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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연회, 충북연회 조직과 제22대 김홍도 감독회장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22회 총회가 1996년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광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총회는 지난 제21회 총회에서 결의한 입법과 행정총회 분리 개최 이후 처음으로 모인 행정총회였다. 행정총회의 주요 기능 가운데 중요 안건은 단연코 앞으로 2년의 감리교회를 이끌어갈 각 연회의 감독을 선출이었다. 각 연회는 다음과 같이 감독을 선출하였는데 서울연회 김홍도 목사가, 서울남연회 김용주 목사가, 중부연회 이호문 목사가, 경기연회 김영수 목사가, 동부연회 김창수 목사가, 남부연회 김영웅 목사가, 삼남연회 신완철 목사가 각각 당선되었다 이어진 감독회장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과반수 이상의 득표자가 없자 이호문 감독당선자와 5명이 사퇴를 하자 의장이 김홍도 감독당선자에 대해서 회원들에게 가부를 묻자 1884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감독회장에는 김홍도 감독이 선임되었다.
김홍도(金弘燾, 호 晶岩) 감독회장은 1938년 2월 6일에 평안남도 양덕에서 아버지 김상혁 목사와 어머니 이숙녀 전도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모태에서부터 부모의 철저한 기독교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는 감리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걸어갈 때 우연히 엿장수에게 100원 주고 산 영문 서적 빌리그레헴의 책을 읽고 십자가 수속의 은총에 대해 확신을 얻어 거듭난 체험을 하였다. 그 후 그는 결혼 첫날을 철야기도로 하나님께 바칠 정도로 열정적인 신앙을 소유하였다. 1963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가평의 상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첫 목회하던 1964년에 김홍도 전도사는 성령의 뜨거운 세례를 받았다. 그때 그는 주님께서 주신 세 가지 명령을 받고 자신의 소명으로 삼으며 열정적으로 목회했다. 그 명령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 마게도니아 사람의 소리를 들은 바울처럼 영혼 구원에 호소에 응답하라, 거지 나사로 이야기처럼 이웃에 대한 주님의 명령이었다.
1967년 4월 4일~8일까지 동대문교회에서 개최된 제26회 동부연회에서 변홍규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바로 서울광희문교회에서 부담임목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1971년 금란교회를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담임했다. 금란교회에 부임 당시 출석 교인은 약 70명 정도였다. 성령에 충만하여 열정적인 목회에 임했던 김홍도 목사는 20년 만에 금란교회를 15,000명이 재적하는 대형교회로 부흥시켰다. 1984년에는 감리교단에서 제일 큰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97년 12,400평 대지에 1만 석 규모의 성전을 건축하였다.
김홍도 목사는 1982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87년 ACTS와 미국 훌러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에 중랑지방 감리사, 1991년 갱생보호회기독교전국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4년에 미국 인디아나 웨슬리안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96년에는 기독교텔레비전 대표이사를 역임하였다.
이렇게 체험 중심의 신앙을 소유한 김홍도 목사는 1970년대 이후 한국 교계를 대표하는 부흥사의 한 사람으로 국내와 부흥 집회를 수없이 인도하였으며 1989년 이후 민관군 구국기도회와 군복음화 선교대회를 자주 인도하면서 보수적 복음주의 부흥 운동가로 활약하였다. 그런 배경에서 1991년 변선환, 홍정수 교수의 신학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는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종교재판 상황을 주도하여 두 교수의 출교를 이끌어냈다.
1996년 10월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22회 총회에서 김홍도 목사는 제9대 서울연회 감독 및 감리회 제22대 감독회장에 선출되었다. 이런 보수적 복음주의 성향을 가진 그는 1996년 11월 18일 금란교회에서 개최된 서울연회 감독 취임식에서 “복음주의에 입각한 부흥운동을 활발히 펼쳐 교회 부흥의 새로운 발판을 이룩하는 한편 내적으로는 파당적인 교회정치를 타파하고 참신한 행정을 펴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김홍도 감독회장은 감리회를 이끌어갈 청사진도 제시했다. 첫째 감리회를 행정적으로, 사업적으로 개혁하여 낡은 옛 구조를 청산하고 민주적이고 효과적인 교회 행정을 펼 것이다. 둘째 고른 인재 등용을 통하여 목회와 선교 복음 증거와 사회봉사에 있어 21세기를 준비해 앞서가는 감리교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김홍도 감독은 1998년 임기를 마치고도 열심히 성령집회를 인도하며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KNCC 대표회장, 사단법인세계교회갱보협회 이사장, 1999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서울기독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자유민주국민연합 총재 취임했다. 2007년 6월 24 세계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홍도 감독은 1975년부터 계속하여 설교집《불기둥》을 출간했다. 그 외 저서로는 《왜 예수를 믿어야 하나》(1989), 《짧은 인생 영원한 천국》(2002), 《금란교회 45년사》(2002), 《2006 오십이주 생명양식》(2005), 《2007 오십이주 생명양식》(2006) 등이 있다.
평생 “믿음, 정직, 진실, 겸손”이란 좌우명을 가지고 살아온 김홍도 감독은 2020년 9월 2일 별세했다. 배영자 사모와의 슬하에 1남 3녀(정민, 정진, 정란, 정란)를 두었다.
김홍도 감독은 감독회장 재임 시 제17회 서울연회(1997년 3월 4일~6일, 정동제일교회 개최)와 제18회 서울연회(1998년 3월 11일~12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또한 제22회 총회 입법총회(1997년 1월 27일~28일, 임마누엘교회 개최), 제22회 총회 정기 입법의회(1997년 10월 27일~30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23회 총회(1998년 10월 28일~30일, 인천숭의교회 개최)를 ‘성령충만한 감리교회’라는 주제로 이끌었다.
김용주(金容株) 감독은 1934년 9월 9일에 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광진리 78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58년 중앙신학교룰, 1963년 감리교대전신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루터 라이스 신학교(Luther Rice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 1989년 동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그 후 목원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 중부연회 이천지방 복대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고 1960년 송곡교회, 1963년 가산교회에서 목회했다. 1968년 서울 서초지방 경신교회를 부임한 후 은퇴할 때까지 담임했다. 1970년 3월 4~6일 동대문교회에서 개최된 제29회 동부연회에서 변홍규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1972년 동부연회 정회원에 허입하였다. 1985년 서초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86년 서울남연회 자격심사위원장, 1987년 총회 교육원 위원, 1990년 총회 기본재산관리위원, 1994년 총회 장정개정위원, 1993년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총동문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김용주 목사는 1996년 10월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22회 총회에서 서울남연회 제4대 감독에 당선되었다. 총회 교육국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명예로운 개혁으로 새 감리교회 정립”이라는 모토 아래 총체적인 개혁이 필요성을 취임사에서 밝혔다. 또한 사업과 기구를 효율적으로 운영 시행하여 전문화, 복음의 질적, 양적 성장을 도모하여 세계를 향해 전파되는 세계복음화, 기술정보 사회에서 왜소해 가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질이 향상되는 인간화, 웨슬리 경건성과 사회성이 복음을 통해 감리교회와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도록 감리교 선교신학의 정체성을 확립되는 감리교 신앙의 신학화를 내걸었다.
김용주 감독은 2005년 3월 30~4.1일 임마누엘교회에서 개최된 제16회 서울남연회(김충식 감독)에서 은퇴하였다. 그 후에도 필리핀 앙겔로스 경신선교재단 이사장, 복지선교회 대표, 제주지방 선교사로 활동했다. 2005년에 자랑스러운 목원인 상을 수상하여 모교 발전의 공을 인정받기도 했다.
김용주 감독은 다음과 같이 저서를 남겼다. 《라인홀드 니버의 윤리사상》(1990), 《성경적 사도신경 강해1》(1995), 《성경적 구원론 강해2》(1995), 《성경적 교회론 강해3》(1995), 《김용주목사 저작 전집1-주기도문 심계명 성령론》(1995), 《김용주 목사 저작 전집2-구원론 강해설교》(1995), 《김용주 목사 저작 전집3-요한계시록 강해 상》(1998), 《김용주 목사 저작 전집4-요한계시록 강해 하》(1998), 《나는 행복한 목회자였다》(2000), 《목회자를 위한 성경 가이드》(2000), 《예배를 위한 시가선집》(2000), 《삼층 강해 설교집 1권》(2000), 《경신교회 35년사》(2003) 등이 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6)을 좌우명을 삼고 달려온 김용주 감독은 아내 김인혜 사모와 슬하에 1남 3녀(일중, 윤옥, 윤희, 지연)를 두었다
김용주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8회 서울남연회(1997년 3월 12일∼14일, 경신교회 개최), 제9회 서울남연회(1998년 3월 18일∼19일, 경신교회 개최)를 주재했다.
이호문(李浩文) 감독은 1938년 3월 28일에 경상북도에서 출생하였다. 1963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3월 13~1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7회 중부연회에서 변홍규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3년부터 숭의교회에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담임했다. 1976년 미국 캘리포니아 신학대학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중부연회부흥단장, 1983년 인천남지방 감리사, 1986년 감리교전국부흥단장, 1991년 아펜젤러선교기념대성회 대회장, 1993년 인천기독교연합회 회장, 1994년 인천지방경찰청경목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호문 목사는 1996년 제22회 감리회 총회에서 제23대 중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어 연회를 돌보았다. 감독의 임기르 마친 후에도 그는 1999년 사단법인세계복음화중앙협의회 총재, 감리교신학원협의회장, 감리교군선교회 이사장, 인천여자신학교원장, 21세기 감리교성장선교회 대표회장 등을 맡아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호서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호서신학목회자 협의회 총재를 맡기도 했다.
이호문 감독은 부흥사 출신답게 감독 재임 기간 중 연합성회를 여러 회 개최하였다. 아펜젤러선교기념성회(1997년 7월 7일~12일, 인천 실내체육관 개최), 중부연회 지역별연합대성회(1997년 6월 5일~12일, 6개 지역 분산 개최), 중부연회 제1회 연합산상성회(1998년 8월 10일~13일, 청양수련마을 개최), 98년 지역별속회지도자강습회(1998년 12월 1일~9일, 5개 지역 분산 개최)가 그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감독 재임 시 업적을 하나 꼽으라면 중부연회 오랜 숙원 사업인 아펜젤러 기념관을 건립하고 연회 본부를 이전한 것이다. 또한 문서 선교활동도 활발했다. 1997년 중부연회 회보를 발간하고 중부연회 목회자 설교집, 목회자 간증집을 차례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준회원 영성훈련, 심방전도사세미나, 선교사 교육수련회, 교회관리봉사자 수련회 등 훈련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이호문 감독은 설교집 《푯대를 향하여》, 《산 믿음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 《가장 좋은 응답》, 논문 《21세기 신학과 목회》, 에세이집 《기독교 신앙의 길잡이》를 저술했으며 성가집과 율동집도 있다.
“크게, 넓게, 깊게, 많게, 더 많게”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 목회에 전념한 이호문 감독은 2022년 9월 30일 별세하여 중부연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했다. 윤신자 사모와의 슬하에서 4형제를 두었다.
이호문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56회 중부연회(1997년 3월 11일~13일 인천숭의교회 개최)와 제57회 중부연회(1998년 3월 17일~18일 인천숭의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김영수(金榮洙) 감독은 1937년 12월 18일에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군면 양지리 349번지에서 태어났다. 강경상업고등학교를 거쳐 1964년 감리교대전신학교를 졸업했다. 1968년 3월 12~14일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4회 남부연회에서 변홍규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청주대학교 법과대학,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에덴교회를 개최하고 미탄교회에 부임하여 성전증출과 주택 신축했다. 남양교회에 담임할 때 성전을 신축하고 봉헌했다. 1978년 남양교회를 담임하였고 남양지방 감리사를 2회(1대, 3대) 역임하였다. 경기연회 총무, 과정심사위원장을 지냈으며 장성교회를 거쳐 여주흥천교회를 시무하고 있을 때 1996년 경기연회 제4대 감독에 당선되었다. 또한 국외선교연회 감독, 중국선교연회 초대 감독을 겸임했다. 1997년에 안산 명성교회를 부임했다.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주 감리교신학대학 이사장, 경기연회신학교 이사장, 사이판신학교 이사장을 역임하고 2001년 서광교회를 개척하고 담임하고 은퇴했다..
석사학위 논문으로《기독교와 불교의 구원관 비요 연구》와 박사학위 논문으로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미디어로서의 교회론》이 있다. 평생의 좌우명“감사하는 삶”를 가지고 목회했으며 조상숙 사모와 슬하에 3남 1녀(웅섭, 현섭, 의섭, 숙영)을 두었다.
김영수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8회 경기연회(1997년 3월 17일~19일, 성남대원교회 개최)와 제9회 경기연회(1998년 3월 18일~20일, 분당만나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제5회 국외선교연회(1997년 4월 24일~25일, 서울경신교회 개최)와 제6회 국외선교연회(1998년 4월 15일~17일, 로스앤젤레스 남가주 빌라델비아교회 개최)를 주재했다.
김창수(金昌洙) 감독은 1941년 8월 21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31번지에서 태어났다. 1965년 감리교대전신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대전지방 우명교회, 1968년 충서지방 원산도교회에서 목회했다. 1969년 3월 5~7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5회 남부연회에서 변홍규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그해 육군 군목에 입대하여 1973년 육군 대위로 전역했다. 그는 군 전역하기 전 1972년부터 춘천 신성교회로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목회했다.
1981년 춘천동지방 감리사, 1985년 춘천교도소기독교교화 위원장, 1986년 춘천시교역자연합회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 춘천경찰서경목실장, 1990년 KNCC유지대단 이사, 1994년 춘천기독교방송국상임위원회 위원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춘천효자종합사회복지관 재단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김창수 목사는 1996년 10월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22회 총회에서 제23대 동부연회 감독 겸 제4대 서부연회 관리감독으로 선임되었다. 1997년에는 동부연회에서 충북연회가 분할됨에 따라서 충북연회 관리감독을 겸임했다. 1997년 감리교신학대학 재단이사, 동부신학원 원장, 미국 감리교신학교 재단이사, 서울 기독교방송국 재단이사, 1999년 목원대학교 재단이사, 2000년 목원대학교총동문회장, 2001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이사, 춘천기독교연합회 회장, 2002년 강원도기독교연합회 회장, 2002년 강원지구군선교회 이사장, 2003년 동부연회 자격심사위원장, 2004년 춘천시어린이회관 운영이사장을 역임하고 2005년 춘천기독교방송국 운영위원회 위원장과 사랑의집짓기 춘천지회 이사장을 맡았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목회한 김창수 감독은 김영순 사모와의 슬하에 1남 2녀(동호, 미영, 성민)를 두었다.
김창수 감독은 제56회 동부연회(1997년 4월 1일~2일, 속초교회 개최)와 제57회 동부연회(1998년 3월 24일~25일, 원주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김창수 감독은 1998년 동부연회 소속 충청북도를 중심으로 충북연회 분할을 결의함에 따라 1998년 4월 2일 충주 남부교회에서 조직연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서부연회 제4대 관리 감독으로 선임되어 1997년 2월 4일 감리교 일영연수원에서 제4회 서부연회와 1998년 5월 25일에 한남동 여선교회회관에서 제5회 서부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재임 시 권역별 선교대회를 통해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의 사명을 다했으며 목회자 자질 향상과 영적 무장에 힘썼다. 그리고 탄광촌 진폐환자 전문 병원인 동원보건소에 원목실을 개설하였고 미자립교회 자립을 위해 수고했다. 21세기 대비 평신도 지도자 양성에 노력하고 한서 남궁억 장로 기념교회를 건축하고 북한 동포돕기 위해 헌금 후원하였다.
김영웅(金永雄) 감독은 1938년 3월 8일 충청남도 논산시 등화동 38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60년 감리교대전신학교 졸업, 1974년 목원대학 교역대학원 졸업, 1987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이수하였다. 미국 센터너리 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대전구측교회, 1963년 마산합성교회, 1964년 대전갈마교회를 담임하고 1969년에 대전중앙교회를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목회를 하였다. 대전지방 감리사, 대전서지방 감리사 2회 역임하고 대전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목원대학과 대신 중․고등학교 재단이사로 일했다.
김영웅 감독은 1973년 모범교역자 표창, 1997년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1998년 김대중 대통령 감사장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대전 기독교 방송국 유치활동 인정 공로패, 대전 중앙신협 설립에 공헌한 감사패, 연회발전에 기여한 공로감사패를 받았다.
설교집 《1권 생동하는 마음》, 《2권 십자가를 자랑하라》, 《3집 사랑을 나기고 간 사람》, 《4집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5집 영적인 힘의 근원》, 《6집 오직 그리스도》, 《7집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 《8집 밝은 곳을 보라》, 《9집 하나님께 맡기라》, 《10집 빛을 발하는 심지》, 《11집 사랑은 이기심의 극복》이 있다. 일반기독교 서적으로 《기독교 신앙입문》, 《모범기도문》, 《빛을 위한 기도》, 《신앙의 오솔길》, 《내가 본 김종필》,《JP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가 있다. 평신도를 위한 성경교재로는 《생명과 진리》, 《영원한 진리》, 《천지창조》, 《약속의 성취》,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살아있는 말씀》, 《선지자의 말씀》이 있다.
“오직 예수”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목회한 김영웅 감독은 원봉희 사모와 슬하에 남매(근범, 근숙)을 두었다. 김영웅 감독은 재임 시 제43회 남부연회(1997년 3월 24일∼26일, 계룡대 군인교회 개최), 제44회 남부연회(1998년 3월 24일∼26일, 계룡대 군인교회 개최)를 주관하였으며 충청연회 분할 결의에 따라서 조직연회를 개최하고 주관하였다.
신완철(申玩撤) 감독은 1944년 3월 26일에 충청남도 당진군 정미면 매방리 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서울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감리교신학대학 신학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72년 경기연회 준회원 허입하고 1974년 경기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6년 중앙연회 정회원에 허입하였다. 미국 에모리대학 교회성장학과를 수료하고 필리핀 유니온신학대학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 이리영생교회를 담임하면서 전북지방 감리사, 총회실행위원, 평신도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8년 대구지방 대구제일교회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담임했다. 이때 대구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삼남연회 부흥선교단 단장, 전국 감리교 부흥선교단 부단장,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총동문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96년 10월에 제22회 감리회 총회에서 삼남연회 제9대 감독에 선출되었다. 그 후 대구신학원 원장, 대구광역시 동구교구협의회회장, 연회교역자과정심사위원장, 대구경북성시화본부 부회장, 감리회복지재단이사, 국제기아대책대구지회 이사장 및 회장, 대구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주님만 바라보면 목회한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달려온 신완철 감독은 김형정 사모와 슬하에 형제(동경, 동범)을 두었다. 감독 재임 시 제17회 삼남연회(1997년 3월 19일~21일, 이리영생교회 개최)와 제18회 삼남연회(1998년 3월 17일~19일, 마산합성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김홍도 감독회장은 감리회를 이끌고 갈 비전을 제시하였다. 복음주의 노선에 튼튼히 설 것, 영적 새 각성 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할 것, 정치 서클을 없앨 것, 북한 선교를 구체적으로 준비할 것, 은급제도의 효율적 운영과 여신도의 발언과 영향력을 보강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이 이끄는 감리교회는 성장 발전하여 두 개의 연회를 분할하여 충청연회와 충북연회를 조직하였다. 1997년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제22회 총회 입법의회가 임마누엘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동부연회 소속 충청북도 지역을 별도로 분할하여 충북연회를 조직할 것과 남부연회 소속 충청남도 지역 중 대전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을 분할하여 충청연회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1998년 4월 2일에 충주남부교회에서 충청연회 조직연회가 김창수 감독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또한 충청연회는 1998년 3월 24일∼26일, 계룡대 군인교회에서 개최된 제44회 남부연회 시에 조직연회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기독교 대한감리회는 9개 연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김홍도 감독회장(서울연회)
김용주 감독(서울남연회)
이호문 감독(중부연회)
김영수 감독(경기연회)
김창수 감독(동부연회)
김영웅 감독(남부연회)
