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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의 국가 産業行政체계 개혁론
1. 머리말
2. 産業․技術 開發論
3. 專擔 개발 행정론
4. 專業 久任 責成論
5. 作動의 점검 ; 考績論
6. 맺는 말
1. 머리말
儒學 經傳을 기본 텍스트로 하는 朝鮮 후기의 實學은 王政이라는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실현하는 데에다 주된 목표를 두고 추구하였다. 茶山 丁若鏞(1762∼1836)은 실학의 집대성자로 일컬어지는 전형적인 국가개혁론자였다. 그가 구상한 이상적인 국가체제는 우선 정확한 國勢의 파악을 토대로 하고서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田地 經界를 바로잡지 못해서 숨기고 누락된 것이 半數나 되니, 소위 몇 結이라고 되어있는 것은 實數가 아니다. 戶籍을 밝혀내지 않아서 가리고 冒錄한 것이 점차 불어나니 소위 몇 戶라고 하는 것이 모두 虛名이다. 隱結을 田案에 올리고 陳結을 덜어낸 다음에야 실지 結數를 알 수 있으며, 漏戶를 잡아내고 虛名은 삭제한 다음에야 실지 戶數를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政事를 거행치 않으면 온갖 일이 모두 막혀서 그 사이에 손 하나 쓸 수가 없다(經世遺表 4-9 天官修制 郡縣分等).
그래서 그의 국가개혁론의 기초가 되는 井田制論은 田地를 기준으로 하고 거기에다 戶口를 배치함으로써 田地와 戶口를 유루 없이 파악한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음이 특징이다. 기초부터가 그러니, 그의 개혁론은 정치제도・행정조직을 비롯한 국가체제 전체를 전반적으로 새롭게 편성한다는 복잡한 내용을 이루게 되었다.
이 연구는 다만 그 가운데의 産業行政체계의 改革이라는 측면에 국한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茶山 실학은 지나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이상적인 역사를 창출하려는 것이므로 産業 여러 분야의 개발 또한 우선적으로 국가정책을 통해서 행정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産業과 技術의 개발 뿐아니라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산업 여러 분야의 새로운 편성과 인력의 배치 또한 주로 국가행정력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다산 실학의 큰 특징이다. 구래의 국가라는 것은 주로 收奪機構였으며 그 행정이라는 것이 결코 收奪行政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산의 새로운 王政論에서는 국가 행정력을 통해서 각종의 산업을 개발하고 산업기술을 적극 활용한다는 것으로 고안되어 있다. 즉 중앙의 산업행정기구가 새로운 개발과 기술의 수용을 통해서 모든 분야의 산업생산력을 극대한으로 발전시키고, 다시 이를 전국의 지역행정 단위에다 널리 전포하여 하여금 적극적으로 편성 배치 개발토록 함으로써 결국 국가를 부유하게 하고 그 臣民의 삶을 극히 풍요롭게 만든다는 의도적인 개혁론을 제기하였다. 물론 그 모든 개혁의 근원이며 추진력으로서의 王權의 본질부터 새롭게 정립해야 함을 전제하고도 있었다.
그의 산업행정 개혁론은 물론 19세기 초 조선왕국의 現實을 바탕으로 하고서 구상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당장에 모두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장차 井田制를 기초로 하는 국가체제 전체의 개혁을 기다려서야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理想論인 것임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2. 산업․기술 개발론
다산이 살던 19세기 초의 조선왕국에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미 상업적 농업이 자못 번성하고 있었다.
서울의 안팎이라든가 번화한 큰 도시에서는 파밭・마늘밭・배추밭・오이밭이 10畝의 땅에서 數萬錢의 돈을 헤아린다. 西路의 담배밭・北路의 삼밭・韓山의 모시밭・全州의 생강밭・康津의 고구마밭・黃州의 地黃밭은 上上等의 水田과 비교해도 그 利가 10배나 된다. 근년 이래로는 人蔘 또한 밭에다 심는데, 그 남는 이익을 따지자면 혹 千배나 萬배가 된다. 이는 田地의 등급을 가지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비록 항상 심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紅花와 大靑은 그 利가 심히 많다. 오직 木綿밭만이 五穀 보다도 5배의 利가 있을 뿐이 아닌 것이다(같은 책 8-17 田制 11 井田議 3).
조선 후기에는 사회 제분야의 分化와 分業이 점차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으며, 都市 인구의 증가현상 또한 점차 커지고 있었다. 사료는 각 지역에 적의한 농산물이 경쟁적으로 개발되면서 特産化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들 특산물은 모두가 集約的 營農을 통해서 일반 穀物농업 보다는 강한 시장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들이다. 특산물의 개발과 그것의 집약적 경영은 모두가 營農者들의 자기 책임 아래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도인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상업적 농업은 국가 행정력을 통해서 진흥시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자율적인 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대도시 중심의 상업적 농업을 제외한 여타 지역의 일반 산업은 어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내가 오랫동안 민간에 있으면서 보니 농가에서는 채소를 전혀 심지 않아, 파 한뿌리・부추 한 단도 사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시골 풍속이 고루하고 서툴러 채소 심을 줄을 모른다고 여겼다. 오래 살펴보니 대체로 농가에는 채소 심을 땅이 없고 여가도 없어서 농사와 겸해서 재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당으로 남새밭으로 번갈아 써서 땅에는 빈 곳이 없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므로 사람은 한가한 날이 없다. 農・桑 두 글자는 예로부터 아울러 일컬어져 오는 것이지만, 그 실상을 살펴보면 농사짓는 자는 양잠을 하지 않고 양잠하는 자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진실로 守令된 자가 농민에게 養蠶을 권장할 것같으면 농민은 반드시 이를 괴롭게 여길 것이며 실효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綿花가 이미 널리 보급되어 있고 비단 옷이 급한 것도 아닌데 어찌 농민이 뽕나무 심기를 원하겠는가. 닭과 돼지란 곡식과 채소를 해치는 것이고, 염소와 돼지를 기르자면 지게미와 겨가 필요하다. 농가에서는 밭갈고 김매는 일에 힘을 다 쏟고 어느 겨를에 채소를 가꿀 것이며, 소 먹이는 데에도 힘이 부치는데 어느 겨를에 돼지를 칠 수 있겠는가. 백성의 수령된 자가 만약 漢나라・魏나라의 옛 방식을 따라 백성에게 목축을 권장한다면 백성은 괴로워하고 근심하며 수령의 오활함을 원망치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牧民心書 7-11 戶典六條 勸農).
시험삼아 南方 사정을 논해본다. 水田에다 종자 10斗를 뿌리면 대개 곡식 20苞를 수확한다. 그 중 10포는 田主에게 바치고, 2포는 種子와 稅로 들어가며, 2포는 還上穀으로, 2포는 雜賦(자잘한 명목은 지금 다 기록할 수도 없다)로 각각 들어가니, 농부가 먹는 것은 많아도 3∼4포에 불과하다. 先王은 10분의 1을 징수했는데 지금은 10분의 7∼8을 내야 한다. 백성이 어떻게 마음잡고 살겠는가(牧民心書 1-14 戶典六條 平賦司).
우리나라 풍속에는 木手라든가 冶匠이 나무를 다듬고 쇠 불리는 법을 좀 알고 있으면 官長이 사역을 시키되 삯은 주지 않고 매질만 빈번하다. 그러므로 팔둑을 잘라버리고 손가락을 쪼개어 버리면서 그 자손들에게 타일러 금지시킨다. 다시 工匠 일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農具라든가 織機, 배와 수레 등이 아직도 원시시대의 옛 제도를 지키고 있으니, 田野는 날로 황폐해지고 財用은 날로 줄어든다. 한 번 水害나 旱災를 만나면 하늘을 원망할 뿐이요, 백성은 근심으로 가득하고 나라는 가난해져도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다(中庸講義補 1-40 凡爲天下國家有九經節).
첫 번째 사료는 19세기 초의 조선 농민 사이에서 耕地의 점유 分化가 거의 한계수준으로 극단화하고 있는 사정을 전한다. 한뙈기 마당을 또한 남새밭으로도 활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도로 좁은 땅 밖에 차지한 것이 없다. 밭갈이 소를 기르느라고 지게미와 겨를 다 들이고는 힘이 부쳐 다시 돼지를 칠 수가 없는 정도이다. 곡식 농사는 목숨을 부지하는 식량문제에 직결된 것이므로 이에다 모든 정성과 노력을 다 기울이고 보니, 채소 한 다발 따로 재배할 여력도 땅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모든 가족노동력을 총동원하여 곡식 농사에 매달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물며 양잠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자고로 아울러 일컬어져온 ‘농사와 양잠’이란 것은 이미 ‘漢나라․魏나라’ 시대의 ‘옛 방식’이다. 현재의 실정으로서는 양잠은 고사하고 되지나 양을 칠 수도 없고 채소조차 재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저 근소한 農地에다 온 가족노동력을 다 기울여 우선 밥이나 먹고 살기 위한 곡물 농사에 매진하는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두 번째 사료는 10斗落地를 경작하는 並作 小農의 처지를 말한 것이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並作農이 田稅까지를 부담하면서 부지런히 힘써야 並作地를 겨우 확보할 수 있을 정도로 借地경쟁이 치열한 상태로 진입해 있었다. 10두락지의 병작지라면 결코 지나치게 작은 零細農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경작지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가족 노동력까지 다 동원해서 부지런히 營農하더라도 결코 항구적 存立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운 작은 收益 밖에 남는 것이 없다. 田主에게 절반을 바쳐야 하는데다 還上와 雜賦가 너무 과중한 부담을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還上와 雜賦의 부담은 전국적으로 鄕吏들의 할거적 농단에서 기인하는 바가 매우 큰 것임은 널리 알려진 그대로다. 그같이 가혹한 수탈관계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농민들이 ‘마음잡고 살기’는 참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지금 湖南 一路에서 우려할만한 것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民亂이요, 다른 하나는 吏胥의 貪虐”이라고 함이 茶山의 관찰이었다.
세 번째의 것은 각 지역 단위마다 手工業은 물론이려니와 農器와 織機와 舟․車의 제도를 개발하여 民生을 裕足케 할 책임을 맡은 守令 등의 ‘官長’이 그 本務는 遺棄해버리고 오히려 수공업자에 대한 침학과 수탈을 일삼고 있으므로, 어떠한 산업분야도 결코 발전할 수가 없다는 현실을 전하는 내용이다. 사례를 목수와 대장장이의 수공업 기술로 들고 있지만, 농업과 織布 등 현재의 필수적인 산업 분야의 기구와 기술의 자발적 개발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하물며 새로운 산업분야의 개발과 그 기술의 발전이란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뿐아니라 직접생산자에 대한 침학과 수탈 또한 하필 수령 따위 ‘관장’만의 능사가 아닌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는 각 道의 監司야말로 ‘큰 도적’이므로 이 큰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게 된다”고 함이 茶山의 관찰이었다. 더 나아가 “下邑의 小吏로서 宰相과 체결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도 하지 않는가. 이 시기에는 중앙의 宰相으로부터 지방의 監司․守令과 그 아래의 官屬인 鄕吏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 지배층과 그 하수인을 통틀어 각계 각층 모든 분자들의 할거적 농단과 수탈이야말로 생산기술과 유통부문을 포함하는 전체 산업분야의 발전을 가장 결정적으로 沮害하는 항구적 조건으로 되어 있었다. 가령 조선후기 새로운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저해하는 구조적 현상을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邸店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이른바 船商 客主가 그것이다. 포구에 배가 닿는 곳이면 어디나 豪民이 점포를 차려놓고 무릇 장삿배가 와서 정박하면 그 物貨를 주관하면서 감히 移動을 못하게 하고 스스로 거간꾼이 되어 임의로 그 값을 올렸다 내렸다 조종한다.…昌原 마산포, 晋州 가산포 등에 있는 邸店의 수익은 수천 수만 兩이나 된다. 갯마을의 豪民들이 다투어 점거하고 서로 작당하여 상대편과 분란을 일으킨다. 뇌물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서는 宰相들과 결탁하고 監司에게 請을 넣어 認許狀을 얻어내어 그 권세를 믿고 횡포를 자행하여도 守令이 규제할 수가 없다. 그들이 船商들을 벗겨먹는 일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연해의 여러 갯마을에서도 또한 모두 守令에게 뇌물을 바치고 인허장을 얻어낸다. 수령이 이미 뇌물을 먹었으니 그들의 횡포를 어찌 금할 수 있을 것인가(목민심서 6-34 戶典 平賦 下).
중앙의 宰相과 지방의 監司와 守令과 현지의 지배층인 豪民이 결탁하여 자행하는 중층적 농단은 결코 일과성의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농단과 수탈은 결코 船商들만을 결단내고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은 그 船商들에게 화물을 공급하는 광범한 직접생산자들에게까지 역효과를 미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연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어차피 사회적 연계를 지으며 국가를 이루고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지배층의 할거적 수탈과 농단은 반드시 개혁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각종 산업의 진흥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요, 그 技術과 機器의 개발 또한 의도적으로 착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든 상업적 농업의 경우는 어떻게 자발적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는가. 그 또한 지배층의 중간 수탈과 농단에서 예외가 되는 현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고려한다면, 그런 중간 농단과 침탈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견디어 내면서 상업적 농업은 드디게나마 성장과 발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 농단과 침탈 아래서의 성장과 발전이란 것은 너무나 큰 障礙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 장애는 때로는 성장과 발전의 계기 자체를 근저적으로 침해하는 한계요인으로 작용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남쪽 해변의 예닐곱 고을에는 모두 귤과 유자가 생산되는데, 거기 딸린 여러 섬에는 그 생산이 더욱 풍성하다. 그런데 수십년 이래 날마다 쇠퇴하고 달마다 줄어든다.……그 까닭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년 仲秋가 되면 邸卒이 吏胥의 臺帳을 가지고 나와 그 과일의 갯수를 세고 나무둥치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과일이 누렇게 익으면 비로소 와서 따가는데, 혹 바람에 몇 개 떨어진 것이 있으면 곧 추궁하여 보충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것같으면 그 값을 징수한다. 광주리째 가지고 가면서 돈 한 푼 주지 않는다. 저졸을 대접하느라 닭을 삶고 돼지를 잡게 되니 그 비용이 많이 들고 이웃이 떠들썩하게 모두 이 집을 나무라면서 들어간 비용을 이 집에서 받아낸다. 이에 몰래 그 나무에다 구멍을 뚫고 胡椒를 집어넣어 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으면 대장에서 빠지게 된다. 그루터기에서 움이 돋으면 잘라버리고 씨가 떨어져 싹이 나면 보이는대로 뽑아버리니, 이것이 귤과 유자가 없어지는 까닭이다. 근래에 듣기로는 濟州 또한 이 폐단이 있다 하니, 이같이 해서 그치지 않는다면 몇십년 안가서 우리나라에 귤과 유자가 없어질 것이다(牧民心書 11-23 工典六條 山林).
사료에 나타난 橘과 柚子의 예는 實學의 산업 진흥론이 어떤 한계상황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즉 귤과 유자는 희귀 果物로서 남방에서만 생산할 수 있는 特産이다. 그러므로 이는 개발만 잘 하면 분명히 경쟁력을 갖춘 상업적 농업의 종목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례는, 민간에서의 산업 개발의 욕구가 있다 할지라도 이를 현재의 인습적 收奪行政 체계의 割據績 壟斷 아래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그 開發과 振興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라는 현실을 증언한다. 그러나 개발과 진흥을 통해서는 여러 산업분야의 자발적인 증산 의욕을 크게 고취할 수 있으며, 그래서 국가와 민간이 다 함께 부유해질 수 있다는 적극적인 전망을 가지고서 그는 자기 나름의 개혁론을 제시하게 되었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통해서 구체적 현실을 점검하고, 경세유표를 통해서는 전반적인 국가개혁론을 제기하였다. 그것은 결코 지배층의 할거적 농단과 수탈을 금압하는 법령을 만들고 행정제도를 개선하는 정도의 소극적 개혁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체제 자체를 획기적으로 개혁함으로써야, 여러 산업분야의 증산 의욕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그래서 국가와 민간이 다 함께 부유해질 수 있다는 적극적인 개혁론을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령 그같은 한 사례를 ‘牧羊’의 경우에서 살피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 사람이 “朝鮮에는 羊이 없다”고 하는데, 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양을 치지 않는 것이다.…오직 외방 고을에서 각기 창고 뜰에다 10여 마리씩 기르는데 倉奴로 하여금 스스로 기르도록 할 뿐이다. 그의 부지런하고 게으름이라든가 양의 수가 줄어들고 늘어남은 守令이나 監司가 살피거나 묻지 않는다. 양 한 마리가 늘어나면 창노에게는 1년 동안 해롭고, 두 마리가 불어나면 2년 동안 해가 된다. 양이 번식할 이치가 있겠는가. 이제 마땅히 목축을 맡은 官署를 다시 설치하고 牧人 수십 명을 증원한 다음, 近郊로 나누어 보내 양 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할 것이다.…연말에는 그 실적을 글로 써서 아뢰도록 하고, 本署에서 그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고찰한 다음 戶曹에 보고한다. 그래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西班 末職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에도 羊이 많아질 것이다(경세유표 2-11 地官戶曹 司畜署).
司畜署는 원래 경국대전에서부터 속대전에까지 명칭이 등재되어 있으나, 그 후 어느 때인가부터 없어진 관서였다. 관서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사육해온 羊도 官이 그 사육의 방법을 放棄하고 보니, 이제는 種羊조차 끊어져가는 실정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다산이 개혁하고자 하는 것은 “牧畜을 맡은 관서를 다시 설치”하여 牧羊場을 설치하며 牧人을 설정하여 牧羊에만 전념토록 함으로써 牧羊산업을 근본적으로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 자에게는 官職을 수여하는 誘引을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즉 국가 행정기관이 주도하여 민간인 축산 기술자를 양성하고 하여금 專業하여 적극적으로 개발토록 함으로써 牧畜 산업을 크게 진흥시킨다는 내용이다. 牧羊은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지만, 실로 국가를 富强하게 만들고 民生을 넉넉하게 하는 길은 곧 국가 행정력을 동원하는 적극적 개발을 통해서 여러 산업분야를 진흥시키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百工의 技藝가 정밀하게 되면 무릇 宮室과 器用을 제조하는 데서부터 城郭 舟船 車輿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견고하고 편리하게 될 것이다. 진실로 그 법을 모두 개발하여 力行한다면 나라는 부유해질 것이요 군대는 강성해질 것이며 백성은 살기가 넉넉해져 장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바야흐로 익히 바라보기만 하고 도모하지는 않으면서, 누가 車制를 거론하면 “우리나라는 山川이 험악하다”고 말하고, 누가 牧羊을 거론하면 “조선에는 羊이 없다”고 말하며, 누가 말 먹이로는 粥이 맞지 않다고 하면 “風土가 각기 다르다”고 말한다(여유당전서 제 1집 11-11 技藝論 2).
茶山은 무엇보다도 구래의 지리멸렬한 상태로 放棄되어 있는 산업과 기술, 그리고 그 오랜 인습에 따라붙어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모든 산업 분야를 국가기관이 주도하여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개혁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국가기관은 오히려 중간농단과 할거적 침탈을 일삼는, 모든 산업 발전의 제1차적 障礙기구로 작용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모든 산업분야를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主務의 行政기관으로 다시 탄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가 행정체계의 쇄신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적극적 개발을 추진한다면 과연 여러 산업분야의 생산력수준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얻어진 것인가. 茶山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적 심성은 어떤 개발을 통해서 성취하기란 힘든 것이지만, 사회의 산업기술 수준은 적극적 개발을 통해서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다 아는 바,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 모여 살수록 그 기예는 더욱 정밀해지고, 시대가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그 기예는 더욱 공교해진다”는 것이 다산의 소신이었다.
茶山이 그와 같은 신념을 가지게 된 배경은 아마도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 하나는 앞서 각 지역 特産 作物의 개발 사례에서처럼 새로운 경쟁력을 갖춘 영농형태가 현실적으로 전개되는 객관적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와 같이 경쟁력을 갖춘 상업적 농업은 이미 “田地의 등급을 가지고는 말할 수가 없는” 새로운 현상들을 구현하고 있었다. 즉 ‘전지의 등급’이라는 자연 조건을 극복하지 못하고 거기 의존해오던 구래의 농업수준으로부터 이제는 남북 각지에서 그것 가지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특산물의 개발과 그것의 집약적 경영이라는 새로운 營農 현실을 창출해내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의존 상태로부터 이제는 자연을 적극적 다각적으로 활용하여 都市 人口의 需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집약적 농업개발이 현실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새로운 영농법의 결합으로 당해 분야의 농업수준이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그는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中國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의 선진적 기술 수준을 알게 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령 武器를 두고 말하자면 西洋의 紅夷砲에 대해서도 그는 이미 그 위력을 듣고 있었다.
이른바 紅夷砲라는 것은 그 속력과 파괴력이 대단히 맹렬하여 前古에는 비할 것이 없는데, 中國과 日本에서는 이를 사용한 지가 이미 오래다. 만약 불행하여 백년 후에 南․北에 警報가 있으면 반드시 이를 가지고 올 것이다. 그러면 손을 마주잡고 땅에 엎드려서 城을 받들어 바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활고자[彄]가 벗겨진 활을 당기고 살촉도 없는 화살을 활시위에 물리되, 과녁을 百步 밖에 세워 놓고서 온 힘을 다해 맞히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맞힌 사람은 祿을 얻고 맞히지 못한 사람은 녹을 잃게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絶世의 妙技라 한다. 이 어찌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막막한 짓이 아니겠는가(여유당전서 제 1집 11-10 軍器論 2).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이라든가 혹은 산업혁명과 같은 사정을 아직 자세하게는 알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중국에 드나드는 使行을 통해서 西洋의 기술수준을 견문하고 그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서양와 통교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지금 兵器나 火器는 모두 새로운 제도이다. 일본의 鳥銃도 지금은 舊式이다.…지금의 급무는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배우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매우 중시한다. 日本과 琉球가 중국에 드나들면서 그 새로운 산업기술을 배우고 활용함에 따라 “민생은 유족해지고 군대는 강해지는” 현상을 그는 주목한다. “중국의 새로운 법식과 교묘한 제도는 날로 더하고 달마다 늘어나 이미 수백년 이전의 중국이 아닌데, 우리는 막연하게 지내면서 물어보지도 않고 오직 옛 것만을 편안히 여기니, 어찌 이다지도 게으르단 말인가” 하고 우려한다.
산업과 기술에 대한 다산의 신념은 그와 같이 국내외의 산업・기술의 실제 수준이 이전보다 크게 발전하고 있다는 현실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의 산업행정체계 개혁론은 우선 그같이 선진적으로 발전한 국내외의 산업․기술 수준을 현실적 토대로 수용하면서, 국가 행정력에 의한 정책적 의도적 조직과 개발을 통해서 모든 분야의 생산력을 격단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새로운 王政의 산업정책으로 정립하고 전개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곧 국가 행정력을 동원하는 정책적 의도적 개발을 통해서 모든 산업분야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새 시대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3. 專擔 開發 行政論
茶山이 제도적으로는 周禮를 기준으로 하는 국가개혁의 기본 법제를 구상하면서 사상적으로 尙書를 많이 참작하였다 함은 다 아는 사실이다. 새로운 이상적인 王政을 창출하고자 하는 개혁론을 구상하면서도 그는 儒者였기 때문에 결국 儒敎의 옛 經典에서 그 기준과 근거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미 그의 개혁론은 “시대가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그 기예는 더욱 공교해진다”고 하여 산업・기술은 발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에 튼튼히 입각해 있었다. 비록 옛 경전에서 기준과 근거를 구한다 할지라도 그의 산업행정론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기초 위에 서서 현실적으로 개발 가능한 것이라면 극대한으로 발전시킨다는 새로운 편성과 배치의 원칙으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원칙이 곧 모든 산업분야를 의도적으로 개발하되, 分業的으로 專擔시키고 責任 지고서 成就토록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사례들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산업 진흥의 기초인 田地․戶籍․賦稅를 전담하여 관장하는 기구로서 經田司․版籍司․平賦司라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하여 운용한다. 토지와 호적은 정전제를 기초로 하여 편성 배치 관리한다. 그리고 부세제도는 정전제도에서의 公田稅 뿐아니라 새로이 개발하는 모든 산업분야를 대상으로 소위 ‘9賦를 制定’하여 징수함으로써 국가의 財用을 넉넉하게 하면서도 백성의 부담을 균평하게 한다. 호조 소속으로 司畜署를 다시 설치하여 牧畜을 전담시킨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와 같다. 司圃署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심고 가꾸는 정사 또한 國用을 넉넉히 하고 백성의 살림을 돕는 일이다. 봉산․황주의 배, 가평․양주의 밤, 청산․보은의 대추, 풍기․순창의 감, 강진․장흥의 귤과 유자와 치자 등은 모두 마땅히 법을 정해서 심도록 권장할 것이다. 그래서 혹 널리 심어 숲을 이루고 능히 千이나 萬株에 이르도록 한 자는 司圃署에 보고토록 하고, 그 虛實을 조사한 다음 추천하여 西班 末職에 보임토록 한다. 廟堂에서 불러 시험하되 능히 農書를 환하게 알고 그 땅에 알맞은 作物을 가려서 農圃를 경영할만한 자는, 사포서 관직에 승진하여 보임시킨다. 그렇게 하면 10년을 지나지 않아 나라 안의 진귀한 과일을 이웃나라에 판매하여 財用을 넉넉히 하기에 족하게 될 것이다(경세유표 1-17∼18 地官戶曹 司圃署).
司圃署는 “園圃와 蔬菜에 관한 일을 맡는다”고 경국대전에 등재되어 있으면서도 실상 王室에 채소를 공급한다는 명목 아래 현실에서는 전국 거의 모든 군현으로부터 貢納을 받으면서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있는 기구였다. 다산은 이 기구를 전국의 果物 생산을 격단으로 진흥시킬 새로운 행정기관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각 지역의 특산물을 개발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을 官職이라는 誘因의 설정을 통해서 유도해 내고자 하는 것도 흥미롭다. 앞서 살펴본 상업적 농업의 발전이 새로운 富의 획득이라는 誘因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통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각 지역의 특산 果物산업이라면, 燕巖 朴趾源의 「許生傳」의 都賈현상이 가리키는 그대로 이미 그 자체발전의 길을 스스로 예비해가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여기서 참조해야 할 것이다. 다산이 여기서 외국에 대한 果物수출까지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주목할만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茶山은 다시 鑛山의 개발을 전담하는 司礦署를 신설하여 金․銀․銅․鐵의 광산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중국으로부터 그 제련술을 배워와서 이를 전국에 보급한다 하였다.
또 가령 兵曹 소속 기관으로서는 養馬를 전담하는 牧圉司의 신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래에는 司僕寺에서 주관하는 각 牧場에서 養馬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은 유명무실하였다. 다산의 시대에는 “큰 郡縣이라도 그 경계 안에서 말 10匹을 볼 수가 없고, 혹 있더라도 모두 果下馬처럼 자그마한 종류여서 戰馬로 될만한 것이 없다”는 실정이었다. 戰馬의 확보를 위해서도 養馬는 국가 주관하에 급속히 개발하지 않을 수 없는 정책산업이었다.
牧圉司는 8道의 牧圉 행정을 총관한다. 또 諸道의 富民 가운데 海島나 山莊을 가진 자로서 말을 사육할만한 곳이 있다면 우리[圉]를 설치해서 養馬하도록 하되, 官에서 駿馬를 주어서 교미시켜 번식시키도록 한다. 말을 길러서 千필이 된 자에게는 駿馬 10필을 선발해서 本司에 납부토록 하고 그 나머지는 私賣함을 허락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本司 관직에 바로 제수하였다가 법에 따라 遷轉하도록 함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우리나라 사람들은 “北方은 일찍 추워지므로 養馬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韃靼의 말이 北塞에서 매매되는 것에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또 “남방은 卑濕해서 養馬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飛龍馬가 耽羅에서 생산되는 것에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서로 통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牧圉의 일을 관장하는 기관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경세유표 2-4 夏官兵曹 牧圉司).
牧馬에 관한 그의 안목은 결코 국내의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으로는 濟州에서 북으로는 蒙古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日本과 琉球의 사례를 거론하며 ‘北으로 중국에서 배운다’는 원칙을 천명함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상대적으로 매우 개방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工曹 소속의 기관으로는 전국 산악의 植木과 禁伐행정을 맡는 山虞寺, 林木과 貂皮․人蔘 등의 관리를 맡는 林衡寺, 저수지와 河川의 관리를 맡는 澤虞寺와 川衡寺를 설치하여 각기 당해 분야를 전담시키되, 새로운 분야를 개발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며 그 부세의 수취까지를 담당토록 한다 하였다. 그리고 기와와 벽돌 제조를 전담하는 甄瓦署, 각 종의 織造를 담당하는 織染局, 製紙산업을 담당하는 造紙署 등은 특히 利用監이 중국으로부터 수용하는 새로운 산업기술을 더욱 연구하고 개발하여 확고한 활용단계로까지 확보한 다음 전국적으로 널리 보편화시킨다 하였다. 가령 직염국의 경우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織造한다는 것은 명주와 베에 불과하다. 비단・무늬비단・양모로 된 베는 아직 짤 줄을 모르고, 해마다 金銀으로 燕京에서 이를 무역해온다. 이미 工力을 갖추지 못하면서도 또 검소함을 숭상하지도 못하고 한갓 귀중한 보물만 허비함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마땅히 利用監에서 북으로 중국의 법을 배워서 좋은 법식을 本局에 알리도록 할 것이다. 本局에서는 工人을 모집하여 織造해서 왕실용으로 공상하며 또 그 방법을 諸道에 반포해서 만백성에게 가르친다. 이에 비단과 무늬비단을 모두 국내에서 가져다 쓰게 될 것이요, 金銀을 산출하는 여러 산에서도 (侵虐으로 인한) 슬픈 빛이 없어질 것이다. 이는 國策 가운데의 지극히 귀중한 것이다(경세유표 2-38∼39 冬官工曹 織染局).
이용감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중국의 선진 織造기술을 익혀오도록 한 다음, 이를 직염국이 주관하는 模範 織造의 단계에서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수용하고, 다시 이 기술을 전국적으로 보급시켜 전국의 직조산업을 보편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이다. 그것은 다산이 외국의 선진 산업기술을 수용하여 우리의 것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전형적 형태의 하나이다. 중국의 비단이 워낙 고래의 선진산업임은 다 아는 바와 같다. 그런데 이 시기 조선의 明紬라든가 綿布 직조기술이 과연 그러한 선진기술을 수용할 단계로까지 발전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 시기 조선의 綿布산업은 家內副業으로서 널리 보편화하고 있을 뿐아니라 지역적 특성에 따라 이미 專業생산의 단계로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직염국은 그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더 적극적으로 외국의 선진 직조기술까지 수용하고 활용함으로써 직조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까지 보편적으로 발전시키는 주관 행정기구로서의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제 선진 산업기술의 傳習을 전담한다는 利用監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진실로 技藝가 정교한 자에게 그 廩祿을 더해주면, 사방의 機巧한 사람들이 장차 풍문을 듣고서 모여올 것이다. 농기구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곡식은 많아지고, 織機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布帛은 족하게 된다. 배와 수레의 제도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먼 지방 물화가 정체되지 않으며, 引重・起重의 법이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臺榭・堤防이 튼튼하게 될 것이다.…모든 農器・織機・兵器・火器・風扇・물총으로부터 天文 曆法에 소용되는 儀器・測器 따위 모든 實用에 관계되는 기구는 傳習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여 돌아와 本監에 바친다. 本監에서는 솜씨 있는 工匠들을 모아다 그 법을 상고하여 시험삼아 제조토록 한다. 그래서 성과가 있는 경우, 提調와 工曹判書가 그 기술과 제조물을 고찰하여 혹 監牧官이나 察訪을 제수하고 혹은 縣令이나 郡守로 제수한다. 그리고 큰 공이 있는 자는 승격시켜 南・北漢副使로 삼으며 혹은 그 자손을 錄用한다. 이같이 하면 10년을 지나지 않아 반드시 성과가 나타날 것이며,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사도 강해져서 다시는 천하의 비웃음을 사지 않게 될 것이다(경세유표 2-28∼29 冬官工曹 利用監).
이미 직염국의 경우에서 살핀대로, 인재를 파견하여 중국의 선진 산업기술을 傳習해 오게 한 다음, 이용감은 이 기술을 다시 선발된 工匠들에게 온전히 傳受시켜 하여금 模範을 製造토록 함으로써 그 산업기술을 우리 것으로 확고히 수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 제조 혹은 제작에서 큰 성과를 올리는 자에게는 官職을 수여한다는 誘因도 설정해 두었다. 큰 성과를 쌓은 자에게는 인간이 본연으로 가진 富欲과 貴欲을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경쟁관계를 유발함으로써 산업기술의 정교한 개발과 그로 인한 생산력의 항구적 발전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용감에서 온전히 수용하여 확립하기에 이른 여러 산업기술은 이제 각기 專任으로 분담하는 당해 행정기구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각 현지에서 실제 생산과 제조에 널리 활용한다는 구상은 이미 몇몇 사례에서 살펴본 그대로이다. 선진 외국의 산업기술일수록 국가의 산업행정을 통하여 수용하고 확보히며 전국적으로 보급하여 실제 산업에서 활용한다는 구상이었다.
茶山의 산업행정 개혁론은 또한 물화의 신속한 유통과 상업의 원활한 발전, 그리고 군사적 활용을 위한 각종의 수레[車]와 船隻의 운행에 관한 구상을 포함한다. 그것은 이미 상품화폐경제의 단계로 들어선지 오래인 이 시기의 객관적 실제적 요청을 반여하고도 있는 것이었다. 각종 地圖라든가 地理書의 제작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도 그러한 실제적 요청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산은 각기 典軌司와 典艦司를 설치하여 수레와 선박의 제작과 관리를 전담하는 중앙 행정기관으로 삼는다 하였다. 가령 典軌司는 중국의 수레제도를 배워와서 기술이 익숙히 되면 전국 同軌의 수레를 제작토록 하되, “무릇 公私간에 소용되는 수레는 모두 여기서 제작할 것이다. 그 工費를 계산해서 수레의 값을 일정하게 정하여 백성들이 값을 바치고 수레를 사가도록 할 것이요, 혹 사사로이 만드는 것은 엄금한다”이라 하였다. 그리고 典艦司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내가 배 만드는 것을 보니, 尺度를 쓰지도 않고 다만 눈어림으로 한다. 재목이 고르지도 않으므로 재목에 따라 배 모양이 다르게 된다. 혹 바닥은 짧으면서 뱃전은 길고, 혹 바닥은 좁은데 보[梁]는 넓으며, 혹 몸통은 작은데 키는 길고, 혹 몸통은 큰데 돛대는 짧다. 그래서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맞지 않아 등과 배가 걸핏하면 서로 당겨져서, 혹 키를 들어도 뱃머리가 돌려지지 않고 혹 돛을 펼쳐도 노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혹 한 척이 우연히 법도에 얼추 맞게 만들어져 능히 달리고 능히 무거운 짐을 이겨내는 경우가 있으면 이에 괴이쩍게 여기면서, “저 배는 저와 같은데 이 배는 어째서 이와 같은가” 하고 탓한다. 아아, 배는 말[馬]이 아니다. 어찌 능히 날래고 둔함이 있을 것이며 건장하고 잔약함이 있겠는가.…배 만드는 법은 이용감이 북쪽으로부터 배워올 수 없는 것이며, 또 北學에 의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국 배와 倭國 배로서 우리나라 연안에 표착하는 것이 해마다 10여척이나 되고 琉球와 呂宋 배 또한 가끔 표착하는데, 그 제도와 모양이 기묘하고 정밀하며 견고하여 능히 풍파에 출몰하면서도 파손되거나 침몰되지 않는다.
이 배들이 표착하는 즉시, 利用監 郎官과 함께 솜씨 있는 工匠으로서 分數에 정통한 자를 파견하여 합동으로 대조 점검하도록 한다. 여러 가지 부품과 체제의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음과 뾰쪽하고 뭉특함과 높고 낮음을 모두 상세하게 관찰해서 그 치수를 기록한다. 그리고 거기 소용되는 재료 및 油灰와 배의 틈을 메우는 방법과 양쪽 날개에 판자를 붙이는 제도는 모두 그 규정과 방식을 물어보고 그 효과를 알아본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모방해 만들어서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게 된다면, 이가 곧 北으로 중국에서 배워옴과 같다. 이에 그 比例를 가지고서 크고 작은 여러 배에다 풀이해 나누어 9등으로 되게 한다. 大船에 3등급이 있고, 中船에 3등급이 있으며, 小船에도 3등급이 있어, 그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음과 뾰쪽하고 뭉특함과 높고 낮음의 차등을 모두 비례적으로 遞減한다.…모든 公・私간에 쓰는 漕船과 兵船, 商人들의 배는 모두 9등급 안에서 한 가지 비례를 적용하도록 한다. 그 體裁가 9등급으로 정한 제도에 맞지 않는 것은 本司에서 고찰하여 잡아다가 그 배는 파괴해 버리고 그 사람은 죄를 줄 것이다. 이는 참으로 고쳐서는 안되는 법이다(경세유표 2-36 동관공조 典艦司).
수레의 제도는 북으로 중국에서 배우고,여기 선박은 남방으로 日本․琉球의 선진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규격화하여 제작한다는 다산의 구상은 매우 획기적인 개혁론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産業技術의 객관적 존재 의의를 국가의 행정적 조정을 통해서 새로이 창출하고 부여한다는 극히 적극적인 구상이다. 일체의 私造를 허용치 않는다는 것은 산업기술의 수준을 격단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지름길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田制로서의 井田制가 음악에서의 黃鍾尺과 같이 필수적 기준이라고 함과 동일한 논리였다. 가령 각 郡縣단위 수탈기구로서의 ‘民庫’라는 것은 전국적으로 없는 곳이 없으되 그 방식은 “邑各不同”이라는 것이 이 시기의 실태였다. 또 가령 “度量衡의 無法”으로 말하자면 “한 城 안이라도 저자마다 같지 않고, 한 고을 안이라도 마을마다 같지 않으며, 한 마을 안에서도 집집마다 같지 않다”고 하는 형편이었다.
국가 규정에 의해 명명백백한 標準을 세우고, 국가 행정력을 통해서 전국 통일의 명명백백한 규격화를 성취하는 일이야말로 지리멸렬한 인습의 割據的 현실태를 근원적으로 극복하는 가장 확고한 개혁안이었던 것이다.
명명백백한 표준의 확립은 점차 번성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상품화폐경제를 원활히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행정 조치이다. 그래서 典圜署를 설치하고 여기서 金․銀․銅의 鑄錢을 전담 鑄造하여 이를 널리 통행하도록 하며, 量衡司를 설치하고 전국의 度量衡을 전담하여 엄격히 통일적으로 제작하고 운행시키도록 하며, 다시 券契司를 설치하여 토지․노비․가옥의 文券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다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인간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본 媒介․規制의 道具를 행정적으로 창출하고 정비해 두려는 구상인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4. 專業 久任 責成論
茶山은 인재를 선발․임용하는 요체로서, “才能을 헤아려 직책을 부여하며 오롯이 맡겨서 功績을 이룩하도록 한다”는 원칙을 매우 중시한다. “그 大意는 모두 두 가지로 귀결된다. 여러 가지 일을 겹쳐 맡겨서는 안되며, 雜歧라도 편벽되이 폐지해서는 안된다”고도 한다. 계속해서 그는 말한다.
專門으로 다스리는 직책이 없기 때문에 일을 익힘이 정밀하지 못하고, 오래 맡기는 법이 없으므로 治績을 이룩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낮은 직계에서 淸顯한 관직을 지내고, 높아져서는 權要職에 앉아 있으면서도 방만하여 무엇이 어떤 일인지도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다. 다만 吏胥들은 규정상 專任하고 久任하도록 되어 있어 체제와 사례에 익숙하여 환히 알고 일을 행함에 숙련되어 있다. 비록 剛明하고 재간 있는 관원일지라도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권력이 세어지고 奸僞가 날로 심해진다. 세상에서 '吏胥之國'이라 일컫게 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마땅히 官制를 적이 변통하여 안으로는 작은 부서의 낮은 관직에서부터 쓸데없는 자들을 도태하고 하나만을 두어 專任토록 하는 한편, 文․武의 長官들도 각기 한 사람을 뽑아 久任시켜서 治績을 책임지고 이룩하도록 하며, 밖으로는 監司․守令도 명성과 치적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그 연한을 오래 맡긴다면, 인재가 모자라지 않고 백성이 그 혜택을 입을 것이다(여유당전서 제 1집 8-39∼40 人才策).
인재를 뽑는 과정에서부터 才能 있는 적임자를 선발해 맡겨야 하며, 여러 직무를 책임지우지 말 것이며, 또 나라를 다스리자면 특수한 ‘雜歧’라도 함부로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관직을 수행시키는 가장 요긴한 원칙은, 오롯이 맡기고[專任] 오래 맡겨서[久任] 책임지고 공적을 이룩하도록 한다[責成]는 세 가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원칙은 나라를 다스리는 文․武의 인재를 선임하는 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더 기초가 되는 여러 산업분야의 개발과 편성과 인력의 배치에도 꼭 마찬가지라는 것이 다산의 지론이었다. 그의 국가개혁론의 기초가 되는 井田制論에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원칙을 들었다.
先王이 능력을 헤아려 田地를 준 것은 마치 재능을 헤아려 官職을 주는 것과 같다(경세유표 6-4 地官修制 田制 4).
先王의 뜻은 천하 백성에게 모두 고르게 田地를 얻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하 백성이 모두 고르게 職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職을 농사로 받는 자는 田地를 다스리고, 직을 工匠 일로 받은 자는 器具를 다스리며, 장삿군은 物貨를, 牧者는 가축을, 虞者는 材木을, 嬪氏는 베 짜기를 맡아서, 각자 그 職으로써 먹을 것을 얻도록 했다.…聖人은 租․賦를 바로잡는데 힘썼지 田産을 균평히 해주는데 힘쓰지 않았다. 다만 9職으로써 만민에게 권하여 하여금 각자 서로 도우면서 먹는 것을 얻도록 했을 따름이다(같은 책 6-16․20 田制 5).
지금 우리나라에는 士・農・工・商이 뒤섞여서 구분이 없는데, 다만 한 마을에 四民이 섞여 살 뿐아니라 또한 한 사람의 몸으로도 네 가지 업을 겸행한다. 이것이 한 가지 技藝도 성취되지 못하고 온갖 일에 법도가 없게 되는 까닭이다.…오직 工・商 두 가지 백성은 불가불 邑城 가운데 모여 살도록 함으로써 管仲이 齊나라 다스리던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같은 책 8-7 田制 10 井田議 2).
何休는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을 3년마다 한 번씩 주인이 바뀌도록 한다” 하였으나, 이 또한 시행하지 못할 정사이다. 농민은 그 전지가 永業田이 된 줄을 안 뒤라야 돌자갈을 추려내고 잡초를 제거하며 밭도랑을 단속하고 거름을 많이 주게 될 것이다. 만약 규정을 따라 3년마다 바꿔 가면서 농사지어야 함을 알게 된다면, 누가 그같은 일을 즐겨 하겠는가(같은 책 5-33 田制 3).
정전제론에 나타난 전지 배분과 관리의 원칙은 田地를 경작할 능력을 갖춘 적임자 농민에게만 그 능력에 걸맞는 전지를 준다는 것, 모든 생산자들은 국가가 배정하는 9職 가운데의 한 가지씩을 맡아 거기에만 專業하면서 각자가 서로 이바지하면서 먹고 산다는 것, 分業을 통해서야 ‘법도’가 서고 ‘기예’가 발전함으로써 생산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 또한 商․工業을 전업으로 받는 자들의 거주와 영업은 국가적 편성에 따라 邑城 안으로 제한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농민 각 家戶가 받는 井地도 永業田으로 해 둠으로써 그것을 항구적으로 관리하면서 생산성을 발전시키도록 유인한다는 것 등이 확인된다. 요컨대 국가 행정력의 관리 아래 모든 산업을 조직하고 편성하며 배치하고 관리한다는 원칙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정전제론에 등장하는 모든 직접생산자는 각자의 편의와 私益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존재라고는 할 수가 없다. ‘영업전’의 영농이라는 명제에서 유추되는대로, 自律的 自立的 직접생산자로 정립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는 또한 어디까지나 王政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국가 제정의 기준에 따라 국가 행정력의 통솔하에 편성 배치되어 새로운 産業역군으로 정립되는 자율적 존재인 것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자립적 영농주체로서의 산업역군은 국가 행정력의 규제와 함께 그 支援 또한 받게 되지만, 동시에 산업의 自律的 自營을 통해 국가에 이바지하게도 되는 존재이다. 자립적 생산지반을 갖추고 역사적으로 성장함으로써 드디어 주체적 인간존재로 정립될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지리멸렬한 고래의 인습을 타파하고 돌파하기 위한 국가개혁론의 일부로 제시한 것이었다. 가령 오래고도 奇怪한 습속 그대로를 되풀이하고 있는 현실의 農事 실태를 참작할 필요가 있다.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백성이요 지극히 정밀한 것은 농사의 이치이다. 반드시 사리에 밝고 물정에 통달한 君子가 있어 백성을 위해 農師가 되어 그들을 가르치고 훈도하여 토양에 알맞은 곡식을 분별하고 농기구의 사용을 편리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미치지 못한 점을 도와준 후에라야 백성이 할 일을 알게되고 농사 짓는 것이 農法에 맞게 된다. 우리나라 백성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들 제 멋대로 농사를 지어왔다. 군자의 가르침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종자를 선택함에 정밀하지 못하고 종자를 보관함에 조심성이 없으며 파종을 하는데도 일정한 법도가 없다.…기기괴괴한 짓이 곳곳마다 습속을 이루고 이루고 있으니, 작은 걱정이 아니다(목민심서 7-1∼2 戶典六條 勸農).
그같이 ‘기기괴괴한 습속’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산은 새로운 국가 기준을 세우고 국가 행정력을 동원함으로써 국가의 산업 전반을 의도적으로 새로이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진흥시키고자 한다. 그는 모든 산업분야에도 專業과 久任의 원칙을 적용한다. 즉 모든 臣民을 상대로 그 현실적 자질과 능력에 따라 士・農・商・工・圃・牧・虞・嬪・走의 9職으로 나누어 맡기되 각기 한 가지씩에만 專業토록 하며 동시에 각자가 자기의 職을 항구적 직업으로 맡아서 책임지고 공적을 이루어 내도록 한다 하였다. “백성이 9職으로 나뉘어짐은 天理이다. 비록 위에서 시키지 않더라도 백성은 스스로 나뉘어질 것이다”라고도 강조한다. 사회관계의 전개에 따라 각 직업의 사회적 분화와 전업화는 필연적으로 진전될 형세라고 하는 소신을 피력한 것으로 해석된다.
9직 가운데의 ‘士’는 상하 여러 종류의 治民職을 분담하는 것이며 ‘走’는 잡역 담당자를 가리킨다. 商․工 또한 국가의 행정적 관리에 따라 각기 邑城 안에서 영업하도록 배치된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이다. 여기서는 이제 農業 분야의 경우에만 국한해서 개혁론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다산이 경세유표를 저술한 것은 1817년이요, 목민심서를 저술한 것은 그 다음 해였다. 그래서 경세유표에서 미쳐 다 서술하지 못한 내용을 목민심서에다 추가로 서술해둔 부분들이 있게 되었는데, 農業을 6科로 나누어 권장한다는 내용이 그 적실한 사례이다. 다산은 周禮 각편의 내용과 그 후 歷代의 역사적 사례들을 고찰하고 나서 자기 나름으로 고안한 농업 6科의 진흥책을 개진한다. 여기서 농업 6과의 구분은 각 郡縣을 단위로 하는 것이며, 그 진흥의 추진력도 각 군현이라는 現地에서 王權을 대행하는 守令의 行政力인 것임을 주의할 일이다.
무릇 勸農의 정사는 6科로 나누어 각기 그 職을 주고 그 성적을 考課하여 功績이 좋은 자를 등용함으로써 백성의 생업을 권장할 것이다.…田農이 한 科요(9穀을 생산한다), 園廛이 한 科이며(百果를 심는다), 圃畦가 한 科요(百菜를 심는다), 嬪功이 한 科이며(布帛을 생산한다), 虞衡이 한 科요(百材를 심는다), 畜牧이 한 科가 되니(六畜을 사육한다), 工․商․臣妾을 합하면 의당 9職이 된다(목민심서 7-12~13 戶典六條 勸農).
원래 주례의 직제로는 ‘園圃’가 하나의 ‘과’로 되어 있는 것이지만, 다산은 이를 ‘園廛과 圃畦’의 2과로 나누어 설정한다. 아마도 果物과 菜蔬는 별도의 분야를 세워 각기 전담하여 재배토록 하는 것이 실정에 맞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인 것으로 이해된다. 위와 같이 각 군현의 守令은 그 경내의 농민들에게 농업 6과를 각기 專業的으로 분담시킬 뿐아니라, 농민 각자의 業을 다시 여러 항목으로 細分하고 혹은 그 재배 과정을 여럿으로 세분하여 힘써 營農하도록 권장한다. 권장의 방법은 곧 농민 각자가 각기 쌓는 實績을 고찰하여 평가하는 考課를 통해서 責成토록 하는 것이다.
그 考課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田農에 9 항목이 있으니 첫째는 갈아엎기요, 둘째는 거름내기요, 셋째는 파종이요, 넷째는 써래질이요, 다섯째는 모내기요, 여섯째는 김매기요, 일곱째는 수확이요, 여덟째는 堤防이요, 아홉째는 灌漑이다. 이상의 9가지 일로 그 성적을 고찰하는데, 밭농사를 考課하는 경우에는 附種을 모내기에, 밭도랑치기를 제방에, 陳田 개간을 灌漑에 각각 해당시킨다.
園廛에 9가지 항목이 있으니 대추・밤・배・감・매실・살구・복숭아・오얏・호도로 9果를 삼아 그 성적을 고과하되, 나머지 여러 과일은 각각 土産에 따라 혹 出入이 있을 수 있다. 능금․頻婆․앵두․석류․귤․치자․모과 등은 그 土宜에 따를 것이다. 圃師에 9가지 항목이 있으니 파․부추․마늘․생강․오이․박․배추․겨자․무우로 9 가지 채소를 삼아 그 成績을 고과하되, 그 나머지 여러 채소는 비섯한 종류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혹은 土宜에 따라 出入이 있을 수 있다.
……무릇 채소나 과일 등속은 반드시 교통이 편리한 큰 고을이나 도시의 성곽을 끼고있는 땅이라야 심고 재배하기에 마땅하다. 거름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며 판매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외진 마을 궁벽한 곳에다 이런 것들을 심어서 어찌 하겠는가. 도회지 사람들은 좋은 채소와 진귀한 과일을 먹을 수 있지만 시골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守令이 園圃를 권장하려면 반드시 園師・圃師를 모집하여 그들로 하여금 邑內에 살도록 한다. 성곽을 끼고 있는 땅을 주어 채소를 재배토록 하고, 또 空地를 구하여 九果를 심도록 한다. 小邑에는 9인, 中邑에는 18인, 大邑에는 27인을 모집하여 각자에게 땅을 주고 일하는 데 드는 비용을 보조해주며, 별도로 軍官 2인을 차출하여 園監・圃監으로 삼을 것이요, 功績의 考課를 규정대로 한다.
……畜牧에 9가지 항목이 있으니, 말・소・염소・돼지・당나귀・닭・거위・오리, 그리고 연못에 기르는 물고기의 9종으로 그 성적을 고과한다.
……畜牧도 역시 그러하다. 소를 치는 자에게는 산을 주고 염소를 치는 자에게는 섬을 주며 돼지 치는 자에게는 邑城 부근의 땅을 주어 우리[圉]를 만들게 하거나 혹은 작은 섬을 주기도 한다. 닭을 치는 자에게는 노는 땅을 주어 구덩이를 파게 하고 울타리와 덮개를 만들어 농사에 해가 없도록 한다. 거위와 오리를 치는 자에게는 개울이나 도랑이 있는 땅을 주고, 養魚하는 자에게는 못이나 늪이 있는 땅을 준다
……婦功도 역시 그렇게 한다. 9인이나 27인을 모집하여 官田을 주고 土宜를 살펴 오로지 9材를 재배토록 하되, 공적의 고과는 규정대로 한다(목민심서 7-13∼4 戶典六條 勸農).
각 군현의 수령은 경내의 산업실정을 종합 고찰하여 국토를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 활용할 것이며, 각 분야에 재능을 가진 적임자를 현실에 알맞은 인원만큼 모집하여 적재적소로 배치함으로써 그들의 자발성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훌륭한 實績을 쌓은 자를 객관적 기준에 따라 嚴選하여 상부로 보고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여러 鄕, 여러 里에서 각각 上農家를 뽑는다. 대략 1井의 8家 중에서 3, 4家를 선발하되 上族・中族・下族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농사에 힘써 100畝를 온전히 받아 농사짓는 자라야 선발에 참여시킨다. 매 전지 100井마다 1인의 農正을 두고 그 功能을 상고하여 縣令에게 보고하면 현령은 이를 받아 9등의 등급을 매기기를 考課法과 같이 한다.……
무릇 功績을 考課하여 가장 우수한 자에게는 그 고을에서 진기한 물건으로 상을 주고 그 고을의 職任을 준다. 監司는 여러 고을의 고과표를 모아 그 우열을 비교하여 3인을 선발하고 이를 銓曹에 추천한다. 銓曹에서는 각 道의 추천장을 모아 그 우열을 비교하고 직업을 참작하여 매양 3분의 2를 취하여 初仕로 보임하되, 農・嬪・虞・衡은 吏曹에서 經田員外郞에 보임하고, 園圃・畜牧은 兵曹에서 武院員外郞에 보임한다. 벼슬한 지 만 2년이 되면 東班 소속은 나아가 察訪・監牧이 되게 하고 西班 소속은 나아가 堡將・城將이 되게 한다. 그렇게 하면 여섯 분야의 직업이 백성의 항구적인 산업이 되어 10년이 지나지 않아 온갖 곡식 과일 채소가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아질 것이다. 재목이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아질 것이요, 물감이 다 물들일 수 없을 만큼 많아질 것이며 家畜과 魚物이 나라 안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정사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목민심서 7-13∼14 戶典六條 勸農).
각 군현의 수령은 당해 지역의 적의하고 유용한 산업분야를 가능한 한 유루없이 적극 개발할 책임을 진다. 농업 6과에 관한 한 직종상의 分業이 일어나고 그 분업적 專治에 따라 각기의 산업기술이 가일층 발전할 것임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게다가 각 분야마다 우수한 營農家를 장려하는 誘引이 설정되고, 다시 각 郡縣 - 道 단위로 최우수 營農家를 선발하여 중앙에 추천하면 吏․兵曹에서 그들을 文․武의 관직으로 등용한다는 구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개혁안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實學은 인간 본연의 欲求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茶山은 인간이란 것을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고, 모든 가치있는 것은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야 성취된다는 이른바 ‘行事’主義의 신봉자였다. 그는 사회적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서 貴欲과 富欲 두 가지를 긍정하였다. 그같은 전제 위에 그는 다시 전에 없던 競爭의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기본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개별 인간들의 奮發力을 극단으로 유발하고자 고안한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농업의 모든 분야를 專業的으로 새로이 배치 권장하되 그 최우수 營農家를 官職으로 유인하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자발적 경쟁력을 유발한다면, 각 분야의 생산력이 저변으로부터 크게 발전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농업 각 분야가 남김 없이 다 개발됨에 따라 산업 전반의 연관된 상호 발전이 이루어지고, 국가 전체로 보아 소위 고용의 극대화를 달성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야말로 萬民이 각기 제 자리를 얻어[各得其所]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항구적으로 專業하며[專業과 久任] 자신의 직역을 자기가 책임지고 성취하도록 하는[責成] 국가 행정조직이 항구적으로 작동한다면 산업분야에서의 王政의 실현은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국가적 생산력이 격단으로 더 고양될 수 있을 뿐아니라, 사회적 분업관계를 통해서 전체 국가체제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유기적으로 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분야마다 增産이 성취되고, 富民과 富國의 효과가 동시에 실현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王政의 산업경제적 지반을 튼튼히 확보할 수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다산이 9職論을 전개한 것은 국가의 산업분야를 유루없이 다 개발한다는 데에만 뜻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산업분야를 개발하고 그 모두에서 ‘賦’를 거둠으로써 국가 財政 또한 크게 유족케 한다는 데에도 큰 뜻이 있었다. 가령 “지금은 山林 川澤을 버려두고 收稅하지 않으면서 오직 농사짓는 백성만 벗기고 족친다. 그래서 公私간에 쓰임이 모자라고 上下가 아울러 곤란을 받는데, 오직 탐관오리와 土豪 奸民이 중간에서 그 利를 독차지한다”는 실태의 지적에서 보이는 바와 같다. 그래서 그는 가령 工曹 소속으로서 전국의 山林행정을 관장하는 山虞寺라는 중앙의 산업기구를 신설하고서 그 기능을 규정한다.
국가 제도로는 四山參軍이란 것이 있어 오직 서울의 四山을 관장한다 하는데, 그 제도가 未備하다. 12省의 名山 大嶽의 예에 따라 모든 山들을 文籍에 기록하여, 그 방위와 구역을 분별하며 그 土宜를 구별하고 그 植木하는 일을 관장하며 그 禁伐을 살피고 그 賦稅를 거두어 國用을 돕는다(경세유표 2-25 동관공조 山虞寺).
신설하는 것이든 혹은 개편하는 것이든 중앙 소속의 산업행정기구가 당해 분야의 산업을 개발하고 기술을 수용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전파하고 관리하면서 賦稅를 거두는 기능을 수행함은 다산의 국가 산업행정체계 개혁론의 전형적 사례이다. 그는 經傳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원래 先王의 법에는 ‘田’과 ‘賦’가 각기 다른 收稅 항목으로 양립하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賦’는 전지를 다스리는 농민이 아닌, 여타 職業을를 맡은 자들이 각기 자기의 소산물을 바치는 稅의 항목을 총칭하는 것이다.
田等과 賦等이 이미 서로 다른 것인즉 田은 田地에서 내는 것이고 賦는 별도로 거두는 것이었다. 각각 하나씩의 법을 이루고 있었는데, 先儒가 經傳을 해석하면서 매양 그 賦를 전지에서 내는 것이라고 했다. 잘못된 해석과 그릇된 뜻으로 이리저리 얽어 둘러서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많다.…田法과 賦法을 두 가지로 양립시켜 국가 재용의 근원으로 삼았는데, 經書의 뜻이 한번 어두워지자 (先王의) 典章도 드디어 무너져 버렸다.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나라를 건설하고 표준을 세우는 시초에 아예 賦法을 다스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폐단은 徵歛에 한도가 없어져서 만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게 되었다. 아아, 經書를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경세유표 10-3 賦貢制 1 九賦論).
무릇 몸에 職事가 있는 자는 각기 그 직사를 닦아서 가지게 된 것을 바친다. 農者는 곡식을 바치고 圃者는 채소를 바치며 工匠은 器物을 바치고 商者는 寶貨를 바치며 牧者는 축산물을 바치고 嬪者는 베를 바치며 衡者는 山物을 바치고 虞者는 澤物을 바친다. 그리고 직사가 없는 자는 다만 夫布를 바친다(경세유표 10-9 賦貢制 1 九賦論).
그러고 보면 茶山의 9직론은 국가의 산업 여러 분야를 다각도로 균형있게 개발하는 길일 뿐아니라, 동시에 국가의 재정 수입을 다양한 항목의 설정을 통해 크게 늘림으로써 새로운 王政을 실현하는 물질적 기초를 확고히 확보코자 하는 뜻을 깊숙히 간직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5. 作動의 점검 ; 考績論
이미 누누히 살폈듯이 각 지역 산업의 여러 분야를 그 지역 실정에 맞게 나누어 조정하며 적정 인력을 배치하고 개발하여 격단의 增産을 성취함으로써 富民과 富國의 실효를 거두도록 감독하고 추진하는 것은 각 지역의 지방행정을 책임진 수령이다. 王權을 대행하는 수령이 책임지고 현지의 里長과 農正을 지휘하여, 경내 직접생산자들이 각기 분담한 산업역군으로서 얼마나 부지런하고 게으르며 어떤 成績을 쌓는지를 점검하고 평가한다. 수령의 평가는 감사를 경유하여 중앙으로 보고된다. 군현 단위마다 적절한 여러가지 산업의 개발과 分任, 권장과 점검과 평가의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서 營農家들을 독려하여 하여금 그들의 생산의욕을 항구적으로 고취하는 자가 곧 행정관으로서의 수령인 것이다.
그런데 그 수령된 자가 왕권의 代行을 제대로 수행하는가의 여부는 다시 누가 점검하게 되는가. 물론 조선왕국에도 형식상으로는 직속 상관이 그 예하 관원의 考課를 담당한다는 규정은 있었다. 가령 수령의 考課는 監司가 맡는다는 규정이다. 그런데 그 실상은 그냥 설정되어 있는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 敎化가 행해지지 않고 禮俗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田野가 제대로 개간되지 않고 山․澤에서 생산되는 이익이 일어나지 않으며, 재목과 六畜이 번성하지 못하고 城郭과 公廨가 퇴락하지 않음이 없으며, 온갖 工匠의 기술이 頑鈍하지 않음이 없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며, 還穀을 사고 파는 것이 어지러워 생민의 초췌함이 날로 심해지는데, 守令된 자는 베개를 높이 베고 병을 요양하고 있다가, 考績할 때에 이르러서는 좋은 평가의 문자를 얻고 남몰래 스스로 기뻐하고 있으니,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여유당전서 제 1집 9-33 考績議).
그렇다면 ‘국가에 도움이 되는’ 考績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가. 주지하듯이 尙書에는 「堯典」・「皐陶謨」 등의 篇이 있다. 그런데, “대저 ‘典’이란 것은 나라를 통치하는 法이요, ‘謨’라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인데, 그 법․그 계책 가운데는 考績 한 가지 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堯․舜이 至治를 이룩하게 된 것도 이를 가지고써이다” 라는 것이 茶山의 소신이다. “이로 보건대 堯․舜의 통치법과 정치 계책으로서 考績을 벗어난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라고도 한다. 考績이야말로 堯․舜이 至治를 이룩할 수 있었던 가장 요체인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王政의 실현을 기획하는 경세유표에서 그는 중앙과 외방의 統治行政 編制를 일단 마무리하고 나서 그 끝에다 「考績法」을 서술함으로써 그 통치행정의 작동을 점검하는 항목, 즉 責成의 추진 항목을 마련해 두고자 하였다.
舜임금이 考績함에서는 비록 元勳 大臣이라도 관대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더구나 禹와 益은 모두 先帝의 元勳이요, 稷과 契은 모두 先帝의 懿親이었다. 그 존귀하고 대단함이 어떠했겠는가. 하물며 이들 수십인은 모두 神聖하고 크게 지혜로우며 학문이 순수하고 공적이 크게 드러났으니, 임금은 다만 신임함이 당연한 것이요, 그 부지런하고 게으름과 훌륭하고 훌륭치 못함을 고찰해서 대신을 공경하는 체통을 상하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오히려 3년마다 그들을 考績하고 세 차례 고적해서는 반드시 黜陟하여, 일찍이 머리털만큼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았음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진실로 天의 職事[天工]는 폐기할 수가 없는 것이며, 民生은 고달프도록 버려둘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법으로는 大官은 고사하고 무릇 京官 가운데의 3품 이상으로서 下大夫라 일컬어야 하는 자에게도 도무지 고적하지 않는다. 또 外官으로서는 觀察使와 節度使에 대해서도 고적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 제 마음대로 貪虐하고 한절 없이 荒淫해도 감히 묻는 사람이 없다. 드디어 온갖 법도가 무너지고 만백성이 곤궁해져도 구제할만한 약이 없고 시행할만한 법이 없게 되었다. 唐・虞의 제도와 비교한다면 너무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경세유표 4-10∼11 天官修制 考績之法).
王의 직무는 곧 ‘天의 職事[天工]’를 대신하는 것이므로, 어떤 고귀한 신분․고귀한 관직자에 대해서도 王이 맡긴 직사의 責成을 추궁하는 고적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적법을 시행하되, 반드시 관직을 위임받은 본인이 자신의 실적을 書狀으로 문서화하여 제출하고, 다시 차례에 따라 王 앞에서 말로써 아뢰어 점검받도록 함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堯․舜 시대에 至治를 실현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妙理가 오로지 관원들로 하여금 功績을 아뢰도록[奏績] 하여 그것을 考課[考績]하는데 있었다”는 것이 그의 경전 해석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그래서 다산은 三公 이하 중․외의 모든 관원은 반드시 자기의 공적을 書狀으로 써내어 다른 (상위) 기관의 고과를 받도록 한 후, 이를 나중에 임금 앞에서 스스로 아뢰도록 하여 다시 考績을 받도록 하고, 그 후 다시 다른 관원이 實地에서 그 구체적인 항목들을 감찰하도록 하는 면밀한 제도를 고안하였다. 이제 여기서는 산업행정 분야와 관련되는 몇 가지만을 검토하기로 한다.
가령 司憲府 관원이 임금 앞에 나아가 아뢰는 書狀의 내용에는, 이조판서 某가 뇌물을 받고 守令 자리를 팔았음을 논한 일, 혹은 어느 곳 수령이 모종의 부정을 저지른 일을 論駁한 일 등이 포괄된다. 또 가령 掌胥院 관원의 書狀 내용에는 어느 곳 수령이 정원 외의 鄕吏를 더 增員했음을 적발하고 그를 파직하도록 奏請한 일, 혹은 아무 고을 邸吏가 수령에게 뇌물을 바치고 몰래 그 役價의 증액을 요청했음을 밝혀낸 일 등을 포괄한다. 그리고 利用監․典軌司․甄瓦署 등의 書狀을 예로 들자면, 지혜를 짜내어 어떤 교묘한 산업기구를 만들어서 이용후생하는데 이바지한 일 등이 있으면 이는 응당 그의 공로로 포함시키도록 한다.
考績 가운데서는 外官職의 경우가 더 엄밀하고, 그 중에서도 守令의 경우를 가장 엄밀하게 시행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위에 언급한 바처럼 수령은 이미 중앙의 여러 官署로부터 감독과 감시를 받도록 고적법에 따라 연관이 조직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도로 수령은, 조정에서 규정한 律己 6조목․奉公 6조목․愛民 6조목과 吏․戶․禮․兵․刑․工典에서의 각기 6조목을 합쳐 도합 54조목을 삼가 遵行하여 그 가운데의 성적이 좋은 27조목(3*9=27)을 갖추어 監司에게 보고한다. 그 가운데의 몇 조목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향리를 단속하는 일이다. 백성의 수령 노릇을 하고자 함에는 향리의 단속이 있을 뿐이다. 향리와 皂隸의 수는 규정된 액수와 掌胥院의 條例를 삼가 준행하여, 넘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 혹 벗어나는 자는 죄가 있다(吏典 6조).
둘째는 農政에 관한 일이다. 농사를 책임지우고 권장함이 수령직을 맡은 자의 정사이다. 나무를 심고 가축을 기르는 일은 더욱 힘쓸 것이다. 뽕나무․산뽕나무․닥나무․옻나무․느릅나무․버드나무․가레나무․오동나무와 온갖 과일, 온갖 목재 및 六畜을 飼養하는 정사는 모두 애초부터 힘써야 하는 일이다(호전 6조).
셋째는 말[馬]을 기르는 일이다. 富民에게는 마땅히 집집마다 말 한 필씩을 기르도록 한다. 혹 사사로 목장을 일으키고 말을 길러서 번식시키는 자가 있으면 이를 上奏해서 東班 正職으로 보임토록 주선한다. 또 공영 牧場이 있는 경우는 더욱 힘을 기울일 것이다(병전 6조).
넷째는 도량형에 관한 일이다. 尺度․斗斛․權衡은 모두 官에서 제조하여 분급한다. 사사로이 제조하는 자는 私錢 鑄造와 同律로 처벌한다(형전 6조).
다섯째는 도로에 관한 일이다. 도로를 닦음에는 숫돌같이 판판하게 해야 한다. 비록 마을 골목의 작은 길이라도 평평하게 다듬어서 수레가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할 것이다. 교량도 때맞추어 수선해야 한다(공전 6조).
監司는 그 예하 수령들의 실적을 고찰한 다음 각기 9조목씩을 뽑아서 9등급으로 고적하여 조정에 上奏한다. 이에 감사가 상주한 啓本과 수령이 奏績한 書狀이 아울러 조정에 도착하면, 조정에서는 이를 아울러 吏曹에 회부한다. 그리고는 해마다 올린 考績을 3년마다 종합하여 大比하는데, 수령은 이미 遞代되었거나 체대되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서울로 올라와서 임금의 召接을 기다려, 奏績한 書狀을 임금 앞에서 직접 구두로 아뢴다. 召接이 끝나면 이에 3년마다 暗行御史를 12省으로 각기 나누어 파견해서 각각 수령들의 實績과 罪狀의 虛․實을 대조 고찰 점검하도록 한다.
지난 3년간 수령이 보고한 27조목의 奏績과 그것을 토대로 감사가 고적해서 9등급으로 上奏한 문서 모두가 비밀리에 파견한 御史의 손에 다 들어 있으니, 이에 각자의 “功績과 罪狀의 虛․實”은 御史의 점검 과정에서 여지 없이 모두 탄로나기 마련이다. 수령이 만약 거짓 공적을 奏績하고 감사가 만약 수령의 없는 공적을 거짓으로 꾸며 상주했다면, 本罪 이외에 또한 임금을 속인 죄가 덧붙여진다. 그래서 더더욱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고적제도 아래서는 어떤 수령도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茶山은 확신한다. 그래서 “이 법을 시행한다면 太平의 治世를 朝夕 사이에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堯・舜이 堯・舜의 至治를 이룩할 수 있게 된 것도 考績하는 한 가지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그는 待望해 마지 않았다.
6. 맺는말
다산의 산업행정체계 개혁론은 중세 말기 지배층의 할거적 농단과 중간 수탈로 인해서 지리멸렬한 고식적 행태로 방치되어 있는 여러 산업분야를 국가 행정력의 동원을 통해 획기적으로 개발 진흥시킴으로써 새로운 역사 창출의 바탕으로 삼으려고 하는 내용을 집약적으로 개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결코 구래의 산업 여러 분야를 확대 개발하고 크게 진흥한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9職論이라든가 農政 6科論에서 살필 수 있듯이, 가능한 한에서의 모든 산업분야를 모두 다 새로운 계획 아래 국가 행정력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그리고 극대한으로 개발 진흥코자 하는 개혁론이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산이 구상한 것처럼 19세기 초 조선왕국의 현실에서 과연 그러한 산업 여러 분야의 새로운 개발과 재편성, 재배치가 가능한 일이었는가. 이 문제는 여기서 즉각 해답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산의 산업개혁론은 궁극적인 王政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서 구상한 전반적인 국가체제 개혁론의 한 부분이었다. 가령 그는 井田制를 두고서도 반드시 “수백년을 동요됨이 없이 堅持하면서” 차례차례 점차로 시행하여야만 “이에 先王의 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산업개혁론 또한 마찬기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農政 6科의 勸獎을 설명하면서도, 지금의 守令이 이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추진하라는 것이 아니요, 경세유표 전제론에서 결락된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라는 말을 그는 덧붙여 두었다.
그러나 다산의 산업 개발론은 또한 당시의 역사적 현실적 의미를 충분히 지니는 것이었다는 사실 또한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살펴본바 국내에서도 도시 중심의 상업적 농업은 이미 專業的 開發 營農의 단계로 접어들어 있었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산업기술은 이미 전일에 비할 바 아니게 크게 발전해 있으므므로 우리가 배워서 활용하지 않으면 국가적 낭패를 면할 수가 없는 지경으로 객관적 정세가 변하고 있었다. 西洋의 선진적 기술수준도 견문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는 인식하게 되었다. 뿐아니라 造船기술은 중국 보다도 일본을 위시한 남방 국가들이 더 앞서 있다고 하는 객관적 현실을 알게도 되었다. 적극적인 개발과 진흥을 통해서는 다방면에서 큰 성과와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이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내의 산업행정은, 개발이라든가 진흥은 고사하고 중간 농단과 주구적 수탈의 지리멸렬한 인습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남방의 橘과 柚子의 誅求的 收奪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발이 아니라 障礙가 되고 沮害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國家행정라는 것이었다.
19세기 초 조선왕국의 산업행정 실태를 살펴보면, 의도적인 개혁을 통해서 새로운 개발 진흥책을 쓰는 방향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외국의 침략이 아니더라도 민란이 일어나 국가 자체가 패망하고 말 것이라는, 어떤 한계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茶山은 진단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법제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을 그는 경세유표의 서문에다 直敍해 두었다. 산업행정의 의도적 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다산의 井田制論은 농민이 능력에 따라 받는 井地를 永業田으로 길이 보유 관리 경작토록 한다는 구상이었다. 井地가 永業田으로 된다면 가령 牧畜이라든가 林業을 그 職으로 받는 자 또한 마찬가지로 그 牧場이라든가 山野를 영구적인 산업장으로 보유 관리 영업하도록 조직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곧 전국의 田土를 전국 산업 역군들의 永業田的 산업장으로 영구 보유케 한다는 구상이다.
가령 어느 농민이 이제는 “파 한뿌리・부추 한 단”조차 재배할 땅뙈기가 없음을 한탄할 필요 없이, 자기의 능력에 가까운 산업분야에 배치되어 기본 耕地(産業場)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우선 농민들로 하여금 恒心을 가지고 자기 산업에 전업적으로 매진토록 하는 기본 요건이다. 모든 농민이 자기의 永久 産業場을 보유하면서 분업적으로 專業함에 따라 恒心에다 熱意를 더해서 營農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경험의 축적을 통한 기술의 개발이 일어날 수 있으며, 드디어 어느 시점에 가서는 생산기술의 큰 발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가령 菜蔬 재배자가 자가 이를 항구적 專業으로 삼아 정성을 다해 계속 영농하면서 경험을 쌓고 기술을 개발하여 드디어 자신의 산업이 크게 번영함에 따라 官職으로도 진출하게 된다면, 이는 그의 家業이 번성하는 일일 뿐아니라 국가의 菜蔬산업 또한 크게 번성하는 첩경이다. 그리고 專業的 기술은 이윽고 인접 분야와도 상호 이전하고 침투하면서 국가의 산업 전반에도 생산기술의 확대 발전이 전개되기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考績法이라는 추진책을 통해서 간단없이 점검하고 督責함으로써 그 모든 과정은 간단 없이 연속적으로 작동되어갈 것이다. 그래서 民富와 國富가 유족해짐에 따라 이에 王政을 실현할 기초가 항구적으로 튼튼히 확보된다.
그리고 여기서 자립적 영농주체로서의 산업역군 또한 역사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국가 행정력을 통한 산업 진흥책은 그 産業전사들에게 여러 가지 規制와 함께 각자 자율적 自營體로 성장할 自立의 地盤을 제공한다. 그래서 가령 농민은 耕地도 얻게 되지만 그 경작을 통해서 국가에 곡물을 이바지하게도 된다. 자립적 생산지반을 갖춘 營農主體로 정립된다는 것은 곧 사회적으로는 주체적 인간존재로 역사적 진화를 실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할 것이다.
매우 낙관적인 예상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여기까지가 구래의 수탈행정을 극복하고 개발과 진흥의 산업행정체계로 전환한다는 다산의 개혁론의 구상인 듯하다.
다산이 산업 여러분야의 우수한 실적을 올리기 위해 官職이라는 誘引을 설정한 것은,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富欲과 貴欲이라는 본연의 두 가지 욕구를 가진다는 확신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개인적 확신일 뿐아니라, 당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매관매직의 행태를 참작하고 그것을 돌이켜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인하는 선에서 성안한 것으로도 이해된다. 그는 정전제론에서도, 井田 구획의 초기단계에서 각 지역마다 표준되는 井地를 솔선해서 만드는 “재물이 많고 재간이 있는” 자에게는 관직을 수여한다는 유인을 설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산에 의하면 가령 田地는 농민의 永業田으로 耕治하도록 배치한 것이지만, 그 궁극의 관리는 역시 국가의 공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음이 특징이라 할 것이다. 결코 사적 소유물로서 배타 독점적으로 관리되거나 처분할 수 있는 데까지 허용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인간이 가진 본원적 욕구로서의 貴欲도 어디까지나 王權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허용될 수밖에 없듯이, 본원적 욕구로서의 富欲의 추구 또한 국가 전체의 조화로운 운영을 위한 限度 안에서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다산에 의하면 이 세계에서는, 개인에 의한 私的 所有라든가 私的 支配의 이념의 실현 보다는 國家的 혹은 公共的 이념의 실현이 언제나 優先해야 하는 것이며,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것으로 思惟되고 있었다. 儒學 經傳의 이념을 따라 그 또한, 王의 직무란 것은 곧 天을 代理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살핀바 아무리 고귀한 관직자일지라도 결코 考績에서 寬待할 수 없는 이유가 곧 “天의 職事[天工]는 폐기할 수가 없는 것이며, 民生은 고달프도록 버려둘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스스로 분발하여 “天의 운행의 굳건함”처럼 모든 臣民을 이끌고 왕정의 실현을 위해 간단없이 결단하고 매진하는 改革主體로서의 王權인 것으로 구현되어 있음이 큰 “道는 天에서 발원하여 君子에게서 中和를 이루고 化民으로 끝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王이란 곧 모든 ‘君子’의 표상이며 표준이다. 그러기에 ‘皇極’이란 명제를 쓰지 않는가. 王은 天道를 이어받아 中和라고 하는 ‘大本과 達道’ 즉 體・用으로 터득하고 풀어내어 결국에는 만백성을 교화시킴으로써 王政을 실현해야 하는 책무를 지니는 존재이다. 그래서 다산 개혁론에서의 王權의 본질로 말하자면, 성리학적 왕권론에서와 같이 大臣에게 국정을 위임한채 자기 一心의 수양에 몰두하면서 拱手端坐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분발하여 “天의 운행의 굳건함”처럼 모든 臣民을 이끌고 왕정의 실현을 위해 간단없이 결단하고 매진하는 改革主體로서의 王權인 것으로 구현되어 있음이 큰 특징이다.
‘天이 맡긴 직무’를 관리하는 地上의 王으로서는 개인의 私欲 추구를 결코 무한정으로 긍정할 수는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소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제 산업분야의 발전과 전개를 기대한다는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思惟체계인 것으로 이해된다. 다산은 원칙직으로 국가 행정력에 의한 의도적인 개발과 조직․편성․배치를 기획하고 있으며, 국가 産業제도와 ‘田’・‘賦’ 제도의 올바른 운용을 통해서 王政을 실현한다는 데에 그 궁극의 목표를 두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미 살핀바 그의 9職論은 국가의 산업 여러 분야를 유루 없이 개발하는 것일 뿐아니라, 田地에만 의존하는 구래의 收稅제도를 개혁하여 여타 모든 산업분야에서도 ‘賦’를 거두어 들임으로써 국가 財用을 넉넉히 한다는 데에 큰 뜻을 두고 있었다. “堯・禹가 전지를 구획하여 井田制를 만든 까닭은 백성의 산업을 균평케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나라의 租・賦를 바로잡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田地를 나누는 법은 그 중점이 전지를 耕治하는 데 있는 것이지 산업을 마련해주는 데 있지 않다. 누가 식구 수를 헤아려 전지를 나눈다고 하였는가. 行伍와 같이 편성하고 굳센 병졸을 선발하듯 하되, 그 노동 인원의 많고 적음과 힘의 강약을 헤아려, 강한 자에게는 上等地를 주고 약한 자에게는 하등지를 준다.……先王이 그 능력을 헤아려 田地를 주는 것은 마치 才能을 헤아려 관직을 주는 것과 같다. 부모・처자 등 양육할 식솔이 많더라도 진실로 재능이 없다면 이 관직을 제수할 수 없고, 부모・처자 등 양육할 식솔이 많더라도 진실로 굳센 힘이 없다면 이 전지를 줄 수가 없다.…양육할 식솔의 많고 적음은 先王의 묻는 바가 아니었다. 적임자를 얻어서 전지를 맡기매 그가 힘을 다해 경작하면 곡식이 많이 날 것이요, 곡식이 많이 나면 民食이 풍족해지고, 민식이 풍족해지면 疲・病・衰・幼한 자와 工・商・虞・衡・牧・圃・嬪하는 자가 모두 그 가운데에서 즐거이 먹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聖人의 뜻이었다(경세유표 6-4 地官修制 田制 4).
茶山 實學에 의하면 국가는 개인의 私的 영역에 대해서는 결코 간여하지 않지만, 동시에 개인을 私的으로 保護하는 제도 또한 결코 긍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억조창생은 수풀처럼 무수하므로 비록 慈母일지라도 하나하나 젖먹이듯 할 수는 없다. 오직 백성에게서 收取하는 것에 일정한 제도가 있으면 백성은 바로 편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聖人은 租․賦를 바로잡는데 힘썼지 산업을 균평히 해주는 데 힘쓰지 않았다. 오직 9職으로써 만민에게 권하여 하여금 각자 서로 도와 이바지해 가면서 먹고 살도록 했을 따름이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또 가령 수레는 모두 典軌司의 주관하에 전국 통일의 ‘同軌’제도를 시행하되 결코 私造를 허용치 않으며, 선박은 모두 典艦司의 주도하에 전국 통일의 ‘9등급’제도를 채택하되 조금이라도 틀리는 규격은 결코 용서치 않는다는 지론도 극히 주목할만한 것이다. 다산 실학은 國家 위주 개혁론으로서의 성격, 더 나아가 國家主義的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산의 산업행정 개혁론에서도 각 분야의 산업 역군은 직접생산자인 民間人이 주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러 산업분야를 개발하고 진흥하는 추진력은 왜 하필 국가 행정을 통해서 발동시키고자 하는 것인가. 19세기 초의 산업경제 정세로 말하자면, 민간부문의 성장이 다소 있기는 하였으나 산업개발을 구체적으로 추진할 새로운 사회계층의 성장은 아직도 너무 미미한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반면에 소위 봉건적 反動은 도처에서, 층절마다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立案이란 무엇인가. 거친 산・첩첩 봉우리・먼 갯벌・작은 섬들은 천지개벽 이래 국가 臺帳에 올라본 적이 없는 것인데, 門閥 높은 집에서 스스로 文券을 만들어 이를 차지하고서는 立案이라 한다. 풀 한 포기・나무 한 그루・고기 한 마리・게 한 마리도 모두 내 것이라 하여 앉아서 稅를 거두어 들인다. 나뭇길도 끊어지고 도끼질도 엄중히 금지된다. 고기잡이 통발은 국가 臺帳에 실리지 않고, 塩盆은 사삿 聚斂에 바닥이 난다. 혹은 功臣・戚臣의 먼 후손들이 매양 民田을 잡아서 賜牌地라 칭하는데, 구릉을 포함하고 벌판까지 뻗쳐있는 것을 모두 내 땅이라 하여 마음대로 강탈하여도 아무도 말을 못한다. 小民들은 파산하여 드디어 쇠잔하고 멸망한다(목민심서 10-38 刑典六條 禁暴).
오늘날 국가에 가장 긴급한 것은 田政이다. 내가 오랜 시일 田野에 살면서 田政의 문란함을 직접 보고 참으로 눈물 흘리고 싶은 때가 많았다. 康津 고을은 누락된 田結이 가장 적다고 일컫는 곳이다. 그런데 田案에 등록된 田地가 6千餘結이고, 漏結이 거의 2千결이나 된다. 이는 公家에서 4분의 3을 취하고 縣吏가 4분의 1을 갖는 것이다. 비록 옛 魯나라 季氏가 公室을 4등분했다 하지만 어찌 이보다 더할 수야 있었겠는가. 海南은 강진과 비교하면 지역은 더욱 작은데 漏結은 오히려 더 많다. 羅州인즉 누결이 元案에 기재된 결수보다 더 많다. 천하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경세유표 1-15 地官戶曹 2 經田司).
도처에 산재하는 할거적 중간 농단의 사회세력들은 결코 소홀히 대하거나 혹은 무시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 시기 閥閱을 이루고 영구 집권을 획책하는 것이 ‘門閥 높은 집’이며 ‘功臣・戚臣의 먼 후손’임은 이미 널리 아는 그대로다. 이제 이들까지를 통합하고 전체적으로 결속하여 새로운 王政 실현의 추진력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일 것인가. 다산은 강력한 王權의 존재야말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국가개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 산업행정 체계 개혁의 추진 주체 또한 궁극적으로 王權 이외의 존재는 생각할 수가 없다. 堯舜의 至治를 실현할 가장 긴요한 점검 수단으로서의 考績제도에서도 그 궁극의 발원력은 왕권 이외의 것일 수가 없음이 명백하다. 구체적으로야 물론 王權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 행정체계를 통해서 추진되고 실현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통치행정 실태는 어떠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가. 가령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弊法들을 곧 ‘祖宗의 法制’라고 표방하고서 독점적으로 정권을 농단해온 현실의 집권당의 행태를 그는 직시한다.
三代 때 禹 湯 文・武가 나라를 이룩하여 표준을 세우고 禮樂을 제정하여 金石 같은 法典을 물려주니, 어진 신하와 훌륭한 보필이 뒷 임금에게 고하기를, “어기지 말고 잊지 말아서, 모두 다 옛 법을 따라 하소서” 라고 하였다. 그런데 후세에는 세상이 어지러운 때를 타서 우뚝 일어선 자가, 天命은 아직 정돈되지 않고 人心도 복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豪强한 자들의 원망을 살까 염려해서 드디어, 衰亂한 세상을 오래 거치면서 겹겹이 쌓여 벌써 곪아터질 腫瘡을 이루고 있는 弊法들을 그대로 따라 쓰게 되었다. 혹 하나라도 깨달은 견해가 있어 更張하기를 시험해보고자 하면, 元老 大臣으로서 沈重하여 德이 있는 듯한 자가 반드시 한 마디 말로써 천천히 억압하기를, “祖宗의 法制는 반드시 경장할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 그러면 豪强하여 권세를 업고 私만 알지 公은 모르는 자가 반드시 따라 되뇌이기를, “老爺의 泰山 喬嶽 같은 덕망이 국가를 진정할 만하다” 라고 한다. 그러나 실상 鄕愿의 거짓 德이요, 善을 좋아하는 마음은 한 점도 없는 것이다(경세유표 11-21 賦貢制 6 力役之征).
다산에 있어서 산업 행정체계 개혁론은 산업경제의 개발과 진흥이라는 독자적인 과제로서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王權과 政治라고 하는 統治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 역시 결국에는 한국사의 항구적인 큰 특질을 이루는, ‘統治’의 문제라는 장벽 앞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통치의 궁극적 원천으로서의 왕권은 위의 사료에서와 같이 고립무원의 형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더 본질적으로는 왕권 자체가 이미 집권당의 首長 노릇 이외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랜 터이기도 한 것이었다. 王政은 대체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