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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삶 (시23:1-6)
우리의 삶엔 두가지 모습이 존재합니다. 산문적 삶과 시적인 삶, 또는 서정적 삶과 서사적 삶이 그렇습니다. 산문적인 삶은 환경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는 삶이요, 시적인 삶이란 환경을 뛰어 넘는 소망을 갖는 삶입니다. 그런데 저는 신앙인의 삶은 시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풀어서 설명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상상력도 없어지고,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이해가 삶을 싹둑 싹둑 재단하는 규범이 되어 너무나 삭막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학교 국어교사인 신정숙 선생님은 세상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제 사람을 만나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군이 없으면 고달프므로/ 적군이 없으면 재미없으므로/ 삶이 어느 틈에 전쟁이 되었으므로.(적군과 아군)
그럼에도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은 좋은 그림을 보면 마음이 고요해 지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그윽해 지듯이, 좋은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우리의 삶이 정화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에겐 아직 소녀의 감수성과 아름다운 꿈이 마음속에 그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정숙 선생님은 삶을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절망 속에서도 '호두나무 아래에서'란 산문적 시를 통해서는 100년전 선교사가 심은 호두나무에서 삶의 희망을 보고 살찌우는 양식이 되고픈 영혼의 갈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정명동산 만이 가지는 특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을은 시인의 계절입니다. 봄을 노래한 시인도 많고, 여름의 정열과 겨울의 스산한 아픔을 노래한 시도 적지 않지만, 가을만큼 시인의 넋을 유혹하는 계절도 없습니다. 가을은 영혼의 계절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가을의 노래는 모두가 기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안도현 '가을엽서')
가을이 물들어오면/ 내 사랑하는 사람아/ 흘러가는 강물을 보러/ 강가에 나가자/ 강변에 앉아 우리의 삶처럼/ 흐르는 강변을 바라보며/ 서로의 가슴속에 진하게 밀려오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면/ 우리의 사랑은 탐스럽게 익어가는/ 열매가 되지 않을까. (용혜원 '가을이 물들어 오면'중에서)
풍족한 영혼이 아니라, 가난한 영혼, 그 고독한 영혼이 절대자를 만나는 시절입니다. 가난하기에 내적 충실을 갈구하고, 고독하기에 하나님과의 대화를 기다립니다. 그 갈구와 기다림은 기도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신앙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현승님은 노래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가을의 기도)
파릇한 봄의 희망과 여름의 싯푸른 절정을 다 지내고 이제 생명의 종말을 알리는 낙엽의 때에 이르면 누구든지 진실 앞에 겸손해지기 마련입니다. '겸허한 모국어'는 마음속 가장 깊은 자리에서 솟아오르는 절절한 생명의 소리입니다. 거짓이 끼어 들 자리가, 오만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가을의 기도는 그래서 진실과 겸손으로 가득 채워진 영혼의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을은 사랑하고 호올로 기도하는 시간인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가끔은 혼자 있어야 합니다. 특히 가을엔 그렇습니다. 혼자 있는 것은 외로움과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스스로를 발견하지 못하면, 꿈을 키울 수도, 가꿀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최창일의 '아름다운 사람은 향기가 있다'중에서)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따스한 위로의 말 몇 마디가 목마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전 무심코 시집을 꺼내 읽습니다. 세상살이가 팍팍하다고 느낄 때면 이해인, 용혜원, 정용철, 이정하, 천상병, 김용택, 고훈, 신경림, 안도현 님 등의 시를 즐겨 읽습니다. 또한 괜시리 외로울 때면 기도하거나 찬송을 부르기도 하지만 동요(사실은 시)를 많이 부릅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이 그립고, 생각이 막힐 때 한편의 시를 읽으며 시를 맛보는 순간은 온 세상이 내게로 집중되어 내가 시를 읽는지 시가 나를 읽는지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환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 아련한 시어들 속에서 헤매다보면 저절로 단비를 맞은 듯 마음이 생글거리고, 책장 사이사이 뿌려진 시어들 속에서 반짝이는 삶의 지혜들을 건져 올리는 풍성한 삶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눈감고 느긋하게 시를 음미하면 느껴지는 시인의 감성이 좋습니다. 번득이는 재치와 느긋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좋습니다. 정승기의 시 ‘시란 놈은’ 제가 왜 시를 좋아하는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는 시란 놈을 좋아합니다/ 시란 놈은 나에게 희망을 줍니다/ 시란 놈은 나에게 감동을 줍니다/ 시란 놈은 나에게 옛 추억을 줍니다/ 가끔 시란 놈은/ 나에게 지금 너무 힘들다고 말합니다/ 시란 놈은 그 고통에 저항할 것입니다/ 시란 놈은 그 고통에 순응할 것입니다/ 시란 놈은 그 고통을 극복할 것입니다/ 시란 놈은 신의 능력을 지녔습니다/ 시란 놈은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시란 놈은 저 차가움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시란 놈은/ 시란 놈은.” 시 구절의 하나 하나가 꼭 제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그렇게 저는 시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봄을 상상하면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여름을 기다리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새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물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아름다운 꽃을 보면 마음이 아름다워집니다. 그만큼 우리의 생각 눈길 손길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마음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그림을 보면 마음이 고요해 지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그윽해 지듯이, 좋은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우리의 삶이 정화되는 것 같습니다.
시를 많이 읽으면 좀 더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다고도 합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또는 기껏해야 저녁 반찬 생각, 유명 연예인 생각을 하고 앉아 있고, 또 한 사람은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며 움터오는 새싹과 꽃을 보며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 두 사람의 삶은 같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 있더라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럼 누가 남들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느낄까요? 천양희 시인은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란 시에서는 “생각한다는 건/ 생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생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생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듯이 시를 많이 읽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느끼며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체험과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 읽는 사람을 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시는 왠지 어려운 것으로만 느끼고 그래서 일부 사람들만의 취미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정명가족 여러분들도 성경은 자주 읽으시지만 시는 별로 읽지 않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국어 책에 실린 시들을 교사가 가르치는 대로, 참고서가 일러주는 대로 밑줄 치고 외우고 시험보고 하면서 우리는 시에 대한 첫인상을 망쳤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학교에서 시를 마음으로 읽는 법이 아니라 고정된 답을 외우는 것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는 읽는 사람의 감성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답이 다릅니다.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눈물을 줄 수 있는 것이 시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연애편지 쓸 때) 시의 힘을 빌리는 걸 보면, 우리 모두가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시 읽기 운동’을 제안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시를 읽으면 행복해집니다. 세상의 티끌도 지워질 듯 가슴은 맑고 깨끗해집니다. 시를 읽으면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내 마음이 착해집니다. 시를 읽으면 저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집니다. 둘째, 시를 읽으면 풍부한 정서와 감성이 느껴지고 살아 숨쉽니다. 시에는 희로애락의 감성과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꽃을 노래하는 시를 읽으면 코끝에서 꽃향기가 스쳐 지나가는 듯하고, 시속에 비가 내리면 내 상상 속에서도 비가 내립니다. 시가 뭇 사람에게 던져주는 언어 속에는 생의 한켠을 떠받치는 모든 감정의 무게와 깊이와 넓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언어의 순화적 기능 때문입니다. 이해인 님의 ‘삶과 시’ “시를 쓸 때는/ 아까운 말들도/ 곧잘 버리면서/ 삶에선/ 작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욕심이 부끄럽다”란 고백에서처럼 시에서 말의 절제를 배우고 삶의 고통과 아픔이 승화되기 때문입니다. 넷째, 시는 빈 마음을 채워 성숙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는 시편의 기록이 그러하듯 입술의 열매를 통해 천지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우심을 받고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때로는 고백이요, 때로는 간구요, 때로는 감사로 항상 내 잔이 넘쳐납니다. 다섯째, 시는 내면의 삶을 가꾸어주고, 다양하고 풍부한 삶의 체험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거리를 지나가면서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나 유리는 자주 쳐다보며 외모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관심을 갖지만 자신의 내면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시는 내면의 세계를 비쳐주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시란 다른 사람의 언어에 공감하는 것이고, 부담 없이 시를 읽고 시인의 이야기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안정과 자기 성찰의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정호승 시인은 고통스런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시를 통해 비슷한 정서와 감정을 확인하고 맞장구치는 순간 고통은 저절로 승화된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시를 읽으면’ 현우철 님의 시입니다. “시는 모처럼 내게 다가와/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고 간다/ 한 소녀가 내게 남긴 사랑처럼/ 그렇게 눈물나도록 서글픈/ 모습을 하고서.”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시를 읽으면 글이 살아서 움직이고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시는 물리학이 아니라 화학이고, 사회학이 아니라 심리학이라고 합니다. 시가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구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시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읽는 것도 아닙니다. 시는 성경구절을 외우듯 외워야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삶의 어떤 국면을 건드려 삶이 부풀어 오르고, 시가 커지면서 삶이 보이고, 꿈도 보이고, 희망도 보이게 되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시는 마음으로 몇 번이고 곰씹어 읽다보면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제 맛을 느끼게 됩니다.
정명 가족 여러분 !! 삶이 너무 팍팍하고 힘드십니까?
삶이 지루하거든 앞치마를 입으세요./ 꽃밭에 물을 줄 땐 꽃무늬의 앞치마를/ 부엌에서 일을 할 땐 줄무늬의 앞치마를/ 청소하고 빨래할 땐 물방울무늬의 앞치마를 입어보세요./ 흙 냄새 비누냄새 반찬냄새/ 그대의 땀 냄새를 풍기며 앞치마는 속삭일 거예요./ 그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조금 더 기쁘게 움직여보라고/ 앞치마는 그대 앞에서 끊임없이/ 꿈을 꾸며 희망을 재촉하는 친구가 될 거예요/ 때로는 하늘과 구름도 담아 줄 거예요. (이해인/앞치마를 입으세요)
그래도 답답하고 사방으로 꽉 막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까? 그럼 다윗처럼 시로 노래합시다. 여러분의 출입을 지켜주실 것입니다.(시121:8) 이제부터 시를 읽읍시다. 하지만 어떻게 시를 읽을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시를 읽을 때 왜 이렇게 썼을까, 무슨 뜻일까 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시가 너무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이 답답한 세상, 억눌리고 막막한 마음을 달래주는 한 줄의 시는 그 가치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시는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시의 정서의 흐름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정서가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토인비가 장 콕토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처럼 살아가며 희망을 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게 바로 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정명 가족 여러분 !! 가끔 씩 형광등 대신 촛불을 켜고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시를 낭송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훨씬 더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시의 감동은 멀리서 느리게 오나,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내 입에서 흥얼흥얼 자연스럽게 시구들이 흘러나올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은 모르는 또 다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시에 눈을 뜹시다. 시를 읽읍시다. 시를 읽고 눈이 뜨이는 순간 내가 보이고, 내 마음이 설레고, 내 삶도 설레게 될 것입니다.
(2005년 9월 29일 목포정명여자중학교 학생예배 설교/윤삼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