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한류의 기수 조선통신사, 문명의 젖줄을 흘려보내다
문화는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언제나
한쪽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서로 주고받으며 원처럼 돌고 도는 것이, 문화가 물과는
다른점이다. 한일간의 문화교류는 중세 이전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일방적
으로 흘러갔었으나, 임진란 이후 일본의 문화도 한반도에 적잖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문화의 흐름을 주고받는 큰 통로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통신사였다.
제 2차 조선통신사 행로를 더듬어 그들이 어떤 역할과 기능으로 한일간의
문화 흐름을 순환시키며 서로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260년간의 선린, 양국의 문화 가교가 되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은 원수가 되었으나 1607년 다시 선린
관계를 맺었다. 지금의 정서라면 100년간은 담을 쌓고 살 철천지원수 관계
였으나 일본 측이 선린을 강력하게 원한데다 조선도 쇄국을 원하지 않았기에
서로의 관계를 새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이 동방의 강국으로 나선 메이지유신 전까지 260여 년간 양국은
비교적 원만한 친선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동안 조선은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 일본인들의 상주를 허락해 주었고 평균
5백명 이상의 일인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반면 조선에선 일본에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의 조선통신사 (정식
으로는 9회) 를 보내 문물을 교류토록 했다. 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지도자인
쇼군이 바뀌게 되면 정례적으로 통신사를 요청한 일본 측의 강청으로 이루어
졌다. 왜관이 설치되고 통신사가 오가는 동안에 양국의 무역이 늘어나면서,
고추와 호박, 담배, 고구마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우리가 즐겨 먹는 식품들이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은 경제와 문화의 순환이
일방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나라에선 학문과 법례, 제도 전해졌다. 또 문화인들(학자와 예술인, 의료인
등 전문가 집단)이 일본에 들어가 신지식을 전해 주었다. <동의보감><의방유치>
등의 전문서적들이 이 때 전해졌고 여기엔 인문서적도 다수 포함되었다.
이 때 전해진 퇴계 이황의 학문과 철학은 조선학 한류 붐을 일으켜 퇴계는
학문의 신처럼 받들어졌다. 그에 대한 학문적 숭상은 계속되어 일본에선 지금도
퇴계 연구자들이 나올 정도다.
또한 면화는 한일교류사에서 우리가 베풀어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문익점이 어렵게 들여온 면화는 당시 한반도에서 크게 번창, 확산된 상태라,
일본이 그렇게 오래도록 탐을 낸 중요 자원이었다.
일본 전역이 감동과 성심으로 받은 조선통신사。
정사와 부사 등 3백 명 이상 많게는 5백 명까지 이루어진 조선통신사 여행로는
목숨을 건 길이었다.
왕복에 열 달 정도 걸렸고 수륙 일 만리의 험로를 헤쳐가야 했다. 육로를 통해
부산 영가대에서 배를 탄 2차 통신사(1617)의 경우, 479명이나 되는 일행이 6척
의 배를 나누어 타고 출발해, 쓰시마섬을 거쳤다.
이 때 일본 배를 빌려 조선에 무사 도착을 알리는 인편도 보냈으니 준비와
보고가 철저한 편이었다. 일본 측에선 봉화로 통신사 도착을 알렸다.
통신사 일행은 이키섬을 거치며 일본 측 영접선 100여 척의 환대를 받고
하카다 앞에 있는 아이노시마라는 작은 섬을 통해 시모노세키로 들어갔다.
이들 접대에 닭 천마리, 계란 만 개가 준비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통신사가 거치는 지역의 수령들은 이들을 접대하고 공궤하는데 막대한 인력과
재정이 들어가 중앙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민간의 배를 강제 징발하는 등
난리를 피기도 했다.
이제 통신사 일행은 영접선과 함께 610척의 배와 인원 2,900명으로 늘어난
대선단이 되어 있었다.
대륙의 길목에서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중심부로 들어서는 세토나이 해협을
따라 가미노세키와 후쿠야마 앞을 지나 오카야마 앞의 우시마도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일본인들은 통신사 일행의 짧은 숙박동안 조선인들을 만나 문물을
익히고 배웠다.
선진문화를 마음껏 즐기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들의 다음 목적지는 오사카
였다. 호사스런 오사카 문물에 조선통신사 들이 놀라고, 한편으로는 극진한
대우에 감사하기도 하는 모습들을 여행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사카에선 통신사의 배를 남겨두고 일본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군 배들에
옮겨 타 요도가와 강을 거슬러 요도에 도착, 그 다음부터는 육로로 길을 나갔다.
다음 목적지는 교토였다. 교토의 백성들이 쏟아져 나와 통신사 일행을 구경
하고 통신사는 통신사대로 교토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일본 문물을 구경하는
놀라운 장면들이 계속되었다.
이들은 다시 비와호를 끼고 육로로 움직여 히코네까지 나갔다. 히코네에 들어
서는 30킬로미터의 길은 통신사로 인해 조선인가도로 이름 붙여졌다.
다음 목적지는 나고야였다. 하천이 많은 곳이라 일본의 쇼군은 이곳이 임시
가설 다리를 275척의 배로 만들어 붙여 일행이 건너가게 하는 환대를 보여주었
다. 그림으로 남겨진 이 당시의 광경이 장관이다.
이들은 다시 지금도 온천으로 유명한 하코네를 거쳐 최종 목적지 에도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정사 일행은 마침내 일본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만나 선린
외교를 펼치게 된다. 일본 열도에 한류의 문명 젖줄이 전래되는 역사적 장면
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우익 사학자들은 통신사가 조공행사였다고 강변하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 번의 통신사 행차에 일본 측이 무려 100만냥의
돈을 쓰고 33만 여명의 연인원을 동원 환대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 알 수 있다.
조선통신사는 가는 곳마다 큰 환영을 받았고 숙소 마당에는 일본 전역에서 몰려
온 학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통신사 일행 아무도 이들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고 성심으로 대했다.
조선의 고급 문화와 예도를 몸과 마음으로 보여준 소통의 장이 이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박기현/소설가 언론인 역사 관련 저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