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10락(樂), 이래도 안 쓸 것인가 / 강원국
눈을 뜨니 아버님 댁이었다. 지난 새벽 인사불성으로 택시에 실려 온 나를 아내는 5층 집까지 끌고 올라갈 수 없었다. 승강기가 없는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애프터서비스라도 해달라는 항의 표시였는지 아내는 나를 차에 실어 아버님 댁에 던져놓다시피 하고선 출근해 버렸다. 점심때 쯤 정신이 들었는데 발밑에서 아버님이 울고 계셨다. ‘내가 너를 이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저녁에 아내가 나를 찾으러 올 때까지 자는 척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요즘 날마다 글쓰기 강의를 한다. 강의 목표는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쓰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쓰게 되고, 자주 쓰면 잘 쓸 수 있는 게 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 열 가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일명 글쓰기 10락(樂)이다.
첫 번째는 성취의 환희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요 새로운 시도이다. 이뤄냈을 때 뿌듯하고 대견하다. 과정이 힘들었을수록 성취감은 더 크다. 글이 완성되는 순간은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다가오기도 한다. 분명한 건 틀림없이 그 순간이 온다는 사실이다. 올 때까지 앉아있기만 하면 반드시 온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나는 매번 성공한다. 그런 성공경험이 쌓이면 자신감이 된다. 자존감이 높아진다.
두 번째는 몰입의 기쁨이다. 어쩌다 가끔 무아지경에 빠진다. 아무 걱정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 오로지 글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이른다. 문장이 문장을 불러오고 생각이 꼬리를 문다. 기억이 떠오르고 상상이 나래를 편다. 사실 몰입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 쓰는 시간에는 몰입이 일어난다. 나는 이렇게 글에 취해 내려야 할 지하철 정거장을 지나치기도 하고, 기차역 승강장에서 글을 쓰다 타야 할 고속철도를 놓친 적도 있다.
세 번째는 존재감을 느낀다. 글을 쓴다는 건 누군가 읽으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읽히기 위해 쓴다. 글쓰기에는 누군가에게 내 존재를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스며있다. 나는 카페에서 글을 쓴다. 쓰다가 누군가 와서 사인해달라고 하거나 사진을 찍자고 하면 그때부터 글이 더 잘 써진다. 글로써 얻고자 하는 존재감을 현실에서 확인한 탓이다. 투명인간으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네 번째는 축적의 희열이다. 올해 들어 트위터와 카카오스토리에 ‘글쓰기 단상’과 ‘글쓰기 강좌’란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벌써 1200개가 넘는 글을 썼다. 쌓으면 쌓을수록 더 쌓고 싶다. 돼지저금통이 묵직해졌을 때부터 더 열심히 동전을 넣는 것과 같다. 내리자마자 녹는 눈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쌓이면 눈싸움을 할까, 눈사람을 만들까 가슴이 부푼다. 쌓아보니 글은 더 그렇다. 글이 쌓이면 충만감을 느낀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속이 허하지 않다. 믿는 구석이 있어 쭈뼛거리지 않고 당당해진다. 쌓는 사람에게는 목표도 생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꿈을 꾸게 된다. 트위터와 카카오스토리에 쓴 글이 2000개 넘으면 그것으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다섯 번째는 궁금해지는 즐거움이다. 알면 알수록 쓰면 쓸수록 궁금하다. 더 알고 싶다. 연애감정이 바로 그런 궁금증이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지, 결혼할 마음은 있는지, 헤어져 있으면 지금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 때 설렌다. 글쓰기에 관해 글을 써보니 뇌 과학, 심리학, 문학, 철학 모든 게 궁금해진다. 소통, 리더십도 궁금하다. 궁금증의 외연이 넓어지고 심도가 깊어진다. 대학원에 가고 싶다. 아내가 환갑 넘어 석사 학위 받아서 어디에 쓰려느냐고 타박하지만 써먹으려는 것이 아니다. 궁금해서 그렇다. 문예사조가 궁금하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초현실주의 등등 한 시대를 풍미한 문예사조 안에 글쓰기 원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것이 알고 싶다. 어린 시절 잠깐 호기심이 왕성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살면서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 모든 게 궁금하다. 알고 싶어 가슴이 뛴다. 글쓰기가 내게 준 선물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아내가 어디 갔는지, 누구와 있는지 궁금하면 병원에 가봐야 한다. 궁금증이 아닌 의심이란 병이기 때문에.
여섯 번째는 생각의 유희다. 생각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생각이 나는 기쁨이다. 글을 쓰지 않을 때도 뇌가 글을 쓴다. 길을 가다, 잠들기 전에, 책을 읽다, 친구와 대화하다, 심지어 샤워하다 문득 생각이 난다. 왜 그럴까. 써둔 게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써둔 것에 와서 붙는다. 보는 것, 읽는 것, 듣는 것이 써둔 것과 연결된다. 써둔 게 없던 때에는 스쳐 지나갔던 것들이 의미 있게 달라붙는다. 그 지점에서 생각이 난다. 써둔 게 많아 덩어리가 커지면 그에 비례해 표면적이 넓어지고 생각이 와서 붙을 확률도 높아진다. 큰 눈덩이가 구를 때 커지는 속도가 빠르듯 써둔 게 많을수록 생각이 더 자주 나고, 생각 날 때 행복하다.
일곱 번째는 성장의 낙(樂)이 있다. 그저 낙이 아니라 열락(悅樂)이다. 사는 게 재미없고 심드렁한 이유는 변화하고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상태에 계속 머물면 지루하다. 똑같은 내일은 기대되지 않는다. 나의 어제와 오늘은 같지 않다. 쓰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 또 쓰면 내일은 더 낫다. 이전 글을 보면 허접하다. 내 블로그 <강원국의 블로그>에 가보라. 5년 전 쓴 글을 보면 중학생 수준이다. 후하게 쳐줘도 고등학생이다. 그새 나는 유명강사가 됐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그만큼 성장했다. 나의 지난 5년만큼 괄목상대, 상전벽해를 잘 설명할 사례는 없다. 나는 또 5년 후 무엇이 돼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즐겁다.
여덟 번째는 말 잘하는 호사를 누린다. 나처럼 말도 잘하고 글도 좀 쓰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런 내게 비법을 묻는다. 그런 것 없다. 많이 안 해서 어려운 거다. 많이 하면 잘할 수 있다. 쓰기는 하겠는데 말하기가 힘든 사람은 말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 그렇다. 말은 잘하는데 글쓰기가 두려운 사람은 글을 많이 안 써봐서 그렇다. 누구나 안 해 본 것, 낯선 건 어렵고 무섭다. 익숙해지면 쉽다. 많이 해보면 된다. 나는 말하기 위해 준비한다. 바로 메모다.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블로그에 메모했다. 매번 강의할 때마다 이전 강의까지 하지 않았던 새로운 말을 한마디라도 추가하려고 한다. 추가하기 위해 준비한다. 강의 전 인근 카페에 가서 새로운 한마디를 찾았을 때 기쁘다. 그것을 메모할 때 즐겁다. 메모해둔 것을 강의에서 써먹을 때 신난다.
아홉 번째, 글은 기록으로 남는다. 사람은 누구나 영원을 지향한다. 내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자취를 남기고 싶어 한다. 나란 존재는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도 나의 이야기는 글로 남는다. 우리는 또한 남겨야 할 의무가 있다. 지구에 와서 자원을 쓰고 환경을 훼손했으면 다음 세대를 위해 뭔가를 남기고 가야 한다. 살면서 보고 배우고 깨닫고 느낀 것을 앞으로 살아갈 후대에 전해주고 가야 한다. 다음 세대는 나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
요즘 아버지에게 취미가 하나 생겼다. 집 가까이에 있는 대형서점에 가는 일이다. 아들 책이 잘 진열돼 있는지 얼마나 팔리는지 알아보는 재미로 서점에 가신다. 내 책을 구매하는 기특한(?) 젊은이가 있으면 말도 거신다. ‘그 저자가 우리 아들이라고’. 술 끊고 글 쓰면서 효도하고 있다. 가장 큰, 열 번째 즐거움이다.
이래도 안 쓸 것인가.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등록 :2019-05-16 10:00 수정 :2019-05-1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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