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부
1.
초연의 얘기에 취해 홀짝홀짝 들이킨 양주가 상당한 양이었던지 아침이 되었어도 정신은 맑지 못했다.
샤워기에서 찬 물을 뒤집어 쓴 채 미희는 그러나 지난 밤 초연의 말을 들으며 초연에게 얽힌 고리를 자신이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대한 의문이 자신을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경연…..정경연….스물여덟….열여섯 살 차이…대갓집의 귀한 손…..유모의 품에서 자란 고아….퍼즐을 맞추듯이 맞춰 나가보면 초연의 얘기 중에 다른 것은 경연의 성씨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씨는? 고향은?…..그래 시간이 없어’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다시 생각난 초연의 얘기는 미희의 마음을 갑자기 급하게 만들었다.
‘언제까지나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살 수는 없어. 계속 세상 사람들 눈을 속이고 살 수는 더욱 없고…... 초연이 아무리 주방 일을 하고 있더라도 둘 사이의 눈을 바라보면 그들 사이는 눈치가 더딘 사람도 금방 알아챌 수도 있을 거야.’
비록 경연과 자신의 아버지의 만남이 껄끄러운 관계로 끝났지만 경연은 이미 미희에게 남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과 관련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미희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샤워를 마친 미희가 몸에 타월을 두른 그대로 나와서 미희의 방문을 열었다.
지난 밤 폭음을 한 초연이 아직 숙취에서 깨어있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방은 비어있었다. 문을 닫고 돌아선 미희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초연은 벌써 달그락거리며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다 들어온 미희를 보고 방긋이 웃었다.
“언니 속 괜찮어?”
“응….그 정도 가지고 뭐. 다 씻었어?”
“응 언니는?”
“나도….그래 밥 먹자…내가 술국 끓였어.”
“빠르기도 하네….”
식탁 위에 수저를 놓는 초연의 모습을 보며 방으로 들어간 미희가 옷을 입고 나오자 어느새 식탁은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초연의 손놀림은 언제나 재빨랐다.
“며칠 째야?”
혓바닥이 깔깔하여 밥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국그릇에 숟가락을 몇 번 들락거리며 깨작거리고 있는 미희를 보며 초연이 넌지시 물었다.
“열흘이 넘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내가 너무 서둘렀었어”
밑도 끝도 없는 소리로 답한 미희가 다시 국을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으며 미희를 바라보고 말했다.
“언니, 국 진짜 맛있다.”
“맛은 뭐….”
“근데…..내가 곰곰 생각했는데…..”
“???”
“언니!!”
“응?”
“내가 곰곰 생각 했는데….언니…..그 사람 들, 만나라…..일단 만나….언니가 직접 어려우면 내가 먼저 만나서…..언니 얘기를 할게. 그리고…..그 두 사람….언니 남편이었던 분, 그 분도 내가 만나서 말할게.…..그 두 사람이 서로가 모르고 있다면 조심스럽게……근데….어디로 먼저 가지? 언니 생각은 어때?”
“모르겠어”
“아직 나도….어느 쪽을 먼저 만나야 일이 잘 풀릴 수 있을지는 결정을 못했어. 한 편은 우선…..부모끼리 먼저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또 다르게 생각하면…..언니 딸을 만나서……언니 딸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언니가 살아온 얘기를 하면….거기가 먼저 얘기가 잘 풀릴 수 있기도 하고…..여자니까..여자니까…..서로 더 이해가 빠를 것 같기도 하고…..어때? 언니는? 언니 생각을 말해 봐.”
“정말 난 잘 모르겠어…..어느 쪽도 자신이 없어.”
“언니!!”
“응?”
“학교 안다고 했지? 아냐. 대학원이라도 지금은 방학기간이라서 학교에선 찾기가 쉽지 않을 거야. 집도 안다고 했지?”
“응”
“ 그래 일단 집으로 가보는 거야. 없으면 대문 안에다 편지라도 두고 오면 되니까….집에 없으면 언제 어디서 만나자라고 쓴 편지를 두고 오지 뭐.”
미희의 그런 결정에 초연은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젓가락으로 반찬만 깨작거리고 있었다. ‘후르륵’ 남은 국을 입에 털어 넣은 미희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정말 갈 거야? 나도 같이 갈까?” 미희가 일어서자 따라 일어선 초연이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아냐 언니, 내가 먼저 언니 딸을 만나볼게. 종이에다가 주소하고 이름하고 약도를 그려 줘. 택시를 타야 하니까 그 근방 생각나는 큰 건물이나 간판을 그리면 더 좋고….”
2
예령은 오늘따라 더욱 정성스럽게 경연의 방을 청소했다.
이미 학위에 필요한 학점 이수도, 논문 정리도 다 끝났다. 방학기간이기는 했지만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방학기간 내내 학교 도서관에서 법률 관련이 아닌 다른 서적을 보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나 오늘은 왠지 그냥 마음이 편안했다.
그 편안한 마음으로 경연의 방에 들어섰다. 언제나 먼지가 앉을 틈도 없이 청소를 해서 먼지하나 없는 방이지만 다시 바닥을 닦고 침대 시트와 이불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10년 째 책꽂이에 꽂혀있는 대학입시 관련 참고서들을 들춰보며 그 손때를 음미했다.
금방이라도 경연이 나타나서 그 책들을 가방에 넣다가 팽개치며 자신을 안아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 앞에서 이글이글 불타오르던 그의 탄탄한 가슴이 생각났다. 눈빛 하나로 모든 얘기를 다 하고 뜨겁게 결합했던 그 밤이 생각났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던 원장의 손길이 징그러워 소스라치게 놀랐던 몸뚱이였다. 그러나 경연의 손끝에서는 자신의 몸뚱이가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던 그 밤의 열정도 생각났다. 그리고 같이 기거하던 몇 달 동안 그의 몸과 함께 했던 그 뜨거운 밤들이 생각났다.
자신의 비명과 함께 가슴과 등에서 폭포수 같은 핏줄기를 뿜어내며 유리창 밖으로 뛰어 내리던 그 밤도 생각났다. 뛰어 내리며 내지른 그의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고함도 생각났다.
그가 사라진 후 10년 동안 매 번 그의 방을 청소할 때마다 예령은 그의 환영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가 다시 이 방으로 돌아와서 자신과 그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에게 경연은 이미 오빠가 아니었다. 그가 만약 살아서 나타난다면 그와 자신의 결합을 말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와 자신은 애초부터 남이었다. 법률로도 마음으로도 그는 남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오래도록 그리는 꿈속의 연인이었다. 아니 그는 연인이 아니라 이미 남편이었다. 열 여덟 소녀를 여자로 만들어 준 당당한 남편이었다.
불가항력으로 천대성이란 짐승에게 겁탈을 당한 몸뚱이었다. 그리고 천대성이란 짐승에게 겁탈을 당하던 순간에도 뜨거운 반응을 보였던 몸이었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씻어낸 몸이었다.
그 뜨거움을 잊기 위해 피나는 공부로 날밤을 새웠다. 날밤을 세우다 씻고 또 씻었다. 이제 그도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 되었다.
10년을 그 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는 그의 침대는 언제나 포근했다. 그 침대의 시트를 털며 예령의 눈망울은 다시 물방울이 맺혔다.
‘그는 조경연이고 난 유예령이야. 호적법도 민법도 가족법도 족보도 나와 그이의 결혼에 장애는 없어. 그와 내가 쌍둥이었다고? 누가 그래? 누가 알아? 그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데….천대성? 웃기지 말라 그래. 그 사람이 내게 뭔데? 난 이미 그의 부인이야.’
수없이 혼자 뇌까리며 자기 최면에 빠졌던 속삭임을 다시 뇌까리며 예령은 그의 베게를 안았다.
‘정말 죽었어요? 아니죠? 내가 이렇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데….당신은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녜요. 나를 놀래 주려고….그렇죠? 나…..이제 당신의 아내 자격을 다 갖췄어요. 당신은 그냥 놀아도….내가 다 당신 책임질 수 있어요. 당신만 생각하며 보낸 10년이었어요. 당신 앞에 떳떳이 나서려고 준비한 10년이었어요. 이제 정말 돌아와 줘요.’
첫댓글 언제 재회 하려나 ????
해후가 기다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