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장 1-9절. 고린도 교회에 대한 인사와 감사. 요약설교
1-3절.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문안 인사입니다.
1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1.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사람(특히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 1:1).
그 이유는 그가 전하는 복음의 기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의 계시로 인함(신적 기원과 권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갈 1:11-12).
그래서, 본 절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1) 이처럼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고 말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 바울의 사도됨을 부인하는 반대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1-12. 9:1-2)
(2) 원래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와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행 1:21-22)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직제자도 아니었고,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를 죽인 반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바울을 변화시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택정함을 받은 사실을 밝히면서, 자신이 전한 이방인 구원의 복음이 사도적 권한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1:1)
즉 바울은 이방인 구원이라는 복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도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15)
2. 소스데네.
소스데네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에 유대인의 회당장이었는데(행 18:17), 그는 또 다른 회당장인 그리스보와 함께(행 18:8)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협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고 핍박을 받았습니다(행 18:17).
그 후로, 그는 고린도 교회의 한 지도자가 되었고, 바울이 AD 55년경 에베소에서 본서를 기록할 때, 바울을 대신하여 본서를 기록했습니다.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1. ‘고린도’라는 도성은 80여 년간 폐허가 되어 있었는데, 율리어스 씨이저(Julius Caesar)가 BC 44년경에 재건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60만의 인구로 성장한 헬라 반도에서 제일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항구 도시로서 상업이 발달하여 부유한 도성이 되었으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를 섬겨서 술과 음행이 난무한 부도덕한 도성으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타락한 도성에도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많았습니다. (사도행전 18:10)
그래서 바울은 이 도성에 일 년 반 동안이나 전도해서 큰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사도행전 18:11)
2. 하나님의 교회
고린도 도성이 우상숭배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과 대조적으로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였습니다.
원래 ‘교회’(ἐκκλησίᾳ)란 ‘밖으로 불러낸다’(ἐκκαλέω)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고린도 교회는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고린도 도성에서 하나님이 불러내신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란 표현은 대조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이처럼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고린도 도성에서 하나님의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10, 14)
4.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본서의 수신자가 고린도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본서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특정한 서신이나, 특정 지역을 초월하여, 보편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읽고 따라야 할 일반 서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 ‘은혜’(χάρις)는 헬라인들의 인사였고, ‘평강’(εἰρήνη)은 유대인의 인사(שָׁלוֹם: 샬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은혜’는 구원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평강’이란 구원의 은혜에서 나온 참된 평안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평강’이란 싸움과 질병과 가난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생업의 안정과 사회적인 평안을 모두 포함한 참된 평안과 풍요로운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안은 참된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27)
이 세상은 늘 불안하고 질병과 가난과 전쟁이 있지만, 성령님이 늘 함께 하심으로 성도들은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4-9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든 구변과 풍성한 지식과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4-7절), 주님 재림시에 교인들을 온전하고 견고케 하실 것을 소망하며(8절),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9절).
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 항상 하나님께 감사.
(1) 바울이 ‘항상’(πάντοτε, always) ‘감사한다’(Εὐχαριστῶ, I thank)고 현재형으로 말한 것은 바울 자신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한 말씀을 항상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에베소서 5:20)
이처럼 바울이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체험상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한 사건도 결국 성령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
(2) 또한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감사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에는 분파도 있고, 음행과 우상숭배와 예배의 무질서도 있었지만, 언변과 지식이 풍부하고, 은사가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7)
(3)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분당을 지어 자신을 대적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도 있었으나, 바울은 언제나 변함없이 저희를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서에서 바울이 저희들을 책망하는 것도 원한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1. 언변(λόγος)과 지식(γνώσις).
(1) 원래 헬라인들은 이 언변과 지식을 좋아했고,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이런 헬라인의 경향에 따라서 언변과 지식이 풍족했습니다.
(2)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서는 성령의 여러 가지(9가지) 은사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지혜의 말씀(λόγος)을, 둘째는 지식(γνώσις)의 말씀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러한 은사에 풍족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보다도 여러 사람을 위해서 훨씬 더 유익한 은사라고 했습니다(고전 14:5 참조)
6절.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1. ‘그리스도의 증거’(τὸ μαρτύριον τοῦ Χριστοῦ: the testimony of the Christ)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서 십자가 복음을 가리킵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증거를 받아들여서 그 안에 견고하게 섰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언변과 지식에 풍족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의 언변과 지식은 헬라 철학적인 언변과 지식이 아니라, 복음 신앙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주신 언변과 신령한 지식이 풍성하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7절.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1. 은사(χαρισμα).
고린도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저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으며(행 18:10), 고린도 교인들은 문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사가 풍성했습니다(본 절).
따라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근거한 것이지, 인간의 노력과 도덕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롬 4:4-8, 마 20:1-16 참조).
8절.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1. 끝까지, 그리스도의 날에
본 절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주님께서 우리 허물 많은 성도들을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로 보호해주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완전한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절대 주권을 가지신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이루어지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2. 책망할 것이 없는 자.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란다’고 했는데(고전 13: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비록 흠이 있을지라도, 근본적으로 그들이 결국 온전케 되는 것을 믿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1.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서게 될 희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한 번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은 결코 중간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신실하게 우리를 보존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0:28-29. 로마서 8:38-39)
2. 미쁘시도다(πιστος, faithful).
이와같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신뢰와 감사는 근본적으로 그들을 불러주신(1:2)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입니다.
<생활에 적용>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나 부모나 형제, 동료 그리스도인이나 직장 동료나, 이웃이나 타인이 고린도 교인들처럼 문제가 많고 나에 대해서 나쁘게 대할지라도, 바울과 같이 저들에 대해서 근본적인 신뢰와 애정을 갖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러한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생길 수 있을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오늘 바울 사도가 “너희가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신 것 같이, 우리 모든 성도들이 교회의 각 부서에서 주님을 섬길 때, 한마음과 한뜻을 가지고, 금 년 한 해에 힘있게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