 조선 백성들이 참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동묘에 갈때마다 사실 화가 나요. 아차 제가 잠깐 하이킹 중 딴길로 빠져 버렸네요./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