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선 영웅 강 병장을 기리며 / 김창남 2
1. 군대 동기인 강 병장이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2. 작년 봄, 강 병장은 우리를 서울로 불러 크게 한턱내며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호기롭게 약속했었지만, 차일피일하다 보니 어느새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그날의 호탕한 웃음이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3. ‘의리 빼면 시체’라 불리던 친구였는데 떠나는 길은 너무도 허망했다. 지난번 만났을 때 그는 살집이 꽤 붙어, 턱선은 겹치고,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친구들이 건강을 걱정하자, 그는 병원에서 별 이상은 없다며 체중이나 좀 줄이고 술을 끊으라고 했다며 껄껄 웃었더랬다. 그랬던 그가 이토록 쉽게 세상을 떠나다니 믿기지 않았다.
4. 상가에 모인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 시절 그 사건으로 흘러갔다.
5. 전역을 몇 달 앞둔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동기 다섯 명이 소대 내무반에서 돌아가며 주번하사를 맞고 있던 시기였다.
내무반원을 모두 재워 놓고, 우리는 한구석에서 몰래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위병소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외박 나간 김 일병이 돌아와서 위병소 병사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6. 그날 당직사관은 전역을 앞둔 이 준위였다. 보급부대 특성상 비상시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던 탓인지, 그는 “어쩌지, 어쩌지” 하며 내무반 안에서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우리 동기 다섯이 나섰다. 한 명은 내무반에 남아 상황을 지켜보며 소대원들을 통제하게 하고, 넷은 소대원 중에서 고참 병사 열 명을 뽑아 함께 밖으로 나갔다.
7. 연병장은 보름달이 훤히 비치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 공간에는 서늘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김 일병은 위병소 바깥 담장 위에 총을 걸쳐 놓은 채 안쪽을 겨누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총구는 차갑게 빛났고, 그의 일그러진 얼굴도 어렴풋이 보였다.
8. 동기 둘의 인솔 아래 다섯 명은 담장을 넘어 김 일병 뒤편 밭에 매복시켰다. 강 병장과 나는 남은 다섯 명을 데리고 연병장 둘레 오동나무 그늘을 따라 위병소 쪽으로 은밀히 접근했다. 위병소에서 열대여섯 걸음 떨어진 나무 아래 우리는 숨을 죽이고 몸을 숨겼다.
9. 김 일병은 행정반에서 보급품과 병기를 관리하던 강 병장 조수였다. 입대 전에 초등학교 교직 과정을 밟던 대학생답게, 하얀 얼굴에 선량한 기색이 가득한 모범 병사였다. 내무반에서도 잔심부름을 도맡아 고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그가 이런 일을 벌인 데에는 분명 남모를 사연이 있을 터였다.
10. 사수로서 책임감을 느낀 강 병장이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야 김 일병, 이거 뭐 하는 짓이야?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김 일병이 울분 섞인 목소리로 맞받았다.
“나 오늘 죽을 겁니다. 혼자는 안 갈래요. 누구 하나 데리고 같이 갈 겁니다”
11. 강 병장은 망설임 없이 나무 그늘을 벗어나 몸을 드러내며 말했다.
“야 무슨 일인지 말해 봐. 나하고 얘기 좀 하자니까”
“오지 마세요, 쏩니다.”
강 병장은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한걸음 씩 나아갔다.
“야 너, 나 쏠 수 있어. 그럼 쏴 봐”
김 일병의 울먹이는 소리가 달빛에 흩어졌다.
“오지 마세요, 오지 말아요”
12. 우리들은 숨이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달빛을 등지고 당당히 걸어가는 강 병장의 뒷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 순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13. 총구 앞까지 다가간 강 병장이 총신을 가볍게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위병소 밖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달려들어 김 일병을 제압했다. 상황은 허무하리만큼 순식간에 끝났다.
14. 오랏줄에 묶여 내무반으로 끌려온 김 일병의 사연은 기가 막혔다. 낮에 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자고 가라”고 소매를 붙잡더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얼어붙었다. 여자는 군에 오기 전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이었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그는 넋이 나간 채 거리를 헤매다 술을 들이켰다. 부도가 난 집안 형편 때문에 소식이 끊긴 연인을 그런 곳에서 재회한 자괴감이 그를 미치게 했다.
15. 부대로 돌아와 보니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무기고에서 소총을 꺼내 들고 나왔다고 했다. 횡설수설이지만 대강의 사정은 짐작이 갔다.
16. 부대장에게 전화로 보고하자 내일 아침까지 함구하고 잘 지키고 있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음날 당직사관 이 준위의 보고를 거치며 사건은 엉뚱하게 변질되었다. 총기 사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리가 술을 마시다 부대원 관리를 소홀히 해서 벌어진 소동으로 정리되고 말았다.
17. 진급을 앞둔 부대장에게 총기 사건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헌병대에는 탈영을 시도한 것으로 보고해 군기 교육대로 이송했다. 이 준위는 책임에서 벗어났다. 대신 주번 하사인 강 병장은 근무 태만이라는 이유로 ‘빳다’ 스무 대를 맞았다. 우리 동기들도 함께 술을 마셨다는 죄로 열대씩 맞았다.
18. 목숨을 걸고 대형 사고를 막아낸 공로로 훈장을 받아야 마땅할 강 병장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매질 뿐이었다. 훗날 들으니 이 준위는 무사히 제대했고, 부대장은 이듬해 진급했다고 들었다. 1970년대 군대의 씁쓸한 자화상이었다.
19. 그날 이후 강 병장은 우리 소대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늘 “별거 아냐 걔가 날 못 쏠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이라며 덤덤하게 말하곤 했다. 평소 김 일병을 누구보다 잘 아는 믿음이었다. 그 의리와 배포가 사회생활에서도 빛을 발했는지 크게 성공했다.
20. 이 세상에서 조금 더 머물며 그 따뜻한 의리를 나누다 갔으면 좋았을 친구.
우리는 조용히 잔을 들어 올렸다.
“강 병장의 영혼을 위하여, 부디 그곳에선 평안하길”
이미 먼 길을 떠난 영웅의 영혼을 향해 우리는 천천히 잔을 비웠다.
* 빳다: 배트의 일본어로, 군대에서 팔 짚고 엎드린 자세인 부하에게 배트로 엉덩이를 때리는 기합의 일종
첫댓글 사건의 전개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전광석화 처럼 대처해 나가는 강병장의 기지가 놀랍습니다.암울했던 70년대 군대생활이 기억납니다.
소설같이 엄청난 사건이네요.
또 사람은 언제 어느 때나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군요. 저 역시도 그렇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70년도 중반부터 군 생활을 하였는데,
옛 추억이 아련합니다.
의리의 사나이 강병장 얘기가 감동적입니다.
인간적이고 훌륭하신 인품으로 사회적 성공도 하였건만, 조금 일찍 별세 하셨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허망하셨겠습니까?
좋은 전우를 보내셨습니다.
인생 무상입니다.
세 분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영웅이었는데 하늘이 일찍 불러가네요.~~
글 쓰는 게 점점 어려워집니다.
김창남 선생님
기승전결로 이루어져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람이 위기가 올 때의
선택은 도덕적으로
결정해야 하지만
위급한 상황이라면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