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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은 석 달을 사양했다. “이름난 원로도 아닌데 650평 전시장을 무슨 수로 채우냐”고. 하지만 결국 광목에 먹과 수채로 제주의 설경을,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일출봉을 그렸다. 관객 수, 도록 판매, 작품 판매까지 전시는 성공이었다. 당시 전시작 중 일부는 2021년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됐다.
소동파 문집을 임서하는 박대성. 힘줘 붓 잡고, 긁듯이 써내려간다. 경주=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국에서 중국화의 거장 리커란(李可染ㆍ1907~89)을 만났다. 병석에 있던 리커란은 그가 가져간 호암갤러리 전시 도록을 보고 “기초를 잘 닦았다”며 탄복했다. “글씨를 잘 써 봐라” “먹이 제일 기초다” 등 조언도 했다. 한국에서 온 서른 살 아래 화가를 격려한 리커란은 이듬해 세상을 떴다.
빨치산에게 왼손 잃고 중학교만 졸업…도처에 그림 스승
돌이켜보면 다 인연이고 운명이었다. 순탄치 않은 삶이었지만 불운도 잘 다루면 행운으로 바뀔 수 있음을 체득했다. 경북 청도에서 한의원을 했던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돌아가셨다. 오랜 친구인 소설가 이문열은 이렇게 썼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이던 49년 여름의 어느 끔찍한 밤이다. 설익은 이념의 선동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와 잠자던 어린아이의 부모를 살해하고 다섯 살의 어린아이에게까지 낫을 휘둘렀다. 낫에 찍혀 왼손을 잃고 아픔과 공포에 휘몰려 밤길을 달리던 그 어린아이는 고향 개울가에 처박혀 빈사의 상태로 밤을 지새운 뒤에 친지에 의해 구조된다.”(『소산 박대성』, 가나아트센터)
동급생들은 그의 팔을 놀려댔다. 그게 싫어 중학교만 겨우 마쳤다. 어느 날 제사상 뒤에 친 병풍 그림을 따라 그리는 걸 본 집안 어른의 칭찬 한마디가 인생을 바꿨다. “대성이가 그림에 소질이 있나 보네.”
김영옥 기자
학교는 안 다녔지만 도처에 스승이 있었다. 18세에 친척 어른 소개로 호랑이 그림의 대가인 서정묵에게 배웠다. 1960년대 중반 대구 화실을 찾아온 시인 구상(1919~2004)은 자신의 친구 이중섭 얘기를 들려줬다. “중섭은 실제로 보고 옮기는 연습을 많이 했다”고. 그저 보는 걸 넘어 사물 자체에 투철하게 들어가는 ‘관입실재(觀入實在)’를 당부했다. 그렇게 배우며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내리 8번 입선했다. 중앙미술대전에서는 첫해에 입선, 2회에 대상을 받았다.
박대성은 40대 중반 지나 붓 잡는 법을 바꿨다. 목판에 칼로 새기듯 꼭 쥐는 걸 손에 익히려 한동안 걸을 때도 이 자세로 다녔다.
"익숙하면 게을러진다", 이미 한 팔이 없는데도 부러 불편을 추구한다. 경주=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주 화가 박대성을 있게 한 ‘불국설경’…이건희 생일선물로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대만으로, 히말라야로. 모더니즘을 배우겠다며 뉴욕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불현듯 경주에 가야겠다 작심했다. 뉴욕에서 본 수직으로 쭉쭉 뻗은 마천루들이 불국사에 수평으로 펼쳐져 있었다. 절에 간청해 요사채에 1년간 머물렀다. 그렇게 머물던 1996년 겨울 ‘불국설경’이 나왔다. 경주에 7년 만에 눈이 내린 날이었다.
화실에서 내다본 송림. 뒤뜰의 조각은 아내 정미연 조각가 작품이다. 경주=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림은 고요하다. 천년 고도를 지켜온 노송(老松) 표면에 여백은 그대로 눈이 되어 쌓였다. 가로로 길게 누운 불국사도 하얗다. 신라 김대성이 지은 절을 화가 박대성은 종이에 오로지 먹으로 새로 지었다. 가로로 긴 불국사는 막상 현장에서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어도 마찬가지, 가장자리에 왜곡이 생긴다. 그는 공간을 3분할해 그렸다. 평평한 것이 현실 풍경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박대성, 불국설경, 1996, 종이에 채색, 124x304㎝.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박대성의 ‘불국설경’은 총 네 점, 이 중 하나가 이건희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은 “이건희 회장 생일이 1월 초라 세배 겸 생일 선물로 드렸던 그림”이라며 "시리즈 중 비교적 작은 크기여서 가까이 걸어두시라고 선물했다"고 돌아봤다. 이 그림 왼편에 박대성은 이렇게 적었다.
“이곳에 실상은 생멸이 없지만 나고 죽고 오고 가는 것이 있음이요 모두가 다 한 상의 꿈일 뿐이니…”
화실에 걸어둔 붓. 뒤 그림은 근작 '불국설경'. 경주=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갓 꿈에 집착하지 말자 했지만 꿈같은 일도 일어났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걸리며 해외 전시의 물꼬를 텄다.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 때 방한한 해외 미술계 인사 90여 명이 경주 작업실을 방문한 게 계기가 됐다. 2022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을 시작으로 미국 순회전을 열었다. 박대성은 말한다. “그래서 ‘다 인연이다. 선하게 살자. 손해 보고 살아보자’ 합니다. 너무 빡빡하게 살지 말자고.” 뉴욕 스토니브룩대학 내 찰스 왕 센터에서 전시할 때 한 백인 노인이 와서 제도권 교육 밖 아웃사이더로서의 심경을 물었다. 그는 “학위 있는 동료들이 인삼이라면 나는 산삼”이라고 답했다.
2022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전시 장면. 왼쪽부터 '불국설경'(솔거미술관 소장), '청산백운'(작가 소장).
LA= 권근영 기자
우리 나이로 팔순, 박대성은 지금도 “꿈을 이루고 싶다” 말한다.
“붓 몇 개 가지고도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게 꿈입니다.
많은 얘기 않고 오로지 필묵으로만.”
왜 박대성인가…글씨가 힘, 매일 아침 글씨쓰기
박대성의 하루는 새벽 5시 냉수마찰로 시작된다. 두어 시간 글씨를 쓰고, 집 뒤 삼릉 송림을 맨발로 걷는다. 그리고 오후에는 그림 그리다가 밤 10시면 잠든다. 1999년 경주 배동의 헌 농가를 고쳐 살기 시작한 이래 매일 반복하는 일과다.
2022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 전시된 '금강산'(238.4x553.7㎝, 오른쪽). LA= 권근영 기자
더없이 단순한 일과지만, 노화가는 화폭에서만큼은 독수리도 되고 물고기도 된다. 맨해튼에서 빌딩을 올려다보다가 금강산을 떠올렸다는 ‘금강산’(2004)이 그렇다. “내가 새가 돼야겠다 여겨 독수리가 되어 내려다보듯, 내가 물고기가 되어 내 눈이 오목렌즈처럼 동그랗게 본 듯 그렸다”고 박대성은 말한다.
서구 원근법식 공간 구도에 익숙한 관객들은 시점을 자유자재로 바꾼 그의 그림이 주는 역동성을 신선하게 받아들인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전시에 대해 미술사가 브리타 에릭슨은 “360도 파노라마로 보는 새처럼, 산마루와 바닥의 거리감을 없앰으로써 금강산에 가 있는 듯 압축적 경험을 선사한다”고 평했다.
붓과 먹물, 서첩을 항상 휴대한다. 박대성은 사진 찍기보다 현장 스케치를 선호한다. 몸으로 부딪치고 눈으로 본 현장이
자기만의 산수화로 되살아난다. 경주=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매일 글씨쓰기로 쌓은 기초, 손바닥만 한 서첩을 들고 다니며 무시로 하는 현장 사생, 자유분방한 다시점, 이것이 박대성 그림의 남다른 점이다. 그는 2015년 경주 솔거미술관에 ‘불국설경’을 비롯한 그림 435점과 서예·도자기 등 830점을 기증했다. 서울에서는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해외 순회 기념전 ‘소산비경’을 2월 2일부터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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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중앙일보 기자
보고 씁니다. 미술경영학 박사. 책 『완전한 이름』『나는 예술가다』『로이 리히텐슈타인』(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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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n1**** 2024.02.20 15:20
상처를 딪고 평생을 예술혼에 이끌려 살아온 화가나 그를 알아보고 흠오했던 이건이나 고수는 다르군요.인생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연대에 머무르지 않고 화가의 진면모를 보려는 기자의 안목과 솜씨가 멋집니다. 또 뭔가 울컥거리게 하는 지점이 있고요.
skym**** 2024.02.02 08:01
좋은게 많아서 어느한부분 한부분이 좋았다 라고 하기가 망설여지는거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youn**** 2024.02.08 13:33
기사를 쓴 권근영입니다. 힘들 때 보고 싶어지는 응원이네요^^ 감사합니다!
juxi**** 2024.02.02 03:57
꼭 한번 들리고싶어 지네요!
poli**** 2024.02.01 09:24
대한민국에는 이처럼 훌륭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부디 후세를 위해
더욱 뜻깊은 작품들 많이 남겨주소서!!
jhlo**** 2024.02.01 08:21
스토리 좋네요..손해 보고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