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래
안 종 문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 둥근 나무토막을 바닥에 깔아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 도르래다. 학교에 가면 교실 앞, 뒤의 출입문들을 여닫을 때 손으로 느낄 수 있으며, 장난이 심한 친구들이 문짝을 넘어뜨렸을 때는 직접 볼 수도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손쉽게 나르는 물건의 바퀴에서나 엘리배이터 혹은 이삿짐 사다리차를 이용하는 모습에서도 그 원리와 고마움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서도 도르래와 닮은 사람이 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었다. 듣는 것으로서의 들었다가 아니고 남의 말을 듣고서 행동에 잘 옮겼다는 뜻이다. 할머니는 큰아버지와 사셨지만 돌아가실 순간까지 아버지를 끼고 살고 싶어했던 아들이었다고 한다. 이 점은 그 누구를 편하게 하였지만 그 만큼 또 그 누구를 불편하게 하였다.
내가 어릴 때 무수히 보고 자란 것 중에 하나는 낡은 달구지(구루마)가 골목에서 썩어서 버려지는 모습이었다. 오일장에서 그 누구의 꼬드김에 아버지가 덜렁 사서 집에 갔다 두고는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염소를 팔러간 어느 농부가 썩은 사과 포대기를 안고 돌아왔다는 우화가 있듯이 아버지의 이런 점은 어머니의 가슴을 숱하게 멍들게 했다.
또 하나는 해마다 불도저를 불러서 홍수에 떠내려간 논밭 둑을 다시 쌓는 것이었다. 강변에 위치한 논과 밭을 점유해서 농사 짖는 것은 아무 실속이 없었다. 그 해의 이익을 넘어서는 유지비가 어린 내 마음에도 쓰렸다.
그뿐 아니었다. 누구의 솔깃한 손 벌림에도 쉽게 돈을 꿔주었고, 어느 사람의 애걸에도 쉽게 소원을 들어주었다. 선산의 귀한 묏자리도 덜렁 내주는가 하면 딱한 사람의 족보 등재 요청에도 덜커덩 승낙해서는 자식들의 말문을 닫게 한 바도 있다. 매년 몇 십 혹은 몇 백만 원을 손쉽게 떼이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오일장 뜨내기 소장수들이 아버지를 그냥 놔두지 않았던 점이다. 소를 산답시고 찾아와서 벌이는 세월 보내기 놀이였다. 손해를 보거나 좀 따거나 할 것 없이 술을 거나하게 잡수시고 돌아와서는 인생에서 부귀영화는 다 뜬구름이라며, 가족의 근심을 우물가의 두레박 도르래처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다독였다.
가족에게 소리 없는 눈물을 주었던 반면에 남들에게는 더없이 인기가 좋았다. 어느 인근 동네에서든 소를 팔 때나 논밭을 흥정할 때도 아버지는 곧잘 최우선으로 초청되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사고 파는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도르래 역할을 곧잘 수행하였다. 농사철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써레군 중에 아버지가 늘 최우선이었다. 하다못해 강변에 키운 버드나무를 팔 때도, 초가지붕을 새로 갈아 이우는 일에도 아버지는 수시로 불리었다.
아버지가 여느 촌부와 달랐던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집안 살림이 쉽게 구르도록 도르래 역할을 잘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출타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직접 해보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먼저 수박, 참외, 토마토를 재배하여 자식들의 학비를 대도록 머리를 틀었다. 누에치는 것은 물론 국수틀을 차렸고, 소나 염소를 키워서 돈을 벌도록 했다. 집 앞의 제재소 공장을 공동으로 인수해서는 정미소와 떡 방앗간을 운영해보기도 했고, 뒤늦게는 과수원까지 꾸렸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에 와보고 가계경제를 잘 굴리는 아버지의 수완에 탄복하였다. 그뿐 아니라 도르래 바퀴 위에 올라탄 아홉 자식이 저마다 작은 효행을 보이며 사는 것을 부러워했다.
아버지는 힘든 시골 살림에도 불구하고 일곱 아들을 모두 중학교에 보냈다. 공부시켜야 한다는 아내의 말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간혹 도와주긴 하였었지만, 고등학교도 저희 형제들 힘으로 다니게 했다. 살림을 내어주는 결혼 문제도 물론 저 스스로 풀게 하였다. 자식들이 자수성가하였다는 성취감을 누리게 하였던 배려가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고차원 전략이었다.
며칠 전이었다. 여섯째 아들인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제법 큰 공장을 일으킨 넷째 아들네를 구경시켜드리고 왔다. 사십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사는 아들의 성공을 두 눈으로 보고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자 휠체어를 밀어드리면서 아버지의 일생을 생각해보았다. 좋은 정보를 갖고도 이런저런 걱정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버지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도르래 바퀴처럼 잘 굴러서 살아온 삶이었다. ‘사람은 제 먹을 것을 다 갖춰서 태어나기 마련이다’는 말을 즐겨 하셨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느 시인이 그려낸 풀과 같은 삶을 사셨다. 백수를 코앞에 두시고 갑자기 무릎을 펴지 못해서 전동차나 휠체어 없이는 마음대로 다니시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정신은 아직 도르래 그대로시다.
며느리나 사위를 본 내 친구들은 말한다. 자식들의 무한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겠다고.
어리석은 부모는 자식이 먼 길 떠남에 혹여 목이 말라 고생할까 필요한 물을 모두 등짐에 지워서 보낸다. 짐이 힘에 버거워서 기우뚱거리는 젊은이들이 가련하다. 그 길이 사막길이라면 몰라도 그럴 필요가 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지를 못하는 것이 우리와 같은 필부필부다. 인생은 먼 여행길인데 왜 그리 무거운 등짐을 지어주지 못해서 안달인지 이제야 아버지의 높은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도르래는 힘의 방향에 거역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도르래와 같은 삶이 뒤늦게 부러운 것은 왜일까.
* 나는 세월 도르래로 살고 싶다. 역사에 작은 힘을 보태는....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으니 ....2024.3.6. 새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