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6(수) 오후 2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도대체 청소년 연극이란 무엇인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보고
어린이문화연대 "함께보는 공연 소모임"
개구쟁이
영하 14라는 말에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사람과 이미 오래전에 한 약속이라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갈 때는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얼마 전 전국어린이연극경연대회 장소를 이곳으로 잘못 알아 낭패를 본 일이 생각났다. 공연 장소인 달오름극장은 그 극장 바로 옆이었고, 사람들이 많아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극장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온 차이 때문에 안경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중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와서 로비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혼잡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싫어하는데, 거기에 남자 중학생들이 털털하여 머리를 감지 않은 탓에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하여 후각이 민감한 나는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이 공연은 그림 형제의 동화로 널리 알려진 ‘하멜린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모티프를 빌리고 있다. 연극의 무대는 스페인의 어느 도시, 주인공은 몬떼로라는 검사. ‘시장’ 대신 ‘검사’가 나오고, ‘피리 부는 사나이’ 대신 ‘사회운동가’가 나오는 것이 원작과 다르다. 사회운동가는 어렵게 사는 아이를 돕지만, 거기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제보가 접수된다. 검사는 아동 청소년에 대한 파렴치한 성범죄라고 판단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피의자는 존경받는 사회운동가 리바스 씨. 리바스 씨가 호세라는 남자 어린이를 비롯하여 여러 아이를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명백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검사는 사건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확증을 잡지 못하고 점점 오리무중에 빠져든다. 그러는 사이 검사의 친아들 하이메는 친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집에서는 엄마에게도 주먹을 휘두른다. 검사는 자기 아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다.
팸플릿을 보면 공연을 준비한 극단에서는 청소년 관객에게 언어의 모순을 생각하도록 초점화했다고 한다. 아동 청소년에 대해 잘 안다는 아동심리전문가와 검사의 언어가 그것이라고 여겨지는데, 과연 그것이 성공했을까? 안타깝게도 공연장에서 필자가 본 청소년 관객들의 반응은 싸늘했던 것 같다. 지루하다고 한숨을 쉬거나 공연이 끝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학생들은 공연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공연장을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물론 대다수 학생들은 함께 온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리를 지키면서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공연장에 인솔해온 교사의 마음이나 연극을 준비한 극단의 의도는 아는지 모르는지.
연출 방식을 살펴보면 브레히트의 서사극(Epic Theatre) 이론에 근거해서 소외효과(Verfremdungseffekte)를 추구했다. 관객이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보다는 인물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하도록 했다. 배우들의 움직임도 그러했고, 대사와 소품, 조명, 의상, 음악 등 많은 부분에서 감정이입할 여지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소년 관객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공연에 집중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20년 전인 1991년 브레히트의 <어머니>를 공연하면서 고민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각났다. 대학생 관객들이 자신들의 관극 경험과 거리가 먼 브레히트의 연출 방식과 의도를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까? 이번 공연의 대상이 중학생들이었으니, 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연출 방식도 문제였지만, 더욱 큰 문제는 과연 이 공연이 청소년을 위한 연극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공연의 핵심 인물은 검사와 사회운동가이지 결코 피해자로 설정된 호세나 이 사건을 제보한 호세의 형 곤잘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동 청소년 범죄에 대한 어른들의 갈등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이 연극은 청소년연극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청소년연극이란 청소년의 삶을 다루면서도 청소년들의 생각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각색을 할 때 검사와 사회운동가의 시점이 아니라 청소년의 시점으로 바꾸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호세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곤잘로는 왜 제보를 하였는지 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호세 외에도 관련된 다른 청소년의 주장도 있으니, 청소년을 중심에 두어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면 전혀 다른 공연이 되었을 것이다. 스페인 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에 함몰되지 않고, 아동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이 사건을 보고 청소년의 처지를 중심에서 연극을 만들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수준이 낮다고 탓하고 싶지 않다. 우리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청소년연극을 만들어서 그들이 감동하고 새로운 안목을 갖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첫댓글 우리 나라 청소년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네요. 어른, 특히 교사 관점에서 본다면 생각해 볼 점이 많겠지만요. 여덟살 짜리 호세를 둘러싼 가정을 대표하는 아버지, 어머니, 형. 사회를 대표하는 사회사업가, 학교를 대표하는 상담전문교사, 국가를 대표하는 검사--- 모두가 호세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호세에 대한 진실한 관심이나 호세와 진정한 관계맺기나 의사소통에는 관심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한 어른이고 학교고 국가군요. 소통의 수단인 행위와 언어가 이렇듯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이로 인한 호세의 소외 현상이 참 가슴 아픕니다.
불확실한 정보제공만으로도 부모와 아이를 격리시키는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는 국가권력, 그 공권력을 상징하는 검사의 이중적인 의식과 위선적 행위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관람을 했던 중3 남학생이 '이거 다 게이라는 거잖아'라는 정도밖에 이해시킬 수 없다는 한계가 보인다. 우리 나라는 부모가 자녀를 생명에 위협받을 정도로 학대를 당해도 공권력으로 격리시킬 수조차 없고, 가정에서 폭력을 당한 학생을 교사가 알면서도 경찰에 고발할 수 없는 현실과 사회인식에 젖어 있는 청소년들이 쉽게 이러한 공권력 개입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른, 교사들이 본다면 의미가 있겠으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면 관람 전이나 후에 이해를 돕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 -올챙이 한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