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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명에교수이신 한실 이상보 박사님이 2020년 10월 21일 세브란스병원에서 돌아가셨다. 1927년생이시니 93세시다.
이상보 교수 별세, 이훈승(포스코인터내셔널 자문역)·사라씨(서울과학기술대명예교수)·숙영(중앙대 명예교수)·화익씨(이화익갤러리 대표) 부친상, 이이정씨 시부상, 정진홍(서울대 명예교수)·김을수씨(꿈의교회 담임목사) 장인상=21일 오후 5시 세브란스병원. 발인 23일 (02)2227-7580
새 길을 떠나는 아침처럼 사시는 인정과 지성의 수필가 한실 이상보 박사
최원현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었다. '햇살이 환장하게 쏟아지고 있다'라고.
아마 이럴 때를 두고 한 말일 것 같다. 늦가을 햇살이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눈부시게 쏟아지는 오후였다. 아직 다 익지 못한 어떤 열매에도 이 햇살만 닿으면 금방 익어버릴 것 같은 참으로 빛 부신 햇살이었다.
새 천년의 첫 해도 벌써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타까움처럼 하늘도 여느 때의 서울 하늘보다 높고 맑았다. 이런 우리 나라의 하늘을 보면서 외국인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는데 오늘 나 또한 밝은 햇빛, 맑은 하늘에 이렇게 흠뻑 취하고 반해 있다.
마음이 맑으면 매사에 의욕이 넘쳐나는 법이다. 그래서 천성이 맑고 부드러운 이들을 보면 삶 또한 그렇게 평안해 보이고, 하는 일마다 무리 없고 순리롭다. 해서 그런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참으로 편안한 순간들이 되곤 한다. 그런 분들에겐 스스럼없이 존경심이 우러난다. 한실 이상보 박사가 바로 그런 분이시다.
평생을 교육의 일선에서 정성과 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으시고, 우리 나라 가사문학의 연구와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신 고문학자이시다. 선생님을 뵐 때마다 언제쯤 조용히 찾아 뵙고 선생님의 삶의 체취도 느껴보고, 삶의 현장도 보면서 좋은 말씀을 들어야지 했지만 좀처럼 기회를 만들 수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어디다 비할 수 있겠는가.
선생님 댁은 스위스그랜드호텔을 끼고 오르막을 올라 이르른 아파트였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여 전화를 드리니 기다리고 있노라 하신다. 엘리베이터로 10층까지 올라 벨을 누르니 개량 한복차림의 선생님께서 반갑게 문을 열고 맞아 주신다.
워낙 풍채가 좋으신 데다 그렇게 입으시니 여간 잘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오랜만이라며 내미시는 손에 내 손을 갖다 대자 큼직한 손안에서 내 손은 간데 없고 따스한 선생님의 체온만 내 온 몸으로 전해져 온다.
오늘도 교회 행사로 멀리 다녀오실 일이 생겼는데 나와의 약속 때문에 사모님만 가셨다고 한다. 송구스럽기 그지없는데 손수 차를 끓이시고 과일까지 깎아 내오신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시는 선생님의 자상함이 차 맛에서도 짙게 풍겨나는 것 같다.
차를 마시며 집안을 둘러보니 큰 글씨 액자들이 벽면에 여럿 걸려있고, 집안은 참 편하게 꾸며져 있다. 아니 꾸몄다기보단 그렇게 자리잡힌 모습이었다. 작은 방 하나와 건너 방인 조금 더 큰 방 하나를 함께 서재로 쓰고 계셨다. 특히 선생님은 고서화와 좁쌀책(미니북)의 수집가이신데 고서는 그렇더라도 그 큰손으로 좁쌀 책을 모으시는 것은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우스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집안의 여기 저기서 선생님의 취향에 맞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선생께선 전라도 장성의 한실 마을 태생이시란다.
"나는 1927년 9월 18일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의 한실이란 마을에서 경주 이씨 덕우(李德雨)님과 함평 이씨 외동(李外東)님의 5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어요. 아호는 죽헌(竹軒)을 쓰기도 하나 태어난 마을이름인 '한실'을 더 즐겨 쓰고 있지요. 1952년 한양 조씨 은임(趙銀任)과 결혼 3녀1남 4남매를 두었습니다.
학교는 관립 광주사범 강습과, 단국대 정치학부,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중앙신학교 신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에서 '박노계 연구'로 문학석사, 명지대에서 '한국가사문학의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울 정신여고 교사와 명지대 교수, 명지여고 교장을 거쳐 국민대학 교수로 정년을 맞고 현재 국민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노산문학회 부회장과 한국기독교수필문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수필문학회장,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장의 일을 맡고 있습니다.
수필집으로는 <사색의 편린>(1965), <초원의 백마>(1971),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불빛 하나>(1980),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1984), <눈을 감고 바로 보기>(1992), <떠나기 연습>(1997), <갑사로 가는 길>(1999) 등이 있으며, 정년기념 시문집 <사랑의 꽃잔치>(1997)와 여러 권의 전문 저서가 있습니다."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정겨움이 깊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인연이라 하지만 딱 한 번 손을 잡아도 십년 지기처럼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믿음이 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마음을 편안케 해주는 문학도 있다. 한실 이상보 박사가 쓰는 수필이다.
'문학은 인간의 심성을 정화하고 미화하고 상승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수필가 김병권 선생이 했던 말처럼 한실 이상보 박사야말로 품성과 문학이 서로 보완하여 상승효과를 내는 분이다. 타고난 성정에다 문학은 그의 심성을 더욱 정화하고 미화하고 상승시키는 작용을 하고있는 것이다.
한실 선생은 처음엔 시를 쓰셨다고 한다.
"1948년부터 시를 발표했어요. 그러다가 1957년 박연구 선생이 내던 <수필>지에 수필을 발표하게 되면서 수필을 주로 쓰게 되었어요" 어쩌면 선생께서 가사문학에 빠지게 된 것도 시와 수필을 쓰신 연유에서일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렇게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고 한다.
'슬하에 1남3녀를 거느리게 된 그는 가솔들의 생계문제만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더구나 자신의 만학으로 인한 대학과 대학원 등의 학비를 조달해야 했으니 그 얼마나 힘겨운 세월이었겠는가.'(김병권의 '선비의 전형 이상보박사' 중)
그러나 선생은 늘 감사하며 사셨고, 만족할 줄을 아는 분이었다. 살아오시며 특별히 기억되시는 행복했던 순간이나 추억되시는 일이 있으시냐고 했더니
"광주 수피아여고 교사시절인 1952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그곳 동부교회에서 결혼하고 다음 해 첫딸 '사라'를 낳아 기르며 살던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하신다.
앨범 속에서 보는 50여년을 함께 하신 사모님과의 모습들은 오히려 남매같아 보였고, 그 때의 딸 '사라'는 두 아들의 어머니로, 문학박사이며 시인으로 서울산업대학 교수라고 한다.
선생은 참 수필을 재미있게 쓰신다. 그 재미는 인간애가 바탕이 된다. 작품의 제목에서부터 호기심을 유발시키며,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독자를 궁금증으로 끌어들이곤 적당한 해학으로 완전히 독자를 사로잡아버린다. 선생의 수필구성 특징이다. 선생께선 대표작으로 5편의 수필을 꼽으셨다. <갑사로 가는 길>, <짜장면 교수>, <괌에서 겪은 일>, <국추>, <얼빠진 사람들>인데 모두 재미가 넘치는 작품들이다.
문학성을 충족시키면서, 수필이 읽혀지는 문학이 되게 하기 위해 애쓰는 작가의 마음씀이 작품에서 넉넉하게 드러난다. 작품마다에서 풍겨나는 인간애는 맛깔스러움을 더한다.
'여보게, 내가 그동안 늘 짜장면만 청했던 것은 자네들 주머니 사정을 봐주노라 그랬지 내 입맛이 짜장면밖에 몰라서 그런 건 아니야. (중략) 만약에 번번이 비싼 음식을 청했다면 자네들이 나를 스스럼없이 불러낼 수 있었겠는가? 아마 한 두 번 먹여주고 다시는 초대하지 않았을 걸.' (짜장면 교수)
'내가 그 비장본을 구하러 왔다고 하자 여주인은 한쪽 포장을 젖히고 안으로 이끌었다. 아뿔사! 그곳에는 이른바 포르노책들이 즐비하게 쌓여있지 않은가?'(괌에서 겪은 일)
이 얼마나 진솔한 표현인가. 그래서 선생의 수필은 재미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뿐 아니라 기행수필들을 보면 또 얼마나 섬세한 분인가를 알게 된다. 하찮은 작은 것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게 없다. 수필이 체험에서 비롯된 삶의 이야기임에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새롭게 재미를 주는 것 그것은 바로 선생이 한 경지에 이른 수필꾼(?)임을 증명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무언의 교훈이기도 하다.
선생께선 번역도 많이 하신다. 그래서 외국수필과 우리 수필이 다른 점과 특별히 우리 수필문학의 단점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지 여쭤봤다
"외국 수필보다 한국수필은 신변잡기가 많습니다. 우리 수필도 사회적, 객관세계로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그리고 디지털시대를 맞은 만큼 우리 수필가들도 개인적 관심사에서 공동적 관심사로 전환을 해야 하며, 그리하여 공동체 의식의 작품을 많이 써야 합니다" 하신다.
여타의 모든 문학이 변하고 있는 것처럼 수필도 변해야 하리라. 무엇보다도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문학의 고유 장르가 해체되어 버리는 기 현상이 올지도 모른다. 종이 책이 없어지고 멀티미디어 성격의 하이퍼 텍스트가 새로운 문학 양상으로 자리를 잡고, 읽는 문학에서 보고 듣는 문학이 주를 이루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수필가 김학선생은 '수필은 변해야 한다. 미래문학이라는 수필은 더 빨리 변해야 한다. 독자의 의식과 취향이 변하는데 옛것만 고집하면서 그들을 수필의 마당으로 불러모을 수는 없다. 독자를 뒤쫓아가서는 안된다. 앞에서 독자를 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독자를 선도할 수 없으면 그 작가는 이미 문학 본연의 사명도 책임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선생께서 염려하신 것도 바로 그런 것인 것 같다. 독자가 변하는데 작가가 변하지 않고 있으면 그야말로 문제가 아니겠는가. 한실 선생의 수필이 모든 계층에 크게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도 수많은 여행과 쉼 없는 학문의 탐구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진솔함과 박학다식함과 인간애로 합성되어 빚어지기 때문에 이만한 연세에도 젊은이들까지 독자로 끌어들이는 선생만의 매력이 되고있는 것이다.
선생께선 문학세계에 대해 "나는 교육자로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내 수필에는 교훈적인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특히 자연이나 서정보다는 인간의 문제에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라고 하신다.
문학세계! 그것은 곧 작가의 사상이요 삶이 아닌가. 교육자요, 시인이요, 수필가요, 기독교회 장로인 이상보 선생, 그중 한 가지 만으로도 가장 인간다울 수 있겠거늘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이 여러 호칭들은 이상보 선생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그리고 앞으로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어느덧 일락의 시간을 맞는다. 그렇게 장시간 말씀을 들었는데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선생께 우리 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수필문학 발전을 위한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무엇보다도 동인회의 활성화로 범 문단적 지위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등단하는 작가에게는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선생께선 너무나 짧게 말씀을 하셨지만 요즘 우리 문단을 볼 때 등단이란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필요 이상의 등단지 구입이라든가 신인상이란 이름으로 문학지마다 단 번에 수명씩을 양산해 내는 등단제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말하고 계심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 않는가.
이 땅에 작가를 탄생시키는 어머니로서의 문학지는 배출시키는 작가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그리고 배출 후도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지원하고 격려하고 채찍질하여 그들이 명실상부한 작가로써 문단을 지키고 발전시켜가게 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서 문단에서도 얼마나 안타까워들 하고 있는가. 그렇기에 선생께서는 동인회의 활성화를 강조하신 것 같다. 끊임없는 자기 발전과 자기 완성을 위한 공부를 통해서만 홀로서는 작가, 자기 몫을 하는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대학박물관 후원하에 열기로 한 전시회에는 그래도 돈황 막고굴과 명사산의 모래까지 넣어서 족히 백여 점에 이를 것이다. 그것들을 먼저 내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보여주며 옛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어야 할 것만 같다.' (옛 그릇을 어루만지며)
선생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모은 문물들을 통해 강단에서 전할 수 없는 산 교육을 전시회를 통해 전하고 있는 스승의 사랑이 가슴 찡하도록 전해져 온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시간과 돈과 정열을 쏟아 모은 것들이다.
'서안에서 산 글씨며 비림의 탁본들, 또 난주에서 산 그림과 글씨들, 돈황 역사박물관과 그곳 화랑에서 사들인 서화폭이며, 청나라 적의 다구 일습 그리고 또 북경의 만리장성과 유리창에서 손에 넣은 포전과 도전을 비롯한 한대와 송대의 옛 엽전들과 상해의 고서점에서 찾아낸 옛 책들' 그것은 단지 개인을 위한 수집 취미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역사의 소중함과 옛 것을 통해 선열들의 지혜를 배우므로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열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여행 중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여 얻어낸 좁쌀책들을 펴 보이며 설명해 주시는 한실 선생의 모습은 갖고싶었던 것을 가슴에 안고 기뻐하는 아이 마냥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앞으로 하고싶으신 것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힘써야 합니다. 곧 많은 좋은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해서 수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고싶은 것은 기행수필집을 좁쌀책(미니 북)으로 몇 권 내고자 합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한국문학의 세계화, 말로는 얼마나 많이 해 왔던가. 그런데도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선생께서 보시기에도 안타까우셨을 게다. 그러나 어느 한 개인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잖는가. 하루속히 내실과 외실을 겸하는 우리 문학이 되었음 싶다. 선생은 이미 지난 99년 10월에 <인도차이나 역사기행>이란 제목으로 좁쌀책을 출간한 바 있으시다. 하지만 현실적 여건이 선뜻 출판을 맡아줄 출판사가 선뜻 나서주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하시면서도 이에 대하여 상당한 의욕을 보이고 계셨다.
일흔을 훨씬 넘기셨음에도 늘 청년처럼 젊음으로 넘치시는 분, 선생은 봄처럼 아니 봄의 마음으로 사시는 분이셨다.
아쉬운 마음으로 선생 댁을 나서 차에 오르다 문득 선생의 수필 한 부분이 생각나 책을 펼쳐보았다.
'봄은 미움보다는 사랑으로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린다. 봄처녀의 화사한 정감으로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봄은 눈부신 햇살과 함께 아침에 찾아왔다. 어서 일어나라 한다.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일터로 나가라 한다. 오직 새로운 희망을 안고 다시금 처음부터 시작하라고 소근거린다.' (봄이 오는 소리)
그렇게 늘 새로운 희망을 안고 다시금 처음부터 시작하는 선생이고 보니 어찌 젊지 않을 수 있으랴. 한실 이상보 선생은 언제나 그렇게 봄처럼 싱싱한 푸르름과 젊음으로 새로운 기대 가득 새 길을 떠나는 아침처럼 그렇게 사시는 인정과 지성의 수필가였다.
< 수필과 비평> 2000. 11.12월호 '작가가 만나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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