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강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게 되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입니다. 오늘 죽음이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날입니까? 아멘!
여기 창세기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8장 4절입니다.
창 8:4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성령님이 이 구절을 중요하게 보신 것은 방주가 머무른 날과 그 장소 아라랏산입니다. 이 날자는 한 참 되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사 죽음을 이기신 날과 일치합니다. 그 날이 바로 부활하신 날입니다. 아멘!
노아의 방주가 일종의 새로운 피조물 위에 머물렀듯이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새 피조물들을 낳으셨습니다. 아멘 우리 교회 이름이 “뉴 크리에시션”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방주가 머무른 곳의 이름은 아라랏산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라”는 저주를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 하셨을 때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 저주를 뒤집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노화되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질병을 앓거나 죽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노화되고 죽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지만 여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이 누리는 높은 질의 생명을 산다는 뜻입니다. (첨가: 즉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영생이란 “조이”한 삶을 나타냅니다.
즉 “조이 아이오노스”인데 하나님께서 사시는 높은 수준과 양질의 생명을 뜻합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무덤에서 나온 생명입니다.
죽음을 집어 삼키는 생명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자연적인 삶 끝에 존재합니다.
부활은 그 죽음의 끝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죽음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전세가 역전이 된 것입니다. 무자비한 독재자이자 끔찍한 탄압자인 죽음은 인간에게 말 할 수 없는 비극과 고통과 가슴아픔을 주었던 죽음은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죽음이 생명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생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이 죽음의 죽음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아멘 아버지의 우편에 가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면 이 땅에 내려 오실 필요가 없었겠죠.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셨거든요. 예수님은 에수님의 공로에 우리를 포함하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도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이긴 승리가 우리의 죽음을 이긴 승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정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역사가 되어 우리 뒤편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고려하라고 권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나 이제 부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 그것이 진리 같은데요 왜 저는 아직도 죽음이 무서울까요?” 여러분 뿐만 아니라 사실 많은 분들이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성도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행을 싫어하는 분들은 대부분이 비행을 싫어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비행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집 밖에 나가는 것도 자녀들을 내 보내는 것도 싫어합니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죠. 죽음의 공포 때문에 속박된 것입니다. 완전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동료나 친구들은 겉으로 멀쩡해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눈에는 사람들이 큰 회사의 임원이나 상사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지 아무도 그 속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이르시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한 가지는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을 보시겠습니다.
히 2: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이 오신 이유 중에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든 자들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단 한 순간 짧은 기간 만이 아니라 한 평생 죽음에 매여 종 노릇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 삶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모든 공포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모든 선하신 것, 모든 축복이 여러분의 공로를 기준으로 삼아 주어진다고 칩시다. 여러분의 순종과 여러분의 신실함이 기준점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겠습니까?
기준을 삼는다 하면 분명히 여러분의 마음에 공포가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어떤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 축복과 안정이 나 아닌 누군가에 달려 있다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면 우리는 안식할 수 있습니다. 아멘
이 안식이 여러분을 변화시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권능이 있으며 이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세요. 이 구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입니다.
히 2: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여기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에서 분명하게 죽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가 더 강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마귀는 그 자신만으로는 능력이 없고 빌린 것에서만 힘이 있습니다. 제가 이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율법이 사망을 불러온다고 말합니다. 사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지 죽음의 나무가 아닙니다. 죄의 나무도 아니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율법의 나무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고 구분 짓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 율법의 과실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율법의 나무의 과실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창2:17)
고린도 후서 3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돌에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의 조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이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고후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의 조문” 율법 가운데 돌에 써서 새긴 돌 판에 하나님이 손으로 직접 새긴 율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십계명 뿐입니다.
유대 경전 “토라”율법 가운데 다른 것은 돌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이르길 십계명은 돌에 새겼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게 하는 율법입니다.
그 외에 다른 율법들은 두루마리나 양피지에 기록되었지요. 돌에 새긴 율법은 오직 십계명 밖에 없습니다.마귀는 이 점을 알고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앞에 십계명을 펼쳐 놓고 여러분이 잘못할 때 마다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우리도 사람들 앞에 율법을 들이대면 율법은 사람들에게 “의”가 아닌 죄를 알게 합니다.
그런 율법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가든 우리 사람의 마음에는 양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양심이란 선과 악을 깨닫게 하죠.
잘못을 저지르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압니다. 우리는 양심을 잠잠케 하고자 술을 잔뜩 마시고 망각에 빠져보기도 하고 양심을 잠재우려 밤새 파티를 하거나 마약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양심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양심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할 것입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잘못에 대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바로 나쁜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 중에 하나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존재했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했으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요.(요1:1)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죽기 위해서입니다.
즉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 2:14-1514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여기서 분명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율법을 사용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우리의 잘못을 고발합니다. 마귀가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를 참소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의 죽음의 힘은 참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정죄함과 참소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마귀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마귀를 “하 사탄”이라고 합니다. “하 사탄”이라는 뜻은 “법적으로 고소한다”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참소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그 참소를 받아들이면 마귀의 죽음의 세력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아담이 죄를 지었기에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잘 보세요.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반대로 언제든 죽을 수 있고, 마귀가 내게 악한 일을 한다고 믿으면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시려고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죽음을 통하여 마귀를 멸하셨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멸하셨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카타르게요”라고 하는데 “힘을 빼앗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힘을 빼앗고 마귀가 가진 것을 박탈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무력화 시키신 것입니다.
마귀는 죽음의 세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마귀가 어떻게 한다고요?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여러분의 잘못에 대해서 정죄하고 고발합니다. 대부분의 경에 마귀는 종교적인 영으로 나타납니다. 즉 마귀는 광명한 천사처럼 보입니다.(고후11:14)
그래서 심지어 목회자의 입술에서도 역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 때문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 계시록까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우리의 몫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길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길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법은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가 법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다 그런 거지 뭐 다 덮어버리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죄는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반드시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으시다면 우주의 질서는 예전에 무너 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고 의롭지 않으시다면 우주 전체가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셔야 했지만 우리 몸에 벌을 가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를 두고 “하나님의 딜레마”라고 부릅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딜레마보다 더 위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처벌할 유일한 방법이 누군가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셨고, 율법을 완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율법의 모든 요구 사항을 지키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예수님은 자애로운 목자시고 하나님은 엄격하고 요구하시는 분이시다”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십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죄의 심판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모든 심판을 다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저는 이 성경의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바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권능의 모습입니다.
죽은 뒤에 축 늘어진 채 고개를 떨 군 것이 아닙니다. 죽기 위한 자세를 취하신 것이죠. 그리고 영을 떠나 보내셨습니다. 이 “떠나 보내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왕이 그 수하를 떠나 보낸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고개를 숙이고 그 영을 떠나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권능의 모습이죠.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신 다음에야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고 영을 떠나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끝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모든 처벌, 저주, 정죄함을 예수님의 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제가 본 영적 환상에서는 회오리처럼 한 번 또 한번 연이어 모든 정죄함, 심판, 저주가 예수님의 몸으로 휘몰아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이기시고 다 받아 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다 삼켜 내셨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그 때 “다 이루었다”하셨죠.
히브리어로는 “쿨라” 헬라어로는 “테텔레스타이” 단 한 마디로 “다 이루었다” 부활은 그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졌다는 선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영수증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15:17)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은 죄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있지 않음을 부활이 증명하고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영수증인 것입니다. 무슨 영수증이든지 영수증은 잘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잘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의 죄를 무덤에 두고 부활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뜻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셨던 것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우리 죄를 무덤에 두신 채 죄 없이 부활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공로가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공로입니다. 아멘!
우리가 죄의식을 갖고 죄로 인한 미래의 처벌과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이건 예수님의 공로를 무효로 하고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하찮게 여기는 셈이지요.
마치 “그것으로는 부족해”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누군가가 빚을 갚으면 그것을 누가 제일 기뻐합니까? 빚을 받은 자 이겠지요. 맞죠? 제가 누구에게 빚을 졌는데 그 빚을 갚으면 누가 제일 기뻐합니까? 저입니까? 아니죠 빚을 다시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속해서 죄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이런 뜻과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공로를 받지 않으셨다”라는 뜻입니다. 이해 되십니까?
여기 답이 있으니 잘 들으세요. 우리의 양심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죗값을 치러라”할 때에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내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이점을 확실히 알면 양심도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양심에도 자유 함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셨다는 진리를 알면 우리가 하나님께 값을 치르겠죠. 어떤 분은 “예수님이 마귀에게 죄값을 치르셨어”라고 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은 마귀에게 빚진 적이 없습니다.
이건 구세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거룩한 하나님께 갚으신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이 이를 위해 구세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죠.
이런 분들이 계시죠. 아직도 죽음이 우리보다 더 강하다고 믿으시는 분들이 있어요. 여러분, 이런 날이 오고 있습니다. 승리를 하고 나면 일단 승리가 이뤄지고 우리의 일상에서 승리가 발효하게 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17절과 20절을 보십니다.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20-21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절: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첫 아담의 행위보다 마지막 아담의 공로를 더 체감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22절입니다.
고전 15: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기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했는데 모든 사람은 누구를 가르키는 것입니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23절을 보시면 더 확실합니다.
고전 15: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모든 사람”은 문맥상으로 보아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뜻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믿고 있다면 여러분이 “삶을 얻는 모든 사람”입니다. 아멘! 다음 24절을 보십니다.
고전 15:24-2624절: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절: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이미 죽음을 폐하시고 이기셨습니다. 여기서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라고 했는데 발은 몸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엡1:23)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죽음이 우리 보다 더 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음보다 더 셉니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흔히 즐겨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절 말씀입니다.
살전 4: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에게 죽음은 자는 것과 같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도 보면 “자다”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원문에도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의 쏘는 것이 사라졌습니다. 아멘
그래서 “잔다”라고 표현했지요.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계속해서 보십니다.
살전 4:14-15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절: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이것은 사도 바울이 깨달은 계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16절을 계속해서 보십니다.
살전 4: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휴거라고 불립니다. 헬라어로 “하르파조”입니다. 17절을 계속해서 보십니다.
살전 4:17-1817절: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절: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하나님께서 중력을 뒤바꾸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중력이니까요. 천국에서는 모두가 영원한 미남미녀입니다. 병원도 없습니다.
천국에서도 몸이 존재하고 천국에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 식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죽지 않음을 알기에 전차를 얼마나 빨리 몰겠습니까? 우주 저 끝까지 가겠죠.
더 이상 죽지 않음을 알기에 여러분의 몸은 더 이상 아플 수도 없고 늙지도 않습니다. 얼마 동안요? 영원히 입니다. 영원히란 아주 긴 시간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예수님이 오실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여기서 “살아 남은”의 뜻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나이가 젊은 이들은 생기가 넘치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젊은 이들은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힘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으면서 생명력이 있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생명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죠. 죽음을 물리치는 겁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25절이 기억나시나요?
고전 15:25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즉 교회는 2천년 전에 시작 되었고 지금 현재 2014년인데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적들을 이기셨어도 이 적들이 남아 있다가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도록 우리 발아래 적들을 둡니다.
적들은 점점 더 그 힘이 약해지고 적은 수의 적들만 남다가 마지막 원수만 남겠지요.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발아래에 두신다는 이 말씀이 이뤄지는 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가 새 몸을 받을 때도 맞지만 저는 재림 전에도 생명력 있는 사는 분들은 여기에 해당 된다고 봅니다.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누릴 겁니다.
우리 세대가 그렇다고 봅니다. 은혜의 혁명이 지금 이뤄지고 있습니다. 제가 마무리 하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원수를 발 아래에 두실 때가지 다스리시는데 우리가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들도 고난을 겪었으니 우리도 겪어야지 이들도 가난했으니 우리도 가난해야지”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적은 지난 세월 동안 하나씩 예수님의 발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원수인 사망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해 되셨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원수를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다스리십니다.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목사님! 그 주체가 누구입니까?” 꼭 이러시는 분들이 계시죠.
”여러분은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하고 여러분은 이렇고 저래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다시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면서 우리의 허물만 찾는다면 우리는 흉하고 허물 많은 고릴라 같은 모습만 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영광에서 영광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것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보라고 가리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구약 시대에 이미 율법으로 그렇게 해 봤어요.
왜 오늘날에도 나를 바라보도록 가리키십니까? 우리는 왜 우리가 약한지, 왜 여기 왔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해결책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바라보도록 가리키는 대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십시오 짧게 말씀 드리자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누가복음에 기록된 바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나셨죠.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하시는데 “목사님! 저는요 매일같이 예수님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가리워 누구인지 못 알아보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지만 누구인지를 알지를 못하게 하신 것이죠. 그들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대신 말씀으로 모세오경부터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자신에 대한 모세와 선지자들의 내용을 설명하셨죠. 왜 제자들의 눈을 가리셨는지를 하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육안으로 예수님을 보는 것 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목사님들 리더 여러분들 매 주일 마다 성경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활한 자신을 보는 것보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겠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권능과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닮아가니까요. 고린도 전서 15장 25절을 다시 보십니다.
고전 15:25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누가 모든 원수를 교회의 발 아래에 둡니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이시고 교회인 우리는 몸입니다.(엡1:22-23마태복음 22장 44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께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말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전에 바리새인들이 도전했거든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사실 다윗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나님이 아들에게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당시 왕이 사용한 발등상인 이 “모낙”이라는 것은 왕좌에 앉았을 때 이 발등상을 두고 거기에 발을 얹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원수가 이미 패하였으며 패한 원수들을 모아 교회의 발등상으로 만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발이 속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요.
누가 예수님의 원수를 발등상으로 만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러분 잘 기억하세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우리를 위하신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엡2:5-6)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말씀하신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하심은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원수를 발등상으로 만드시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길 바라시는 단 한가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앉아 있으라” 저는 이 모습을 “보좌에서의 태도”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앉아 있으라, 안식하라”
”그런데 하나님! 잘 모르시나 본데 지금 적이 여기 저기에서 몰려옵니다.” 제가 알기도 전에 또 다른 적이 제 등 뒤에서 공격할 것입니다. 제 아들이 병에 걸려 누워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내가 아닌 하나님이 발등상 되게 만드십니다. 따라서 이 보좌에서의 태도를 가지면 승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승리한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몸이 아프신 줄 압니다. 의사가 진단을 내렸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가 중요합니다. 건강에 관한 한 “앉아 있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앉아서 말씀하세요. 안식하시라는 말입니다.
나는 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았습니다. 바라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순간 지는 것입니다. 믿지 않은 것이니까요.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순간 여러분은 믿음 가운데 있고, 바라는 것이 이뤄질 것입니다.
여러분 앉으세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네 상활을 잘 안다 네 눈에는 심각해 보이겠지!”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좌에서의 태도를 기억하고 앉아 있으라” 여러분 앉아 계세요.
그러면 마귀가 외칠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해야지!” 그러면 여러분은 마귀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했으니 하나님한테 뭐라고 그래라”라고 말하세요. 그리고 앉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원수들을 여러분의 발등상이 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노력해서 받았습니까?
오히려 노력하면 할수록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는 못해요.” 라고 외치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감사할 때 보좌에 앉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새로운 적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매번 앉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 할 일이죠. 보호에 관한 아름다운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91편 1절을 보십니다.
시 91:1-31절: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02절: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03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이 구절은 많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총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질병에 대한 보호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악성 전염병에서 지키십니다.
이 시편에서는 다른 질병이나 시한부 질병도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전염병도 여러분의 장막에 미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 믿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총을 뜻합니다.
”천 명이 내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시91:7)역시 보호의 은총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테러 공격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총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차후에 큰 위험이 될 줄 미리 아시고 특히 이 시편에서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시91:5-6)
여러분! 이 시편 91편이 어떻게 끝이 나는 지 아십니까?
시 91:16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우리는 시편 90편에서 살지 않습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헤매며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일 뿐이었으나 이는 주의 분노와 심판 아래 사는 경우입니다.(시90:10)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피로사신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수하게 하심으로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젊은 나이 33세에 죽으심은 우리로 장수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축복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시91:1)
제가 90년대부터 이 시편을 연구했는데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 어디입니까? 저는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두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존자의 은밀한 곳과 전능자의 그늘 아래” 두 곳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지존자”는 히브리어로 “엘 엘리온”입니다. 그리고 “전능자”는 “샤다이”입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여기 “거주한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야쉐프”인데 뜻은 “앉다”라는 뜻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앉으며” 문자 그대로 “야쉐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이름을 의지하여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엘 엘리온” “지존자”를 한 편에는 “엘 샤다이” “전능자”를 다른 편에 앉아 있으라는 태도를 말할 뿐 제 질문의 답은 아니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고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이 은밀한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이 두 이름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엘 엘리온”은 “지존자” 이시시고 “엘 샤다이”는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두 이름이 등장하는 곳을 살펴 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저는 성경 공부를 하식 시작하였으므로 “엘 엘리온”은 창세기 14장에 등장한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나는 데 그는 지존자의 대제사장이죠 즉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두주로 아브라함을 맞으며 축복합니다(창14:18) 19절을 보십니다.
창 14: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곳이 바로 처음으로 “엘 엘리온”이 언급된 구절입니다. 아브라함의 삶 가운데 처음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엘 샤다이”은 어디에서 처음 나올까요?
이 또한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99세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히브리어로는 “엘 샤다이”입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신 “엘 엘리온”은 창세기 14장에서 처음 언급되고 창세기 17장에서는 “엘 샤다이”가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이 두 장 사이에서 어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14장과 17장 사이에는 15장과 16장이 있습니다. 이 두 장 사이를 보면 은밀한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이 어떤 내용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밤 하늘의 별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셨습니다.(창15:5-6) 그런데 이 구절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도 사도바울이 인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 바로 이 구절이라고 합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인이 된 것은 자신의 행위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선해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4장은 “지존자”, 17장은 “전능자” 그 사이의 15장 16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우리가 믿는 것과 동일한 복음을 믿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주를 믿었고 주께서 의의 은사를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 장인 16장은 어떤 장입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16장은 문제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아십니까? 하갈이 등장합니다. 16장 전체는 하갈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있었을 때 그에게 준 여종이 하갈입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낳았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하갈이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과 속박의 상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면 다시 율법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 뒤, 13년이 지난 뒤에서 비로서 “엘 샤다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13년이 흘렀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을 보십니다.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우리의 의는 하나님이 주신 의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럽니다. “목사님! 저는 율법을 별로 의식하지 않아요” 그런데 내 의를 만들어 내려고 하죠. 그것이 율법입니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 의를 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난 의를 받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난 의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를 보십니다. 10절입니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왜 교회가 부활의 권능을 알지 못합니까? 왜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까? 왜 교회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을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교 말씀으로 들었다 해도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듣고 흘러 보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율법에 매여 스스로 정죄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금은 은혜의 혁명이 진행 중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은혜의 개혁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를 멈추려는 목소리가 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은혜의 복음이 제가 만들어 낸 것이거나 다른 설교자가 고안해 낸 것이면 인간의 산물이기에 곧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아멘. 복음의 깨달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의”의 깨달음이 현실이 됩니다.
이 깨달음이 현실이 되면 또 하나의 원수가 발아래로 가고 사망이 쏘는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 앉아서 쉬게 될 것입니다. 내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우리가 악한 습관을 없애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미 이 습관을 이시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면 됩니다. 중독의 문제가 있습니까? 내 힘으로 끊겠다고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미 중독을 없애셨으니 나는 주 안에서 안식합니다. 중독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면 “주 안에서 안식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의인이니 주 안에서 안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존자와 전능자의 품 안에서 보호하심을 받게 되고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못 박히셨을 때 우리도 함께 못 박혔다고 말씀하십니다.(갈2:20)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 보좌에 앉으셨을 때에 우리도 또한 함께 앉았습니다. (엡2:5-6)우리는 주 안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모든 것은 2천년 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제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죄를 모르고 죄를 짓지도 않으시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완전한 분노를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구약 시대의 제물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인 엘리야는 발알 선지자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돌 제단을 세우고 하나님께 제단을 불사를 불을 주시길 기도했습니다.(왕상18:31)
그 제단 위에 제물을 올려 놓은 뒤 물을 가져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통으로 3통이나 갖다 부으라고 하니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이 흥건히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불을 내려 주시길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불은 모든 것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제물 뿐만 아니라 12개의 돌 마저도 사라졌습니다.(왕상18:38)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심판이 제물보다 더 강함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에선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의 모든 심판과 저주와 정죄함을 예수님이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심판과 저주를 친히 몸으로 다 흡수하시고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랬음에도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이 모두 끝난 후에도 예수님은 고개를 들고 아버지라고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버지로 부르셨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큰 소리로 외치신 후에 고개를 숙이셨죠.
이것이 권능입니다. 숨을 내 쉬셨고 그 영을 내려 놓으셨죠.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심판을 받으신 후에도 견디셨습니다. 은혜 아래에서는 제물이 하나님의 심판보다 더 강했습니다. 이제 마무리 짓겠습니다.
몇 년 전에 저는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통해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보여주신 진짜 모습이죠. 그런데 더 중요한 일은 오래 전에 환상으로 이 모습을 보았는데 영의 환상이어서 실재보다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물질을 모두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영적인 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그린 모습은 영적인 심판을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볼 눈이 있다면….몇 년 전에 저는 기도 중에 봤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로 폭풍처럼 회오리 바람처럼 점점 더 거세게 폭풍 같은 것이 커지더니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 쪼개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흡수하셨지요. 그 폭풍 속의 죄와 정죄함과 저주와 질병 등 모든 것이 바람처럼 예수님의 몸에 흡수가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생각하길 “언젠가는 꼭 이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보여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누가 만들었으면 하고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사이에 최고 영화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제작 되었습니다. 지금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영화가 개봉된 후 어떤 분들이 이러더군요. “그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너무 끔찍한 짓을 저질렀어” 영적으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저지른 악행이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죄 때문 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화를 낼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인든 이방인이든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죠. 사람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끔찍하다고만 말합니다. “로마인들이 저지른 짓 좀 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진 줄도 모르고 말이죠.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이해가 영화만으로는 부족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 이 말씀을 드리다가 하나님께서 이러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네가 십자가 위 영적인 심판을 영상으로 만들거라” “하나님 재원을 주시면 만들겠습니다. 그것이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교회 “크리에이티브 팀”에 이 영상물 제작을 요청했습니다. 이 분들은 제가 영으로 본 것을 정말 영심히 영상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제 마음에 안 차는 모습이어서 스케치를 계속 재 구성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전에는 이렇게 까다롭지 않았지만 이 영상은 제가 본 것과 똑같아야 했거든요.
음악 이나 특수 효과에서도 제가 영으로 본 모습과 똑같아야 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스케치를 수정하고 드디어 최종 산출물이 나왔습니다. 마지막 결과물에 대해서 꼼꼼히 보았습니다. 영적 환상 가운데 음악도 들었거든요.
모든 작업이 끝이 난 뒤에 제게 어떤지를 묻더군요. 몆 가지 조금 더 고칠 것이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영적 환상으로 보았던 것과 최대한 흠사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들이 오늘 처음으로 이 영상을 보시는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보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편히 앉으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당시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 꿈이 이뤄졌네요. 단순히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보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내하셨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종교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며 규칙과 법칙을 주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옷처럼 입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이 받지 않으면 허사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강권하여 용서받게 하시거나 여러분을 억지로 사랑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여러분을 억지로 죽음을 이기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사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사랑하사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사랑과 용서가 가득한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승리의 집으로 돌아오라 부르십니다. 여러분 중에 “저는 이렇게 멋진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삼고 싶습니다 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공로를 진심으로 믿고 이 기도를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를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도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길을 잃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도 예수님은 날 사랑하셨습니다.
아들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 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사 나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시고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내 모든 죄가 사함 받았음을 감사드립니다.
마귀는 패배하였고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부터 영원히 내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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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강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게 되다 “
ha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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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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