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서흥김씨 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자
다음의 글은 김훈식 교수의 ‘寒暄堂의 講學 활동과 門人들’입니다.
한훤당 선현의 당시의 강학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내용들입니다
2012년 영남문화연구원 추계학술대회에서
‘寒暄堂의 講學 활동과 道學’이라는 주제로 발표된 내용입니다.
「한훤당의 강학 활동과 문인들」과 「강학활동을 통해 본 도학의 특징」이라는 부제목의 글을
김훈식교수의 논문의 글에 추가하여 2회로 나누어 올립니다.
寒暄堂의 講學 활동과 道學 1. 머리말 | |||||||||||||
3. 한훤당의 강학활동과 문인들
그의 강학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기록은 추강 남효온의 「냉화(冷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문인(門人) 이적(李勣)은 「行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심원(李深源) 역시 한훤당의 강학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경현록』에 실린 이심원의 시 「贈金大猷」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1492년(성종23)에 남효온이 죽고, 그 2년 뒤인 1494년, 김굉필은 마흔의 나이에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또 32세 때는 스승인 김종직을 풍간(諷諫)하는 시를 보낼 정도로 자립하는 견해가 있었기에 스승으로 자임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인다. 이에 따르면 이장길은 그의 동생 이장곤(1474-1519)과 함께 한훤당에게 배웠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한훤당은 그들 형제가 살고 있는 창녕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고 했다. 창녕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현풍이니, 이장길 형제는 한훤당이 현풍에 거주하고 있던 시기에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훤당은 호현방에 있는 본가 이외에 한양 서쪽에 별서를 갖추고 있었고, 그곳에서 강학하고 있었다. 아마 「사우명행록」에 보이는 문인들 가운데 이장길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거의 한양에서 길러낸 제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흔히 영남의 사림파라는 개념 때문에 김종직이나 한훤당의 문인들의 출신 지역을 영남 중심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가르쳤다고 했으나, 남효온의 글에서는 ‘쇄소의 예를 행하고 육예의 학문을 닦는 사람이 앞뒤로 가득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벗인 정여창(鄭汝昌)이 강학을 그만두도록 권할 정도였다.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첫째는 한훤당의 강학이 상당히 활발하여 많은 수의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강학에 대한 비방은 그 사회적 영향력의 파급을 우려한 것이다. 사학(私學)은 규제의 대상이 아니었고, 사학을 통해 많은 수의 학생을 가르친 선생들은 칭송의 대상이지 비난의 대상은 아니었다. 따라서 한훤당에 대한 비방은 단순히 학생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한훤당의 강학이 당시의 일반적인 강학과는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 내용이 문제가 된 것으로 보야야 할 것이다. 결국 한훤당의 강학 내용에 대해 우려를 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그러한 강학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선비들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 강학 내용의 특징이 무엇인지는 이후 설명하기로 한다. 물론 한훤당은 정여창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강학을 계속하였다. 정여창의 염려에 대해 한훤당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남효온은 한훤당이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고 했다. 이는 한훤당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구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해도 괜찮다. 그는 생원시 급제 이후 과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고 하듯이 한훤당의 명성이 퍼져나갔고, 그 결과 남효온 사후 1년 만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나가에 되었다. 기대승이 찬한 「행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역불폐강수(亦不廢講授)’라는 구절을 통해서는 그가 사로(仕路)에 나선 이후에도 여전히 강학을 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우명행록」에는 보이지 않는 제자들 가운데 이후 유배지에서 만난 제자들 몇몇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부분은 이즈음에 한훤당에게 수학한 문인들도 보인다. 학생들이 그에게 찾아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가운데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1462-1538)의 자제도 있었다. *註16) 당시의 대표적인 세가 출신이었다. 앞서 김종직·한훤당의 문인들을 영남지역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은 영남사림파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선입견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림파와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연관성 때문에 이들의 문인을 재지사족 출신 중심으로만 닌식하는 것 역시 선입견이다. 사림파가 재지사족의 계층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졌다는 사실과, 그들 개개인이 재지사족 출신이라는 사실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한양의 세가대족(世家大族) 출신인 조광조가 제지사족의 계층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안국(金安國) 형제와 유우(柳藕 1473-1537)를 들 수 있다. 김안국(1478-1543)의 「행장」에는 그가 15-6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한훤당을 찾아가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또 김정국(1485-1541)은 어릴 때 한훤당에게 배웠다고 했다. 이들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한훤당에게 수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빨라도 1594년 전후 일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한훤당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로(仕路) 에 나서기 시작한 시기 전후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들 형제보다 연장자인 문인으로는 유우가 대표적이다. 유우에 관한 기록에는 한훤당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갔을 때(1498년) 그의 나이가 겨우 약관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20세 전후부터 한훤당에게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국과 유우의 나이 차이를 본다면 약10세에서 20세에 걸친 학생들이 벼슬살이 할 당시 한훤당의 새로운 제자로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실린 이현손의 「奉送金先生大猷奉大夫人歸玄風」라는 시이다. 그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마음을 내보인 시이다. 한훤당이 현풍으로 내려 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남효온 사후인 것은 확실하다. 『경현록』에 실린 「연보」에서는 이 시기를 성종24년으로 비정하고 있다. 물론 그 근거는 없다. 필자는 오히려 2년 뒤인 연산군 1년 무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되었고, 그 편지 가운데 ‘김굉필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고 했다. *註17) 그 편지에는 근일에 정석견(鄭石堅)이 동지성균(同知成均)에서 파직되었고, 이철견(李鐵堅)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자는 사실도 아울러 전하는데, 그 시기가 연산군 1년이다. 따라서 김굉필이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난 것도 이즈음의 일로 볼 수 있다. 사직장을 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벼슬에 임명된 이후여야 하고, 한훤당이 벼슬에 임명된 것은 성종25년, 즉 연산군 즉위년의 일이다. 그해 한훤당은 남부참봉, 전생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시골로 내려갔으며 이후 6품에 서용되면서 군자감주부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이현손의 시는 그즈음에 지어진 것으로, 한훤다의 강학에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활동에 문제가 생겼음을 암시한다. 그 문제는 종자(從子), 즉 한훤당을 따르던 문인들 사이에 ‘各分散’, 즉 분열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분산의 원인은 ‘利慾’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장길(李長吉)이라는 인물을 통해 위의 사태에 대해 어느정도 짐작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경현록』의 「사우문인록」에는 이장길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창도했을 때 함께 따랐던 제자들이었고, 남효온이 ‘그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이 그 스승과 같았다.’고 칭찬했던 제자들 가운데 포함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장길은 출사에 급급하여 학문의 길을 포기했고,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지닌 간신에게 밀붙기까지 했다. 이현손과는 가는 길이 전혀 달라져 ‘各分散’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다. 이현손의 시는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소지가 농후했고, 그러한 문제를 둘러싸고 문인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이미 김종직은 과거 응시를 중시했으나 그 문인들 사이에는 과거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인물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생겼다면, 한훤당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라는 점이다. 이후 유배지에서까지 강학을 멈추지 않았던 사실에서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이루어진 한훤당과 조광조와의 만남은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전라도 순천에 이배(移配)된 이후에도 한훤당의 강학활동은 계속되었다. 흔히 말하는 호남사림과 한훤당의 만남은 이 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류희춘의 부친인 류계린(柳桂隣)을 들 수 있다. 갈등에서는 자유로웠을 것이다. 한훤당과 같은 유배 죄인에게 배운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별한 학문적 성향을 받아들인 다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광조가 특별히 한훤당을 찾아가 배운 것은 한훤당의 강학이 가지는 특징을 잘 알았고, 그러한 강학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유를 기용함으로써 교육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조광조 세력은 오히려 유숭조의 교육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註19) 조광조의 유승조에 대한 태도는 다음의 글에 잘 보인다.
조광조는 유숭조가 사유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많이 오았던 사실을 국고만 허비한 것으로 평가한다. 사유로서의 유숭조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 대신 조광조는 김굉필과 같은 사유만 있다면 교육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생각하고 있었다. 유숭조의 강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면서 한훤당의 강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이유는 두 사람의 강학이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 두사람 가운데 한훤당의 강학이 올바를 강학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조광조의 입장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배지의 한훤당을 따랐던 문인들 모두에게 공통된 입장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계속)
|
*註11) 『景賢錄·上』 「事實」 아뢰기를 “治亂이 모두 학술에 달린 것인데, 지금 성상께서 도학에 마음을 두어 부지런히 다스리기를 바라시니 참으로 우리 백성의 복입니다. 前朝 때 鄭夢周의 理學은 우리 동방의 宗主이며, 이조 金宗直도 또한 그런 사람인데, 이 두 사람의 풍도를 들은 사람은 지금도 사모합니다. 근자에 柳崇祖의 학문은 章句만 아는 학문이요 몸을 다스리는 학문이 아니니, 임금께서 반드시 도학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아랫사람들이 바람에 풀이 쏠릴 듯하여, 士習과 風俗이 반드시 저절로 고쳐질 것입니다. |
☞출처 : 2012년 영남문화연구원 추계학술대회 '한훤당 김굉필 학문의 연구방법론적 모색'
김훈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 전자우편 histhoon@inje.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